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vs 영화 

원작-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영화- 피아니스트 (미하엘 하네케) 

 

            

 소시민은 변태를 비웃는다

 

 -저기 영화 포스터를 보시라. 뒤로 길게 뺀 이자벨 위페르의 깡마른, 약간 휜 왼쪽 다리. 검은 옷과 완벽하게 다듬어진 머리칼. 흑백 패턴의 화장실 바닥. 같은 각도로 열린(즉, 같은 패턴의) 흰색 문과 흰 벽. 사람의 피부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흑백으로, 일정한 패턴으로 정렬되어 있는 섬짓함. 심지어 등을 돌린 남자조차 마그리트의 그림 속 누군가처럼 보인다. 자칫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로 오해할 수도 있는 이 강박적인 한 장면이 이 영화와 원작을 '이미' 잘 설명해준다. 저 포스터는 불길하다. 편집증을 불러 일으키는 정신적인 압력이 팽팽하다. 절대 구겨지지 않을 것같은 포스터. 

  그렇다. 원작소설이건 영화건 (보통 쓰이는 의미에서) 정상이 아니다. 여주인공 에리카는 강박증의 화신이면서 동시에 성욕의 화신이다. 그녀의 강박증은 세상 모든 것에 영향을 끼쳐서 대인관계에조차 '시스템'을 설정한다. 당연히 정서적 유대 같은 불안정한 패턴에는 관심이 없고, 덩달아 섹스에도 그다지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 흥미가 없다기보다는, 섹스에는 뭔가 너저분한 부수적인 것들이 너덜거린다. 의식적으로 그 장애물을 돌파한 뒤에는 섹스는 이미 섹스가 아니다. 매번 혐오를 정면 돌파해야 하는 성행위는 그저 고통일 뿐이다. 그녀는 섹스의 화신이면서 동시에 섹스는 그녀가 이룰 수 없는 행위다. 그러면 어떡하는 게 좋을까? 에리카는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다른 행위들을 개발한다. 이 '색다른 성욕 해소 액션'은 소설에서건 영화에서건 부지기수로 등장한다. 휘황찬란하다.

  왜 그렇게 되었나? 틈틈이 단서들이 주어진다. 에리카는 어머니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 어릴 적부터 정서적으로 압력을 계속 받고 살았다. 아, 그래서 불우한 유년 시절이 이 여자를 삐뚤게 만들었구나. 라고 생각하지 마시라. 이 소설/영화는 그렇게 만만치 않다. 에리카의 변태적 행위는 충동적이지 않고 완전히 계산되어 있다. 아무것도 그녀를 상처입히지 못한다. 그녀는 완전히 안전한 세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섹스를 즐기며, 그 방식도 오감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자극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이다. 이성의 완전한 조절 아래 감각의 최대치를 개방해내기.

  이성의 완전한 조절 아래 감각의 최대치를 개방해내기. 이것은 또한 세상 모든 피아니스트들에게 요구되는 조건이다. 피아노는 글렌 굴드의 말에 따르면 가장 통제하기 힘든 악기다. 피아노는 피아니스트가 10을 입력한다고 10을 출력해주는 악기가 아니다. 거기에는 메카니즘과 그 이상의 '무엇'이 있으며, 그 황금 열쇠를 찾는 여정이 바로 피아니스트의 삶이다. 에리카는 거의 열쇠를 찾을 뻔했던, 지금은 영감을 상실한 피아노 교수다. 그러나 그녀는 피아니스트의 황금 열쇠를 자기 안에서, 피아니스트가 되기 전부터, 피아니스트를 포기한 뒤에도 찾고 있다. 무너져버린 과거들과 강박적인 현실 속에서 '그 무엇을 탐구하기'. 따라서 얼핏 불쾌해 보이는 그녀의 행위들은 결코 단순한 변태 엽색 행각이 아니다. 에리카는 욕망 앞에 무너지는 법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그 격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관찰하고 실험한다.

