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사진 한 장 - 사랑하는 나의 가족, 친구에게 보내는 작별인사
베아테 라코타 글, 발터 셸스 사진, 장혜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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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뇔커는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병원을 나선다. 그전에 그는 루트 글란더에게 코트찬이 죽기 2주 전인 1월의 어느 하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날은 밤새도록 함박눈이 내렸다. 뇔커는 병원 문 앞에서 솜처럼 하얀 눈을 뭉쳐 큰 눈덩이를 만든 다음 허겁지겁 뛰어서 코트찬의 병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눈이 서서히 녹아 물이 되는 걸 지켜보며 물이 다시 눈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는 이런 변화에 큰 관심을 보였죠."
뇔커가 그날 일을 회상한다.
"사라지는 것은 없다는 깨달음이었을 거예요."
220p <마지막 사진 한 장> 中

"당신의 삶이 한 달쯤 남았습니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며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상상해보지 않았고,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누구에게나 죽음은 찾아온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베아테 라코타와 발터 셀스는 특별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죽을 준비를 하러 호스피스를 찾아 들어온 사람들의 生과 死를 찍는 것이다. 살아있었던 순간과 죽고 난 순간의 얼굴을 담았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묶여 이 책이 나왔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후회한다. 해왔던 일보다, 해보고 싶은 일이 아직 더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의 삶을 내일이 없을 것처럼 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 나중에, 나중에를 읊조리지만,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나중에'는 없다. 오늘이라도 죽을지 모르는 시간만 있을 뿐.

어제 <그레이 아나토미 6>-4화를 보고 있는데, 이런 에피소드가 나왔다.  


82세의 노인이 닥터 슬론(성형외과 의사)에게 음경 보형물 시술을 하고 싶다고 찾아온다. 발기가 되지 않는 남자에게 발기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보조적인 시술이었다. 
아들은 반대한다. 나이가 많아 위험하다고 길길이 날뛰며, 그런 시술에 남은 예금을 써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노인은 화를 낸다. 나이가 들었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자고 싶은 욕망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고생해서 모은 돈을 쓰고 싶을 때, 내 행복을 위해 쓸 권리가 있다며 싸운다. 아들과 며느리가 양로원에 있으니,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다며 집으로 다시 모시고 들어가겠다는 말까지 한다. 노인과 자식은 냉랭하다.
닥터 슬론과 단둘이 있게 된 노인은 이런 말을 한다.


"애들은 이런 게 다 부질없다고 생각한다우. 난 정말 이 수술이 필요해요.
어느 날 일어나보면 모든 일들이,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갖고
손자를 갖는 그런 큰일들이 다 지나갑니다.
다 끝나는 거죠.
남는 것은 다 옛일들이고 미래는 얼마 남지 않아요.
내 아내가 죽고 20년까지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 싫었소.
그러다 어느 날, 어느 날 밤 빙고 탁자에 앉았지.
매리언과 함께 말이오.
그녀가 내 미래라오."


그는 살아온 날보다 살 수 있는 날이 더 적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싶기 때문에, 용기를 낸다. 비록, 내일 죽게 될지라도 오늘이 행복하다면 상관없다. 삶은 그런 것이겠지?

<마지막 사진 한 장>에 등장한 많은 사람이, 삶을 안타까워한다. 평생 고생만 한 사람도 있고,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다. 일만 하다가 인생을 돌아보지 못한 사람도 있고, 채 펴지도 못하고 죽는 아이도 있다. 자신의 존재를 잊어가며 죽어가거나, 피를 토하고, 먹지 못하고, 숨 쉬는 것도 힘들고, 의식이 없이 죽어간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자식과 화해하고, 헤어진 남편과 화해한다. 나를 용서하고, 타인을 용서한다. 며칠의 시간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기도 하고, 자신을 잊어버리며 죽고 싶지 않아 죽음을 빨리 부르기도 한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남은 시간을 살고, 추억하고, 기억한다.

