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vs 영화 

원작- 로드 (코맥 매카시)

영화- 더 로드 (존 힐코트) 

 

           

아버지들은 왜 매일 살아남으려 할까

 

 -코맥 매카시는 한 인터뷰에서 <로드>를 쓰게 된 동기를 말했다. 그는 늦둥이 아들과 단둘이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여행 중의 어느 날 밤, 매카시는 상상 혹은 환상을 접했다고 한다. 아들이 곤히 자고 있는 가운데, 창밖이 온통 불타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는 아들과 창밖의 끝없는 화염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뭔지 생각했고, 그 장면의 기억과 느낌을 바탕으로 소설 <로드>를 썼다. 

  <로드>의 세계는 지옥 그 자체다. 인간은 물론이고 생물 자체를 구경하기가 힘든 잿덩어리 땅 뿐이다. 미 대륙 전체를 날려버린 대화재에는 어떤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소설은 말해주지 않는다. 하긴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매일매일을 목숨을 걸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재앙의 기원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그들이 원하는 건 마실 수 있는 물과 먹을 수 있는 음식, 그리고 편안히 잠들 수 있는 은폐된 공간 뿐이다. 이 강제된 소박함 사이에서 탐욕은 금방 눈에 띈다. 사람을 사냥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인간을 사냥하는 것은 여러모로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온갖 쓸만한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데다 식욕 성욕을 모두 채울 수 있다. 슬프게도 이 '대재앙 이후'를 다룬 소설 속의 세계는 지금 여기와 무척 닮아 있다. 더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사람이 살겠다고 주장하는데 누가 말릴 것인가. 하물며 가장 현실적인 방법들을 택한다는데. 

  그리고 한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지금껏 해온 일들 중에 가장 용기를 낸 일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오늘 아침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삶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다. 살아야 할 이유란 게 있는가? 그는 인간이 '굳이' 생존을 유지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가 이렇게 회의적인 인간이 된 동기로는 대재앙을, 그리고 부인의 자살과도 같은 가출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볼 점이 있다. 그는 대재앙 이전에는 행복했는가? 그는 모범적인 중산층 남자였는가? 아무도 모른다. 매카시는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도 코맥 매카시 자신일 '아버지'의 앞에 펼쳐진 지옥도는 그의 내면이 예전부터 바라보고 있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허무가 표면 위로 드러났을 뿐이다. 이 폐허는 소설가의 내면이므로 <로드>는 대종말을 다룬 SF가 아니다. 이 폐허는 고도를 기다리던 두 남자가 죽어 파묻힌 숲이다. 부조리 연극의 배경이고 아버지 자신의 내면이며, 그가 어른이 된 이후 줄곧 살아왔던 바로 그 세계다. 그는 자살에 대해 생각한다. 아들이 아니었다면 이미 예전에 자신을 향해 총을 쏘았을 것이다. 

  합리적으로 보았을 때 아들은 그의 짐이다. 너무 어려서 아버지인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살아야 한다. 아들은 추호도 쓸모없는 완전한 짐이라서 그에게 삶의 의지를 북돋운다. 그가 아니면 아들은 처참하게 죽어갈 테니까. 그는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이 열성이 어디서 오는지는 그역시 모르며, 심지어 신기해하기도 한다. 이 무기력한 존재는 그의 신비다. 그는 오직 아들을 지켜주기 위해서 살아남는다. 그가 윤리를 지키는 이유 역시 아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그의 모든 것이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들은 거의 무정부적인 폭력과 연관되어 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보수적이고 자기보호적인 인간이다. 그의 작품들은 거의 다 격렬한 폭력과 거대한 허무를 동반한다. 그 허무가 이 세계와 절묘하게 겹쳐지면서 그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 그에게 <로드>는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이해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소설 전체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로드>가 정말로 그의 고백이건, 아니면 어떤 상징이건간에 맥카시는 하나의 희망을 발견했다. 비록 그 희망이 자신의 것이 아니더라도, 그래서 그 희망 안으로 결코 들어갈 수는 없을지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원서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son 대신에 boy라고 불렀다) 그는 그 희망을 신뢰한다. 이 결론은 슬프다. 그러나 이 슬픔이야말로 코맥 매카시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대한의 것이다.