  독자/관객들이 불쾌한 것은 에리카의 변태적 행동에 '왜'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필 왜 그런 행동을 할까'에 대한 답은 없다. 에리카도 소설가도 감독도 입을 다문다. 아니,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설명은 원래 불가능하다. 왜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터의 어떤 베토벤 소나타 30번 2악장은 그렇게 느릴까? 어째서 그 순간 그런 선택을 했을까? 즉흥적인가? 즉흥적이라면, 그는 원래 즉흥적인 사람인가? 아니다. 피아니스트 리히터와 1963년 11월 28일 라이프찌히 실황공연의 리히터는 같은 사람이지만 그 둘은 또한 다르다. 그날의 베토벤은 왜 느렸는가? 그날은 그렇게 되었어야 했던 것이다. 에리카 역시 피아니스트다. 어떤 날은 휴지에 묻은 정액 냄새를 맡고, 어떤 날은 핍쇼를 보고(그러나 모든 감각을 이용할 것), 어떤 날은 드라이브인 씨어터에서 다른 커플을 엿보며 오줌을 눈다. 절대로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통제하면서. 섹스를 음악으로 표현한 경우는 많았지만, 에리카는 그 '음악가'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렇다. 대개의 경우가 그렇듯이 에리카(와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그들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너머의 존재다. 탐구자들.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한쪽 어깨에 올려놓고 자위행위를 하는 사람들. 피아니스트.

  소설과 영화 둘 다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소설은 냉정하게 절제된 서술로 휘황찬란한 행위들과 강박증 사이를 오가며, 영화는 이자벨 위페르의 신경질적인 한 톤 높은 목소리와 강박적인 미장센으로 고도의 압박 작전을 펼친다. 굳이 점수를 주자면 영화에 보너스를 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음악을 직접 들을 수 있으니까. 메인 테마나 다름없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3중주 D.929의 2악장, 그리고 '영원히 반복될 것같은' 슈베르트 소나타 D.959의 잔향은 관객들이 에리카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그렇다.

  그녀는 슈베르트를 좋아한다. 
 

  

-외국소설MD 최원호  


p.s: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들이 꾸준히 국내에 출간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상을 많이 타서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꾸준히 변태적인 그녀의 소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앞으로도 이해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이미 독자 자신이 그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소시민을 위한 소설이 있고, 안 소시민을 위한 소설도 있는 것이다. 최소한도로 이 작품을 폄하해서 '세기말 현대 사회의 광증'이라고 하더라도, 이만큼 강렬한 광증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지 않은가? 세기말 현대라는 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계니까. 

p.s2: 물론 영화 역시 막장이라고 욕을 많이 먹었다. 그렇다 치자. 그러나 art는 예술이면서 동시에 장인의 경지에 오른 기술을 뜻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장인의 경지에 오른 최고급의 막장극이다. 이보다 더 '아트 무비'에 부합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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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4-0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가 막장이라고 욕을 많이 먹었어요? 우와, 상상도 못한 일이네요. 세상은 역시 나와는 다른 이들로 넘쳐나요.

외국소설/예술MD 2011-04-08 18:42   좋아요 0 | URL
저는 타르코프스키나 앙겔로풀로스 같은 사람들 말고 미하엘 하네케야말로 소위 '아트' 취향을 가늠하는 리트머스라고 생각해요. 경계 지점에 있다고 할까..

다락방 2011-04-08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잘 안나요. 전 전혀 줄거리를 알지 못한채로 봤다가 여자가 점점 이상해지는구나, 라고 생각했던 그때 당시의 기분만이 남아있네요.
저 이 영화 원작이 있다는 걸 최근에 알게되서 4월1일에 사두었거든요. 그리고 저쪽에 치워뒀었는데, 지금 읽는 책 다 읽으면 이 책 읽어야겠어요.

