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네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하필 그 순간 내가 아래층에 내려가 널 만나게 됐어. 그 덕분에지금 우리는 이렇게 이 방에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지.
하지만 그날 내가 아래층에 내려가지 않았을 수도 있고, 내려갔더라도 네가 그냥 갔을 수도 있지. 그 상황은 지금 우리 세계에선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하지만그렇다고 해서 없는 일은 아니야. 지금 여기의 우리가선택하지 않은 삶들이 어딘가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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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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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이렇게 일찍 와?"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네가 오기를 혼자서 기다리는 게 무엇보다 즐겁거든." 너는 말했다.
"기다리는 게?"
"응."
"나랑 만나는 것 자체보다?"
너는 생긋 웃는다. 하지만 질문에 대답하진 않는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다. "이렇게 기다리는 동안은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슨 일을 할지,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잖아, 안그래?"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상대를 만나고 나면 그 무한의 가능성은 불가피하게 오직 하나뿐인 현실로 치환된다. 너는 그게 괴로운 것이리라. 네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훗날 고야스 씨는 자신이 왜 일상적으로 스커트를 입는지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첫째로는, 이렇게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 네, 왠지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랍니다."

"제가 하고 싶은 건 이런 얘깁니다. 티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음의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 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더욱이 그 사랑이 어떤 이유로 도중에 뚝 끊겨버린 경우라면요. 그런 사랑은 본인 에게 둘도 없는 행복인 동시에, 어찌 보면 성가신 저주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알 것 같습니다. "
"여기서는 나이 차이도, 시간의 시련도, 성적 경험의 유무도 대단한 요건이 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게 백 퍼센트인가 아 닌가, 중요한 건 그뿐입니다. 당신이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 때 상대에게 품었던 사랑은 실로 순수했으며 백 퍼센트의 마음이 었지요. 그래요, 당신은 인생의 아주 이른 단계에서 최고의 상대를 만났던 겁니다. 만나버렸다. 라고 해야 할까요."

"오. 맞아요. 내 생일이 정말 수요일이었네요. 확실해요."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수요일인 게 당연하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계산이 틀렸을 리 없다. 확인까지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요즘은 자기 생일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구글에서 점색하면 누구나 십 초도 안 되어 간단히 알 수 있 다. 소년은 그것을 단 일 초 만에 알아맞힐 수 있다지만, 서부극의 결투도 아닌데 십 초와 일 초 사이에 얼마나 실리적인 차 이가 있을까? 나는 소년을 위해, 그 사실을 조금 쓸쓸하게 여겼다. 이 세상은 날로 편리한, 그리고 비로맨틱한 장소가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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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무튼, 당근마켓 - 우리는 그렇게 만날 수도 있다 아무튼 시리즈 59
이훤 지음 / 위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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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라고 하니까 생각난 건데요. 어느날 갑자기 아주 멀리 떠나야 한다면요. 저는 트렁크 하나에 다 들어갈 수 있을 만큼만 짐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속옷,가디건, 치마, 반바지, 셔츠 하나씩만 있으면 되지 않나 싶어요. 집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을 주기적으로 비우려고 하는 것도 그래서예요. 마음이 허할 때마다 구매로 푼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요즘은 물욕이생기면, 스스로에게 말해줘요. ‘지금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이거면 됐어‘ 하고 마음의 방향을 틀어요. 그럴때 좋아요. 현재에 대해서도 조금 더 확신하게 되고요.
생활이 더 단단해지는 것 같아 좋아요. 작아지면서에서 검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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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레베카 동서 미스터리 북스 26
뒤 모리에 지음, 김유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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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로 예의 따위에 마음쓰고 있지 않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다만 함께 식사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비록 지금처럼 꽃병을 엎지 않으셨다 해도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그때내 얼굴에 의혹의 빛이 나타났던 모양인지 그가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내 말을믿지 않으시는군요. 걱정 마시고 이쪽으로 와 앉으십시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서로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요."

