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제가 어린이 (좌익)잡지 고래가 그랬어를, 그리고 편해문의 놀이 책들을 좋아하긴 합니다만, 고래가 그랬어에서 나온 놀이 전문가 편해문의 동남아 촬영 사진집이라는 책 소개를 처음 들었을 때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_-;; 그 컨셉트만으로도 이 책은 근래 가장 잊혀지지 않는 조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놀라움은 경악에 가까운 것이어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기대는 안했습니다.;; 아마추어가 찍은 '동남아의 어려운 삶 속에서도 꽃피는 아이들의 순수함' 블라블라... 

사실 저는 에드워드 슈타이켄의 <인간 가족전>같은 시리즈를 싫어합니다. 무작정 인간의 긍정적인 본성을 내보이면서 세상을 (본의건 아니건) 미백하려는 시도는 영 불편해서요. 우는 애 앉혀놓고 강제로 스케일링을 하는 기분이랄까. 휴머니즘 사진의 근간까지 부정할 깜냥은 되지 못하지만, '가능한 모든 이미지는 이용당한다'는 수잔 손탁의 고찰에 가장 순진하게/바보같이 들어맞는 그 모습들은 사진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더군요. 예 뭐, 어중간한 놈들이 꼭 그런 핑계를 대긴 합니다만.  

(위) 수잔 손탁 <타인의 고통>

 

그래서 <소꿉 Children's Playing House>은 어떻다? 

좋았습니다. 참 좋았어요. 일단 사진들이 준수합니다. 정적인 모습을 찍을 때는 의도적으로 프레임을 꽉 채우거나 정리하려는 (다분히 아마추어적인 욕망) 시도가 엿보여서 종종 아쉽긴 했지만, 뛰노는 아이들의 스냅 사진들을 중심으로 전반적으로 구성이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아이들은 거의 모두가 카메라를 두려워하지 않는 완벽한 모델들입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빈곤함이 엿보이는 이미지들을 '잘 감상했다'고 말하면 다소 (손탁적으로) 폭력적인 감상일까요. 그래도 '보기에 좋았다'고 고백은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감상적인 휴머니즘이 엿보이는 이 사진들에서 왜 불편함이 엿보이지 않았을까...

아마, 사진 속의 아이들이 늘 행복해 보이지는 않기 때문인 듯해요. 사진들 속에서는 권태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한숨이, 딱히 다른 걸 할 것도 없는 현실에 대한 자조가 가끔씩 고개를 듭니다. 물론 이것들은 그래도 뛰어놀지요. 아이들에게 있어 놀이는 유희 이전의 근본적인 행위, 마치 업보 같습니다. <날개>의 작가 이상의 글 중에 '권태'라는 제목의 수필이 있었지요. 거기 보면 시골 애들이 하다 하다 할 게 없어 똥을 눈 다음에 그 똥이 웃기다고 하하거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이들에게 있어 놀이는 그 즐거움 여하를 떠나 어떤 필수요소, 통과 의례, 시지프스의 바위 같아요. 이런 고찰은 유년 시절에의 회한 섞인 미화와는 반대 방향에 있습니다. 오히려 냉정한 느낌까지 풍기죠. 늘 즐거우리란 보장은 없으나 해야 하는 것. 놀이는 아이들의 사명인 것이죠...

 

그리하여, 의도치 않았더라도

“이 작업은 상업적 장난감과 미디어, 게임과 학원과 시험에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빼앗긴 채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는 우리 아이들을 비춰볼 거울을 만드는 일이었다.”라고 말하는 작가는 “아이들은 동무들과 웃고 뛰놀며 보내느라 하루해가 짧아야 마땅하다. 그런 아이들의 삶과 웃음과 놀이를 사진으로 담아내고 그들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여정의 출발이다.”라고 책을 펴낸 의도를 이야기한다.         -책소개 중에서

이 나라의 아이들이 잃어버린 '뛰노는 동심'을 담겠다는 그의 바램은 책에 담긴 그의 의도와는 약간 다른 성과까지 얻어낸 듯합니다. 편해문이 발견한 것은 놀이의 동물적인 특성입니다. 웃고 떠들며 인간애를 느끼는 것 이상의 것. 즉, 그런 밝은 부분만이 아니라 '그림자의 냄새'도 미리 맡아보는 시간. 모든 동물들이 새끼 때 놀이를 통해 살아가는 법을 배우듯, 사람의 아이들도 놀이를 통해 삶의 그늘까지 예비하나봅니다.

고래가그랬어에서 나온 놀이 전문가의 사진집. 그 괴조합에서 나온 기대 이상의 성과. 어쩌면 09년 예술 분야에서 나온 책들 중에 가장 놀라운(가장 위대하다는 뜻은 아니지만요) 성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워낙 사진집이 안 팔리는 세상인데다 저자가 사진가도 아니다보니 잘 팔리긴 힘들겠다고 고백하게 돼서 슬프지만, 놓치지는 마시라고 권해 드립니다. 구입하지 않더라도(사장님 죄송합니다) 어딘가에서 만난다면 꼭 펼쳐 보시길.  

p.s: 문득 피씨방 알바시절, 피씨방의 오후를 점령하던 초등학생들이 떠오릅니다. 흥분하고 떠들고 때로는 권태로워하면서도 행동은 멈추지 않는 그 모습만은 아이들의 그것이더군요. 그 아이들은 단순한 놀이 결핍 세대가 아닌 웹 세대의 '뉴타입 칠드런'이 될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조세희(선생님)의 <침묵의 뿌리>가 사실은 모든 어린이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사북을 돌아다닐 때 만났던 아이들은 서울내기들보다 해맑았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의 삶과 겨루고 있었지요. <소꿉>과 <침묵의 뿌리>는 달라 보이지만 둘 다 선연한 투쟁의 기록입니다. 모든 아이들은 놀이를 하면서부터 세계와 맞서기 시작하니까요. 부디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게 맞서기를, 아무도 회의하지 않기를, 서로 비웃거나 조소하는 쉬운 유혹에 빠지지 말기를 바랍니다.

 

 

-새로 나온 다른 책들   

 

<처음 만나는 그림>은 예쁜 책입니다. 그림 읽어주는 블로그 '레스카페'에서 온 글과 그림들인데요. 단연코 이 책의 강점은 수많은 그림들!! 근/현대 화가들의 작품으로 짜여진 이 책에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화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이게 누구의 그림이든간에 참 예쁘구나' 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책의 제목이 참 잘 어울립니다. 낯설은 이름들이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그림들은 퍽 아름다우니까요. 텍스트도 어떤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그림 한 점 한 점을 앞에 두고 잔잔히 감상을 읊조립니다. 마음 편히 읽기 좋아요.