치니 2011-04-08 12:16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제가 저런 댓글을 단 이유는, 저는 책을 읽었는데 영화를 보고나서 여주인공을 연기한 이자벨 위페르가 정말 위대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아 - 다락방 님, 빨리 읽어봐요, 소감이 완전 궁금해요!

외국소설/예술MD 2011-04-08 18:43   좋아요 0 | URL
다 읽으신 뒤의 느낌이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는 제가 예측할 수 없겠으나, 일단 흥미로울 것임에는 틀림없을 거라 봅니다. 재미있다와는 다른 뜻이지만요. ㅎ

비로그인 2011-04-1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마지막 부분(이자벨 위뻬르가 자신의 가슴을 칼로 찌르고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에서 정말 감동...
저도 그 장면에서 나오는 슈베르트의 피아노3중주 D.929 2악장 첫부분, 너무 좋아서 요즘도 즐겨듣는답니다.
자해와 마조히즘, 완벽성에 대한 추구 등의 심리를 너무나 잘 파헤친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기덕도 미카엘 하네케를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감독으로 꼽기도 했죠..

외국소설/예술MD 2011-04-11 18:42   좋아요 0 | URL
이 글 본문에서는 일부러 중후반 내용을 말하지 않았었죠. 그 변화 과정을 독자/관객들이 함께하는 게 의미있는 게임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ㅎ 사실 뭐 스포일러는 아니지만요.

저도 그 엔딩을 말하고 싶었어요. 선셋 대로의 한 장면처럼 우아하고 강렬하고, 그러고보면 욕망을 말하는 멋진 영화들은 그렇게 본능적인 품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저 위대한 여배우들께 경배를.

그러고보니 슈베르트 d.929는 해피엔드에도 나왔었죠. 그 영화도 욕망에 대한 영화, 라고 봐야겠죠? ㅎ
 

원작 vs 영화 

원작- 신 기생뎐 (이현수)

드라마- 신 기생뎐 (이영희, 손문권 / 극본 임성한)

 

 

짝짝짝!

 

  욕망이 불꽃이 떠난 주말 드라마계의 왕좌를 차지한 드라마가 있다. 막장(!)계에서 일가를 이룬 드라마 작가 임성한이 선보이는 <신기생뎐>이 그것. 재벌 2세와 계모와 출생의 비밀에 지레 기함해 원작에 손을 대지 않기엔 이 소설이 너무 아깝다.

  소설의 중심은 군산의 기생집 ‘부용각’이다. 전국의 돈을 모두 벌어들이고 있다는 질시도 옛날, 이제는 몰락만을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 기생집이다. 소설은 부용각 사람들의 면면을 품격있는 문장으로 서술한다. 평생 음식만 만들어온 부용각 주인 부엌어멈 타박네와 전국에 이름을 떨친 소리기생 오마담, 영욕의 세월을 지나온 부용각을 마지막까지 잇게 될 춤기생 미스 민, 오마담의 기둥서방과 오마담만을 바라봐온 집사까지. 부용각 사람들은 곧 스러질 부용각을 이루고 있다. 어떤 위기의식도 없이. 분노와 슬픔도 없이. 열정도, 애정도 아닌 평상심으로.

  누군들 아름답고 신성한 사랑을 꿈꾸지 않겠나. 욕된 세월도 세월은 세월이듯이 욕된 사랑도 사랑은 사랑인 것이야. 고백하자면 나는 눈을 뽑아버리고 싶은 적도 있었네. 다시는 앞을 보지 못하도록 눈알을 파내고 싶은 적이 있었어. - 153쪽.

  가장 좋았던 장은 ‘집사의 사랑’이었다. 능소화 향에 취해 부용각에 발을 디딘 이래, 평생을 오마담을 바라만 봐 온 집사. 그는 평생을 애초에 손님으로 부용각을 방문하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하며, 오마담의 기생의 일생을 바라본다. 스러져 가야 할 그녀의 일생을 마지막까지 지키겠다는 우직한 열정. 그러나 매일 같은 자리에 꿀물을 놓아둘 정도로 그녀를 증오하는 그의 모습은 선덕여왕을 연모해 불로 화하고 만 지귀의 정념을 닮았다.

