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순간 - 느린 걸음으로 나선 먼 산책
윤경희 지음 / 앨리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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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휴가철이라서? 아니면 그저 일상이 지겨워서?
정확한 이유는 사실 잘 모른다. 아마 누구도 모를 것이다. 

그렇게 밥벌이를 위한 노동을 접고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던 월요일, 이 책을 봤다. 
'여행의 순간' 이란 명쾌하면서도 모호한 단어의 조합
다홍색 스커트와 과감한 커팅의 표지 사진이 한눈에 확 들어왔다. 예뻐서. 

'도쿄 런던 브라이튼 파리 니스 뉴욕 방콕을 다녀왔다고?
많이도 다녔구나. 가만 있자, 내가 가본 데가...도쿄밖에 없구나.
근데 다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도시로군.'
쭉 훑어보다가
'순하게 마음이 녹는다'라는 문장과, 
고요함을 넘어서 어떤 평온함이 느껴지는 창문 사진을 보고선, 책장 넘기는 걸 멈췄다. 

순하게. 그래 나한테 필요한 건
순하게 마음을 녹일 수 있는 시간이다.
아, 내가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꾸 하는 건
일상의 짐을 내려놓고, 머릿속을 텅 비우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을 보내고 싶기 때문이구나.

<여행의 순간>의 지은이는 어딜 가건
대부분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혼자서 어슬렁 거리를 걷고,
아이들 노는 놀이터에도 가보고,
좋아하는 물건들이 잔뜩 있는 잡화점에서 쇼핑도 하고,
시장에도 가고, 지치면 카페에서 쉬고,
여유가 있으면 서점에서 책도 보고,
운 좋으면 친구도 만들고.   
 
내가 누리고 싶은 여행 역시 이런 것이다. 
부제처럼 느린 걸음으로 먼 산책을 나선 기분으로
그곳이 도쿄건 런던이건 파리건
이것도 보고 저것도 봐야 해,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사야 해
이런 생각 없이 그냥 천천히 거닐다 오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들었다. 

하긴, 나는 지금 어디로든 가긴 가야 할 것이다.
떠나서 쉬지 않고선, 일상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진 바로 지금, 이 더운 여름,  
잠깐이라도 쉬는 시간을 가지며 '여행의 순간'을 누리고 싶어진다. 

 이 책이 이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건
지은이의 매력적인 사진의 힘이 큰 것 같다.  
소소한 일상을 담은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뭔가 보는 눈이 남다르다.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지은이는 다른 걸 포착해내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도시는 다르지만, 그녀가 잡아내는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은
별로 다르지 않다. 그건 생각해보면 대단한 능력이지 않나 싶다.
책 디자인 역시 사진을 보는 데 방해됨이 없이 정갈하고 깔끔하다.
요란하지 않고, 시끄럽지 않아서 참 좋다.
오랜만에 정말 자꾸 들여다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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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 빈센트 반 고흐 편지 선집
빈센트 반 고흐 지음, 박홍규 옮김 / 아트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과연 그렇다. 어느 누가 이렇게 쉼없이, 열정적으로 편지를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싶다.

빈센트 반 고흐의 속내를 알고 싶다면,

그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그림을 보았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느끼고 싶다면 역시 그가 남긴 편지를 읽는 것이 제격이다.

 

내용을 보니 빈센트가 평생 남긴 편지는 무려 909통에 달한다고.

거의 천 통인 셈이다. 그 중 가장 편지를 많이 나눈 사람은 당연히

그의 동생 테오이다. 이 책은 테오 외에도 고갱이나 베르나르 등의 친구,

여동생과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들 중 골고루 솎아서(빈센트를 알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편지들로 골랐다고) 125통을 담고 있다.

125통. 이 또한 대단한 숫자다. 그래서 이렇게 책이 단단하고 두툼한 모양이다.

 

책을 읽다 보면 그림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빈센트가 어떻게 생활을 했는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종종 등장한다.

그 부분이 또 은근히 재미있다.

생활비를 얼마로 줄였으며, 올해에는 속옷과 구두를 장만하고 싶다거나

누군가의 그림을 보았는데 그게 정말 훌륭하더라거나 등등.

이처럼 빈센트의 속마음과 생활을 훤히 들여다보는 느낌,

이것이 그의 편지를 읽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옮긴이의 해설도 매우 유용하다.

편지를 쓰던 당시 빈센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어떤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정확히 짚어주고 있다.

양이 워낙 방대해서 빈센트의 편지를 읽다가 뭔가 아, 이때 빈센트가

뭘 하고 있었더라 하고 갸우뚱해질 즈음 하나씩 해설이 등장한다.

 

아무튼 이 책은 한 번에 일독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양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것저것 곱씹으면서 볼거리가 많은 덕분이다.

시기별 스케치와 편지 원본 등의 화보는

책장을 넘기면서 지치지 않게 해준다.

천천히 조금씩 빈센트와 매일 만나는 기분으로 읽으면 딱 좋을듯.

책을 보면 볼수록 빈센트가 테오에게 한 말

"아름다운 것에 충분히 감탄'하면서 살라는 말이 맴돈다.

빈센트는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는 눈이 너무 밝아서,

신념과 집념이 너무 강해서, 그리 아프게 살다 간 것일까.

특히 부모님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빈센트가 했던 생각들은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집에 들이는 것을 덩치 크고 털 많은 개를 집에 들이는 것처럼 꺼리시지. 젖은 발로 드나들 게 분명한 그 개는 너무 더러워 모두에게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짖는 소리도 시끄럽지. 요컨대 더러운 짐승이야. 그래, 좋아. 하지만 그 개에게는 인간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어. 한 마리 개라고 해도 인간의 영혼을 가지고 있어. 게다가 보통 개가 갖지 못한 예민함도 있어서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느끼지. 나는 자신이 일종의 개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그들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이런 대목을 보면 빈센트가 평생 안고 가야 했던

열패감, 좌절과 고독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광기에 사로잡힌 천재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생활인이요, 언젠가는 인정받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보통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나는 이 부분이 가장 신선했다. 요절한 천재화가요, 드라마틱할 정도로

불운으로 일관한 삶으로만 알려졌지만,

빈센트의 매일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 식사를 줄이고,

화구를 이끌고 들판으로 나아가 노동하듯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지친 몸으로 돌아와 편지를 쓰고.

그렇게 그는 세상에 다시 없을, 아름다운 편지를 남겼다.

 

 

*이 책을 읽은 김에 최근 산울림소극장에서 하는 연극

<우리, 테오와 빈센트 반 고흐> 을 보았다.

사전지식이 있는 상태로 보았더니 빈센트와 테오가 나눈 편지를 바탕으로 한

대사와 상황이 굉장히 정확하게 이해가 되서 무척 즐겁게 볼 수 있었다.

연극을 볼 예정이라면 이 책을 읽고 가는 것이 두 배는 효과적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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