그림이 많이 등장하는 만큼 인쇄도 중요한데요, 아트북스의 컬러 인쇄는 퀄리티가 좋은 편입니다. 망점이 눈에 띄지도 않고, 반광 재질의 내지도 좋아요. 검정색을 제외하면 해상도도 좋습니다(근데 검정색은 고급 해외 예술 화보가 아니면 어느 인쇄물에서도 해결이 안되죠..). 

근래 나온 편안한 그림 에세이중에서는 가장 감칠맛나지 않나 싶네요. 사이즈도 소박하니, 휴가 지참용으로 쓰기에도 좋겠습니다. 아, 초판 한정으로 표지의 소녀가 담긴 노트가 같이 제공된다능.. 예뻐요. ㅎ

 

kuinjilunasb7.jpg 

책에 수록된 화가들 중 비교적 유명한 아르힙 쿠인지의 <드네프르 강의 달 밝은 밤> 입니다. 이걸로 피서 대신.. 

  

-우리는 이미 200년 전에 그려진 풍경화로부터 산업화가 인간과 자연의 격리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예고를 받았다. (p.253)

 <미술의 불복종>은 주로 권력 유착의 역사로 인식되는 예술사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불평등에 맞서며, 관습을 타파하고 현실에 저항하는 예술의 역사죠. 그렇다면 소위 '저항/민중예술'의 역사인가? 그것도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이 책이 다루는 것은 보다 포괄적인 의미의 저항이고 전위죠. 첫 꼭지가 '예술로써의 분수'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사실주의와 현실 재현 같은 인식론적인 문제, 계몽주의 시대에 접어들어 힘의 균형이 무너진 인간과 자연의 관계, 부터 폭압에 항거하는 (나치도 있고, 페미니즘도 나옵니다) 여러 종류의 저항 미술까지 다채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기존의 상식과는 약간 다른 미술의 여러 측면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그 내용이 어렵지 않고 특별히 어려운 용어도 거의 쓰이지 않았습니다. 미술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그 인식의 폭을 넓히기 위한 첫 도약대로 삼기에 적절한 책입니다.

 

(안돼 너무 길어졌어..) 

  

 

"젊었을 때 락키드가 아니었던 사람은 바보고, 늙어서까지 그걸 듣는 사람은 더 바보다." 응? 

뭐 어때요. 즐거우면 좋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역사도 좀 더 즐겁게 접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더위를 먹었는지 불면의 나날들입니다. 다음주는 호러 특집요.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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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치 2009-08-05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소개해주신 책들 다 흥미롭네요! 편해문씨 사진집은... 그러게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장바구니에 일단 담았습니다. ^^

외국소설/예술MD 2009-08-05 18:1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이 책을 전면에 딱 걸고 소개를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객관적인 퀄리티로 봤을 때는 다른 사진 책들도 많은데 말이죠. 걸작 아니고 문제작이라는 단어를 쓰긴 했지만, 이거 결국 제 리뷰가 가장 문제적인 게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ㅎ

그런데 애들 놀이는 다 비슷하더라구요. 어릴적 이런저런 놀이 하면서 자라온 분들께는, 이 책은 푼크툼의 성지입니다(ㅎㅎ).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가 아닌가 싶어요. 매우 드문, 소중한 주제니까요.

onesunnyda 2010-05-13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네프르의 강의 달밝은 밤...근사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게 무슨 복인지...감사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0-05-13 13:15   좋아요 0 | URL
네 처음만나는그림은 맘 편히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책이죠. 느긋하게 펼쳐 읽으세요. ^^
 

네오 팝아트적인(?!) 사진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어머, 다리 위에 누가 붙여놓은 판박이 스티커네요! 

  

 소개드리죠.

카메라를 가진 자에게만 열리는 숨겨진 작은 미술관, 

<브라이언 피터슨- 접사사진의 모든 것> 입니다. 

   

-여러분이 DSLR에 관심이 있건 없건, 소위 작품 사진이나 살롱 사진에 관심이 있건 없건 상관 없습니다. 아름다운 이미지를 직접 담아보고 싶지만, 그를 위해 따로 수많은 노력을 투자할 자신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오로지 카메라 한 대를 품고 다닐 수고로움과 이 세계를 지켜보는 반짝반짝한 눈만 있다면 무궁무진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찾아낼 수 있어요.

접사 사진은 사진이 발견을 기록하는 매체라는 사실을 가장 강렬하게 웅변하는 분야입니다. 오로지 바라보고 찾아보는 것뿐입니다. 일상 속에서 이미 수없이 봐 왔던 것들 속에서 패턴을 찾아내고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것이죠. 단 한 번의 셔터 찬스를 놓치고 가슴아파할 일도 거의 없고, 무거운 장비를 지고 산이야 들이야 돌아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천천히, 느긋하게 둘러보는 주위가 어느새 보다 신비롭고 흥미로운 곳으로 변해 있으니까요.

혹시 이런 기쁨이 여러분이 카메라를 살 때 원하던 것은 아니었나요? 

이 책은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그것을 기록하는 기쁨에의 증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좋은 사진 교재의 제1조건, 즉 멋진 사진을 보여준다는 명제를 충실히 이행한 거죠. 사실 이 책의 본문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카메라 하드웨어에 대한 지식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지식이 좀 부족하더라도 상관없어요. 정 부족하면 인터넷이 여러분을 도와드릴 겁니다. 중요한 건 책을 보고 난 뒤에 나도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느냐 아니냐죠. 판에 박힌 듯 지루한 접사 사진들을 보고 "뻔해빠진 아마추어 분야지" 라고 생각하셨던 분들도 이 책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창의적이고 아름다워요. 

익스텐션 튜브와 링 플래시, 고급 매크로 렌즈, 반사판과 대형 카메라가 (물론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괜찮습니다. 주말에 따로 시간을 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저 매일의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좀 더 찾아낼 수 있다면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질거라고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왜냐하면요. 풍경이나 다큐멘터리 등 각각의 사진 분야는 각기 다른 특성을 요구하는데, 그 중에서 접사 사진은 다른 어떤 사진들보다도 여타 '기술적 능력'보다는 관찰력과 감수성의 비율이 훨씬 높거든요. 접사 사진의 '결정적 순간'은 그저 자신의 마음이 뭔가를 발견하고 감탄하는 그 순간 뿐이니, 느리고 여유롭게 둘러보면서 그 기록을 남기는 것. 왠지 좋지 않나요 +_+

음...그래도 카메라가 없으면 바디 하나랑 렌즈 하나를 구입할 정도의 투자는 하셔야겠죠? -_-;;;

마침 올림푸스에서 예쁜 바디가 나왔... 