  나는 이런 소설이 좋다. 선악의 영역이 아닌, 미추의 영역에 자리한 소설. 소담한 문장으로 삶의 한 풍경을 그저 그려내는 소설. 머리를 올리는 기생과, 사랑을 얻기 위해 물속에 몸을 던진 어린 기생 채련, 끝내 기생의 생을 벗어나지 못하고 기둥서방 사이를 전전하는 오마담. 이들은 확실히 옳지 않다. 그 옳지않음의 대가로 이들은 천대당하고, 사라짐의 운명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사라져가는 것이 어디 기생들뿐이랴. 이 소설은 은근한 맛으로, 사라져가는 것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 흐릿하고 푸르고 먼 안개 같은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 그 마지막을.  

-국내소설/시 MD 김효선 님의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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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4-06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글을 읽으니 드라마가 얼마나 막장일질 잘 알겠네요.정말 임성한 작가는 막장 드라마의 종결자 이십니다,탕 탕 탕!!!(봉 두드리는 소리)

한국소설MD김효선 2011-04-08 10:34   좋아요 0 | URL
드라마를 발췌해서 본 처지라, 마냥 막장에 대해 말하는 건 좀 무안하긴 한데요, 소설에선 부용각 모티프와 예술을 하다 기생이 된 미스 민 모티프만 가져온 느낌입니다.. 아스트랄합니다..

stella.K 2011-04-07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지길 내심 바랐는데,
웬 막장질 드라마로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것도 50부작!ㅠㅠ

한국소설MD김효선 2011-04-08 10:35   좋아요 0 | URL
영화였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한 캐릭터 정도만 집중해서 그려냈으면 취화선 같은 영화 느낌도 났을 텐데요. 드라마의 가치관과 소설의 가치관 자체가 맞질 않는 것 같아서 좀 아쉽습니다.

stella.K 2011-04-08 12:49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취화선!
암튼 동양화 같으면서도, 한국적 한과 에로티시즘이면 딱인데 말입니다.ㅠ

나비 2011-04-08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들의 삶을 다 볼 순 있을까요?

한국소설MD김효선 2011-04-08 10:37   좋아요 0 | URL
음.. 제가 이 코멘트를 제대로 이해했는진 확신이 안 서지만, 아마도 드라마에선 소설 속 '그들'의 삶이 제대로 보여지긴 힘들 것 같습니다.

다운이 2011-05-18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처음으로 드라마에 흥미를 느끼고 보기시작했어요..
재미있게 앞으로 그들이 펼쳐갈 아름다운사랑 기대해봅니다..
어떤일이 있을지..기대합니다.
 

오늘 너무 힘들어서 하루 쉽니다. ㅠㅜ 

 

 

제가 무지 좋아하는 책입니다. 

스터즈 터클 만세! 노동자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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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6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6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소설MD김효선 2011-04-06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지 말아요.... 근성맨...

외국소설/예술MD 2011-04-06 18:22   좋아요 0 | URL
근성을 어디다 발휘하고 있는 걸까요 저는..

고랑 2011-04-06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요즘 켈로그의 주 6시간 노동에 대한 책이 그렇게 좋더라고요.....노동자 만세!

