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의 복음서들이 모두 기록하고 있는 바대로,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마르코 복음서에서만 특별히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를 세 번 부인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고 슬피 울었다(마태 26, 69-75; 마르 14, 66-72; 루카 22, 54-62; 요한 18, 15-18; 25-27). 공관 복음서들은 물론이고 요한 복음서까지 전하고 있는 이야기이므로 이만큼 개연성이 확실한 전승도 없을 터, 여기서는 충실하면서도 어눌하고 동시에 용감하면서도 나약한 베드로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가감 없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어제 김재원 새누리당 대변인 내정자가 아버지 박정희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딸 박근혜의 입장을 저 베드로의 입장에 비유했다. 성경에 대한 지독한 무지의 소치이자 기독교 정신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대변인을 시켰더니 대변(代辯)은 하지 않고 외려 대변(大便, 똥물)을 쏟아붓는 '팀킬'을 한 셈인데, 대변인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수사(rhetoric)의 기본적 능력조차 결여한 저 자가 더 이상 대변인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대변인'은커녕 아예 '원수'가 돼버린 저 자를 향해 '원수마저 사랑하는' 도덕적 완벽함을 기대하기에는 오히려 저 너무나 '기독교적인' 새누리당 무리들이 역설적으로 '기독교 정신'에 가장 완벽하게 무지하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김재원 대변인 내정자의 저 비유의 어법에는 무의식적인 진실이 있다. 구조적으로 봤을 때, 박정희 시대의 반민주적/반인류적 과오를 사과하는 박근혜의 말은, 마치 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말처럼, 다급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었던 완전한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저 대변인의 대변이 매우 '쾌변'스럽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 대변인을 포함하여,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스스로 속으면서 살고 있다. 말하자면, 여전히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루카 23, 34)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2012년 9월 12일 수요일자 <경향신문>, '김규항의 좌판' 22번째 편에 제가 속해 있는 밴드 레나타 수이사이드(Renata Suicide)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올해는 또한 레나타 수이사이드가 결성된 지 정확히 10주년이 되는 해, 하여 지난 9월 2일에 레나타 수이사이드는 10주년 기념 공연을 장장 3시간에 걸친 마라톤 공연으로 잘 마무리했습니다. 지금까지 10년의 활동 기간 동안 레나타와 함께했던 예술가들 중 많은 분들이 게스트로 무대를 빛내주셨습니다. 시인 강정, 안무가 공영선, 플라멘코 가수 소니아, 거문고 연주가 오경자, 안무가 장은정, 소설가 황정은 등 모든 게스트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레나타의 10년은 아마도 '요약될 수 없는' 무엇이 아닐까 합니다. 이제 또 다음 10년, 20주년의 그날까지 느리지만 뚜렷한 행보를 이어가볼까 합니다. 레나타 수이사이드는 앞으로도 반국가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행보 속에서 음악이 어떻게 미학과 정치를 서로 흘레붙이고 교배시킬 수 있는지, 암중모색을 계속해 나가겠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함께 더듬고, 함께 걸어주시길. 

 

- 襤魂, 合掌하여 올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112105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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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의 좌판](22)

반국가주의·반자본주의 음악집단 3인조 밴드 ‘레나타수이사이드’

 

 

“앨범 한 장 안 내고 10년간 밴드 활동…  

우린 비전을 강요하지 않아요”

람혼(최정우), 파랑(이용창), 반시(유가영) 세 사람이 ‘레나타수이사이드’라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한 지 막 10년이 되었다. 근래 한국에는 10년 넘은 인디밴드가 적잖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들처럼 애초 멤버 그대로, 그것도 앨범 한 장 내지 않고 10년을 맞은 경우는 거의 없다. “부부관계에 비유하면 우리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같은 관계”(파랑)라고도 하고 “우리는 밴드로서 비전을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반시)이라고 한다. 그들의 10년과 그들의 삶을 도란도란 들어보았다.


