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양식과 담론의 근대성
권영민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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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의 근대를 바라보는 소실점이라고 할 개화기에 등장한 문화 현상을 담론이라는 문화적 기획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근대적 언어가 확립되고 그 언어를 바탕으로 무수한 담론들이 난무하던 개화기를 주체-타자 담론과 신-구 담론 사이의 충돌로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국어국문운동이라는 독특한 문화 현상이 융성하게 된 배경을 근대 민족 국가로서 발돋움하려는 조선의 자기 정체성 확립의 욕구로 묘사하고 있다.

영웅전기나 우화, 풍자가 정체성을 주체성의 차원에서 확립하려는 의지의 소산이라면, 신소설은 일본의 식민주의 담론에 긴밀한 상관 관계 속에서 근대성을 가속화시키려는 음험한 제국주의적 기획의 소산으로 살피는 관점에는 기존의 중립성을 강조하는 국문학 풍토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목소리임에 분명하다. 푸코의 담론 이론에 기초한 미국의 탈식민주의 이론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자료에 대한 해석적 타당성을 겸비함으로써 자칫 신식 이론에 경도되기 쉬운 학문적 풍토에 경종을 울리는 효과가 가지고 있다.

그리고 권말에는 현대 독자가 굳이 도서관을 찾을 필요 없이 저자의 논의 대상인 실제 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칫 담론 자체에 대한 소홀한 파악 위에서 메타담론적 대상으로 화하기 쉬운 개화기 담론의 실상을 여실히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방법론적인 혁신과 실증성을 아울러 보여주는 이 책의 기획은 학문적 성과가 대중적으로 수용되는 메커니즘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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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평 2017-07-26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너무 어려워요. 쉬운 말이 너무 어렵습니다. 메타담론 이야기는 책 안 읽고 글 쓰거나 그 때 상황 이해하는 것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wasulemono 2017-07-26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4년 전에 쓴 글이네요. 너무 오래 전 글이라 제가 이런 글을 썼던가 싶을 정도로 낯서네요. 지적 감사합니다. 공부가 덜 여물어서 그런 것같아요.
 
표상 공간의 근대
이효덕 지음, 박성관 옮김 / 소명출판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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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식인들의 자기 비판 담론을 다룬 책들이 최근 들어 부쩍 출간되고 있다. 이 중에는 재일 한국인 지식인의 책들도 간혹 보인다. 주류사회 속에서 늘 타자로서 경계 상의 존재론적 고민을 없을 수 없는 이들의 일본 비판은 내밀한 아픔을 느끼게 한다. 일본에 대한 내셔널리즘적 비판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 지식인의 비판보다 더 한층 치밀하고 심도 깊은 비판 의식이 느껴진다. 그것이 어쩔 수 없이 일본에서 살며 연구를 하며 살아야 한다는 현실적 조건이 강제하는 치밀함이며, 일본, 일본인이라는 자명성을 의심하지 않는 무비판사회의 근저를 해부함으로써 비판적 성과를 이루겠다는 나름대로의 전략이라고 하겠다.

근대적 표상 시스템의 성립사를 문화의 전 방면에 걸쳐 추적하는 이 책은 일견 문화사 연구처럼 보이지만, 책의 뒷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궁극적으로 근대 국가로서의 일본의 자명성을 문제삼으려는 기획을 보여주고 있다. 석사 논문이라고 보기에는 턱없이 방대한 기획을 가지고 있는 이 책은 광의의 미디어를 매개로 하여 문화사 전반을 종횡으로 넘나들며 표상 시스템의 변화를 추적하고 있다.

푸코적인 방법론과 카라타니 고진의 역작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이론적 자양분을 얻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저자가 검토하는 영역에는 분명 독창적인 사유와 검토가 있음이 분명하고, 비슷한 근대화 과정을 거쳐온 우리의 근대화 과정을 검토하는 데도 시사점이 적지 않다.