영혼이 사라진 후, 육체만 남게 된 사진에는 경건함이 느껴진다. 한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온 마지막, 고통의 시간도 편안하게 마무리된다.
삶과 죽음, 죽음과 삶.
그들이 또 한 번 원하는 삶을 나는 살고 있다. 그것을 고맙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살게 된다면, 하고 싶은 일들을 수도 없이 말했다. 하지만,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죽는 순간까지 살려고 살았지, 죽으려고 살지는 않았다.
그 순간과 사연들이 살게 될 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같았다.
살아갈 자들은 죽어가는 자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그들을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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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건축 뒤집어보기 - 감성과 이성의 경계에서 유럽을 말하다
김정후 지음 / 효형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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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스에서 한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낸 것을 보았다. 왜 국가의 계획에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는 보금자리를 내 놓아야 하는 것이냐는 거였다. 그는, 보기드문 서울 속에 오래된 한옥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한옥이 주는 포근함과 정다움을 사랑하며, 그 역사에 애틋한 감정을 표현했다.
역사가 묻어나고, 대대손손 보존해야 할 한옥을 국가는 낡고 허름한 퇴물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새로운 건물을 지을 것이니 당장 나가라는 통보를 해 온 것이다. 그 외국인은 한국 정부의 이러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으며, 국민이 왜 국가의 계획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천박한 자본에 밀려 개인의 행복과 문화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보존물을 가볍게 치부하는 행태라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 뉴스를 보고, 남편과 나는 깊은 공감을 했고, 후진국스러운 국가의 의식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요즘,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는 이와 같다고 해야할 것이다. 쉽게 부시고, 쉽게 짓고, 쉽게 바꾼다. 사람의 편의와 행복한 생활의 영위가 아닌 '돈'이라는 가치를 좇아 국가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미래에 닥칠 사회에 끼칠 영향과 파장은 간과하는 것이다. 우선 국가는 '돈'과 '전시 행정'이 중요한 것이다.

요즘, 한강 둔치 곳곳에 퍼진 포크레인과 아무렇게나 파 올린 땅덩어리들을 보고 있자면, 아침 출근길마다 스트레스가 치솟는다. 영동대교 너머로 보이는 그 흉물스러운 모습은 누구를 위한 '르네상스'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고, 누구의 동의를 거친 것인지 알 수없는 무자비한 건설 현장에 서울 시민들의 따뜻했던 휴식처마저 빼앗겨버린 기분이다.
청계천 재건 또한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빼며, 만들어졌다.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한데 용역깡패들에게 쫓겨난 사람들의 행복은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았다. 서울시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내쳐졌고, 힘에 의해 밀려나 어디선가 떠돌고 있다. 결국, 청계천은 썩어가는 '수로'일뿐이고, 한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공간이 되었다.

21세기의 건축은 '재생'이 화두이다. 하지만, '재생'은 무분별한 '개발'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할 것이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각기 다른 의도로 건축물을 만들고, 재건하고, 프로젝트를 완성시켰다.
하나만 보지 않고, 넓게 봤다는 점에서, 그들의 모습은 본받을만 하다. 아무리 화려한 건축물이라 하여도, 그 속에 '이야기'가 없다면 사람들은 찾지 않고, 머무르지 않는다. 실제로 '유럽 건축 뒤집어 보기'에 등장하는 건물들은 건물 자체의 '가치'도 있지만, 모두 '어떤 이야기'와 '특별함'이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국가와 개인과 국민들의 결합으로 완성된 것들이었다.
'건축물' 하나에도 정부의 의식과 시민 의식이 숨어 있으며, 도전과 창의적인 생각이 꽃을 피운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물에 담긴 복합적인 의미와 건축물이 갖고 있는 사회적인 역할과 경제적 효과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영국의 <테이트 모던>, <다우닝가 10번지>, <다이애나 추모분수>, <세인트 폴 대성당> 등과 스코틀랜드의 <토버모리>, 웨일즈의 <헤이 온 와이> 이것들의 발상의 전환과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의 결합은 단기간에 발굴하고 개발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사회적 동의와 정책적인 결합이 잘 이루어져야 보여지는 형태가 아닌가 싶다. 특히 쇠락해 가는 지역의 활력을 불어넣고 경제적으로 활성화 시키는 것은 누군가의 작은 아이디어였다는 것. 그것은 삶의 터전을 모두 뜯어고치고,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존시키고 문화를 덧입혀 창출해낸 것이라는 것은 새로웠다. <토버모리>와 <헤이 온 와이>는 그렇게 탄생되었고, 넓게 보면 <테이트 모던> 또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벨기에의 <그랑플라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의 모습은 어떤가? 사람들이 그곳에 머무르는 자체로도 명소가 된다. 축제를 벌여 사람들의 발을 잡아 끌고, 광장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그곳이 빛나게 한다.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어떤가. 그 모습에 압도 당하기 충분하고, 건축물 형태 자체로도 매력적이지만, 시민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미술관에 갈 수 있는 그 분위기와 곳곳의 배려가 더 매력적이다. 미술관으로 통하는 다리나, 지하철 입구 모두, 미술관으로 가는 통로이다. '사람'이 찾아가기에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고 편안한 배려를 느낄 수 있다.

