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티 사말란티



마리 킴



이강욱



펜티 사말라티, 마리 킴, 이강욱
지난주에는 경복궁 근처에서 전시들을 봤다.
펜티 사말란티(공근혜 갤러리 http://www.gallerykong.com),
마리 킴(학고재 갤러리 http://www.hakgojae.com/ko/)
이강욱(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http://www.arariogallery.com)
인상을 가볍게 정리하자면
장인, 연예인, 예술가 순서이다. 너무 단순하게 정리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인상이 그렇다.
펜티 사말란티의 사진은 완벽한 구도와 아름다운 프린트가 일품이다.
나름의 고요한 서정성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스트레이트 사진의 구성 미학), 안셀 아담스(프린트의 미적 성취), 로버트 프랭크(새로운 감각)에 견줄 수 없는 것은 독자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무엇 하나도 새로운 것은 없다. 비유하자면 학교에서 충실히 공부한 어느 성실한 모범생과 같은 사진이랄까? 그러니까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이 미적인 문제의식이든 사회적 문제의식이든 철학적 문제의식이든 보다 본질적인 것에 대해 고투하고 사투한 흔적이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이 말이 그가 쉽게 사진을 찍고 쉽게 작업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배울 것이 많은 사진을 보여주지만 보는 이에게 새로운 질문과 감각을 던지지 못한다. 물론 모든 사진가가 예술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의 작품들은 훌륭한 사진이지만 훌륭한 예술과는 결이 다르다. 아마 이 노장 사진가는 애초에 예술을 하기보다는 좋은 사진을 찍는 것이 목표였을 것이다. 자신을 장인이라 밝힌 그의 고백대로 사진의 장인, Master of Photography, 이것이 그의 목표였다면 그는 그 목표를 충실히 이루어 내었다.
마리 킴의 작업은 너무 쉽게 읽히고 가볍다(부정적 의미에서). 즉 정신적, 기술적 차원에서 노력과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대표 이미지라 할 수 있는 아이돌(eyedoll)은 나라 요시토모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고 그녀의 철학은 대학 학부 교양서적에 써 있는 몇 문장을 어설프게 따온 수준이고 그녀의 미적 방법론은 얄팍한 키치적 팝아트 요소들을 조합하고 있다. 이마저도 앤디 워홀처럼 소위 “팩토리"에서 조수들을 통해 작업한다고 한다. 앤디 워홀이란 작가는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미학적 문제의식과 ”팩토리“라는 작품 제작방식이 가지는 비전통성 그 자체가 그의 작품의 내적구성 요소이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워홀의 작품에서 완성도, 수공예성 따위는 그의 작품을 논함에 있어서는 무의미한 것이다. 이미 작품의 핵심이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점 이후의 훌륭한 팝 아티스트들이나 현대 미술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마리 킴은 전혀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기하지도 “못하면서” 손쉬운 방법론을 택하고 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브랜드가 되고 싶어 했고, 또 그리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애석하게도 명품 브랜드는 분명 아니다.(좀 다른 이야기지만 몇 번에 걸쳐 학고재에서 봤던 좋은 작품들을 떠올려 볼 때 왜 이런 작품을 학고재에서 전시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에서 전시되고 있는 이강욱의 작품은 인상적이었다. 물론 거장의 반열에는 아직 이르지 “않은” 갓 불혹에 이른 젊은 작가지만 작품이 매혹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지오메트릭폼 시리즈” 보다는 근래의 작업인 "제스쳐 시리즈"가 더 좋았다. 사실 1층에서 “지오메트릭폼”을 볼 때에는 “진지한" 젊은 작가들이 그러하듯 이미지보다 사상(개념)이 더 앞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만다라, 부분과 전체, 프랙탈의 개념들) 2층에 전시된 “제스쳐 시리즈”를 보고서는 언어로 포획할 수 없는, 이미지 자체에서 발생하는 분명한 감각적 잉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정말 가까이 작품에 다가가서 봤는데 가까이서 볼수록 더욱 매혹적이고 "만지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나야 회화를 전공하지 않았으니 방법론은 잘 모르겠으나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고, 단순히 노동의 투입량을 넘어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새로운 감각의 차원이 분명히 감지되었음을 말할 수 있다. 전시를 보기 전 작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는데 작품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집에 와 찾아보니 역시나 이미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고 있는 작가여서 내 눈이 아주 동태눈은 아니구나하고 안도하기도 했다. 이강욱 작가는 이번 작업보다 다음 작업이 더 기대되는 작가다.(해서 여유만 된다면 정말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 작업을 보면 아직 완전히 개화했다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문제를 붙잡고 여전히 고민하고 정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몇 개의 수학의 난제 중 하나를 붙잡고 몇 년에 걸쳐 풀고 있는 어느 수학자의 엄청나게 긴 풀이 과정의 일부를 보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것을 그의 작품을 통해서 느꼈다. 하지만 뭐, 사람일 어찌될지 모르니 더 두고 볼 일이다. 김승옥 같은 이도 그렇게 글을 접었으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기회가 된다면 꼭 사석에서 한번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일종에 팬이 되었다랄까.
사실 이상의 주제넘은 이야기는 순전히 내 알량한 지식에 기초해서 떠들고 있는 것이다. 내 구미에 맞는 작품에 대해서는 후한 평을 그렇지 못한 작품에는 박한 평을 함부로 던지고 있는 것이다. 작업으로 밥벌이를 유지하고 있는 그들에게 내가 어찌 배울 것이 없겠나.
펜티 사말란티의 구도자적 장인정신, 마리 킴의 응용력과 마케팅 능력, 이강욱의 고민하는 힘과 예술적 감각. 그럼에도 이 같은 오만방자한 평에 대해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들을 통해 내 지향과 취향을 보다 확고하게 다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니 혹 읽다가 불쾌했다면 이해해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