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찢어지게 가난했고, 엄마는 머릿속에 오직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생각뿐이었죠. 과부가 되자 그 땅, 태평양의 범람으로 경작이 불가능한 논을 사들여 20년 남짓 동안 헛된 노동을 쏟아 부었어요. 방파제가 바닷물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자 엄마는 더는 온전할 수가 없었죠. 말하자면 약간 제정신을 잃게 된 거예요. 우리는 모두에게 버림받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죠. 우리한테 땅을 팔아먹은 공무원들이 부자가 되는 동안, 엄마는 짐승처럼 일만 하다가, 결국 가난하고 성마르고 혼자인 사람이 돼버렸어요. (<뒤라스의 말>, 28쪽)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뒤라스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뒤라스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뒤라스 가족이 식민지 인도차이나에서 겪은 궁핍한 삶이 작품 정서를 지배한다. 식민지의 빈한한 삶, 섹스, 돈, 연인, 엄마, 오빠들 등등 이 작품으로부터 34년 뒤에 쓰인 <연인>과도 소재와 내용 면에서도 비슷해 같은 뿌리를 지닌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공쿠르상 수상작인 <연인>에 비해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덜 유명한 편인지만 이 작품은 어떤 면에서는 좀 더 직접적이고 솔직하게 뒤라스가 자신의 가족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뒤라스의 작품 중 드물게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식민지 정책에 전면적으로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배경은 캄보디아 남중국해 캄 평야- “왠지 촌스러운 남중국해라는 이름 대신 어머니가 고집스레 태평양이라고 부르는 바다”가 있는 이 평야에서 십대 소녀 쉬잔과 오빠 조제프, 그리고 어머니는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한때나마 좋은 시절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어머니 혼자 자식 둘을 키우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억척스러운 어머니는 남편이 사망하고 전직 교사인 데다가 아이 둘을 부양한다는 조건 덕분에 식민지 토지국에 토지 불하 신청을 할 수 있는 우선권을 얻는다. 어머니는 십 오년 가까이 모은 돈을 쏟아 부어 땅을 사고 방갈로를 짓고, 불하지 절반에는 작물을 심는다. 어머니는 희망에 부푼다. 첫 수확을 하면 방갈로를 짓느라 들인 돈을 거의 메울 수 있으리라…….
그러나 7월의 바닷물이 평야로 밀려왔고, 수확을 앞둔 작물들은 몽땅 물에 잠겨 버린다. 그래도 어머니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바닷물이 그해에만 특별히 세게 들이닥친 거라 믿는다. 그리고 평야 사람들 모두가 말리는데도 이듬해에 다시 시작한다. 바닷물도 다시 들어온다. 사실 어머니가 불하받은 땅은 방갈로를 지은 5헥타르를 제외하고는 경작이 불가능한 땅이었다. 어머니는 십 오년 가까이 모은 돈을 태평양 파도 속에 던져 넣은 것이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이번에는 평야의 농부 수백 명을 모아 제방을 쌓는다. 그러나 그 제방은 태평양 파도의 가차 없는 공격으로 단 하룻밤 사이에 무너진다. 어머니에게 남은 것은 빚더미와 경작이 불가능한, 소금과 물뿐인 사막 같은 땅뿐이다. 아니, 딸과 아들 두 자식도 있다.