  

사실은 제가 갖고 싶어서... 

 

-그리고-

 

<여성과 미술>, 만나기 힘든 주제, 큼직한 도판, 멋진 작품들 - 이 책은 사실 나온지 좀 됐습니다. 이번에 특가 판매(30%)를 진행하다가 보게 된 책인데요.  미술 속에 등장한 여성들을 열 가지 코드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여신이나 여성 영웅 같은 고전적 주제부터 육체와 현실 정치에 대한 고찰까지 두루 잘 정리해 놨습니다. 여성성과 예술에 관한 책은 생각보다 보기 드문데요, 그 중에서도 이 책이 눈에 띈 이유는 특히 교양서로 읽기에 적절한 난이도를 갖고 있어서에요. 텍스트 깔끔하구요. 어떤 이론적 경향이나 정치적 성향을 깊이까지 추적하기보다는 테마와 각 작품들간의 상관관계를 해설하는 정도에서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여성성-예술에 관해서는 최소 준 학술서급에 속하는 책들이 대부분인데, 이 정도의 여성-예술에 대한 교양서가 있다는 건 참 반가운 일이죠. 

또한 교양서 수준의 책 중에서는 현대미술의 비율이 꽤 높은 편이며, 수록된 근/현대 작품들도 그저 난해한 것들보다는 독특한 임팩트를 갖고 있는 작품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견문을 넓히기에도 용이하고 작품 보는 재미도 좋아요(사실 요게 포인트일지도!). 책 크기도 큼직해서 그림 보는 맛이 괜찮구요. 여러모로 똑똑한 책이죠. 

쇠라의 [화장하는 젊은 여인] 그림 옆에 신디 셔먼이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진을 배치하다니. 앙큼하지 말입니다.

  

 

<떠돌이 감독의 돌로 영화 만들기>, 이상한 도큐멘트- 사실 이 책은 '책을 읽는 맛'은 덜합니다. 뛰어난 문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뛰어난 사진이나 그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 평범함이 책의 주제와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 있어요.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 동네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뚝딱 만드는 '동네 영화' 이야기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흥행/예술이라는 영화의 두 가지 공식 이외의 또다른 가능성이죠. 동네 영화에는 그 제작 집단 내의 소통과 유희로서의 가능성이 우선시됩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 안의 기쁨을 발견하고, 함께 참여한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하는 것.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는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만드는 영화라는 것. 이름을 다 써넣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찍힌 제작 과정 사진들과 그 사람들에 얽힌 이런저런 사연들... 때로 그 사연들 자체가 한 편의 영화같기도 합니다. 약간 어수룩한 느낌의 책, 그러나 그 냄새는 우리 삶에 바싹 접근한 영화가 풍기는 것이었네요.

  

 

 

<한국의 간이역>, 느리고 내밀한 여행자들을 위하여-교양 건축서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임석재 교수의 새 책입니다. 근데 제목만 보고 감상적인 기행문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돼요. 간이역 건물 하나에 할애한 수십 페이지를 읽다 보면 이게 '건축' 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박공 하나, 작은 기둥 하나까지 어느 하나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지요. 작은 간이역 건물 안에서 읽어내는 것들이 무궁무진합니다. 건축 유행의 변화, 환경의 영향, 설계자의 개성, 한국 건축 특유의 성향, 편의를 생각한 따뜻한 마음씨, 화단에 뿌려진 소박한 욕심... 사람들이 거의 신경쓰지 않는 저 작은 건물들 안에서 수많은 의미와 자취들을 발견해내는 저자의 꼼꼼함이 참 인상깊습니다. 

사실 일반 교양서로 읽기에는 너무 건축스러운(?) 얘기가 많아서 심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용한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이 책에 특히 공감하실 수 있을 거예요. 작고 오래된 공간에서 소소한 디테일들을 발견하는 재미, 조용히 거닐며 세상을 좀 더 자세히 훑어보는 여행, 작은 기차역을 중심에 두고 두어 시간을 돌아다니는 걸 이해하시는 분이라면 <한국의 간이역>의 꼼꼼함에 반하실 겁니다. 수십 페이지 분량으로 풀어놓은 작은 간이역들의 구석구석을 볼 수 있으니까요. 확실히 보기 드문 경험임에 분명합니다.

  

 

<미디어 아트- 예술의 최전선>, 최전선은 여러모로 치열하다- 근래 소개드린 책 중에 단연 최고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책. 현대 예술의 첨병인 미디어 아트 분야의 선두주자들과의 인터뷰집입니다. 고전 미학과 현대 미학, 심리학(특히 인지심리학)과 철학, 사이버스페이스와 메카닉에 대한 탐닉 및 그 생물학적 변용 등, 겉보기에도 짬뽕스러운 미디어 아트는 그 외양 못지않게 내부의 동력원도 정말 가지각색+하이브리드의 집합체죠. 

기술 지배의 시대에 바로 그 기술을 이용해 전위와 중심권력의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사실 정치적 분야에서 먼저 우리에게 알려졌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미디어를 이용한 민중의 역습-네그리의 다중론이 그 중심에 있죠. 그러나 미디어 아트는 담론이 아닌 직접 행동입니다. 새로운 기술의 힘을 사회 중심권력에 압수당하지 않고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으로 탐구하는 행동은 미학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작업이죠. 비록 순수한 탐구와 상상 -사이버스페이스와 호접지몽이라거나- 이라고 하더라도, 신기술에 대한 탈자본적 상상은 그 자체가 이미 불온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 특징이 바로 미디어 아트가 다른 기존의 예술들에 비해 갖는 차이, 즉 예술이라는 행위 자체가 기존 세계와 맞서는 '최전선'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죠. 

벤야민이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테크놀러지는 미학의 상상력에 변환을 가져오며, 그 기술적 패러다임이 변할 때마다 나타나는 새로운 미로 속에는 정말 다채로운 시도들이 펼쳐집니다. <미디어 아트- 예술의 최전선>은 그 격변하는 세계를 훔쳐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비록 절대 쉽지 않은 책이지만, 관심있는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래요.