외국소설/예술MD 2011-04-06 18:24   좋아요 0 | URL
이후 책 말이죠.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스터즈 터클은 저의 완소 저자시죠. 담에 함 읽어보세요. ㅎ

stella.K 2011-04-06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성실하시군요.ㅋㅋ

외국소설/예술MD 2011-04-06 18:24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
 

원작 vs 영화 

원작-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 (코이즈미 타카시) 

 

             

봄 쌍둥이

 

  -대부분의 수학 소설들이 실패한 이유는 수학을 미스테리로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천재들의 암투는 아무리 쉽게 해설해 봐야 해설 따로 소설 따로가 되기 일쑤였다. 풀 수 없을 것같은 문제를 풀어나간다는 과정은 미스테리적인 전개에 가장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독자들이 그 풀이의 전개를 따라오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그러나 해설에 신경쓰다간 죽도 밥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수학 소설은 대개 교양(을 위주로 한) 소설이 되거나 수학자들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 소설로 변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그 가운데서 독보적인 성과를 이루었다. 이 소설에서 수학은 그저 신기하고 아름다운 세계의 비밀을 말해줄 뿐이다. 천재 수학자의 맞상대는 꼬마와 가정부이기 때문에, 이 소설 속의 수학은 어떤 공식도 필요로 하지 않고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서도 자유롭다. 꼬마에게 말해주는 수학의 세계. 이 가벼움이 성공의 비결이다.<박사가 사랑한 수식> 속의 수학들은 더이상 숫자 공식이 아니라 현자의 깨달음, 명언이나 잠언 같다. 수학자들이 발견한 우아한 진리를 쉽게 공유하기. 심지어 오가와 요코는 수학이 오히려 얼마나 써먹기 쉬운 아름다움인지를 보여 주었다. 그 어떤 멋진 광경이나 생물체도 언어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퇴색하지만, 수학은 그 아름다움을 완전히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티없이 착하고 순박한 이야기와 수학은 서로를 북돋아준다. 등장인물들은 수학의 명징함을 사랑하게 되면서 더욱 순수한 이미지를 얻게 되고, 수학은 이 착한 사람들의 언어가 됨으로써 호감을 북돋운다. 이 소설에는 어떤 계몽도, 지적 충족을 위한 해설도 없다. 수학은 투쟁 대상이 아니라 이 세계의 신비한 질서를 찾아내는 이야기, 그것도 예상외로 아름답고 신비한 이야기다. 소설의 설정과 수학의 멋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얽혀들어간 경우는 무척 보기 어렵다. 좀더 수학에 단련된 독자들은 테드 창의 단편 '0으로 나누면'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봄볕처럼 따스하고 선한 수학 이야기는 앞으로도 만나기 어려울 듯하다. 투쟁하는 수학, 생과 맞바꾸는 수학, 몰락하는 천재들, 비극적인 사건들. 여름, 가을, 겨울.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이런 것들이 없는, 아마도 유일한, 볕 좋은 봄날의 수학이다. 

  영화는 신기할 정도로 원작과 닮아 있다. 부드러운 볕이 영화 내내 비쳐온다. 집 안은 단촐하고 정갈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카메라는 늘 인물들을 안정된 위치에 잡아준다. 그래서 영화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사실 이 정직한 연출은 담백함 외에 딱히 장점이 없는 많은 일본영화들의 공통점이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영화는 대개 괜찮은 영화가 아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도 마찬가지다. 기지가 번뜩이지도 않고, '평범하지만 과감'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 담담한 연출이 원작 소설과 마침 잘 들어맞았다(결국 원작 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원작의 미덕까지 그대로 계승한다. 계속 뭔가를 더 전해주려 애쓰던 수많은 실패작들과는 달리, 그저 함께 웃고 격려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것 말이다. 어쩌면 그게 요즘 국내에서 사랑받는 일본영화들의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대단해지려들지 말고 그저 함께 누워 쉬는 것. 편안한 휴식. 길고 따뜻한 봄. 

