세잔의 화집을 보러 서점엘 갔다. 정물화. 어제 처음 펼쳤을 때의 그 강렬한 색감이 주는 충격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그림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배제하고 기법에만 주의해 찬찬히 살펴 보았다. 어제는 세잔의 저 정물화에서 확고함과 단단함을 보았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상식의 예상을 이리 저리 깨고 있더라. 나는 실험이 단호함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 가슴이 쿵꽝 쿵꽝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바로 화집을 닫았다.

종일 세잔의 그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척 보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서점엘 들렀다. 오늘은 세잔이 내게 그닥 강한 존재감을 주지는 못했다. 대신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 세잔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해 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잔이 나를 부지런하게 만드는 구나. 어제 본 그림 몇 장을 또 보기 위해 나는 길을 돌아 이삼십 분을 더 걸었다. 길 양편으로 드리워진 처마들의 구도가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다. 벽에 붙은 전시회 광고 내용을 암기하고 있는 나를 느낀다. 세잔의 단단하면서도 어설퍼 보이는 붓터치는 내게 뭐든 맘껏 휘둘러 봐, 라고 속삭인다. 피카소의 그 무궁한 작품들, 나를 기겁하게 한 그 무지막지한 창의의 생산물들은, 피카소야말로 스피노자의 그 신임을 증명한다.

스피노자의 단호함은 나의 게으름을 정당화한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본질에 관한 이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실존에 관한 이론 또한 가지고 있다. 즉, 실존이란 표현된 것의 총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표현될 수록 더 많이 실존하는 것이며, 더 완전한 것이며 더 많은 힘을 갖는 것이라는 이론. 사실 이 이론은 신에 관한 이론이다. 그리고 신에 있어 실존과 본질은 같은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는 실존과 본질이 분리되어 있다. 인간은 본질에 관한 장에서 주로 논해진다. 아다시피 인간의 본질은 코나투스, 즉 삶에의 맹목적 욕구다. 다시 피카소를 떠올려 본다. 스피노자는 피카소의 관점에서, 피카소의 환경에서 읽혀져야 한다. 왜? 지금은 21세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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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에 부딪혔다.

"Everyone can clearly see this if only he attends to the following point, that if God had wished to make infinite our faculty of understanding, he would not have needed to give us a more extensive faculty of willing than that which we already possess in order to enable us to assent to all that we understand."(IP15S)

"바보가 아니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신이 우리에게 무한한 이성 능력을 주길 원했었다면 인간이 현재 갖고 있는 무한한 의지는 아예 처음부터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1. 지금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오류 이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2. 데카르트의 오류 이론. 오류는 인간의 이성은 유한한데 의지(선택, 판단)는 무한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주장.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이론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박은 이렇다. 그러므로 이성이 무한하다면 (무한한) 의지는 불필요한 것 아닌가! 조금만 더 나가자자. 그렇다면 무한한 이성을 갖고 있는 신에 있어 의지란 무의미하거나 (수사로 멋지게 표현하자면) 이성과 동일한 것 아닐까! 스피노자의 신에 대한 이론이 유령처럼 바로 옆에 서 있다.

조금 아래를 보자.

"when we perceive a thing clearly and distinctly, we cannot refrain from assenting to it, that necessary assent depends not on the weakness but simply on the freedom and prefection of the will."

"사물을 명석 판명하게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참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허약함 때문이 아니라 자유와, 의지의 완전성 때문인 것이다."

더 이상의 해설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자유 이론이 거의 모습을 드러낸 채 숨어 있다.