"오늘 아침엔 바람이 차니 내 양복 웃옷을 입고있어요."
나는 아직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그의 웃옷을 걸치는 데 행복을 느낄 만큼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다.

주위는 말할 수 없이 평화롭고 고요했다. 외돌토리로 혼자 있을 때에는 어째서 평소의 어느 때보다도 이 장소가 훨씬 기분 좋은 곳이 될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만약 지금 누구든, 하다못해 학교 시절의 친구라도 곁에 앉아 있다면 얼마나 평범하고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인가.

그러나 레베카는 절대로 나이를 먹지 않는다. 레베카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저히 겨루어 볼 수가 없다. 그녀는 나에게는 너무 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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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대한 르포
하재영 지음 / 잠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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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성차별주의자일 수 있다. 여성 운동에 헌신하는 계급주의자, 계급적 불평등에 민감한 인종주의자,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호모포비아일 수 있 다. 그리고 인간을 향한 다양한 차별을 일관되게 반대하면서, 동물에게 행해지는 인간중심주의만큼은 재고하지 않는 ‘종차 별주의자spedesism‘일 수 있다.특정 집단이 당하는 불평등에 저 항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 사람의 도덕을 보증하는 알리바이가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연대자인 동시에 다른 누군가가 당 하는 폭력의 방관자이자 심지어 가담자인지 모른다. 동물 문 제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다.

동물에 대한 연민을 낮잡아 보는 사람이 많잖아. 우리가 구 하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이유로, 응원은 고사하 고 비난을 받을 때도 있잖아. 나도 인터넷에서 그런 댓글 많이 봐. 개새끼들 도와줄 여력 있으면 사람이나 도와주라고, 불쌍 한 사람도 많은데 개새끼가 대수냐고. 하지만 사람이든 동물이 든 누군가를 위해 자기 인생을 걸어본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 여기 돕지 말고 저기 도와라, 이 아이를 구하지 말고 저 아이를 구해라, 그런 소리는 누구도 구한 적 없고 누구도 살린 적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이야.

누가 손해를 보는가? 우리 모두다. 다 같이 손해 보는 일이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일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얻는 것이 더 많아서가 아니다. 얻는 것은 항상 명확한 반면 잃는 것은 대개 모호해서다. 그러나 저 단순한 주장의 진짜 문제점은 여전히 손익의 대상을 인간으로 국한한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희생 을 치러야 하는 동물을 배제했던 비인간성이 현대 축산업을 참 극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거나 완전히 잊고 있는 것이다. 개 식용 합법화 주장을 합리적 해결책으로 오인하는 상황은 우리가 현대 축산업의 비극으로부터 아무 교훈도 배우 지 못했음을, 우리의 기억상실을, 어리석음을 증명할 뿐이다.

무엇을 위해 평등을 말할 것인가? 살아 있을 때도 고깃덩어리로 취급받는 농장동물의 삶과 죽음은 참혹하다. 그런데도 왜 어떤 사람들은 농장동물의 고통을 기준으로 평등을 말할까?
모든 동물을 똑같이 최악의 상태로 만들고 똑같은 잔인함으로 대하는 것이 평등의 가치에 부합할까? 우리는 인간의 평등에 해 그렇게 말하지않는다. 최악의 처지에 놓인 누군가를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람의 권리와 복지를 빼앗는 것이 평등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평등은 우월주의와 중심주의에 저항할 때 가치를 지닌다.

현대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시대인 한편, 기술 혁신이 도덕적 진보를 가능케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때로는‘무엇을 하는가?보다 ‘무엇을 하지 않는가?‘가 한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설명한다. 비거니스트는 식물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물을 ‘먹지 않기‘ 위해 채식을 선택한다. 개식용을 금지하려는 사람은 소, 돼지, 닭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 다른 동물을 그 시스템에 밀어 넣지 않기‘ 위해 반대 입장을 선택 한다. 어떤 것이 정답인지 확신할 수 없을 때도 우리는 무엇이 더 가치있고 지속 가능한 일인지 고민해야 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에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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