유럽의 건축물들은 화려한 플랜카드와 과대 광고의 부자연스러움이 아니라, 그들의 삶 안에 조용히 스며들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건축이 없음에도 머물고 싶고, 살고 싶은 곳에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취리히'는 화려한 멋 때문에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다. 옛 것을 보존하며,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기에 모두가 살고 싶은 그런 도시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도시들을 돌아보게 했다.

결국, 건축은 문화이고 예술이며, 사회적인 가치이다. 사람들이 찾고 싶어하는 도시와 건축물에는 결국 인간의 삶과 공존하며, 자연스럽게 스며든다는 핵심이 있다. 인공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결국 '사람'이 알아본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뉴타운'이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을 넘어서, 수백년이 흘렀을 때 그만큼 가치있는 것인가 묻는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건물의 '보존'보다는 새로운 건물의 '재건'에 열을 올린다. 예술가들이 손떼 묻히고 살았던 집들이 아무렇지 않게 헐린다. '개발'이라는 이익 때문에. 지키기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더 이상할 정도다. '남대문 화재사건'은 우리의 의식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한국적'인 것은 사라지고, '따라하기'만 있다. '문화'는 없고 '돈'이 먼저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왜 우리가 그것을 실행해야 하는지 본질적인 의문이 든다. 지금 정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말이다. 

<유럽 건축 뒤집어 보기>는 유럽 건축에 담긴 의미는 물론, 우리나라의 위치와 문화적, 사회적 의식에 대한 반성을 하게 한다. '사람'이 빠진 것은 어떤 의미도 갖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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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오주석 지음 / 월간미술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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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던가?
알록달록 화려한 서양화보다 먹 끝에 담긴 이야기를 찾는 게 더 좋아진 것이. 하지만, 확실히 나에게 동양화는 어렵다. 제대로 알고 있는 것도 없으며, 알려 해도 어렵고, 보고 있어도 어렵다. 하지만, 선과 먹, 여백, 공간, 해학이 느껴지는 그림 앞에서는 감동이 느껴진다.
같은 그림도 누가 설명하느냐에 따라 알 수 있는 것이 달라진다. 이해하는 것이 달라진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아무리 김홍도의 그림을 누군가에게 설명해도, 내가 아는 지식은 짧고 깊지 못하다.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내공은 한순간 쌓이는 것은 아니다.


획 하나를 잘 그으면 열 획, 백 획이 다 뛰어나다.
그 일 획속에 바람이 있고 계절이 있고 말로는 다 못 할 사람의 진정이 있다.


 

글도 그렇다. 첫 문장을 잘 써내면 두 번째 문장, 세 번째 문장 다 뛰어나다. 그 문장 속에는 말로는 다 못 할 사람의 진정이 있다. 오주석 선생님이 바로 그런 글을 쓰신 것 같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은 오주석 선생의 유고 간행위원회에서 발간한 것이다. 동아일보와 잡지 북새통에 연재했던 짧은 글들을 정리하에 발간한 책이다. 그의 글을 그리워하는 이가 많나 보다. 그가 죽고도, 그의 책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책에 소개된 그림의 대부분은 알고 있는 그림이었고, 어디에선가 다른 칼럼니스트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 그림들이었다. 알던 그림도 그의 설명을 읽으니 또 다른 눈으로 찬찬히 보게 된다. A4 한 장 분량은 되는 글들일까? 짧은 글 속에 할 이야기만 한다. 그렇다고, 빼거나 쓸데없이 더하는 이야기는 없다. 게다가 자신의 상상력까지 동원한다.

 





 

 

 

 

 

 

 

 

 

 

 

 

 

 

 

 

변상벽, <모계영자도>


이 그림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림이다. 나도 어미여서일까? 암탉과 병아리들의 모습이 그냥 지나치기에는 어여쁘기만 하다. 그림에 나타난 병아리들에 대한 설명이나, 암탉에 대한 이야기, 불쑥 솟은 괴석에 숨겨진 장치 등을 이야기하다가 오주석 선생은 그림에 대한 속내를 드러낸다.
  
