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여행 에세이의 홍수. 여행기가 이렇게 쏟아지는 이유인즉, '겨우 이 정도 이야기도 책으로 나오니까 당신도 잘 할 수 있을거야'라고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한 출판업계의 대국민 용기백배 캠페인. 일 리는 없겠죠. 어쨌거나 좋은 책은 그저 자기 때에 맞추어 나오게 마련입니다. 네. 근성 넘치는 한길사에서 이병훈 교수의 두 번째 러시아 기행문이 나왔습니다. 

 

<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 이병훈 지음 

 벤치 뒤로 볼품없는 들개 한 마리가 지나간다. 이름이 뭘까. 꽤 지친 모습이다. 먹을 걸 구하러 공원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검은 털이 듬성듬성 빠진데다 다리를 절뚝인다. 뒷모습은 영락없는 술주정뱅이다. 개는 구석을 기웃거리다 사내가 누운 벤치로 다가온다. 누워 있는 사내 몸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다. 먹을 게 아니다. 개가 물러가고 벤치 주위에는 잠시 고요함이 깃든다. 

p.322  

기행문에는 글쓴이가 해당 장소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척도가 있습니다. 곳곳에 얽힌 역사와 사연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어 보이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뽑아내는가죠. 이 두 가지 특징은 그 자체로도 좋은 정보가 되며, 그 풍요로운 발걸음과 숨길 수 없는 애정을 통해 책을 읽는 맛도 함께 안겨줍니다. <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잘 갖추고 있습니다. 유명 장소에서는 그에 얽힌 역사를 풀어놓거나 연관된 예술 작품을 소개하며, 틈틈이 거리와 공원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풍경들의 스케치도 빠지지 않습니다.

러시아 박물관을 소개하는 챕터를 볼까요. 기행문이 러시아 대표 화가들을 소개하는 장으로 바뀌고, 이는 또 그림들을 매개로 다른 예술 작품들을 하나둘 불러옵니다. 예를 들면, 1. 일리야 레삔에 다다라서는 까자끄 인의 호방함에 대해 얘기하다가 고골의 <대장 불리바>로 넘어갑니다. 2. 도부쥔스끼의 도시 풍경화 이야기는 곧 그가 삽화한 소설로 넘어가는데, 그 소설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죠. 이어 바로 <백야>의 한 장면이 인용됩니다. 주인공이 나스쩬까를 만나 들려주는 음울한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죠. 3. 제가 좋아하는 레비딴의 그림에는 '잘 어울리는 시'로 뿌쉬낀의 <비구름>을 수록했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이 딱딱한 인물 소개보다 훨씬 '여행가'의 흥취에 걸맞는다고 생각해요. 보고 떠오르고 느끼는 것. 연상의 연속. 여행자들을 위한 책은 이런 방식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의 인상이 다른 것들을 불러들이고, 그것들이 겹쳐 풍부한 양감을 안겨주는 경험 말입니다. 산책을 하더라도 라스꼴리니꼬프의 발자취를 떠올리며...(네, 알라딘의 로쟈 님이 아닙니다 ㅎㅎ)

가끔 뜬금없이 고골이나 뿌쉬낀의 1인칭 시점이 되어 글이 진행되기도 하는데, 이것도 나름 재밌습니다. 중년 학자다운 여행자의 치기어린 몽상이랄까 로망스랄까 ㅎㅎ. 사실 이 책은 미스테리 기행문이기도 합니다.;;; 소냐라는 정체불명의 여성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남자의 이야기거든요. 물론 정말로 저자가 여자의 환상을 보거나 뿌쉬낀이 빙의되지는 않았겠지만, 이 '업된 기분'만큼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행지에 가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아시겠죠. "마치 나도 뿌쉬낀이 된 것 같았다"라고 쓰는 것보다는 멍하니 공원에 앉아 자신이 뿌쉬낀이 된 양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쪽이 훨씬 여행자다워 보이니까요. 아무래도 이런 감상적인 부분들은 박학다식한 해설의 매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저 솔직하고 대책없는 멜랑콜리는 단순히 1차원적인 기분만 늘어놓은 평범한 여행기의 소회들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아, 읽을 때 주의하실 점이 있어요. 이 책을 가이드북으로 써먹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기행문의 리뷰들을 보면 그런 얘기가 많지요. 실질적으로 여행에는 도움이 안된다거나 운운. 비록 최근 국가 대세가 실용이긴 하지만, 가이드북도 아닌 기행문에다가 왜들 그리 실용을 원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장 그르니에 책에는 그런 리뷰 없던데... 어쨌든 가이드북을 원하시는 분들은 패스.