(이 책을 읽을 수 있는지 아닌지 대강 체크하는 법. 벤야민의 [기계(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을 읽기가 너무 어렵다면 이 책도 나중에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차회예고. 렛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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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4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익. 예술의 최전선 이라는 말 좋군요. 어렵다시니 ...

외국소설/예술MD 2009-07-05 00:21   좋아요 0 | URL
미리보기로 먼저 살펴보세요. 초반만 읽어보셔도 감이 잡히실 겁니다.
 

 그야말로 여행 에세이의 홍수. 여행기가 이렇게 쏟아지는 이유인즉, '겨우 이 정도 이야기도 책으로 나오니까 당신도 잘 할 수 있을거야'라고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한 출판업계의 대국민 용기백배 캠페인. 일 리는 없겠죠. 어쨌거나 좋은 책은 그저 자기 때에 맞추어 나오게 마련입니다. 네. 근성 넘치는 한길사에서 이병훈 교수의 두 번째 러시아 기행문이 나왔습니다. 

 

<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 이병훈 지음 

 벤치 뒤로 볼품없는 들개 한 마리가 지나간다. 이름이 뭘까. 꽤 지친 모습이다. 먹을 걸 구하러 공원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검은 털이 듬성듬성 빠진데다 다리를 절뚝인다. 뒷모습은 영락없는 술주정뱅이다. 개는 구석을 기웃거리다 사내가 누운 벤치로 다가온다. 누워 있는 사내 몸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다. 먹을 게 아니다. 개가 물러가고 벤치 주위에는 잠시 고요함이 깃든다. 

p.322  

기행문에는 글쓴이가 해당 장소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척도가 있습니다. 곳곳에 얽힌 역사와 사연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어 보이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뽑아내는가죠. 이 두 가지 특징은 그 자체로도 좋은 정보가 되며, 그 풍요로운 발걸음과 숨길 수 없는 애정을 통해 책을 읽는 맛도 함께 안겨줍니다. <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잘 갖추고 있습니다. 유명 장소에서는 그에 얽힌 역사를 풀어놓거나 연관된 예술 작품을 소개하며, 틈틈이 거리와 공원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풍경들의 스케치도 빠지지 않습니다.

러시아 박물관을 소개하는 챕터를 볼까요. 기행문이 러시아 대표 화가들을 소개하는 장으로 바뀌고, 이는 또 그림들을 매개로 다른 예술 작품들을 하나둘 불러옵니다. 예를 들면, 1. 일리야 레삔에 다다라서는 까자끄 인의 호방함에 대해 얘기하다가 고골의 <대장 불리바>로 넘어갑니다. 2. 도부쥔스끼의 도시 풍경화 이야기는 곧 그가 삽화한 소설로 넘어가는데, 그 소설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죠. 이어 바로 <백야>의 한 장면이 인용됩니다. 주인공이 나스쩬까를 만나 들려주는 음울한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죠. 3. 제가 좋아하는 레비딴의 그림에는 '잘 어울리는 시'로 뿌쉬낀의 <비구름>을 수록했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이 딱딱한 인물 소개보다 훨씬 '여행가'의 흥취에 걸맞는다고 생각해요. 보고 떠오르고 느끼는 것. 연상의 연속. 여행자들을 위한 책은 이런 방식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의 인상이 다른 것들을 불러들이고, 그것들이 겹쳐 풍부한 양감을 안겨주는 경험 말입니다. 산책을 하더라도 라스꼴리니꼬프의 발자취를 떠올리며...(네, 알라딘의 로쟈 님이 아닙니다 ㅎㅎ)

가끔 뜬금없이 고골이나 뿌쉬낀의 1인칭 시점이 되어 글이 진행되기도 하는데, 이것도 나름 재밌습니다. 중년 학자다운 여행자의 치기어린 몽상이랄까 로망스랄까 ㅎㅎ. 사실 이 책은 미스테리 기행문이기도 합니다.;;; 소냐라는 정체불명의 여성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남자의 이야기거든요. 물론 정말로 저자가 여자의 환상을 보거나 뿌쉬낀이 빙의되지는 않았겠지만, 이 '업된 기분'만큼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행지에 가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아시겠죠. "마치 나도 뿌쉬낀이 된 것 같았다"라고 쓰는 것보다는 멍하니 공원에 앉아 자신이 뿌쉬낀이 된 양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쪽이 훨씬 여행자다워 보이니까요. 아무래도 이런 감상적인 부분들은 박학다식한 해설의 매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저 솔직하고 대책없는 멜랑콜리는 단순히 1차원적인 기분만 늘어놓은 평범한 여행기의 소회들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아, 읽을 때 주의하실 점이 있어요. 이 책을 가이드북으로 써먹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기행문의 리뷰들을 보면 그런 얘기가 많지요. 실질적으로 여행에는 도움이 안된다거나 운운. 비록 최근 국가 대세가 실용이긴 하지만, 가이드북도 아닌 기행문에다가 왜들 그리 실용을 원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장 그르니에 책에는 그런 리뷰 없던데... 어쨌든 가이드북을 원하시는 분들은 패스.

문학, 그림, 음악(쌍뜨 뻬쩨르부르그 필하모닉이랑 차이코프스키가 한 챕터를 차지합니다) 등등 각종 예술을 사랑하시는 분들께 문화의 도시 뻬쩨르부르그의 매력을 알려드릴 책입니다. 별다른 가이드도 가이드북도 없이 여행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길잡이 역할까지 맡아줄지도 모르지요. 아마 제가 뻬쩨르부르그에 가게 된다면 이 책 한 권 들고 가지 싶습니다. 저도 오레쉐끄의 요새 구석에 앉아 이 책에 함께 소개된 가르쉰의 <붉은 꽃>을 읽고 싶어요.