  영화는 원작을 옮겨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과연 재로 가득찬 풍경은 재난 영화를 자주 만든 헐리우드의 위력이 느껴진다. 비고 모텐슨의 연기도 좋았다. 때에 절은 잠바와 꾀죄죄한 수염 속에서 빛나는 눈빛만으로도 그의 열성이 느껴진다. 그도 아들이 있어서일까. 어쨌든, 좋은 비주얼과 좋은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원작과 큰 차이를 갖고 있다. 영화에서는 과거 회상 장면이 등장한다. 아버지는 재난 이전에는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무너진 현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아내를 도울 수 없었던 무기력함이 그를 무표정하게 만든 것이다. 그는 원래 친절하고 강직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아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다. 영화 속의 아버지는 코맥 매카시가 아니다. 영화가 원작의 스토리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서 적절한 연출과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는데도 어딘가 가볍게 느껴진다면, 아마 그때문일 것이다. 영화 역시 지옥을 헤쳐가는 부자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원래부터 세계를 믿지 않던 남자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는 장면'은 결국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만든다면 누가 어울릴까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본 <스토커> 생각이 났다. 이미 죽어버렸지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면 그 지옥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더 깊이 잠겨들듯이.

-외국소설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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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vs 영화 

원작- 잉글리시 페이션트 (마이클 온다치)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 (안소니 밍겔라)

 

          

내가 사막이 되면, 내 안에 사막을 가질 수 있는 거겠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안소니 밍겔라는 원작이 좋을수록 그에 비례한 좋은 영화를 만드는 재미난 특성을 가진 감독이었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서 원작의 '퀄리티'를 가늠한다면 보통은 들어맞는다. 그리고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안소니 밍겔라의 최고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밍겔라 특유의 감성적인 장점과 더불어 평소의 그답지 않은 특징이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 무척 집중했던 이 감독은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는 핸들을 반쯤 놓아 버린다. 등장인물들의 전후사정은 선명히 드러나지 않고, 삼각관계에 빠진 사람들은 힘싸움을 벌이지만 그다지 절실해 보이지도 않는다. 미스터리가 있고 로맨스가 있는 시대극임에도 밍겔라 감독은 스토리에 압력을 넣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들은 호소력있는 영화 캐릭터 대신에 눈앞에 있는 인간의 말과 몸짓밖에 볼 수 없다. 이 영화는 그 유명세에 비하면 확실히 불친절한 축에 속한다. 그러나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이런 불친절한 영화들에 다소 익숙치 않은 사람들마저 반하게 만드는 매력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랄프 파인즈와 월렘 데포는 사막 속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서사에 버금가는 무게를 전달한다. 랄프 파인즈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길 때, 관객들은 결코 알아낼 수 없을 이 남자의 과거 속으로 초대받는다. 월렘 데포가 누군가를 주시할 때는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끝없이 이야기를 해줄 것만 같다. 이 남자들은 욕망하는 듯, 미워하는 듯, 사랑하는 듯 싶지만 정확히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들은 침묵함으로써 인물이 아닌 오브제가 되고, 그대로 사막 풍경의 일부가 되어 거꾸로 사막을 자신의 내면 속으로 불러온다. 고독을 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침묵이다. 그리고 이 침묵들 속에서 줄리엣 비노쉬가 종종 새처럼 날아오른다. 한번은 정말로 공중에 떠오르기도 한다...

원작소설은 영화가 어렵다고 생각한 분들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소설을 읽고 나면 왜 영화가 그토록 침묵했는지 알 수 있다.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신기루의 폭풍이다. 시점이 변하고 주체가 바뀐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듯 싶다가 갑자기 사막의 풍경이 펼쳐진다. 누군가의 과거가 플래시백처럼 번쩍 나타났다가 꿈처럼 끝을 흐리며 사라지기도 한다. 실체가 아니라 영상 혹은 흔적들이다. 배경과 인간, 과거와 현재가 예고 없이 섞여드는(그래서 어렵다고 느낄 수 있다) 이 소설 속에서 끝내 이루어지거나 완결되는 것은 없다.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뭔가를 잃어버렸음을 알지만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망 역시 거의 품지 않는다. 절망도 희망도 이들을 비껴 지나가고, 다시 남은 것은 사막의 풍경이다. 모든 감정과 욕망을 흡수하고도 꿈쩍하지 않는 이 세계의 무자비한 황홀함. 알마시가 가지고 다니는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자꾸 등장하는 것은 작가의 질문인지도 모른다. '이 신기루 같은 현재들이 쌓여서 저렇게 단단하고 굳건한 역사가 발생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질문에 함께하기 위해서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주위를 둘러보아야 한다. 지금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누구인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신기루의 한 형태는 아닌지를. 