 

-외국소설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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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4-04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처럼 책도 영화도 모두 본 작품이 나와서 무지 반가워요! ^^

외국소설/예술MD 2011-04-05 10:52   좋아요 0 | URL
근래 너무 뻑뻑한 것들만 하지 않았나 싶어서..^^;
 

원작 vs 영화 

원작- 배틀 로얄 (타카미 코슌) 

영화- 배틀 로얄 (후카사쿠 긴지) 

 

          

뜨거운 안녕

 

 -일본에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던 소설 <배틀 로얄>은 한국에서는 영화로 먼저 알려졌다. 아마 설정이 우리나라 정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침 소설 출간 당시 일본문화 수입에 따른 쓸데없는 논쟁이 과열되어서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배틀 로얄>은 문제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같은 반 고등학생들이 단 한 명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여야 한다는 설정은 너무 노골적으로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 폭력이 직접적이고 시각적이냐, 아니면 시스템 속에 녹아들어서 눈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 뿐이었다. 최소한 일본과 한국에서는 그랬던 것 같다. 이 공격적인 '현실성'은 한일 양국에서(만)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작가인 타카미 코슌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말했던 스티븐 킹의 <롱워크>와 비교하면 더욱 그 점이 눈에 띈다. 

  지원자 중에 무작위로 뽑힌 청소년들이 단 한 명 남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끝없이 걷는 게임(멈추면 뒤따라오는 군인들에게 사살당한다), <롱워크>는 무한경쟁의 폐해와는 거리가 있다. 빗나간 사춘기의 여러가지 욕망, TV중계로 이 살인 서바이벌을 보고파 하는 대중의 어두운 욕망, 그리고 그 살인 서바이벌 쇼를 기획하는 파시즘 국가의 욕망. <롱워크>는 욕망들의 충돌이었다. 그에 반해 <배틀 로얄>은 강제적이다. 누가 억지로 등을 떠미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이것은 미국 청소년과 일본(한국) 청소년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롱워크>만큼이나 <배틀 로얄>이 중요한 작품이다. <배틀 로얄>은 <롱워크>만큼 신선하지도, 더 많은 사회적/문화적 의미를 숨겨놓고 있지도 않았지만, 지금 여기, 극동아시아의 청소년들에게 주어진 가장 노골적이고도 슬픈 위로였기 때문이다.

  <배틀 로얄>의 남녀 주인공은 너무 전형적이어서 매력이 없다. 대신에 선과 악으로 쉽게 구분할 수 없는 캐릭터들의 매력이 작품을 끌고 간다. '뺏기는 쪽이 되느니 뺏는 쪽이 되겠다'고 말하면서 급우들을 거침없이 죽이는 학생에게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거기다 다른 평범한 아이들은 어차피 죽을 판이 되고 보니 사실은 내가 너를 좋아했네, 걔가 너를 좋아했네 같은 숨겨진 사연들을 공개하면서 소설의 분위기를 미묘하게 만든다. 지금 죽나 사나 하는 판에 그게 중요한가? 그렇다. 아이들에게는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 목숨만큼이나 중요하다. 어른들의 세계에 먼저 눈뜬 아이들이 급우들을 죽이기 시작하는 순간, 아직 소년소녀로 남아있는 아이들은 목숨만큼 소중했던 비밀들을 하나둘 터뜨리면서 죽어간다-어른이 되어간다. 이 모습이 바로 '지금 이 세계'다. <배틀 로얄>의 이 허망한 청춘 고백들은 결코 위대한 성취는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결코 위대하지 못했던 거의 모든 아이들의 이야기일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 <배틀 로얄>이 있다. 이 영화는 흥행용으로 생각하면 실패작에 가깝다. 원작의 소년소녀 감수성이 거의 다 삭제당한 영화 속에서는 감상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 가끔 있는 플래시백은 환상이거나, 죽기 직전 찾아오는 주마등같은 추억 뿐이다. 이 영화는 드라마를 포기하고 아이들이 죽어가는 장면에 주목한다. 여자아이들끼리의 강력한 커뮤니티는 내부에서부터 붕괴하고, 철없는 남자애들은 아니나다를까 뭔가 하나 싶더니 죽는다. 이렇게도 죽고 저렇게도 죽는다. 무슨 사연을 가졌든간에 죽는다. 비주얼이 동기를 압도한다. 죽음이 지나온 세월을 압도한다. 대낮의 환한 햇빛 아래서 기관총탄을 맞고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여고생의 모습은 초현실적이지만, 그 와중에도 피와 죽음만큼은 맹렬하게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이래서야 주인공들이 살아서 섬을 떠난대도 결코 승리했다고 볼 수가 없다. 일본(소설에서는 대동아공화국) 전역에 지명 수배가 내려질텐데 그 기약 없는 투쟁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피투성이의 삶을 연장한 것뿐이지 않은가.