보다시피 스피노자의 이론은 강력하고 무자비하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에서 개진된 이론은 데카르트의 것이라고 연막을 쳤지지만 송곳같은 스피노자의 이론을 꼭꼭 숨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스피노자의 이론은 진리인가? 우리는 여기서 주저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주저함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지성은 유한한데 의지는 무한하다는 데카르트의 이론을 실증하고 있는 것 아닐까? 스피노자의 답변은 이렇다. 한 이론을 배제하는 다른 이론들이 우리 안에 있고 그것들 사이의 힘이 팽팽하기 때문이라는 것. 즉, 한 관념의 진리성이란 그 관념의 힘의 크기를 말해 주는 것일 테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들의 함의는 너무도 풍부하다. 그리고 그렇게 헤매다 보면 결국 "에티카"로 수렴하게 된다. 나도 "에티카"로 돌아갔고 지금 제2부를 읽고 있다. 당분간 스피노자에 대해서 뭔가를 말하기보다는 스피노자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한국어판 미출간 저작을 중심으로 스피노자를 번역하겠다는 나의 계획이 진전이 없는 것에 대한 변명을 이 참에 쓱 끼워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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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가 있는데 내가 말끝마다 스피노자를 들먹이자 스피노자에 대한 책을 하나 소개해 달라고 했다. 내가 읽어본 스피노자 입문서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 처음으로 소피노자라는 한 인간을 소개해 준 책을 그 친구에게 선물해 주기로 했다.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 친구는 곧, 책을 선물한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반응으로 나를 흐뭇하게 했다. 편하게 누워서 윌 듀란트의 스피노자 장을 읽다가 곧 책상으로 옮겨 갔고 급기야는 연필을 쥐고 줄을 쳐 가면서 읽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세잔을 언급했다. 그 친구는 세잔을 좋아한다. 세잔의 무엇을? 오, 이런 식의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친구는 내가 스스로 세잔의 그림을 찾아보고 세잔에 관한 책을 읽어 보기를 원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아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어제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을 잠시 내려 놓고 세잔의 도판이 가득한 책들을 살펴 보았다.

세잔의 일생에 대해 읽고 나자 내 머리에 떠오른 사람은 프루스트였다. 둘 다 심약하고 여린 품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세잔이 오전 10시면 해가 진다고 말했듯이 한낮의 시간이 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간은 늦게 시작되었고 그 끝은 없었다. 프루스트도 세잔도 글을 쓰다 죽었고 그림을 그리다 죽었으니까. 그들의 세속적 삶은 문장들 사이, 터치들 사이에서 겨우 존재했다. 그들은 과학자처럼 세계를 관찰했고 종교인같은 한결같음으로 그것을 원고자 위에서, 캔버스 위에서 재창조했다. 프루스트는 밤새껏 작업하여 원고 여백과, 풀로 덧붙인 종이장을 추고로 가득 메운 것에 만족하며 아침에 잠이 들었다. 세잔은 끊임없이 작업했지만 작업 속도는 경이적으로 느렸다. 마지막 남은 터치 하나에 걸릴 시간을 어림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일 구름이 걷히면 적절한 색조를 얻을 수 있을지, 아니면 적절한 색조를 얻지 못하여 전체를 다시 칠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절대성이나 완벽성의 취향을 갖지 못한 사람은 보기에만 좋은 졸작에 만족하고 만다."(세잔)

내 앞쪽 벽에는 2 X 4 m 정도 크기의 유채화가 걸려 있다. 어제도 걸려 있었지만 오늘에야 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저 그림에서 우선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원근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방식을 썼다. 가까운 쪽은 짙고 먼 쪽은 옅다. 왼쪽 상단의 거대한 수풀과 균형을 맞추고 공간감을 창출하기 위해 오른쪽 아래에 나무 하나를 그려  놓았다. 그런데 멀리 왼쪽 상단에 그려 있는 수풀 속의 나무와 크기가 같다. 순간, 저 화가분은 소심한 분일 게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크고, 과장되고 확고한 나무 하나를 원하고 있었나 보다. 왼쪽 상단의 녹음이 무척 짙다. 그 짙음을 오른쪽 아래에서 받아주고 있다. 그런데 왼쪽의 짙음들 사이로 흐르는 강은 어떠해야 할까? 짙게 해야 할까? 옅게 해야 할까? 화가는 옅음을 선택했다. 그런데 난 그 부분이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것 같다. 화가도 고민을 했을 것이고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필시 만족을 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출처: 내가 직접 찍음)

내가 알기로 세잔은 회화에 있어서의 어떤 선험적 구조를 극복하려 했던 사람인 것 같다. 예컨대 전통적인 원근의 표현. 시선을 한 촛점으로 유도하는 직선들이나 농담들. 그 이론들은 우리의 눈의 구조에서 연역된 것들이리라.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실 체험을 받쳐 주는 구조들은 아닐런지 모른다. 예컨대,우리는 원근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안다.


(출처: http://mtcha.com.ne.kr/korean-photo/sosun/photo8-gimhongdo%20jagpum.htm)

세잔이 선택한 것은 주로 색조와 구도였다. 세잔은 그것을 통해 인상주의풍 그림들의 표면성, 가벼움을 극복하고 깊이와 풍부함, 즉 강한 존재감을 주려고 했던 것 같다. 색조의 배열, 대비 그리고 그 밖의 기법들을 통해 화면 전체가 강력한 무게감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평면적이지 않고 깊이를 가질 수 있을까? 이제 그것은 전적으로 예술가로서의 세잔의 감각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연구하고 실험하고 알아낸 것을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감각.