아들 조제프는 어머니의 기둥이자 버팀목이자 또 다른 삶의 희망이다. 그런데 쉬잔은 어떤 존재일까. 어떤 의미로는 쉬잔도 어머니에게 삶의 희망이다. 그런데 그 희망의 빛깔은 조제프에게 거는 기대와 조금 다르다. 어머니는 딸을 보며 생각한다. 딸이 부잣집 남자를 만나 이 집안을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으리라. 쉬잔 또한 그런 자신의 가치랄까 의무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언젠가 다리 옆에서 쉬잔을 본 남자가 차를 세울지도 모르고, 그녀가 마음에 들어 도시로 함께 가지 않겠냐고 물어볼지도 모른다고. 조제프 또한 방갈로 앞에 차가 멈춰 서기를 기다린다. 영국산 담배를 피우는 진한 화장에 옅은 금발의 여자가 내려 자신을 데리고 떠나줄 그날을. 거칠고 공격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리고 예민한 조제프는 쉬잔과는 말이 잘 통하는, 숨을 쉬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나 두 남매는 이 끔찍한 가난과 어머니의 망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저 부유한 남자 또는 여자가 나타나 자기들을 구원해 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부유한 조 씨가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조 씨는 식민지에서 일확천금에 성공한 전형적인 투기꾼의 외아들이다. 그러나 ‘조 씨는 창의적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터무니없이 어설픈 아들’로 ‘아버지의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을 유일한 상속자였지만 상상력이라곤 눈 비비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사람’(65쪽)이다. 조 씨는 쉬잔에게 한눈에 반해 매일 같이 방갈로를 드나든다. 조 씨와의 만남은 이 가족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들은 조 씨를 두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희망을 품는다. 어머니는 조 씨가 하루 빨리 딸한테 청혼하길 기다린다. 어머니는 마음이 급하다. 쉬잔이 결혼만 하면 조 씨에게서 돈을 구해 방조 제방을 다시 쌓고, 방갈로 공사를 마무리 하고, 지붕의 이엉을 새로 이고, 자동차를 바꾸고, 조제프의 이를 치료해 줄 생각이다. 조 씨와의 결혼이 그들이 평야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아는 쉬잔은 조 씨가 끔찍하게 싫으면서도 그의 물질공세를 외면할 수 없다. 조제프는 조제프대로 조 씨를 혐오하면서도 그가 가족을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못한다. 이 가족은 과연 조 씨의 도움으로 이 지긋지긋한 평야에서의 삶을 끝내고 가난에서 벗어나 도시로 떠날 수 있을까?
내 삶은 엄마를 관통해서 흘러왔어요. 엄마는 내 안에서 살아 있다 못해 강박이 되었죠. (<뒤라스의 말>, 29쪽)
엄마는 극성스럽고 미친 사람이었죠. 오직 엄마들만이 그럴 줄 아는 것처럼, 한 인간의 존재 속에서 엄마란 그가 만난 사람들 중에 결단코, 가장 이상하고 예측이 불가하며 파악되지 않는 사람일 거예요. 우리 엄마는 건장하고, 강한 여자였어요. 어쨌든 우리가 놓였던 그 음울한 삶의 국면으로부터 언제든 우리를 보호할 준비가 돼 있었죠. (<뒤라스의 말>, 30쪽)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가난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딸을 성(性)적으로 이용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분명 <연인>이 떠오르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멍에와도 같은 가족의 굴레를 생각하게 된다는 점에서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떠올렸다. 어머니를 그린 방식 때문에 뒤라스의 어머니는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읽고서 딸과 결별했다고 한다. 그러나 쉬잔은(뒤라스는) 분명 엄마를 사랑했다. 조제프 또한 그랬다. 그러나 이 어린 자식들에게 삶의 무게는 너무나 가혹했다. 어머니도 분명 자식들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딸을 부잣집 남자에게 팔아버리듯 결혼시켜서 가난을 탈출하려는 그런 방법밖에는 없었을까. 어머니의 광적인 희망과 그 희망을 해결하려는 방식이 쉬잔과 조제프에게는 너무나 가혹해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함이 밀려온다. 마치 태평양을 막겠다고 세운 그 볼품없는 제방이 거대한 파도에 힘없이 스러지듯이, 가혹한 삶 앞에 그들 가족이, 아니 그 두 남매가 맨몸으로 부딪히는 듯해 마음이 아파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쉬잔은 어머니를 원망하지 못한다. 어머니 곁을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어머니를 미워하지 못한다. 조제프 또한 그렇다. 사랑과 미움이 뒤섞인 관계 가족- 그들이 보기에 어머니는 ‘삶을 무한히 사랑했고, 삶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치유 불가능한 희망이 지금의 어머니’를 만들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바로 그 희망에 절망’(145쪽)한 것이다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희망하는 것을 끝없이 기다리는 인간의 삶, 그리고 무너져버릴지언정 다시 세울 희망이 존재해야만 살아갈 이유가 있는 인간의 삶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형벌 같은 삶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가련하지만 장엄한 인간의 모습이 어머니의 삶에서 엿보인다. 뒤라스도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