 

밴드 레나타수이사이드 멤버들. 왼쪽부터 드럼 파랑(이용창), 베이스 반시(유가영), 보컬 람혼(최정우).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 어떤 사운드만 중요시하지 않고 연극·무용 등 다른 장르와 협업도
매이지 않아 관객들은 친구가 돼


▲ 과거엔 밴드들 저항성 선언부터… 지금은 지향성보다 현장을 중시
공연 취지 맞으면 함께 모이게 돼… 음악의 정치성 다양하게 진화 중


▲ 사회 전반 진보적 담론 확대 추세… 실은 우파체제 지탱 수준에 그쳐
왜 이럴까 질문 좀 더 치열해져야
 



김규항 = 레나타는 사운드가 독특한 편입니다. 말로 표현하기가 쉽진 않은데, 하드하면서도 깔끔하고 마치 테크노처럼 끊임없이 이어져가는 느낌도 있고….

람혼 = ‘너희는 장르가 뭐냐’ 물으면 대답하기가 애매해서 제가 만든 말이 있는데요. 빠르(PPAR)입니다. 사이키델릭 프로그레시브 아트록.(웃음)

파랑 = 누가 보든 형식은 밴드고 장르는 록이겠지만 어떤 사운드가 대세라거나 어떤 사운드를 만들어내겠다거나 하는 걸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편입니다. 깔끔하다고 하셨는데, 간편하고 명료하게 우리가 준비한 걸 들려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결과인 것 같아요.

김규항 = 대개의 경우 밴드는 사운드를 궁리하고 만들어내는 게 일인데요. 곡은 람혼이 만들죠?

람혼 = 예. 그런데 제가 작곡했다고 하면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보통은 편곡 개념이라 생각하는 것이 저희는 작곡인데요. 제가 리프나 코드 같은 걸 만들어 오면 셋이 곡을 완성해가는 거죠. 때로는 악상이 아니라 형식적 개념이나 구조 같은 걸 가지고 토론하면서 작업하기도 합니다.

반시 = 저희는 곡이 선율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패턴에서 시작해요. 테크노 같은 느낌도 아마 그래서일 거예요. 연주곡이 먼저 나오고 멜로디가 되고 그 다음에 가사를 붙이는 방식이죠.

김규항 = 이름 설명 좀 해주세요.

람혼 = 저는 누더기 람(襤) 자에 넋 혼(魂) 자입니다. 남루한 영혼이죠. 반시(banshee)는 사람이 죽으면 혹은 죽기 전에 울음을 운다는 아일랜드의 요정… 귀신인가?(웃음) 파랑은 물결 파 자에 물결 랑 자입니다.

김규항 = 파랑 빼곤 참으로 어둡군요.(웃음) 노래 제목들도 그런 게 많아요. ‘병든 것’ ‘독의 노래’….

람혼 = 반시 가족의 결혼식 연주를 부탁받았는데 결국 남의 노래를 했었죠.(웃음) 하지만 어둡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결혼식에 안 맞을 뿐이라 생각합니다.

김규항 = 10년차 밴드가 결혼식에서 연주할 곡이 한 곡도 없기는 어려워요.(웃음) 특별히 염세적 세계관을 갖거나 드러내려는 건 아니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사실 제목은 그래도 곡은 밝아요. 반복해서 틀면 레이브 파티에 써도 될 만한 곡들이죠. 각자 악기를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반시 = 베이스는 무대에서 주목받지 않아 편해보였고 또 조용하다는 게 좋았어요. 기타는 주파수가 높아서 부담스러웠거든요.

람혼 = 그러나 레나타에서 베이스는 주목받는 플레이가 많죠.(웃음)

반시 = 저희는 기타 솔로가 있을 부분에 베이스 플레이가 많아요. 멜로디를 많이 치는 편이고요.

파랑 = 고등학생 때 대학 가면 드럼 치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드럼은 우리 악기는 아닌데 전 이상하게 내셔널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도 같아요. 록 드럼에서 레드제플린과 레인보우를 비교해 본다면 레드제플린의 존 본햄은 문학적이고 시적이라면 레인보우의 코지 파웰은 힘과 원초적인 에너지가 느껴져서 단연 그쪽이었고요.

김규항 = 파랑의 스네어드럼 소리는 대쪽 같아요. 그런데 때론 어떤 곡이든 홀로 대쪽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파랑 = 인정합니다.(웃음) 밴드의 사운드에 대한 집착은 없지만 사운드에 대한 제 개인적인 탐구는 강한 편인데요. 말씀하신 건 그와 관련된 부분이고요. 다른 연주자와의 조화에 대한 노력은 그보다는 적었던 것 같아요.

김규항 = 람혼은 어릴 적 가야금을 배웠다고 들었는데 어떤 도움이 되었나요.