아참, 저 혼란스러운 신기루 폭풍은 정말로 아름답다. 

 

-외국소설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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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vs 영화 

원작- 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카포티)

영화- 카포티 (베넷 밀러) 

 

          

 

-<인 콜드 블러드>가 번역돼 나왔던 2006년에 나는 가난한 학생이라 책 한 권 사는 데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딱히 고집스러운 취향도 없어서 사람들이 입모아 칭찬하는 책만 쫓아다녔다. 그렇게 읽게 된 책들 대부분이 만족스러웠고 <인 콜드 블러드>는 대단히 그랬다.

1959년 미국 캔자스주 한 농장의 일가족 4명이 두 남자에게 살해당한다. 신문에서 기사를 읽은 트루먼 카포티는 직감적으로 '될 이야기'임을 알아채고 사형선고를 받은 두 살인자를 취재하러 나선다. 소설이자 저널인 <인 콜드 블러드>는 그렇게 탄생하고, 카포티 인생에 날개를 달아준 작품이 됐다. 그 구원의 책을 쓴 과정에 또 만만치 않은 드라마가 있어 그 얘기만으로 한 편의 영화가...

작가가 제아무리 실감나게 그려놓은 인물이라도, 눈 앞에 살아 숨 쉬는 인간의 강력한 존재감을 어떻게 따라갈까. 그 편견이 가볍게 배반당한 것이, '페리'가 끔찍할 정도로 가까이 나한테 와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끝도 없이 나를 장악해버려 낭패감마저 들었다. 책을 읽었을 땐 감탄했지만, 영화를 본 후엔 비난했다. 카포티가 살인마에게 접근한 방식과, 그 목적이었던 원고, 징그러운 탐욕이 못마땅해서. 어떤 소설들, 아니 많은 소설들이 타인에게 빚을 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범죄 수준이라는 생각 때문에. 지금와서는 그건 그냥 귀여운 반응에 불과했다는 생각하지만.

경외심을 느낀다. 인생도 작품도 지독하게 설계하고, 연출하고 그 결과물이 무자비하게 눈부셨다는 것은. 그것을 직감하는 아찔한 순간의 환희와 광기가 영화의 절정이다. 그리고 이제와서 엉뚱하게도 일을 하려면 저만큼은 해야 되지 않겠냐는, 자기계발의 기회로 삼고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든다. <인 콜드 블러드>를 읽고 한참 동안 떨쳐내기 힘들었던 스산함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이제 기억으로만 남은 나는 감정이 무디고 무딘 3년 차 주부고, 한글로 옮긴 이 책의 제목은 내 남편의 별명과 같다.

  

-어린이MD   이승혜 님의 특별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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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vs 소설 

원작- 마이너리티 리포트 (필립 K. 딕)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스티븐 스필버그)

 

          

 필립 K. 딕 앞에서 해선 안될 말

  

 -그럭저럭 먼 미래. 앤더튼 국장은 범죄를 미리 예측해서 예비 범죄자를 잡아 가두는 경찰이다. 그는 이 범죄 예측 시스템을 신뢰한다. 세 명의 예언자 중에 두 명 이상이 같은 결론을 내리면 범죄는 실행된 것으로 간주된다. 세 예언자 중 한 명이 '범죄 불성립'의 영상을 보여주었을 경우 이 법 집행은 33%의 틀렸을 확률이 있지만, 이런 '마이너리티 리포트(소수의견)' 사건은 발생 자체가 거의 없다. 따라서 발생 확률과 틀렸을 확률을 곱하면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사건이 일어난 뒤에 지루한 재판 공방을 벌이면서 잘못 판결을 내릴 확률보다는, 차라리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묵살하고 예비 범죄자를 잡아두는 쪽이 확률적으로 안전하다.