그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고, 사물의 내력을 남김없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병원 뜰의 커다란 느릅나무는 지난날의 갖가지 전설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실제로 꽤 오래전에 지은 이 건물을 그는 뾰뜨르 대제의 건축물이라고 생각했고, 대제가 뽈따바 전쟁 당시에 이곳에서 살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뜰에서 발견한 허물어진 벽과 벽돌, 타일 조각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거기에 건물이나 정원의 역사가 낱낱이 씌어 있는 것이었다. (...) 그는 시체실 지하실에서 마당 한구석으로 나 있는 작은 창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무지갯빛이 나는 낡고 더러운 유리에 비치는 흩어진 빛의 반사를 통해 언젠가 살면서 혹은 초상화에서 본 적이 있는 낯익은 모습을 발견했다. 

p.478 (가르쉰의 <붉은 꽃> 중 일부) 

 

 또다른 주목할만한 신간들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우리에게도 멋진 (근현대) 미시사 책이 있다면! 이라고 외치시는 분들께 이 책을 뒤늦게 소개드려 죄송하다는 말씀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1세대 아파트들이 품고 있는 근대성의 내외를 탐색하는 시선이 교양서의 수준에서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이제 대부분이 사라졌거나 곧 사라질 예정인 1세대 아파트들에게서 발견하는 특성들은 곧 서울 근대화의 흔적으로 치환되는데요. 재미있는 점은 그 특징들이 아파트마다 제각각이라는 겁니다. 주로 일방적이고 획일화된 과정으로 기억되는 산업 근대화의 시기에 얼마나 다양한 색깔과 변용이 있었는지, 그 디테일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미시사의 미덕이겠지요.  이 1세대 아파트 이야기는 어느새 단순한 건축사가 아니라 서울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역사의 흐름, 주민들의 계급과 살아가는 방식 등이 함께 어우러진 묘한 잔치판으로 변해 있습니다. 도시 근대화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 즉 '삭막한 획일화'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삶'이 보여집니다. 강력히 추천드리는 바, 사진들도 멋지게 찍어 놓아서 보기에도 좋아요. 이 책이 제일 위에 소개되지 못한 건 순전히 타이밍을 놓친 제 탓입니다...

<김시광의 공포 영화관>- 호러물 리뷰로 유명한 파워블로거 김시광 씨의 공포영화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영화들은 대개 이름이 있는 영화들이고, 각 꼭지가 짤막한데다 내용도 쉬운 편이어서 매니아분들은 불만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훌훌 넘어가는 공포영화 이야기라니 방앗간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들의 수효는 제법 많을 걸로 예상됩니다. 특히 입문하시는 분들께는 좋은 가이드북이 되겠네요. 영화를 골라 소개하는 본편 외에 호러물의 간략한 역사나 저자가 뽑은 명감독들, 걸작 100선 등의 보너스(?)들도 흥미로워요. 여러모로 '무서워하고 웃고 떠들고 즐긴다'의 모토에 걸맞는 즐거운 공포영화 탐방기입니다. 남녀노(소는 안됩니다. 19금 많음) 모두 즐기실 수 있어요. 간만에 어깨 힘 뺀 책 소개드리는 것 같네요.;; 

<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비평집...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여타 국내 비평가들의 한국 미술 담론에 비하면 어딘가 사적이고 내밀한 느낌이 있습니다. 글쎄요 딱 집어서 얘기는 못하겠습니다만, 메타 비평(이는 곧 자기집단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니까요)에 대한 글이라거나, 최근 미술계의 경향에 대한 분석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론이라는 도구로 각 작품의 개별적 분석에 임하기보다 작가의 어떤 경향이나 흐름을 추적하지요. 이는 곧 '누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접근입니다. 하여 현대미술을 억지로 '고전미술처럼 관람 가능한 것'으로 해설하려 하기보다는 그 작업들을 하나의 관점과 태도의 결과물로 설정함으로써 작가와 독자/관객과의 대화를 시도하게끔 하는거죠. 최근 나온 그 어느 현대미술 책보다도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많이 거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가 아닌가 합니다. 제목의 센스는 아직도 의문이지만(-_-;;), 추천할 수 있는 '지금 여기'의 예술 시론입니다. 

<아티스트를 위한 멘토링>-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책. 이 아닙니다. 책 도입부에 피카소가 라스코 고분 벽화를 보면서 "우린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라고 읊조렸을 때, 거기에 함께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셨다면 책을 읽는 내내 거장들의 높은 세계를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플지도 몰라요. 굳이 결론을 찾자면 하나가 있습니다. 성공하느냐 마느냐 하는 방법론은 각자 천차만별이지만, 창작에의 욕구는 거의 숙명인양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것. 보고 있으면 거의 신내림 수준입니다. 결국 뭔가 실질적인 도움을 받으려고 이 책을 펼치신 분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각각의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수많은 천재들이 막판에 떼창으로 한다는 얘기가 그러나 우리는 해야만 했지 라니요! 그러나 여기서 기운이 빠지면 안됩니다. 아직 꿈꾸고 있다면 신내림의 그날까지 준비해놓을 것들은 산더미처럼 많으니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책은 예술가 지망생들을 위로해주는 책이 아닙니다. 각성의 순간이 오건 오지 않건, 그날을 대비해서 자신을 구석구석 훑고 끝없이 정진하기를 요구하는 과제집입니다. 노력하는 사람이 늘 성공하지는 않지만, 성공한 사람이 노력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빌 게이츠였던가...

 

광고말씀- 단독 이벤트! 알라딘에서 영화 책 아무거나 한 권 사실 때마다 인디스페이스(중앙시네마)에서 실시하는 중국 독립영화전 티켓을 한 장씩 드립니다. 친구랑 가시려면 두 권 사시면 돼요. 타르코프스키, 트뤼포, 히치콕, 짐 자무시, 코엔 형제 등의 감독들은 물론이요 수많은 영화사 책들과 시나리오와 기타등등에 대한 책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저 찬스라는 말씀밖에는... 

 

곧 여름입니다. 지쳐 쓰러지기 좋은 계절이지요. 누나 가슴에도 삼천원 쯤은 있는거지만, 겨우 그런 것에 흔들리지 말고 혼을 붙잡으세요. 아니면 예술에 대한 책 한 권 끼고 전시회에 가보는 겁니다. 퀄리티는 제각각이지만 열정만큼은 다들 보장할 만하니까요. 끼고 가실 책 구매는 알라딘에서 하시고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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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6-17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오늘도 추천입니다! 누나 가슴에 삼천원, 으흐흐.

