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대한 르포
하재영 지음 / 잠비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와 당신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성차별주의자일 수 있다. 여성 운동에 헌신하는 계급주의자, 계급적 불평등에 민감한 인종주의자,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호모포비아일 수 있 다. 그리고 인간을 향한 다양한 차별을 일관되게 반대하면서, 동물에게 행해지는 인간중심주의만큼은 재고하지 않는 ‘종차 별주의자spedesism‘일 수 있다.특정 집단이 당하는 불평등에 저 항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 사람의 도덕을 보증하는 알리바이가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연대자인 동시에 다른 누군가가 당 하는 폭력의 방관자이자 심지어 가담자인지 모른다. 동물 문 제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다.

동물에 대한 연민을 낮잡아 보는 사람이 많잖아. 우리가 구 하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이유로, 응원은 고사하 고 비난을 받을 때도 있잖아. 나도 인터넷에서 그런 댓글 많이 봐. 개새끼들 도와줄 여력 있으면 사람이나 도와주라고, 불쌍 한 사람도 많은데 개새끼가 대수냐고. 하지만 사람이든 동물이 든 누군가를 위해 자기 인생을 걸어본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 여기 돕지 말고 저기 도와라, 이 아이를 구하지 말고 저 아이를 구해라, 그런 소리는 누구도 구한 적 없고 누구도 살린 적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이야.

누가 손해를 보는가? 우리 모두다. 다 같이 손해 보는 일이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일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얻는 것이 더 많아서가 아니다. 얻는 것은 항상 명확한 반면 잃는 것은 대개 모호해서다. 그러나 저 단순한 주장의 진짜 문제점은 여전히 손익의 대상을 인간으로 국한한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희생 을 치러야 하는 동물을 배제했던 비인간성이 현대 축산업을 참 극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거나 완전히 잊고 있는 것이다. 개 식용 합법화 주장을 합리적 해결책으로 오인하는 상황은 우리가 현대 축산업의 비극으로부터 아무 교훈도 배우 지 못했음을, 우리의 기억상실을, 어리석음을 증명할 뿐이다.

무엇을 위해 평등을 말할 것인가? 살아 있을 때도 고깃덩어리로 취급받는 농장동물의 삶과 죽음은 참혹하다. 그런데도 왜 어떤 사람들은 농장동물의 고통을 기준으로 평등을 말할까?
모든 동물을 똑같이 최악의 상태로 만들고 똑같은 잔인함으로 대하는 것이 평등의 가치에 부합할까? 우리는 인간의 평등에 해 그렇게 말하지않는다. 최악의 처지에 놓인 누군가를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람의 권리와 복지를 빼앗는 것이 평등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평등은 우월주의와 중심주의에 저항할 때 가치를 지닌다.

현대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시대인 한편, 기술 혁신이 도덕적 진보를 가능케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때로는‘무엇을 하는가?보다 ‘무엇을 하지 않는가?‘가 한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설명한다. 비거니스트는 식물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물을 ‘먹지 않기‘ 위해 채식을 선택한다. 개식용을 금지하려는 사람은 소, 돼지, 닭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 다른 동물을 그 시스템에 밀어 넣지 않기‘ 위해 반대 입장을 선택 한다. 어떤 것이 정답인지 확신할 수 없을 때도 우리는 무엇이 더 가치있고 지속 가능한 일인지 고민해야 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에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