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콘래드의 작품은 처음 읽는다.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는 작가 중 하나였다. 그래도 언젠가는 읽어야 할 작가로 마음에 새겨두기는 했었고, 드디어 그의 작품 중 재미있을 것 같은 <비밀요원>을 읽었다. 스파이가 주인공이라니, 흥미진진할 것 같지 않은가. 실제로 이 작품은 재미있다. 단, 자극적이면서 이야기가 긴박하게 흘러가고 숨막힐 듯한,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를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이 작품이 그다지 재미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존 르 카레의 작품처럼 스토리가 천천히 진행하면서 이런저런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고급스러운 스릴러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도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다.
작품은 “벌록 씨는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명목상으로 가게를 처남에게 맡겼다. 그것은 손님과 거래를 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라는 뜻밖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작품이 스릴러라는 사실을 모르고 읽는다면 런던을 배경으로 한 여느 문학 작품과 별반 다르지 않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윽고 이어지는 “벌록 씨는 외형적으로 벌여놓은 장사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부인이 처남을 돌보고 있었다. 문은 낮에는 닫혀 있었고, 밤에는 조심스럽고 수상쩍게 약간만 열려 있다.” 이 문장으로 몇 가지 암시를 얻는다. 낮에는 닫혀 있고 밤에만 수상쩍게 열리는 가게, 이런 가게를 외형적으로만 유지할 뿐, 장사에 통 관심 없는 벌록이라는 인물. 촉이 좋은 독자라면 이 벌록이 문제의 ‘비밀요원’이겠구나 감을 잡게 된다. 그런데 벌록을 제외하고 이 가게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인물들, 그러니까 그의 아내와 장모, 처남 등은 조금 의아하다. 이 조그만 가게를 배경으로 범죄가 일어나는 것일까? 벌록이 신분을 위장하려고 결혼한 것일까? 아니면 모두가 평범한 가족으로 위장한 범죄조직인가 등등 온갖 생각을 하게 된다.
조금 더 읽다 보면 아리송해진다. 이 벌록이란 인물은 도무지 스파이 같지 않다. ‘살찐 돼지처럼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몸집이 큰 벌록 씨’라니, 아무리 위장이라고 해도 지나치다. 뚱뚱한 그의 몸에서는 게으름이 뚝뚝 떨어진다. 스파이 같은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기엔 그 비대한 몸이 크게 방해될 것 같다. 그는 어찌나 게으른지 ‘단순한 선동가나 노동 연설가, 혹은 노조 지도자초차 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 것들은 그에겐 너무나 귀찮기만 하다. 그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형태의 편안함’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의 인상이 썩 좋은 것도 아니다. 그는 ‘소규모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고용주와 비슷한’ 외모를 갖고 있는데, 그런 그에게는 ‘기술자가 아무리 부정직한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습득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가 있다. ‘악과 어리석음, 인간의 저질적인 공포를 이용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분위기’로 ‘도박장이나 매음굴 업주들, 사설탐정과 흥신소 직원들, 사이비 특허 약품 발명가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도덕적 허무주의의 분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주인공에게서 어디 한 부분 매력을 느낄 만한 요소가 없다. 책을 조금 더 읽어 나가면 실제로 벌록은 런던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대사관의 비밀요원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가 운영하는 가게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 대신 그곳에서 은밀하게 무정부주의자들의 모임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가관인 것은 그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 혁명을 일으키고자 만나는 또 다른 스파이들, 그러니까 런던에서 활동하는 혁명주의자들 모두가 하나같이 이 모양 이 꼴이라는 것이다. 벌록에게 명령을 내리는 러시아 대사관의 블라디미르는 살찌고 게으른 그를 질타하지만 그 자신도 입만 살아서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리는 인물이며, 게으르기 짝이 없는 데다가 여자 따라다니는 일에만 몰두하는 오시폰, 잔인한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테러리스트이지만 실제로 테러리즘을 실행해 본 적은 없는 윤트, 폭탄을 옷 속에 넣고 다니는 열등감 덩어리 폭탄 제조업자 교수 등 하나같이 그 ‘위대한’ 대의명분을 수행하기엔 부족하기 짝이 없고 뒤틀린 인간들일 뿐이다.
이들의 뒤를 쫓는 경찰은 어떠할까? 경찰 부국장은 특정 혁명주의자와 친분이 있는 귀부인의 눈치를 보아, 그가 범죄에 연루되어 있음이 틀림없는데도 그를 비호하기에 바쁘다. 그렇다고 이런 부국장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사건을 캐내려는 히트 반장은 정의로운가? 물론 그는 자기 일에 부국장보다는 충실하다. 그러나 그 또한 이중 스파이를 포섭해 그로부터 정보를 캐내 자신이 출세하는 것에 가장 혈안이 되어 있다. 이 두 사람 모두 무정부주의자들이 혁명으로부터 시민과 사회의 안전을 지키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출세와 권력을 좇는 일에만 눈이 멀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벌록의 가족은 어떠한가. 책을 읽는 이들은 누구나 벌록이 신분을 위장하려고 아내 ‘위니’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위니라는 여성은 어떨까? 그녀에게도 벌록 씨가 상상하지 못한(게으르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기에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과거가 있다. 위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편안한 삶을 살고자 아무런 애정도 없는 벌록을 선택한다. 물론 위니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몸이 불편한 어머니와 지능이 모자란 동생 스티비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두 사람을 부양하려고 위니는 도무지 실체를 알 수 없지만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어 보이는 벌록을 선택한 것이다. 위니, 위니의 어머니, 그리고 스티비 이 세 사람은 벌록의 실체는 알지 못한 채 그의 겉모습만 보고 저마다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믿는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 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살아간다. 그러나 이 완벽하게 소통이 막힌 가족에게는 엄청난 비극이 닥친다.
<비밀요원>의 스파이 벌록은 블라디미르로부터 도시를 혼란에 빠뜨릴 엄청난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리니치 천문대를 폭파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실제로 천문대에서 폭파 사건이 일어난다. 이 작품에는 비참한 죽음도 있고 끔찍한 살인도 일어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런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는 스파이들의 숨 막히는 첩보전을 다루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허영과 위선에 찬, 게으르기 짝이 없는 무정부주의자, 혁명주의자들의 뒤틀린 생활과 삶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대의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그리고 그런 이들로부터 이 세계를 지키겠다며 정의를 운운하는 경찰 조직도 그들과 얼마나 다를 바가 없는지 보여주며, 이기적인 욕망으로 뒤틀린 인간들이 부르짖는 혁명이란 얼마나 비루하기 짝이 없는지를 쓰디쓰게 조소한다. 게다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지붕 아래 살아가지만 서로 진정한 교감이나 소통 없이 이루어진 관계가 얼마나 큰 비극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이 작품은 여실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