문학, 그림, 음악(쌍뜨 뻬쩨르부르그 필하모닉이랑 차이코프스키가 한 챕터를 차지합니다) 등등 각종 예술을 사랑하시는 분들께 문화의 도시 뻬쩨르부르그의 매력을 알려드릴 책입니다. 별다른 가이드도 가이드북도 없이 여행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길잡이 역할까지 맡아줄지도 모르지요. 아마 제가 뻬쩨르부르그에 가게 된다면 이 책 한 권 들고 가지 싶습니다. 저도 오레쉐끄의 요새 구석에 앉아 이 책에 함께 소개된 가르쉰의 <붉은 꽃>을 읽고 싶어요.

그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고, 사물의 내력을 남김없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병원 뜰의 커다란 느릅나무는 지난날의 갖가지 전설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실제로 꽤 오래전에 지은 이 건물을 그는 뾰뜨르 대제의 건축물이라고 생각했고, 대제가 뽈따바 전쟁 당시에 이곳에서 살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뜰에서 발견한 허물어진 벽과 벽돌, 타일 조각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거기에 건물이나 정원의 역사가 낱낱이 씌어 있는 것이었다. (...) 그는 시체실 지하실에서 마당 한구석으로 나 있는 작은 창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무지갯빛이 나는 낡고 더러운 유리에 비치는 흩어진 빛의 반사를 통해 언젠가 살면서 혹은 초상화에서 본 적이 있는 낯익은 모습을 발견했다. 

p.478 (가르쉰의 <붉은 꽃> 중 일부) 

 

 또다른 주목할만한 신간들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우리에게도 멋진 (근현대) 미시사 책이 있다면! 이라고 외치시는 분들께 이 책을 뒤늦게 소개드려 죄송하다는 말씀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1세대 아파트들이 품고 있는 근대성의 내외를 탐색하는 시선이 교양서의 수준에서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이제 대부분이 사라졌거나 곧 사라질 예정인 1세대 아파트들에게서 발견하는 특성들은 곧 서울 근대화의 흔적으로 치환되는데요. 재미있는 점은 그 특징들이 아파트마다 제각각이라는 겁니다. 주로 일방적이고 획일화된 과정으로 기억되는 산업 근대화의 시기에 얼마나 다양한 색깔과 변용이 있었는지, 그 디테일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미시사의 미덕이겠지요.  이 1세대 아파트 이야기는 어느새 단순한 건축사가 아니라 서울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역사의 흐름, 주민들의 계급과 살아가는 방식 등이 함께 어우러진 묘한 잔치판으로 변해 있습니다. 도시 근대화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 즉 '삭막한 획일화'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삶'이 보여집니다. 강력히 추천드리는 바, 사진들도 멋지게 찍어 놓아서 보기에도 좋아요. 이 책이 제일 위에 소개되지 못한 건 순전히 타이밍을 놓친 제 탓입니다...

<김시광의 공포 영화관>- 호러물 리뷰로 유명한 파워블로거 김시광 씨의 공포영화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영화들은 대개 이름이 있는 영화들이고, 각 꼭지가 짤막한데다 내용도 쉬운 편이어서 매니아분들은 불만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훌훌 넘어가는 공포영화 이야기라니 방앗간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들의 수효는 제법 많을 걸로 예상됩니다. 특히 입문하시는 분들께는 좋은 가이드북이 되겠네요. 영화를 골라 소개하는 본편 외에 호러물의 간략한 역사나 저자가 뽑은 명감독들, 걸작 100선 등의 보너스(?)들도 흥미로워요. 여러모로 '무서워하고 웃고 떠들고 즐긴다'의 모토에 걸맞는 즐거운 공포영화 탐방기입니다. 남녀노(소는 안됩니다. 19금 많음) 모두 즐기실 수 있어요. 간만에 어깨 힘 뺀 책 소개드리는 것 같네요.;; 