세상에 닭 그림이 많아도 이렇듯 정감 어린 작품이 또 어디 있으랴? 화가 변상벽은 어쩌면 이토록 살갑게 어머니 사랑을 그렸을까? 나는 상상한다. 이것은 닭 그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어느 집 정 많은 친정 부모가 시집 간 딸을 위해 정성껏 주문해 보낸 그림이라면……. 그 딸아이가 늘 건강하고 병아리처럼 예쁜 자손도 많기를 기원하였다면…….
  
이런 따뜻한 견해를 덧붙이는 것이 그의 글의 묘미다. 그가 받은 감동이, 애잔함이 나에게도 전해져온다. 좋은 작품에는 영혼의 울림이 있다고 말하는 오주석 선생. 그의 글에서도 영혼의 울림이 느껴진다. 영혼의 울림이 느껴지는 그림을 설명해야 했으니, 대충대충 빨리빨리 쓸 수 없었을 터. 온 힘을 다해 영혼을 설명하고자 안간힘을 쓴 흔적이 곳곳에 눈에 띈다.

해박하고 폭 넓은 설명은 <금강전도>나 <송하맹호도>에서 크게 다가온다. 그림을 그림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림을 숨겨진 지식의 장으로 보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설명한다는 것은 크나큰 책임이 뒤따른다. 그 설명은 누군가에게 하나의 진리가 될 수도 있고, 그 정보가 여기저기 퍼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주석 선생의 글을 읽고 있으면, 글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많이 고민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분의 성품과 무게가 느껴지는 책. 우리의 동양화를 맛깔나게 설명한 책.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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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디자인 산책 디자인 산책 시리즈 1
안애경 지음 / 나무수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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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에 감동을 받았다'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있는 그대로를 중요시하는 나라 핀란드. 일상 속에서 디자인을 추구하고 영감을 떠올리고 단조로워 보여도 디자인에 감동을 담는 나라가 바로 핀란드인 것 같다.

환경과 자연을 사랑하는 디자인. 그것은 삶의 철학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작가가 핀란드를 산책하듯 누비고 핀란드 삶 곳곳에 있는 디자인을 소개한다. 직접 체험하고 이해하는 디자인. 상품이 되기 위해 디자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디자인이 존재한다. 그게 경이롭다.

디자인의 시대. 모두가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새로운 것, 기발한 것, 창의로운 것을 원한다. 디자인은 돈이 되고, 디자인은 가치가 된다. 하지만 핀란드에서 디자인이란 문화이고 삶 그 자체다. 절제하는 삶을 담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 어릴 적 유년을 담는다. 절제된 디자인이지만 감동을 담는다.
 
푸른 빛이 가득한 겨울. 건물의 빛은 삶의 빛을 표현했다. 도시의 빛은 계산되어 있지만 넘치지 않는다. 디자이너 미꼬 빠까넨의 메두사 조명은 재미와 빛을 결합한 빛의 유희다. 해파리의 수축과 팽창을 연상시키는 조명, 빛의 감정을 담는다. 길쭉한 형광등의 빛이 아니라, 빛에 재미를 담는 디자인.

커피를 즐기는 여유를 갖는 핀란드에서는 일회용 컵이란 없다. 자작나무를 연상 시키고 루돌프 사슴 불을 연상시키는 커피잔. 소비자의 취향과 일상을 고려한 담백한 커피잔들. 커피를 즐기는 여유에도 디자인을 담는다.

오이바 또이까의 겨울 철새를 담은 유리 디자인은 당장에라도 손에 쥐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새 한 마리에게도 디자인의 영감을 받는다. 자연은 디자인이고 디자인은 자연이다. 자연을 디자인의 소재로 삼는 게 자연스러운 핀란드에서는 진정한 에코 디자인을 만날 수 있다. 병원 수술복, 군복, 공사판에서 쓰던 가림막은 또 다른 디자인으로 탄생한다. 쓰레기라도 분류된 천조각에서 자유로운 스타일과 하나밖에 없는 디자인이 나온다.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한 꽃. 디자인이 되고 브랜드가 된다. 폐타이어가 의자가 되고 가방이 된다. 자연과의 공존, 균형, 재활용이 자연스럽게 디자인과 연결된다. 소비성 디자인이 아닌 환경을 살리는 디자인이 인상깊다.