(출처: http://cicnig.com/laughing-paul-cezanne-lesson-plans/)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림도 어느 정도의 테크닉과 손재주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색조를 표현하고 인상들을 훌륭하게 조화시키는 일은 예술가만이 할 수 있다."(세잔)

세잔은 그에서 성공했을까? 그것은 세잔의 그림을 직접 보고서야 판단할 수 있는 일이리라.

그런데 세잔의 주관심이 색조와 색조들 사이의 대비나 구도가 되면서 그의 그림의 주인공은 '표현된 어떤 것'이 아니라 '표현' 자체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세잔의 인물화들의 일관되게 경직된 포즈들, 무표정한 표정들을 보면서 거기서 인간적인 어떤 것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리라. 그것들은 정물화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듣기로 세잔 앞에서 모델 노릇을 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세잔의 작업 속도가 느린 탓도 있지만 세잔은 모델이 조금만 움직여도 투덜댔기 때문이라고).


(출처: http://www.wikipaintings.org/en/paul-cezanne/madame-cezanne-in-the-greenhouse)

말년의 대작들, 예컨대 목욕하는 사람들의 디테일이 생략된 나신들에서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거기서 인간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리라. 그런데 내게는 그 군상들이 묘하게 보인다. 그 군상들이 세잔의, 때로는 천진스런 개성과 어긋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말년의 세잔이 목욕하는 사람들을 그리는데 열정을 쏟았는지 조금 의아스럽다. 일상적인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들에 비해 그것들은 다소 상징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세잔의 그림 앞에 직접 서 보면 알 수 있을까?


(출처: http://www.steveartgallery.se/sweden/picture/image-27926.html)


(혹시나 해서 덧붙인다. 이 글은 미술 평론 비슷한 어떤 것이 절대 아니라 일기 비슷한 어떤 것이다. 세잔을 보면서 든 생각들을 간단히 스케치한 것일 뿐이다. 앞으로 계속 발전시켜 볼 여지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볍게 버려질 단상일 뿐인지 나도 전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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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 쌓인 단상들을 여기에 비워 놓기로 한다.

1.
"...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가 올덴부르크를 처음 직접 만났을 때는 거의 같은 나이였던 셈이다. 스피노자는 28세 때였고, 라이프니츠는 26세 때였다." ("스피노자는 왜" 262 페이지)

올덴부르크는 처음 만난 스피노자에게서 인간적으로든 지적으로든 대단히 강한 인상을 받았다. 스피노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한 경외감을 읽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나중에 올덴부르크는 자신의 길과 스피노자의 길이 엇갈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경력에 있어 스피노자가 매우 위험한 장애물이라는 것도. 그러나 그러한 때라도 스피노자에 대한 올덴부르크의 애정은 식지 않는다. 그것이 혹 분노와 좌절감을 동반하는 것일 지라도. 짧은 직접 만남으로 시작된 올덴부르크와 스피노자의 관계는 그들의 생애 내내 진실함 속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의 관계에 애증이 깃들어 있었다는 것이 그 징표일 것이다.

반면 올덴부르크는 라이프니츠를 다소 사무적이고 퉁명하게 대했던 것 같다. 올덴부르크는 당시의 라이프니츠의 학식을 대단히 높게 사지도 않았던 것 같다. 올덴부르크의 눈에 라이프니츠는 출세를 추구하는 당시의 수 많았던 준천재들 중 하나로 보였을지 모르겠다. 라이프니츠는 올덴부르크에게 뭔가를 증명해 보여야 할 사람이었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올덴부르크에게 더할 나위없이 독특한, 신비롭기까지 한 인간이었다면 라이프니츠는 당대의 숱한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다. 동시에 세상에 빼앗길 것도 없는 사람이다. 스피노자에게서 그의 철학을 뺏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재산을 뺏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단순히 그는 재산이 없었으므로). 그의 기술을 뺏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물론 그의 손가락을 분질러 버리면 되겠지만). 교수라는 명예와 부로 스피노자를 유혹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그는 자유를 더 사랑하였으므로). 심지어 스피노자에게서 생명을 뺏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왜냐하면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이 신체와 더불어 완전히 파괴될 수 없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러한 것들이 스피노자를 철학자로, 혹은 진실한 인간으로 정의하는 것들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 앞에 있는 저 작고 여린, 모성애나 부성애를 자극하는 사람이 진실된 인간임을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었을 게다. 그리고 스피노자 자신에게는 그러한 자족감이 자신의 철학의 힘, 즉 자신의 철학의 진리성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어느 지역에서건 어느 시대에서건 희소하다. 그러므로 그렇게 드러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중하게 다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2.
올덴부르크는 변한다. 시야가 새로운 시대를 창조한다는 자부심으로 좁아져 있을 때 올덴부르크는 스피노자에게 저작들을 출판할 것을 강하게 촉구한다.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런던탑에서 죄수 생활을 하고 나자 그의 시야는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올덴부르크는 스피노자에게 저작들을 출판하지 말 것을 간곡히 권유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대의 풍세는 올덴부르크를 때로는 진보적인 사람으로, 때로는 보수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올덴부르크가 폭풍에 흔들리는 배였을 때 스피노자는 등대처럼 자기 자리를 지켰다. 그것이 스피노자에게 만족을 주는 삶이었는지는 지금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스피노자를 철학자로 정의한다는 것과,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등대로써 지금도 우리 눈 앞에 있다는 것일 테다.