외국소설/예술MD 2009-06-17 14:57   좋아요 0 | URL
고민이 많았어요. 해설을 따로 달아야 하나 하고..^^;;

흐느적 2009-06-17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단독 이벤트 멋진데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중국독립영화전이라니요. 아하하하;;

외국소설/예술MD 2009-06-17 14:5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보러 갈겁니다 ^^

futile_reading 2009-06-24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로쟈님인줄 알고 들어와봤다는... 잘 낚으시네요..ㅎㅎ

외국소설/예술MD 2009-06-24 17:22   좋아요 0 | URL
화려한 제목은 필수.. 일까요?(흠흠) 그런데 의도/음모에 넘어간 분은 아무래도 별로 없나봅니다 ^^;;

느린산책 2009-06-2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찜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6-26 11:31   좋아요 0 | URL
그저 뿌듯합니다. +_+

일년열두달 2009-07-07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모스크바 갔다 왔는데 페테르 갈땐 이 책을 보고 가야겠군요! 누나 가슴에 삼천원...ㅋㅋㅋ

외국소설/예술MD 2009-07-08 13:11   좋아요 0 | URL
모스크바~ 부럽습니다!! 저도 꼭 가보고 싶어요. ^^
 

 

농담삼아 그의 기행문들을 하드보일드 여행기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서경식 선생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 아닙니다. 글이 어려워서는 아닙니다. 비록 번역문이긴 하나 문장은 깔끔한 편이고, 형이상학적인 용어도 잘 사용되지 않죠. 특히 <나의 서양미술 순례>나 <디아스포라 기행>처럼 기행문의 형식을 겸한 경우에는 그 자신의 감탄마저 조절하고 있습니다. 고저차가 느껴지지 않는 일관적인 글투. 야간 저공비행. 이 책은 단 한 순간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을 관통한 증거들을 살피는 그의 시선에서는 쉽게 흥분할 '수 없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아 온 사람 특유의 담담함만이 엿보입니다. 여기에서는 희망조차 어떤 가능성의 일부일 뿐입니다. 무너져내린 것들은 분명한 과거인 데 반해, 희망은 불완전한 담보에 불과하니까요. 보이는 것들만을 믿기에도 힘든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니, 있었다고 합니다. 


<꽃들과 함께 있는 폭탄 구멍> by 오토 딕스 

소위 '전쟁 제단화'로 유명한 오토 딕스가 가장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어져 있습니다. 양차대전 사이에 자신의 시대와 싸워야 했던 독일권 화가들이 등장합니다. 우물쭈물하면서 사랑하는 고국을 버리지 못한 사람도 있고(에밀 놀데), 보란듯이 망명한 사람도 있고(조지 그로스), 1차대전 때 수 년을 복무한 뒤 다시 쉰이 넘어 2차대전에 징집된 사람도 있으며(오토 딕스), 이어지는 망명과 도주 끝에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한 유대인도 있습니다(펠릭스 누스바움). 이들이 등장하는 1부는 일관된 분위기가 유지됩니다. 독일-유럽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죠. 

흥미롭게도 이들 화가의 뿌리로 서술되는 두 화가는 카라바조와 반 고흐. 거부할 수 없는 내면의 열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점에서, 앞서 소개한 비극적인 시대의 화가들의 선배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컨셉트는 (비록 흥미로운 점이 있더라도) 어두움을 방문하는 저자의 단정한 태도만큼 인상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는 경악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지켜본 것들을 옮겨 씁니다. 경악스러운 것들조차 스러진 뒤에 그 땅을 밟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는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피곤해 보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피로야말로 역사에, 그 순간에, 어떤 진실에 가까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도자료와 언론 서평에는 주로 이 책을 어떻게/왜 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근대사의 특수성, 더불어 한국 (주류) 미술의 몰정치성과 같은 써먹기 좋은 주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진가는 그 분위기에 있지 않을까요. 역사가 주는 피로를 저버리지 않은 사람의 무덤덤함. 저는 근래 이렇게 인상적인 '참조' 안내 문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첫번째 사진(331쪽 맨 위)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우크라이나에 있던 어느 장소이다. 구덩이를 파서 유대인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고 있는 영상이다. 물론 보도사진은 아니다. 이런 장면을 보도하는 일을 나치는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영상은 나치 측의 누군가가 다른 목적으로 찍은 것이다. 기록을 남기기 위해 찍은 것이거나, 아니면 일종의 도착된 취미 때문에 찍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사진(331쪽 두번째)은 라트비아의 리예파야라는 장소에 집단으로 끌려온 유대인 여성들이다. 그녀들로부터 벗겨낸 옷들이 뒤로 산적해 있다. 그리고 총을 든 군인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이제부터 죽임을 당할 사람들이다. 죽임을 당할 운명을 예감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나란히 세워놓고 기념촬영을 했다. 누가 무슨 의도로 사진을 찍은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절망적일 만큼의 상상력을 요구하는 사진이라 생각된다. 

한가운데에 있는 여성의 얼굴로 알 수 있듯이, 앞의 사진에 찍힌 여성들이다. 마지막 속옷 한 장마저 벗고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331쪽 세번째 사진 참조) 

이 여성들이 죽임을 당할 구덩이 쪽으로 떠밀려 가고 있는 장면이다.(331쪽 네번째 사진 참조) 

구덩이 가장자리에 서서 당장에라도 사살될 듯한 사진이다.(331쪽 맨 아래 사진 참조) 구덩이 안에는 총에 맞은 시체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라트비아의 리예파야라는 지명만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현재 리예파야에 이런 사건을 기억하는 이가 있을 리 없다. 구덩이는 흙으로 덮여 아직도 그대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p.330-332

 

 <돌격대 독가스 공격> by 오토 딕스

 

 다른 신간들은 금주 내로 다시 소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함께 추천드리는 책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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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소스 2009-06-13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에서 서평봤는데 그 보다 이쪽 글이 훨씬 맘에 듭니다.
꼭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외국소설/예술MD 2009-06-15 13: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신문의 글쓰기보다는 자유롭다보니 그런 것 같아요. 앞으로도 매체 서평하고는 조금씩 다른 분위기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

김현미 2009-06-17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좀 가져가도 될까요? 출처는 밝히겠습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6-17 14:55   좋아요 0 | URL
네 문제없어요. 대신 추천 하나 찍어주세요 하하

책사랑(지현) 2009-06-1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하나 찍고 가져갑니다. 얼른 주문도 마쳤답니다. 감사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6-19 18:10   좋아요 0 | URL
제가 감사드릴 일이죠. 감사합니다. ^^
 

 

 

...그중 한 사람이 말해. "나는 점점 아버지처럼 되고 있어. (중략)"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해. "나는 점점 아버지와 [다르게] 되고 있어. 나는 개가 되고 있어. 미래는 아마도 나를 추하게 만들 것이고, '가난한 생활'이 내 운명이야. 그러나 나는 인간이든 개든, 화가가 될 거야. 요컨대 감정을 가진 존재가 될 거야." 

...나는 너에게 말해. 나는 앞서 말한 개의 길을 택했다고. 나는 계속 개일 것이고, 가난할 것이며, 화가일 거야. 

p.296-297  

 

반 고흐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르는 길. 