<핀란드의 디자인 산책>에서는 핀란드의 디자인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 않다. 그들의 문화와 정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뭉쳐 디자인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도시를 디자인하는 것도 천천히 느리게 언제 끝날지 모르게 조심스럽게 한다. 돌 하나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대상으로 삼기에 함부로 부시거나 새로 짓지 않는다. 있는 것의 변형이 자연스럽다.

아이들의 놀이터에도 흙과 나무가 조화를 이루고, 아이들의 심리도 파악한 놀이기구가 가득하다. 재활용해 만든 놀이기구들 속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환경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버스 표지판, 벤치 하나도 튀지 않고 풍경이 되게 하는 디자인. 시뻘건 십자가가 가득한 우리 도시와 달리 교회가 교회가 아닌 듯 머무르는 곳. 먹을 만큼 재배하고 욕심내지 않는 삶. 자연스러운 질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의 광화문 광장이나, 한강 르네상스가 부끄럽다. 현란한 빛을 내뿜는 건물과 위험한 먹을거리가 부끄럽다. 시멘트로 메워버린 보도블록이 부끄럽다. 자연과 공존하는 도시. 도시와 공존하는 자연. 지금 당장의 편리함보단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는 아름다움을 먼저 생각하는 핀란드.


디자인이 상업이 아니라 생활이 되는 나라.
디자인을 산책하듯 즐길 수 있는 나라.

디자인도 눈앞에 편리함과 돈만 중요시하는 나라.
디자인이 공해가 되는 나라.

아, 아직도 배워야 할 것들이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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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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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나는,
그림이 동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림은 마음을 즐겁게 하고, 눈을 정화시킨다.
고요하게도 말이다.


그림이 동경의 대상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보고 싶다고 해서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악이나 영화야 보고싶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볼 수 있지만, 그림이라는 것은 내가 직접 구입을 하지 않으면, 마침 전시가 없다면 직접 보는 것이 힘들다.
책에서 보는 그림과 실제로 보는 그림은 차이가 많다.
작은 책에 큰 그림을 구겨 넣다 보면, 직접 볼 때 보였던 것도 책으로 볼 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세밀한 감동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림은, 그냥 감동이다.
평론가들은 그림에서 기표와 기의를 찾으며 함축적은 의미와 상징적인 의미를 찾아내려 눈에 쌍심지를 켜지만, 그림은 그냥 보고 느끼면 된다.
음악을 듣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천천히 그림 읽기>에서는 그림을 읽는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 말 해준다.
차근차근, 조곤조곤 알기 쉽고 선명하게 말이다.
하지만, 작자도 말한다. 그런 저런 이야기들은 다 주관적일 뿐이라고.
결국, 자신이 그 작품에서 무엇을 찾아내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냐고.
맞다. 바로 그거다.
의도적으로 만든 작품이 있는 반면, 재미로 어떤 의미를 두지 않고 만든 작품도 있다.
그런 것들은 수많은 사람이 그 작품을 읽어내며 작자도 모르는 의미를 부여해 주곤 한다.
그 의미는 수만 수천가지로 나뉠 수 있으며,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프로이트는 작가의 유년을 쫓아가며 무의식 속에 감추어진 표출을 작품에서 찾아내려 했지만,
사실 그런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개개인이 공감할 만한 의미를 찾아내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본다. 심지어 객관적임을 자랑하는 사진도 실은 사진사의 주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찍을 수가 있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선택적 주의'라 부른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절대적 객관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존재하는 것은 서로 다른 수많은 주관성들 뿐이다. 따라서 화가가 자기 세계관에 따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니라."

135p 중에서

 

이 대목은 <천천히 그림 읽기>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림은 또 다른 언어로 많은 이야기들을 한다. 그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그림을 탐구하는 학자보다, 그림을 보고 있는 관람자 보다 그림을 그린 화가가 더 잘 알 것이다. 그림에 관해 잘 알고 있는 화가와 그 의미를 부여하는 관람자.
어떤 게 그 그림의 전부라고 말 할 수 있을까?

그림을 잘 느끼고자 하는데 수많은 지식보다는,
그림을 보는 사람의 마음 가짐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

 
그렇게 위대하다고 말하는 피카소의 전시회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실망을 느꼈고,
르네 마그리트의 엉뚱한 그림에서 감동을 느꼈다.
김환기 작가의 아기 그림에서 진한 모성애를 느꼈고, 롭스의 악마적인 그림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더 자세히 파고들고 싶다면, 그건 보는 이의 몫일 것.

 
<천천히 그림 읽기>는 그 몫을 알고 싶게 해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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