  바로 그것이 이 영화의 감독인 후카사쿠 긴지의 세계였다.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로 유명한 그의 세계는 빠져나올 수 없는 폭력의 늪이었다. 그의 영화 속에서 가치판단은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누가 어떻게 방아쇠를 당기고 칼을 뽑았느냐가 생사를 결정할 뿐이다. 그러니 이 부질없는 목숨 외에 신경쓸 것이라고는 간지 뿐이다. 후카사쿠 긴지의 세계는 그래서 희안하게 폼이 나는 선굵은 액션들이 빛을 발했다. 어떤 '인간'도 그 빛나는 늪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야쿠자들이 아닌 고등학생들이 나오는 <배틀 로얄>도 얼핏 그렇게 보인다. 후카사쿠 긴지 스타일의 늪.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영화 버전에는 원작에서 살아남은 소년 감성이 딱 하나 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아무 이유 없는 의욕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일단 희망한다. 일단 희망하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유가 없다면 의심하지 않는다. 일단 믿는다면 서로의 목숨을 걸어줄 수도 있다... 이 희망은 영화 내내 아무런 근거가 없이 발생해서 좀 황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단지 주인공이라서 살아남는 건가?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선생 역할을 맡은 기타노 다케시다. 학생에게 칼을 맞고 교사를 그만두었다가 배틀 로얄의 진행자로 돌아온 다케시는 영화 내내 표정이 없다. 그러나 감정 자체가 거세당한 것처럼 보이는 그가 이 영화의 마지막 열쇠다. 그는 마지막에 주인공들과 대치하는 순간 총알이 없는 총으로 주인공들을 겨누고, 그들의 총에 맞아 죽은 뒤 여주인공의 꿈속에 다시 등장한다. 그는 그제서야 웃는다. 그는 말한다. 우리(세대)는 이미 끝났어. 그리고 그 꿈의 마지막, 혹은 영화의 마지막은 "달려라" 라는 커다란 자막이다. 나는 그제서야 기타노 다케시가 후카사쿠 긴지였다고, 배틀 로얄의 세계를 인생 내내 그려왔던 감독이 최후에 '아이들에게' 남겨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희망을 어떻게 불러와야 하는지는 몰랐으나, 어쨌든 너희들만큼은 꼭 다른 인생을 살아가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는 아이들을 자신의 '의리 없는' 영화 속으로 초대한 다음, 힘겹게 그 손에 희망을 쥐어 주었다.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르는 그 막무가내의 희망을.

 <배틀 로얄>은 후카사쿠 긴지의 마지막 영화였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자막은 그대로 그의 유언이 되었다. 그것은 내가 아는 가장 뜨거운 유언, 작별인사다. 이렇게 하나의 세태 고발 SF는 한 거장이 다음 세대에게 남긴 마지막 주문이 되었다.  

-외국소설MD 최원호 

 

p.s: 사실 후카사쿠 긴지는 <배틀 로얄 2: 레퀴엠>도 만들고 있었다. 첫 촬영 이후 사망했기 때문에 마지막 작품이 <배틀 로얄>인 것은 맞으나, 다음 영화를 만들었으니 배틀 로얄의 마지막이 유언은 아니냐고 해도 할 말은 없다. 

p.s 2: 원래 절판된 작품은 쓰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으나, 이번 한 번만 예외로... 입니다.; 

p.s 3: 재미있는 배틀로얄 영화판을 찾으실 분은, 헐리우드판 배틀로얄인 <헝거 게임> 시리즈 영화화를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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