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삼아 그의 기행문들을 하드보일드 여행기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서경식 선생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 아닙니다. 글이 어려워서는 아닙니다. 비록 번역문이긴 하나 문장은 깔끔한 편이고, 형이상학적인 용어도 잘 사용되지 않죠. 특히 <나의 서양미술 순례>나 <디아스포라 기행>처럼 기행문의 형식을 겸한 경우에는 그 자신의 감탄마저 조절하고 있습니다. 고저차가 느껴지지 않는 일관적인 글투. 야간 저공비행. 이 책은 단 한 순간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을 관통한 증거들을 살피는 그의 시선에서는 쉽게 흥분할 '수 없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아 온 사람 특유의 담담함만이 엿보입니다. 여기에서는 희망조차 어떤 가능성의 일부일 뿐입니다. 무너져내린 것들은 분명한 과거인 데 반해, 희망은 불완전한 담보에 불과하니까요. 보이는 것들만을 믿기에도 힘든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니, 있었다고 합니다. 


<꽃들과 함께 있는 폭탄 구멍> by 오토 딕스 

소위 '전쟁 제단화'로 유명한 오토 딕스가 가장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어져 있습니다. 양차대전 사이에 자신의 시대와 싸워야 했던 독일권 화가들이 등장합니다. 우물쭈물하면서 사랑하는 고국을 버리지 못한 사람도 있고(에밀 놀데), 보란듯이 망명한 사람도 있고(조지 그로스), 1차대전 때 수 년을 복무한 뒤 다시 쉰이 넘어 2차대전에 징집된 사람도 있으며(오토 딕스), 이어지는 망명과 도주 끝에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한 유대인도 있습니다(펠릭스 누스바움). 이들이 등장하는 1부는 일관된 분위기가 유지됩니다. 독일-유럽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죠. 

흥미롭게도 이들 화가의 뿌리로 서술되는 두 화가는 카라바조와 반 고흐. 거부할 수 없는 내면의 열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점에서, 앞서 소개한 비극적인 시대의 화가들의 선배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컨셉트는 (비록 흥미로운 점이 있더라도) 어두움을 방문하는 저자의 단정한 태도만큼 인상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는 경악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지켜본 것들을 옮겨 씁니다. 경악스러운 것들조차 스러진 뒤에 그 땅을 밟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는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피곤해 보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피로야말로 역사에, 그 순간에, 어떤 진실에 가까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도자료와 언론 서평에는 주로 이 책을 어떻게/왜 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근대사의 특수성, 더불어 한국 (주류) 미술의 몰정치성과 같은 써먹기 좋은 주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진가는 그 분위기에 있지 않을까요. 역사가 주는 피로를 저버리지 않은 사람의 무덤덤함. 저는 근래 이렇게 인상적인 '참조' 안내 문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첫번째 사진(331쪽 맨 위)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우크라이나에 있던 어느 장소이다. 구덩이를 파서 유대인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고 있는 영상이다. 물론 보도사진은 아니다. 이런 장면을 보도하는 일을 나치는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영상은 나치 측의 누군가가 다른 목적으로 찍은 것이다. 기록을 남기기 위해 찍은 것이거나, 아니면 일종의 도착된 취미 때문에 찍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사진(331쪽 두번째)은 라트비아의 리예파야라는 장소에 집단으로 끌려온 유대인 여성들이다. 그녀들로부터 벗겨낸 옷들이 뒤로 산적해 있다. 그리고 총을 든 군인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이제부터 죽임을 당할 사람들이다. 죽임을 당할 운명을 예감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나란히 세워놓고 기념촬영을 했다. 누가 무슨 의도로 사진을 찍은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절망적일 만큼의 상상력을 요구하는 사진이라 생각된다. 

한가운데에 있는 여성의 얼굴로 알 수 있듯이, 앞의 사진에 찍힌 여성들이다. 마지막 속옷 한 장마저 벗고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331쪽 세번째 사진 참조) 

이 여성들이 죽임을 당할 구덩이 쪽으로 떠밀려 가고 있는 장면이다.(331쪽 네번째 사진 참조) 

구덩이 가장자리에 서서 당장에라도 사살될 듯한 사진이다.(331쪽 맨 아래 사진 참조) 구덩이 안에는 총에 맞은 시체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라트비아의 리예파야라는 지명만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현재 리예파야에 이런 사건을 기억하는 이가 있을 리 없다. 구덩이는 흙으로 덮여 아직도 그대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p.330-332

 

 <돌격대 독가스 공격> by 오토 딕스

 

 다른 신간들은 금주 내로 다시 소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함께 추천드리는 책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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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소스 2009-06-13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에서 서평봤는데 그 보다 이쪽 글이 훨씬 맘에 듭니다.
꼭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외국소설/예술MD 2009-06-15 13: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신문의 글쓰기보다는 자유롭다보니 그런 것 같아요. 앞으로도 매체 서평하고는 조금씩 다른 분위기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

김현미 2009-06-17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좀 가져가도 될까요? 출처는 밝히겠습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6-17 14:55   좋아요 0 | URL
네 문제없어요. 대신 추천 하나 찍어주세요 하하

책사랑(지현) 2009-06-1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하나 찍고 가져갑니다. 얼른 주문도 마쳤답니다. 감사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6-19 18:10   좋아요 0 | URL
제가 감사드릴 일이죠.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