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시덴탈리즘
샤오메이 천 지음, 정진배 외 옮김 / 강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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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은 서구적 시선에 의해 창조된 하나의 가상이다. 동양은 서양의 탄생과 맞물리는 동시적 사건이지만, 동양의 탄생은 철저히 서구적 기획의 산물이다. 서양은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로 동양을 상정하고, 자신들이 억압하거나 부정한 모든 것들을 동양에 투사했다. 서구 제국주의의 동양 침투로 인해 서구적인 동양관은 새롭게 날조되었으며, 동양의 식민화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권력 담론으로 이식함으로써 동양인의 내면을 식민화된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물들여 놓았다. 우리처럼 근대화와 일제에 의한 식민화 과정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경우 사정은 좀 더 복잡해진다.

일제의 서구적 시선에다 일본적 시선을 중첩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일본은 추구해야 할 서구적 근대화의 목표이자 지양해야 할 또 하나의 동양적 억압자로서의 위상을 가졌다. 동양의 근대화 논리 속에는 서구의 식민주의자들의 오리엔탈리즘의 자기 내면화라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자국의 해방을 열망하는 근대주의자의 기획 이면에는 서구적 자기 합리화와 우월감이 깃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근대화 추구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을 제고했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담론/이론은 억압적 근대화와 수동적 근대화 과정을 걸어야 했던 우리에게는 역사를 바라보는 유효한 관점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서구에 의해 날조된 동양 이미지를 유포한 오리엔탈리즘은 일방적인 억압/피압, 가해/피해의 논리일까. 적어도 우리에게 오리엔탈리즘은 억압적이고 피해망상적인 논리일 수밖에 없다. 비록 서구 본국의 지배가 아닌 아제국주의 국가 일본에 의한 지배를 받았다고는 하나, 일본 역시 서구와 다를 바 없는 아서구로서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근대화의 일방적 추종자로서 숨가쁘게 헐떡여 온 지난 시간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독약이 묻은 약, 상한 부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에 넣기 바쁜 처참한 상황이 아니었던가. 비참하고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상황을 면밀하게 고려하고 취사선택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옥시덴탈리즘> 속의 중국은 어떠한가.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우리의 완전한 식민화 이상으로 중국에는 엄청난 사건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서양적 권력을 일방적으로 추수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 서양의 이미지를 창의적으로 오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마련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이 책에서 다루는 옥시덴탈리즘의 과정 중 상당수가 문화혁명기 이후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그 오독의 역사가 20세기초부터 비롯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이런 현상이 문화혁명 이후의 서구화 과정에만 국한되는 현상은 아닌 듯하다.

이 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저항적 옥시덴탈리즘이라는 개념이다. 지배 권력이나 이데올로기의 저항적 타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서양의 이미지를 창의적으로 오독하여 이를 실행의 도구로 삼는다는 것이 저항적 옥시덴탈리즘의 개념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근대화 초기 수많은 지식인들이 서양을 탈봉건의 무기로 삼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서양적 시선에 깊이 침윤된 오리엔탈리즘의 무비판적 수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다.

어떻게 보면 역사라는 것 역시 저자의 관점과 관심에 따른 허구적인 서사라고 할 수도 있다. 역사는 저자가 자료더미를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해 구성한 서사이다. 따라서 주체에 따라서 역사는 무한히 다양한 이야기로 흝어질 수 있다. 하나의 동일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저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오리엔탈리즘이나 관변 옥시덴탈리즘의 역사 속에서 저항적 주체성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관심과 욕망이 아니라면 이런 책이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우리의 역사마저 다시 쓰도록 상상력과 관심을 발동시키는 놀라운 관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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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잇
김영하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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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그가 등단하고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 어느 계간지에 실린 단편 하나를 읽었고, 장편으로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이런저런 곳에서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수군수군한다는 것, 그리고 tv에서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극화한 프로그램을 한 편 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라디오 프로를 진행할 정도로 말재주가 꽤 있는 사내라는 것, 이런 것 등등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거나 체험한 모든 것이다. 여기에다 단편 <호출> 이후로 <포스트잇>이라는 산문집을 읽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기해 두어야 하겠다.