  

반 고흐의 서간집이 나온다는 얘길 들었을 때는 좀 의아했었습니다. 이미 한 차례 열풍이 쓸고 지나간 자리니까요. 특히 예술 분야에서 한 번 유행을 탔던 주제는 좀처럼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법이어서, 출판사에서 뭘 믿고 이런 작업을 했나 싶어 (관계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_-;;) 제본 안된 본문을 훑었습니다. 

아, 이 정도였나? 반 고흐의 글이 이렇게 가열찬 느낌이었던가. 기존의 고흐 서간집들과는 달리 구어체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아니면 발췌가 아니라 전문이 수록된 편지들이기 때문에? 아니면 직접 편지를 선별해 엮고 번역하고 해설까지 꼼꼼하게 첨부한 박홍규 교수의 열정 때문에?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책의 구성이 반 고흐의 삶을 청년기부터 시간순으로 그려가고 있고(반 고흐 서간집 전집을 계획하고 있다는 박홍규 교수의 해설은 상당한 열의가 엿보이며 내용도 충실합니다), 거기에 반 고흐 자신의 목소리가 직접 그 사실들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마치 해설과 재연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듯이요. 필름이 아니라 글로 남은. 

실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반 고흐의 편지라고 하면 유명한 '돈 구걸' 이야기는 여기에서는 그저 생활의 일부로밖에 보이지 않아요. 추신 같은 거죠. 대신에 편지의 본문은 

정경들-저 순진한 영탄법들,

 사랑하는 테오, 안트베르펜의 인상을 좀 더 전하고 싶어... 이곳에선 무엇이나 그릴 수 있어... 방수 천으로 덮인 상품들이 산처럼 쌓인 한구석에 흰말이 한 필 있더구나. 배경은 창고의 낡고 검은 연기로 그을린 벽이야. 정말 단순하지만, 흑과 백의 효과가 너무 분명해. 

정말 우아한 영국 풍 선술집 창을 통해 가장 더러운 진창이 보이고, 배 위로는 모피나 물소 뿔 같은 매력적인 상품이 기이해 보이는 항만 노동자나 이국적인 뱃사람 손으로 내려지고 있어. 매우 아름답고 정말 섬세한 영국 소녀가 창 앞에 서서 그것을 바라보거나,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고, 실내와 인물은 모두 명암이 분명하고, 빛으로는 -진창과 물소 뿔 위에 은색 하늘이 있어서- 일련의 대단히 격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지. (중략)

...지칠 때쯤이면- 하위치Harwich나 르아브르에서 온 기선들이 정박하고 있는 선창 끝까지 가게 돼. 시가지를 등지고 있는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어. 있는 것이라고는 평탄하고 반쯤 물이 찬 무한한 목초지뿐이야. 너무나 우울한 곳으로 습하고, 굽이치는 마른 갈대와 진창이 전부야. 작고 검은 보트 한 척이 떠 있는 강, 회색 물, 안개 낀 잿빛 하늘, 사막 같은 적막. 

p.363-365  *('...'은 단락 내 중략을 뜻합니다)

 

그림(누구의 것이던간에), 

귀하에게 드리는 습작은 여름 태풍이 부는 날, 밀밭 구석에 있는 나무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환류하는 대기의 파란색 속에 있는 일종의 검은 형세입니다. 그리고 양귀비의 주홍색이 그 검은 형세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뒤에 보실 테지만, 이는 녹색,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검은색 바둑판 무늬의 아름다운 스코틀랜드 직물의 색조 조합과 다소 가깝습니다.

p.743 

어제 저녁, 나는 숲에서 썩어 말라버린 너도밤나무 잎으로 덮인, 약간 경사진 지면 위에서 그림을 그렸어... 문제는, 정말 어려운 문제는, 지면 색깔의 어두움, 그 지면의 거대한 힘과 견고함을 표현하는 거야.  

(중략) 그것을 그리기는 너무 힘들더군. 지면은 매우 어두운데도, 그걸 그리는 데 튜브 한 개 반을 썼어. 그 밖에 빨강, 노랑, 갈색, 황토색, 검정, 시에나 황갈색을 쓴 결과는 적갈색이었어. 그러나 흑갈색에서부터 짙은 와인색이나, 도리어 희미한 황금색을 띠는 빨간색으로 가는 도중이었지. 그래도 아직 이끼와 빛을 받아 밝게 반짝이는 싱싱한 풀밭의 경계를 그리는 일이 남아 있었는데 정말 그리기 힘들었어.

(중략) 이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에게 말했어. 즉 작품에 가을 석양의 느낌, 신비로운 느낌, 진지한 느낌이 나타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그러나 그 효과는 시간적으로 영속하는 것이 아니므로 서둘러 그려야 했지. 인물은 모두 몇 번의 견고한 붓질로 단숨에 그렸어. 어린 나무들이 대지 위에 어찌나 튼튼히 뿌리내리고 있는지 정말 감동했어. 그 둥치를 붓으로 그리기 시작하면서, 지면을 이미 두껍게 칠해두었기 때문에 간단한 붓질로 나무들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게 만들었어. 뿌리와 줄기는 튜브에서 물감을 짜내면서 바로 모양을 만들고, 약간의 붓질로 다듬었을 뿐이야. 

(중략) 어떤 의미에서 나는 유화 그리기를 배우지 않았던 것이 좋았다고 생각해. 

p.256-258

그리고 -특히 폴 고갱과의- 우정, 수많은 예술 작품들에 대한 감상 또는 비평("그림에서 성취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보다 이전에 베를리오즈나 바그너가 음악에서 이미 달성한... 슬픔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는 예술을 만드는 것이네!"), 사회와 세계에 대한 정치적 입장, 먹고 살기 위한 구차함...  마치 그가 보고 듣고 느낀 삶의 정수를 옮겨놓은 듯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그 모두를 집어삼키는, 그 자신조차 어쩔 수 없는 강렬한 의지가 있지요.

자.. 그렇다면 마지막 인용을 어디서 가져올까요. 그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는, 거의 그의 유서처럼 취급받는 907번 편지(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져 있습니다)의 유명한 문구, "내 그림, 나는 그것에 생명을 걸었고 내 이성은 그것으로 반은 무너져버렸구나." 로 할까요. 

오늘만큼은 다른 걸로 해 보겠습니다. 죽기 4년 전, 아직 청년이라 할 수 있던 '순진한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반 고흐가 잠시 살폈던 세계입니다. 

오늘 일요일은 거의 봄날이야. 오늘 아침 혼자서 공원과 대로를 비롯하여 도시 전체를 오래 산보했어. 만일 시골이었다면 종달새가 처음으로 노래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날씨야. 

