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이 도움을 요청하는 전략은 놀라웠다. 단순히 필수적인 생존 자원을 끌어오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 확하게 파악하려 했고 자신의 사회적 욕망을 긍정할 줄 알았다.‘생 존하는 나‘를 넘어서 ‘살아서 욕망하는 나, ‘사회적 존재로서 의미 있 게 살아가는 나‘를 추구할 줄 알았고 이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열망과 에너지가 풍부했다. ‘빈곤‘은 그저 나를 둘러싼 여러 장애물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개인의 부족함이라고 여기는 사회적 인식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지점이 지현의 가장 강인한 면이라고 생각했다. 풍족한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은 사회적 압력을 넘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데, 지현은 성장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고 성숙하게 ‘살아서 욕망하는 나(자아) 발견하기‘를 잘 해내고 있었다.
아이들이 학원에, 게임에, 스마트폰에 들이는 시간도 있어야겠지만, 목적 없이 허송세월을 할 필요가 있다. 당장은 쓸모없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이러한 시간을 보내며 자신과 세상과 미래에 대해 고민해보는 기회를 갖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더라도 자기 머리로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충분히 갖지 않으면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 자신의 본모습을 찾기 어려워진다. 그런 점에서 보면 연우가 다른 청소년들과 달랐던 점은 누구보다도 사색하는 시간을 잘 영위했다는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가족과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조용히 생각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부분이 인생에서 후회되나,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했다. 연우가 디자인 평면도를 그리는 일을 해보고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라는 것을 알아낸 것도 이런 시간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발견하자 주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자기 구상을 실행으로 옮겼는데, 나는 연우가 보여준 이 러한 주도성과 자율성이 사색하는 시간을 통해 형성된 자아정체감 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청소년들에게는 홀로 충분한 시 간을 갖고 생각해보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 서는 경험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나는 지현과 연우, 우빈을 만나고 그 외에도 수많은 청소년을 만나면서 자아정체감을 안정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친구들이 진로 탐색에도 유능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진로 선택의 고민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 살고 싶은 삶,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를 정확하게 알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활동은 뚜렷한 진로 전망이 생기면 훨씬 긍정적인 패턴을 보였다. 즉, 자신이 원하는 진로를 향해 관심이 집중되면 이전의 부정적인 생각이나 관계는 자연스럽게 단절이 되었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노력이 쏟아졌다. 자신의 불우한 환경과 조건에 대해 외부로 그 탓을 돌리거나 세상의 평가에 쉽사리 휘둘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적극성을 가지고 현실에 대한 객관적 평가, 진로를 위한 정보 탐색, 도움이 될 만한 사회적 관계 만들기 등을 행동으로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