연배로 따질 때 그는 80년대 세대에 가깝다. 그런데 글을 읽어보면 이 사내는 90년대 중반 이후까지를 자신 속으로 포섭하는 감각을 지닌 특이한 사람이다. 감각이란 지식처럼 배워서 체득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자기 몸에 맞지 않으면 몸밖으로 튕겨 끝내는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까지 내쳐 버리는 인간의 이상한 능력이다. 김영하는 자신의 감각과 맞지 않는 세대를 지나 갈수록 자신과 화합되는 그런 시대를 사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건 분명히 부러운 일이다. 나는 그보다 분명 후세대이지만 김영하에 비해 세상과 부딪치는 면이 적은 것은 분명하다.

물론 작가에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그런 것 아닐까 싶다. 세상을 깊은 안목으로 보든가 아니면 오지랖 넓은 체험을 가졌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같은 것을 보되 남들과 다른 독특한 관점으로 보고 그 기발한 착상을 글로 풀어낸다든가. 그렇게 볼 때 김영하는 세 번째 유형에 속하는 듯하다. 그는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있는 하찮은 물건들에서 미묘한 상상력을 끌어내어 독자들을 도발하고 선동한다(야쿠르트나 말표구두약) 난 고뇌에 찬 지성의 거대 담론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새롭고 깊은 의미를 끌어내는 사유가 마음에 든다. 더더군다나 그가 작가라면 말이다.(거대 담론은 철학자나 사상가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김영하는 재주꾼임에 분명하다.

<포스트잇>은 지하철에서 왔다 갔다 하며 읽은 책이다. 제목처럼 내용도 경쾌하고 날렵하다. 그리고 지하철 정거장 숫자에 맞춰 읽기에 제격이다.(3정거장 당 한 편!) 이 책을 통해 나는 그가 작가로서 가진 문학에 대한 애정, 그의 사생활, 일상에 대한 감각,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그의 심층들에 대해서 조금 엿본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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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회고록
디디에 에리봉 지음, 송태현 옮김 / 강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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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 이후 프랑스 지성계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아울러서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한 학자임이 분명하다. 이후 등장한 푸코, 데리다, 라캉, 바르트 등 구조주의의 효시로 알려진 레비스트로스는 정작 구조주의라고 통칭되는 사상의 흐름에 자신이 계보학적 선구자로서 대중에게 알려지는 일에 대해서 대단히 불쾌한 감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야콥슨, 방브니스트와 같은 언어학자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구조주의자라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도 레비스트로스와 이후 일군의 사상가들 사이의 친연성이 별반 없어 보인다. 일평생을 친족과 신화 연구에 바친 이 유태계 민족학자의 사상에 다가가기란 무척 낯선 일이다. 우리에게는 구조주의 사상의 근간에 대한 이해를 위해 교재로, 아니면 문화상대주의의 교리를 재확인하는 교재로서만 그는 존재한다.

그의 주저 <슬픈 열대>는 과학적 체계를 가진 글이 아니다. 그런 탓에 이 책은 학문의 과학성에서 멀찍이 벗어난 기행문쯤으로 소개되고 읽힌다. 그러나 책장을 펴 들고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제목의 이국적 감수성과는 동떨어진 민족학적 언술 구조에 사람들은 가슴이 막히는 듯한 답답증을 느끼며 책장을 덮는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는 여든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세밀한 기억력을 가진 한 학자의 학문적 인생과 사상을 대담이라는 엿듣기 형식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대담집이라는 형식은 회고록과 마찬가지로 서구에서는 흔한 출판 형식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낯설고 그만큼 매력적인 출판 형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왜 이런 형식의 책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건 아마도 뭔가를 술회하고 종합할 가치가 있는 학문적 지성이 존재하지 않는 탓은 아닐까. 그만큼 우리의 학문 역사는 짧고 학자 개인의 이력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대학 교수도 정년을 마치면 학문 인생을 접고 유유자적한 노후를 즐기는 것을 일종의 멋으로 여기는 풍토는 학문이 단순한 직업 이상의 열정으로 확대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 아닐까.