요컨대 부활의 기운이 느껴지는 무엇이 있었어. 그러나 상거래라든가 사람들 모습은 침체해 있고, 나는 최근 여러 곳에서 터진 쟁의행위로 염세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야. 

앞 세대에게 그것은 무익한 게 아니라 반대로 승리라는 점이 분명해질 거야. 지금은 모든 사람이 노동을 하여 빵을 얻어야 하는 괴로운 시절이야. 매년 더 악화되겠지. 부르주아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200년 전 제3계급이 다른 두 계급에 저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해. 지금 최선의 길은 침묵을 지키는 거야. 왜냐하면 운명의 여신은 부르주아 편을 들지 않을 테고, 우리는 곧 그것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므로 봄이기는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프게 방황하고 있는지! 

p.387-388 

봄이기는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프게 방황하고 있는지. 바뀌지 않는 것은 작품만이 아니라 언제부턴가의 이 세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턴가가 아니면 처음부터였을지도 모르지만요. 

700여 페이지의 두툼한 분량, 깔끔한 양장 사철 제본,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해설과 각주가 달린 '서간문을 통한 전기'. 여러모로 추천해 드립니다. 초판본에는 책에 수록된 반 고흐의 스케치를 담은 작은 스케치 연습장이 함께 제공됩니다.

  

 

-MD가 뽑은 또다른 네 가지의 반 고흐

 

 

 

 

 

 

 

 

<반 고흐 효과>는 치밀하게 짜여진 '사회학' 책입니다. 무명 화가였던 반 고흐가 사후에 어떻게 '불운한 천재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고 그 후광을 키워가게 되었는지에 대해 대중 메커니즘-사회 시스템을 통해 접근하고 있죠. 대중들이 알아보지 못한 천재에 대한 죄책감을 대속적 발상을 통해 추앙하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그 대속 과정은 어떤 진실을 재발견하는 것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고, 불운한 천재에 대한 급격한 발상 전환을 통하여 집단적인 카타르시스-그리스류 비극 관람에 가까운-를 얻는 데 1차적인 목표가 있죠. 말하자면 반 고흐 효과는 반 고흐라는 실체를 어떻게 재발견하느냐 하는 기능적인 effect가 아니라 심리학적인 증후군에 가까운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반 고흐를 아이콘으로 추앙하도록 만든 각종 권력들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도 함께 포착되어 있습니다. 다소 난이도가 있으며, 문장도 좀 난해한 편이지만 충분히 감내할 가치가 있습니다.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는 소설 형식을 빌어 온 전기인데요. 아마 반 고흐 관련 책들 중에 가장 유명한 책일지도 모르겠네요. 1934년에 출간되어 고전 대열에 속하는 책으로, 팩션 소설들의 할아버지쯤 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불운한 천재 예술가'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비극과 열정의 뒤범벅을 보여줍니다. 소위 고전적인 반 고흐론이라고나 할까요. 일반에 잘 알려진 바로 그 반 고흐인데, 학술적으로 그의 '실체'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더라도 그 전체적인 삶의 궤적이 감동적인 것만큼은 변함이 없나봅니다. 최승자 시인의 번역은 감성적인 글(리차드 브라우티건의 <워터멜론 슈가에서>라든가)에서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 책에서도 그 격앙된 낭만을 잘 옮겼습니다. 

<반 고흐 명작 400선>은 말 그대로 반 고흐의 그림을 수백 개나 수록하고 있습니다. 소위 유명 그림들은 물론, 스케치와 습작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이 함께 실려 있어요. 반 고흐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그의 전기를 읽을 때 함께 두고 읽기에 더없이 좋은 '비주얼 가이드북' 입니다. 물론 그의 후기 작품들이 어마어마한 위업을 달성한 건 맞지만, 초중기 (특히 네덜란드를 떠나갈 무렵) 작품들의 색채 구성을 통해 인상파-야수파의 태동을 예감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입니다. 특히 마로니에북스는 Taschen 시리즈를 낼 때도 그렇고, 그림의 인쇄에 있어서 믿을만한 출판사죠.

<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는 접근 불가능한 천재가 아닌 '고뇌하는 인간' 고흐를 분석합니다. 특히 다른 책들이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부분, 바로 그의 소년기와 청년기를 장악했던 종교적 관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종교적 열정이 고흐의 세계관 속에 사물에 대한 감수성과 영원에 대한 추구, 평등과 박애에 대한 관심을 박아넣었다는 거죠. 실제로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 뒤에도 그의 편지에는 성경 이야기나 성서의 문구 인용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이 책은 그러한 종교적 열정이 반 고흐로 하여금 자신의 수난을 감내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고, 그림의 화풍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소위 '반 고흐 효과'에 경도된 책들이 고흐의 후기 작품들을 정신분열증의 창조적 폭발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를 비판하면서(반 고흐의 정신분열증 설은 그가 비극적인 영웅으로 추앙된 뒤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가 단순히 측두엽 이상에 의한 간질 발작을 겪었을 뿐, 그의 그림은 언제나 그의 삶이 일관되게 추구해 온 가치를 이루어내는 과정이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삶의 비극을 천재성으로 뛰어넘은 영웅 대신에 영원히 자신의 굴을 파고 있었던 '영원한 근성의 수도승'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난이도는 <반 고흐 효과>보다 쉬운 편입니다.

 

글이 길어져서 다른 신간들은 또 다음 시간에 찾아들고 뵙겠습니다. 행복하신 분들은 계속 행복하시고, 행복하지 않은 분들은 행복해지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망각을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진실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니까요. <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나 <반 고흐 효과> 같은 책들이 빛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p.s.

써놓고 보니 반 고흐에 관련된 책 중에 가장 좋아하는 책을 빠뜨렸네요. 

불꽃같은 그림에는 불꽃같은 글이 가장 어울리지요. 앙토냉 아르토의 고흐에 대한 단상은 번역문인데도 불구하고 자기확신에 가득찬 언어의 압도적인 위력을 선사합니다. 그야말로 여름 햇볕처럼 작열하는 언어의 향연에 흠뻑 젖게 되죠.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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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9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9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체오페르 2009-06-01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는 것만으로도 보고 싶은 마음이 막 피어오르네요.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6-02 20:30   좋아요 0 | URL
그저 제가 감사드릴 일이죠... 좋은 책만 고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_+

roar 2009-06-1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저도 사서 보았답니다. 감사드려요!

외국소설/예술MD 2009-06-10 13:46   좋아요 0 | URL
마음에 드셨나봐요. 영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