<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비평집...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여타 국내 비평가들의 한국 미술 담론에 비하면 어딘가 사적이고 내밀한 느낌이 있습니다. 글쎄요 딱 집어서 얘기는 못하겠습니다만, 메타 비평(이는 곧 자기집단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니까요)에 대한 글이라거나, 최근 미술계의 경향에 대한 분석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론이라는 도구로 각 작품의 개별적 분석에 임하기보다 작가의 어떤 경향이나 흐름을 추적하지요. 이는 곧 '누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접근입니다. 하여 현대미술을 억지로 '고전미술처럼 관람 가능한 것'으로 해설하려 하기보다는 그 작업들을 하나의 관점과 태도의 결과물로 설정함으로써 작가와 독자/관객과의 대화를 시도하게끔 하는거죠. 최근 나온 그 어느 현대미술 책보다도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많이 거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가 아닌가 합니다. 제목의 센스는 아직도 의문이지만(-_-;;), 추천할 수 있는 '지금 여기'의 예술 시론입니다. 

<아티스트를 위한 멘토링>-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책. 이 아닙니다. 책 도입부에 피카소가 라스코 고분 벽화를 보면서 "우린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라고 읊조렸을 때, 거기에 함께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셨다면 책을 읽는 내내 거장들의 높은 세계를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플지도 몰라요. 굳이 결론을 찾자면 하나가 있습니다. 성공하느냐 마느냐 하는 방법론은 각자 천차만별이지만, 창작에의 욕구는 거의 숙명인양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것. 보고 있으면 거의 신내림 수준입니다. 결국 뭔가 실질적인 도움을 받으려고 이 책을 펼치신 분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각각의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수많은 천재들이 막판에 떼창으로 한다는 얘기가 그러나 우리는 해야만 했지 라니요! 그러나 여기서 기운이 빠지면 안됩니다. 아직 꿈꾸고 있다면 신내림의 그날까지 준비해놓을 것들은 산더미처럼 많으니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책은 예술가 지망생들을 위로해주는 책이 아닙니다. 각성의 순간이 오건 오지 않건, 그날을 대비해서 자신을 구석구석 훑고 끝없이 정진하기를 요구하는 과제집입니다. 노력하는 사람이 늘 성공하지는 않지만, 성공한 사람이 노력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빌 게이츠였던가...

 

광고말씀- 단독 이벤트! 알라딘에서 영화 책 아무거나 한 권 사실 때마다 인디스페이스(중앙시네마)에서 실시하는 중국 독립영화전 티켓을 한 장씩 드립니다. 친구랑 가시려면 두 권 사시면 돼요. 타르코프스키, 트뤼포, 히치콕, 짐 자무시, 코엔 형제 등의 감독들은 물론이요 수많은 영화사 책들과 시나리오와 기타등등에 대한 책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저 찬스라는 말씀밖에는... 

 

곧 여름입니다. 지쳐 쓰러지기 좋은 계절이지요. 누나 가슴에도 삼천원 쯤은 있는거지만, 겨우 그런 것에 흔들리지 말고 혼을 붙잡으세요. 아니면 예술에 대한 책 한 권 끼고 전시회에 가보는 겁니다. 퀄리티는 제각각이지만 열정만큼은 다들 보장할 만하니까요. 끼고 가실 책 구매는 알라딘에서 하시고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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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6-17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오늘도 추천입니다! 누나 가슴에 삼천원, 으흐흐.

외국소설/예술MD 2009-06-17 14:57   좋아요 0 | URL
고민이 많았어요. 해설을 따로 달아야 하나 하고..^^;;

흐느적 2009-06-17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단독 이벤트 멋진데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중국독립영화전이라니요. 아하하하;;

외국소설/예술MD 2009-06-17 14:5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보러 갈겁니다 ^^

nihil 2009-06-24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로쟈님인줄 알고 들어와봤다는... 잘 낚으시네요..ㅎㅎ

외국소설/예술MD 2009-06-24 17:22   좋아요 0 | URL
화려한 제목은 필수.. 일까요?(흠흠) 그런데 의도/음모에 넘어간 분은 아무래도 별로 없나봅니다 ^^;;

느린산책 2009-06-2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찜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6-26 11:31   좋아요 0 | URL
그저 뿌듯합니다. +_+

일년열두달 2009-07-07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모스크바 갔다 왔는데 페테르 갈땐 이 책을 보고 가야겠군요! 누나 가슴에 삼천원...ㅋㅋㅋ

외국소설/예술MD 2009-07-08 13:11   좋아요 0 | URL
모스크바~ 부럽습니다!! 저도 꼭 가보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