그런 풍토에서 바라본 레비스트로스는 90이 넘은 나이에도 책을 쓰며 학문적 인생을 지속하고 있다. 그의 학문적 성과나 개인적 이념이나 사상과 무관하게 이처럼 거대한 지적 열정을 발휘하며 한 나라의 학문 풍토를 조성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불행한 일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적 측면에서 볼 때 방법과 사상을 엄밀히 구분하며 마르크스를 읽은 처세술 밝은 인간이었고, 어떻게 보면 학자로서는 지나치게 생활력이 강하고 변화에 무딘 인간이었으나, 그런 인간적인 면모를 제외하고 순수한 학자로서 그를 바라볼 때 그는 감히 그 누구도 그 경지를 넘보지 못할 순수한 지적 열정을 가진 프로메테우스적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대담집은 난해한 사상가의 지적 사유 과정을 대담이라는 대중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간혹 신문 지문에 저명한 학자와의 대담이 실리는 경우가 있으나, 신문 지면이라는 제약 때문에 단순한 질문과 압축적인 답변이 오가기 마련이다. 비록 신문과 비교할 것이 못되지만 이 대담집은 그런 측면에서 보면 여타의 대담집 이상의 내용을 갖추고 있다. 훌륭한 대담의 비결은 진행자의 몫이라는 말이 있다. 진행자가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은 대담이 성공할 리는 없다. 이 대담의 진행자 에리봉 디디에는 치밀한 준비를 통해 잊혀진 기억들을 상기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대담자의 입장에서는 불리한 사실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일방적으로 떠받들기 위한 대담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대담은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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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아이들 서문문고 124
장 콕토 지음 / 서문당 / 198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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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위 전위 예술가로 유명한 장 꼭또의 소설이다. 꼭또의 작품을 접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시인의 피>같은 초현실주의 영화 역시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고, 그 영화에 대한 간략한 해설이나 스틸컷만 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꼭 필요하지만 구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다. 이름만 허다하게 듣고 정작 진품을 구경조차 못한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일 개인의 힘으로 안 되는 건 나라에서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가 있고-'라는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 한 구절이 아이러니컬하게 다가온다.

여하튼 제목에서도 그 분위기가 느껴지듯이 이 작품은 세상과 단절된 채 자폐적인 삶을 살다 자살로 끝을 맺는 오누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고아로 남겨지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죽음들을 체험하고 끝내 그들 자신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작품 전반에서 사건을 진행하는 계기들이 모두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암울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오누이와 그의 친구들이 벌이는 자멸적인 대사와 행동, 비밀과 거짓말은 이것이 과연 아이들의 세계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들의 일탈과 자멸에는 어떤 논리적인 설득력도 없다. 그들의 말과 행동, 내면은 제각기 분절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묘한 동경과 경멸을 품은 채 새장 속의 새처럼 자폐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꼭또가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는 부조리의 세계이다. 그 세계를 구현하는 존재들이 아이들이라는 점에서 섬뜩하고 차가운 느낌은 더한다. 그래서 무서운 아이들일까? '떼리블 앙팡'이라고 불려지는 세대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예전 판 문고본이라 번역에 있어 의고투가 완연하지만, 번역에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이 소설의 가치는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꼭또'라는 점에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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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어디로 가고있는가
롤랑 바르트 / 강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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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내가 한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작가다. 그러나 몇 년 전에 비해 몇 권의 책이 더 번역되기는 했으나, 초기의 핵심적인 저작인 <글쓰기의 영도>나 <S/Z>는 번역되지 않는다. 주요 저작이 번역되지 않는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어 보인다. 번역되지 않은 그의 저작은 대체로 문학 비평 영역에 놓이는 것으로, 출판의 상업성을 고려할 때는 수지 맞는 장사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 출판사의 역량에 맞기기에는 버거운 책들에 대해서는 공적인 차원에서의 지원이 절실하다. 나는 바르트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보는데, 번역의 수준과 정도는 한 나라의 지식 문화를 좌우하는 중요한 지표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문학은 어디로 가고있는가>는 후기 바르트적 관점을 견지한 바르트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대담 형식인 데다가 문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생각하고 문화 일반으로 확대 적용할 수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전 바르트를 읽을 때의 감회를 가지고 읽어나가다 보니 바르트적 문제 의식이 새롭게 다가온다. 문화 생산물의 저자성, 그리고 읽을 수 있는 텍스트/읽을 수 없는 텍스트, 저자와 독자의 육체성, 쾌락과 향락 같은 문제 의식은 60-70년대의 낡은 사유 틀이 아니라 현대성을 문제삼는 경우라면 언제고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후기 바르트는 다소 낭만주의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는 지식과 과학성에 대한 경멸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이 책에서 보여지는 바르트는 한층 무게 있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바르트의 사유 폭에 조금 가까워진 탓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여하튼 바르트를 읽고자 하는 결심을 굳힌 사람이라면 두꺼운 개론서를 읽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이전에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선택해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바르트에 심취한 사람이라면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문제 의식을 점검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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