3.
"스피노자의 편집증적인 탐구를 촉발한 확고부동한 신념들에 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경우에 수수께끼는 오히려 그러한 신념들의 원천에 있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반면에, 라이프니츠는... (그 자신이 말한 그 숱한 것들을) 도대체 믿긴 믿은 것인가?"("스피노자는 왜" 168 페이지)

여기 똑같은 문제가 또 나온다.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의 진리성을 확신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스피노자가 죽기 전의 마지막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는 사소한 구절마저 그의 철학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반면 그의 철학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찾아내기 힘든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는 의지의 자유를 부정한다. 나는 그의 철학 체계 안에서 의지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매우 정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지의 자유의 부정은 체계에서 연역된 것이라기보다는 체계를 건설해 가는 과정의 한 단계였을 것이다. 그러면 어디서 이러한 관념을 얻었을까? 그리고 왜 이런 관념을 채택했을까? -일단 나는 모른다.

라이프니츠의 경우에 대해서는 그리 고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라이프니츠는 무엇보다도 법률가이자 외교관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벌거벗은 진리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일 것이다. 여하튼 그가 자신의 주장을 믿었건 말건은,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전혀 중요치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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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08-01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를 다시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Weekly 2013-08-01 17:1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요즘 오히려... 좀 가볍게 사는 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 베르그손이 스피노자는 모든 철학자의 첫번째 철학자라든가... 하는 말을 했다던 기억이 나네요. 동의할 수 밖에 없지만 저에게 스피노자는 마치 알의 껍데기처럼 느껴지네요...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와 화이트헤드의 "사고의 양태"를 읽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책은 "스피노자는 왜"와 같은 날 산 것이다. 서가를 둘러보다가 제목에 끌릴 수 밖에 없었고(스피노자의 "형이상학 단평"의 한 주제가 그것이므로) 첫 페이지를 펼쳐 보는 순간 살 수 밖에 없었다.

"...우리 경험 내의 요소들은, 그들이 중요성을 얻는 데 필요한 적정 시간 동안 존속되는 한, 그들의 가변성에 비례하는 <명석 판명성>을 띠게 된다..."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저 문장은 나의 최근의 사고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리고 나의 사고엔 부가적인 노력이 곁들여 지는 데, 그것은 나의 사고를 스피노자적인 틀 안에 구겨 넣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저 문장을 스피노자적인 틀 안에 구겨넣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매튜 스튜어트의 "스피노자는 왜"라는 책은 내게 또다른 가능성을 고민해 보도록 한다. 어쩌면 저 문장은 라이프니츠적인 관심을 더 많이 표현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매튜 스튜어트의 책에서 신-자연의 쌍으로 표현된 것들은 현대적으로는 가치-사태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매튜 스튜어트는 자신의 기획(근대성에 대한 두가지 태도로서의 가치론적 신관과 자연주의적 신관)에 맞추기 위해 스피노자를 과도하게 단순화시켰다. 즉, 스피노자에게서 가치론적 관점을 배제시켰다. 나는 스피노자에게서 가치론적 관점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스피노자의 체계에 정합적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숙제가 하나 더 생겼다.

(어제 거제에서 부친 짐이 도착했다. 그리고 지금 이 포스팅은 어떤 바위 위에서 모기를 쫒아가며 작성하고 있다. 모기 몇 마리가 엉겨서 자판 위에 떨어진다. 한 마리는 내 손에서 사망했다. 그러므로 빨리 피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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