  그런데 위 얘기를 들으면 어딘가 미심쩍다. 확률적으로 안전하다니. 이 범죄 예방 시스템은 절대적인 안전 체계를 구축하기 위함이 아닌가? 여기서 다시 확률이 등장하면 이 시스템의 순결함은 어떻게 되나? 그리고 확률이 등장해 버린다면, 온갖 인간적인 것들, 감정, 음모, 욕망들 역시 이 시스템에 영향을 끼치지 못할 이유가 없잖은가? 절대 체계가 아니지 않은가? 아니, 절대 체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인간이 관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오류의 투입이 아닌가? 우리는 본의 아니게 목숨을 걸고 도망치는 앤더튼 국장을 따라가며 이 질문들을 함께하게 된다... 소설이 좀더 그렇다. 왜냐하면

  원작에는 톰 크루즈가 안 나오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앤더튼 국장은 피로에 쩔은 배불뚝이 중년남이다. 본의아니게 음모에 휘말린 것을 알고 허둥대며 도망친다. 왕년의 실력을 깨워내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그는 현장에서 뛰는 경찰이 아니다. 그는 완벽해야 하는 시스템의 신봉자였고 그 시스템의 어딘가로부터 배반당했으며, 그 순간 자신이 얼마나 거대한 괴물을 만들어 내었는지 깨닫는다. 그는 내내 힘겨워하고 후회하고 의심한다. 애당초 미래를 볼 수 없는 인간은 그 어떤 데이터를 통해서도 여전히 미래를 완벽히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 그러나 이 결론을 인정하려면 자기자신의 과거부터 부정해야 한다. 수없이 처넣은 인간들과 '지극히 합리적이었던 나 자신'. 즉, 서구 합리 문명이라는 매트릭스 안에 빠진 불쌍한 인간. 필립 K. 딕은 우울한 중년남 앤더튼을 거의 지옥까지 밀어넣는다. 그때 같이 위기에 빠지는 자들은 바로 독자들이다. 합리적이고 합목적적이라 믿고 있는 시스템 외에는 아무 가진 것이 없는 자들. 앤더튼은 우리의 친구이고 우리를 대신해서 지옥 구경을 잠시 한다. 그러니 필립 K. 딕을 조심하시라. 그는 유머와 재치가 넘치지만 '합리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엄청 화를 낸다. 왜냐면 그거 다 거짓말이니까. 이 단편집을 포함한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서구적 합리를 신봉하는 놈치고 제대로 된 놈이 없다.

  ...그렇다면 톰 크루즈가 나온 영화는 어떨까. 스티븐 스필버그가 대충 만들었을 리는 없다. 물론 '간지쟁이' 앤더튼 국장은 사건의 실체를 찾아가는 순간에도 철학적 고찰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이걸 폄하할 생각은 없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정해져 있다. 적절한 액션 씬을 유지하면서 음모를 진행하려면 생각보다 시간이 빠듯하다(생각보다 이 영화는 액션 장면의 비율이 높다. 총질 주먹질을 덜 할 뿐이다). 따라서 앤더튼은 의심할 시간이 없고, 결국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불합리한 시스템은 앤더튼의 합리성에 의해 고발당한다. 필립 딕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영화에서는 더 나은 합리가 옛날 버전의 합리를 정복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액션영화이면서 동시에 뭔가 있어보이는' 영화를 만들고픈 유혹에 빠지지 않은 것뿐이다. 스필버그는  '톰 크루즈로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원작의 미래 예측 시스템을 가져다가 권력암투와 미남 액션을 잘 버무린 괜찮은 작품이다. 타겟이 분명하고 연출은 그에 따라 철저히 합목적적이다. 재미있는 영화... 잠깐? 합목적적이라고? 당신 그거 필립 딕이 얼마나 싫어하는...