한국, 한민족, 우리에게 이처럼 자명한 사실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정체성이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그러한 정체성과 경계 확립으로 인해 무엇이 배제되었는가를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근대의 시작과 동시에 발생한 일제 강점이라는 사건은 우리를 암묵적으로 하나의 시점으로 묶어놓았다. 그것이 외압에 의한 수동적인 현상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작금 우리가 스스로를 내셔널리즘이라는 잣대로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외압으로 인해 내셔널리즘의 발생이라는 구도는 일종의 환상일 수도 있다. 우리의 문제를 타자의 문제로 전치시킴으로써 타자의 문제가 해결될 때 우리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는 발상에 과연 문제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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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연구
류광우 / 충남대학교출판부(CNU Press) / 19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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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을 연구한 서적 중에서 이 책은 가장 오자가 많은 책이다. 책을 낼 때 섬세한 교정을 보지 않았던 듯하다. 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책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상문학처럼 텍스트 자체가 혼란스럽고, 잘못된 텍스트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은 텍스트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자는 적지 않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이상문학을 일제의 검열 정책에 대한 은밀한 저항이라는 코드로 읽어내고 있다. 일단 이와 같은 관점은 한번쯤 제시해볼 만하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조선을 지식인으로 살다간 이로서 이상의 문학에 내면화된 코드 중 하나가 은밀한 저항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시어 중에도 이와 같은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들이 꽤 있으며, 그가 작품 속에 제시하는 미묘하고 혼란스런 상황 역시 당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어둠의 분위기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코드가 작품 전반에 대한 해석 코드로 등장할 때,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논지의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과도한 해석이 불거져 나올 때가 있다. 그것은 이상문학의 불가해한 작품 상황에 숨어있는 코드를 추출해내려 하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작품 상황을 굳이 하나의 상황으로 단정짓는 것에는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특정한 몇몇 작품이나 한 작품 속에서도 부분적 정황에 대한 해석으로서 은밀한 저항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이상문학의 심층으로 은밀한 저항을 규정하는 것은 큰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 책의 더 큰 문제점은 논증을 전개하는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이상문학에 대한 기존의 해석 코드를 지배하고 있다고 할 김윤식 교수나 여타 지배적 논자들에 대한 비판을 전개함에 있어서 섣부르고 얕은 논단이 횡행한다는 점이다. '-동의하기 어렵다'라는 식의 전단은 그런 전단에 걸맞은 근거의 제시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제시하는 근거를 보면 대체로 설득력이 없는 것들이 태반이다.

이처럼 섣부른 논증 방식은 이 책의 일 부분의 문제가 아니라 시종일관 저자가 취하는 논증 방식이다. 이것은 은밀한 저항이라는 다소 동떨어진 관점을 확보하기 위해 빚어진 초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대체로 비판하기 위해 끌어들일 뿐, 자신의 논의를 보충하고 그것을 전개시켜 나가는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프로필을 보면 고등학교 교사로서 근무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그와 같은 코드를 내세우게 된 것은 고등학교라는 교육 현장의 분위기에 다분히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같다. 그런 조건 자체가 학적 분위기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관점을 구사하는 자유를 주었다고 할 수 있지만, 기존의 학문 공동체 내에서는 설득력을 별반 가질 수 없는 한계로 작용하는 듯하다.

흥미로운 관점을 보여주기는 하였지만, 기존의 학문성과를 발전적으로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이상문학 연구라는 학적 과제에는 미달한, 대학 1학년 수준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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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철학 - 사상과 그 원천 들뢰즈의 창 3
서동욱 지음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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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선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개론서를 읽는다. 사유의 전반적인 뼈대를 훑고, 그가 사용하는 개념들을 일람하고, 그 개념의 함의를 여타 철학의 틀과 대비하면서 차이를 뽑아낸다. 그것이 철학 개론서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대개의 개론서는 해당 분야 전공자가 해외 서적 몇 권을 참조해가며 발췌해놓는 수준에 머문다. 엄밀한 검토와 우리말의 맥락을 따지지 않은 섣부른 개념 번역이 혼란을 초래하고, 한국어 어법을 과감하게 파괴한 용감한 번역투 문장이 제대로 된 이해를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

들뢰즈에 대한 국내 학자의 개론서인 이 책은 그동안 철학 개론서에 대해 가지고 있던 우려를 말끔하게 씻어줄 뿐만 아니라, 개론서라고 규정하기에는 아쉬울 만큼 엄밀한 검토와 충실한 보충으로 우리를 자극한다.