 

-외국소설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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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3-29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마지막에 결국 웃게 만들어주시는 엠디 님.
저는 근데 아마 '액션영화이면서 동시에 뭔가 있어보이는' 영화로 보이지 않아서 이 영화를 안 본 모양이에요. 스필버그에게 따 당한 관객. ㅋ 톰 크루즈의 왠지 미욱해보이는 - 저에게만 그렇겠지만 - 인상도 늘 별로구요.
하지만 소설은 은근 재미있어 보이네요.

외국소설/예술MD 2011-03-29 18:41   좋아요 0 | URL
소설 재미있어요. 저는 PKD 좋아합니다 ㅎ.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그의 단편집 중 하나인데요, 수록된 단편들은 웃긴 것도 있고 심각한 것도 있어요. 주로 암울한 소재들이지만 재미들이 있죠. 장편들은 좀 루즈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저는 좋아합니다).

PKD의 경우, 역시 가장 유명한 사례는 블레이드 러너구요. 원작소설/영화 모두 좋았던 사례로 늘 꼽히기도 하죠. '있어보이는 액션영화'이기도 하겠군요. 그러고보면 토탈리콜도 있고.. 아... 그걸 할 걸 그랬나? -_-;;;
 

원작 vs 영화 

원작- 렛 미 인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영화- 렛 미 인 (토마스 알프레드슨/ 스웨덴 버전)  

 

            

피와 눈송이

 

 
-생각해보면 이 책을 읽는 동안 사랑에 대해 거의 떠올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들 성별과 연배와 종족을 뛰어넘는 사랑에 감탄한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다들, 그 하얀 눈에 튀던 피에 반한 거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어감부터 멀어보이는 스웨덴의 교외. 블라케베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시작은 하얀 눈송이고, 마지막은 아시는 대로 커다란 수조 속에서 (붉은 연기처럼) 피가 느리게 퍼져나가는 장면이다. 아니 기차가 떠났고, 또 눈이 내렸던가.

이제와서는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특히나 그 기억이 제법 찬란한 (그래서 희미한, 노출이 많이 들어갔으니까) 종류라면? 잊기는 쉽지만 기억하는 것은 부단한 노력을 요하므로, 게으른 사람들은 통상 말해지는 황홀을 모두 잃어버리고 마는 게 아닐까? 나 또한 그렇고, 그래서 아쉽다.

묽게 퍼지던 피처럼, 녹아 사라져버리는 눈송이처럼, 그런 성질을 가진 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일 테다. 당시엔 감각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쏟아져나와 아우성치는 풍경은 얼마나 아름답고 또 끔찍했던가 이 말이다. 용솟음치는 기억들이 거창하고 담백하지 못한 어휘와 얽히는 장면들.

너와 나의 사랑, 흘러가버린 기억, 기억을 품은 공간과 그 공간 속에 무수하던 인간들의 속삭임. 어린 사내아이를 탐하는 늙은이, 얼큰하고 부패한 실업자, 다소 헤픈 여자의 우는 소리와 철분 섞인 도시 먼지가 나뒹구는 느낌이 영화에서는 꽤 탈색되어 있는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이 끔찍한 전제를 깔고서도 오히려 순결해보이는 영화에 감탄했고 찬양을 바쳤던 게 아닐까? 나 또한 이 영화를 사랑하지만 말이다. 소설에는 고요하고도 시끄러운, 파랗고도 빨간, 차갑고도 뜨거운 이야기가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들린다. 양쪽 모두 좋지만 소설에 영화보다는 좀 더 찐득한 피가 흐른다는 얘기다. 영화가 첫사랑이라면, 소설은 조금 오래된 연애라고 말해보는 건 어떨까.

해서 이 사랑 같으면서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통째로 사랑인 이야기의 정체는 가늠하기 힘들게 되었다. 인터뷰를 보아하니 아마 작가도 잘 모르는 듯 싶다.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연처럼 일어나 사람들을 감흥시킨다. 그런 것들은 보통 기적이라고 불린다. 대수로울 것 없으면서도 소중한 기적이란 게 세상에 있다면, 이게 바로 그런 이야기다. 뱀파이어와 관련된 것들은... 취향에 따라 취사선택하면 되시겠다

 

-만화MD 김재욱 님의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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