들뢰즈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할밖에 없는 나로서는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준 해박함과 문장 구사의 명료함에 상당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몇 권의 들뢰즈 번역서를 가지고 있고, 원서 일습을 구비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동안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 들뢰즈를 절실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존 철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 내는 철학적 반항의 하나로서만 느껴졌을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이 보여주는 들뢰즈의 면모는 들뢰즈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제고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 책의 저자 서동욱 선생의 음성을 접하는 순간, 다른 들뢰즈 예찬자들과의 변별성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의 상품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현 상황은 들뢰즈에 대한 무비판적 옹호 일변도로 진행되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철학의 비판적 기능을 생각할 때, 들뢰즈철학은 비판적 전유의 대상으로 가다듬어져야 하며, 지금보다 차분히 그 칼날이 어디로 향해져야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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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하기의 이론 - 소설과 영화의 문화 기호학
스티븐 코핸 외 지음, 이호 외 옮김 / 한나래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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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영화의 문화기호학'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영상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요즘 대학의 인문학 교육에서 필수 테마로 부상하고 있는 '영화를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방법서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막강한 권위를 가져온 문학 교육의 교양적 가치가 예전과 같은 방법으로 이용될 수 없는 게 현실이고 보면, 영상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인 영화를 접목시키려는 대학 교육의 방향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문학 교육이 담당해 온 예술적 감수성의 영역은 영화라는 낯선 구조에 대한 이해에 아직까지 어려움이 있고, 학생들은 소설을 매개로 한 교양 교육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그리 심각하지 않다. 교육자의 입장에서는 영화를 매개로 삼아야 한다는 부담이, 그리고 교육의 수혜자인 학생에게는 소설 읽기가 지루한 경험으로 놓여 있는 셈이다.

소설과 영화, 문학과 영화라는 테마가 대학의 교양 과목으로 우후죽순처럼 개설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목들의 내실을 다져줄 교안도 방법도 마땅하지 않은 시점에서 여러 가지 책들이 번역되고 있다. 대부분 소설과 영화를 의미를 담은 이야기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책들이다. 주로 영미권의 영문학자들이 저자인 이런 류의 책들은 소설을 주 대상으로 한 서사학적 접근법을 이용하고 있다.

한 편의 스토리라는 측면에서 영화와 소설은 비슷한 면을 지니고 있지만, 그런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매개체나 스토리 구성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서사론적 접근은 영상적 지각에 익숙한 학생들에게는 도리어 낯설고 따분한 접근일 수밖에 없다. 차이는 차이대로 보존하고 날카롭게 부각시킬 때 소설과 영화는 서로 긴장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지, 하나의 관점으로 독특한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은 그리 생산적이지 못할 수 있다.

이 책 역시 기존의 소설 중심의 서사학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그리고 논의의 상당 부분이 고전 소설 분석에 할애되고 있어 정작 영화에 관한 논의를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다소 실망감을 안겨준다. 서사학과 아울러 이 책의 뼈대를 구성하고 있는 문화기호학적 접근 역시 롤랑 바르트의 신화 분석에서 차용한 기호학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런 방법이 영화 분석에 적용될 때, 그 분석은 다소 맥빠지는 평범한 해석만을 가져온다. 젠더나 인종 중심의 해석 단위로 구성되는 분석은 문학이나 영화를 떠나서 절실한 맥락을 발견할 수 없는 해석 코드로 느껴진다.

영문학자들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영화와 문학 사이의 매개작업은 여전히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문학이 영화에 준 영향이나 그 둘 사이의 유사점을 찾기 위해 서사의 차원에서 접근하거나, 명작을 영화로 읽기 같은 시도들이 작금 이뤄지고 있는 작업의 개요이다.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미미한 성과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정작 구체적인 분석이나 비교 작업 이전에 왜 영화와 문학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 의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런 반성 없이 이뤄지는 '문학과 영화' 프로젝트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익숙한 것으로 덮으려는 행동을 벗어날 수 없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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