람혼 = 중학생 때 가야금 소리가 좋아서 배우게 되었는데요. 기타에는 밴딩과 초킹이 있잖아요. 가야금에는 농현이 있고 꺾는 게 있다는 말이죠. 기타도 가야금도 현악기인데 현의 다양한 느낌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국악 박자가 재미있잖아요. 엇모리는 5박이고 7채도 있고. 저희 곡을 보면 4박과 3박을 당연시하는 게 없어요. 7박 갔다가 4박 갔다가 11박 가보면 어떨까 그런 시도들을 하기도 하죠. 뭔가에 매어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소득이었던 것 같아요.

김규항 = 레나타는 클럽 공연이라든가 밴드로서의 활동은 많은 편이 아닙니다. 반면에 연극이나 무용, 미술 같은 다른 장르와의 협업은 무척 활발한데요. 언제부터 한 건가요.

람혼 = 처음 한 건 2006년에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사라 케인의 ‘4.48 사이코시스’라는 작품이었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연극음악을 해오다가 셋이 라이브로 하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시작하게 되었죠.

김규항 = 밴드 활동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람혼 = 밴드는 관객을 향해 꽉 차 있는 최대 사운드를 지향한다면 연극이나 무용음악은 얼마나 비우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떻게 개입하고 어디에서 침묵이나 휴지를 통해 빠지는가. 그리고 배우, 무용수 심지어 조명 등의 무대장치와 어떻게 조응하는가를 생각하게 되거든요. 밴드음악은 깔끔하고 완결성 있게 가지만 협업에선 즉흥적인 면도 많고요. 파랑은 드럼 아닌 다양한 퍼커션들, 반시는 베이스로 내는 다양한 소리들을 시도하죠. 재미있는 작업입니다.

파랑 = 저도 아까 말씀드렸듯이 밴드에서 드럼이라는 생각보다는 드럼으로서 어떤 보편적인 것을 찾아보겠다는 욕구가 늘 우선인 편이라서인지 협업 작업들이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반시 = 저는 좀 달라요. 저는 기본적으로 밴드음악을 좋아하고 다른 형태를 탐구해보겠다는 생각도 없었거든요. 사실 4박 갔다, 7박 갔다, 11박 갔다 하는 걸 적응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협업은 저에게 스트레스가 심하고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러나 자꾸 하다보니까 이제 어느 정도는 즐길 수 있게 되었죠.(웃음)

김규항 = 밴드 공연과 실험적인 연극, 무용과의 협업은 관객이 좀 다른데요. 그런 단절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요.

람혼 = 교집합이 조금씩은 생겨나는 것 같아요. 교집합이 아니라 지인들인가?(웃음)

반시 = 저희는 관객으로 만나서 지인이 되고 친구가 되고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팬이 없어요. 팬이 되는 순간 지인이 되는, 그 이후로는 이 사람이 팬인지 친군지, 우리 공연을 보러 오는 건지, 우리와 이야기하러 오는 건지 모르는….(웃음)

파랑 = 이번 10주년 공연 때도 관객이 꽤 많았는데 대부분 지인들이고 대부분 공연을 통해 만난 분들이죠. 연극배우나 무용가들도 많고요. 제 친구가 그날 그러던데요. ‘다 예술하는 사람들 같다, 너만 빼고.’(웃음)

김규항 = 반시는 외국계 회사에서 임금노동을 하고 있고 람혼은 비평가, 번역가, 연구자로서 활동을 하는데요. 파랑은 드럼 외엔 안 하고 살고 있어요. 스스로 선택한 거죠?

파랑 = 고3 때부터 일을 하지 않고 살겠다, 이 시스템을 거부하고 살겠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그런데 근래 생각이 조금 바뀌고 있어요. 그렇게 사는 게 이 미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거부인가, 자기만족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달까요. 저도 곧 임금노동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 안 하고 사는 방식을 내세운 적이 없듯이 앞으로도 일하고 사는 걸 합리화할 생각도 없습니다. 결혼하고 싶은 여성이 생긴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요.(웃음)

김규항 = 레나타 멤버들은 급진적인 분들인데 정치적인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우리 사회에서도 한참 록의 저항성, 정치성에 대한 담론이 무성하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은 씻은 듯이 없고 그렇죠. 실제 현장의 맥락에서는 어떤가요.

람혼 = 저도 레나타 전에 ‘이반’이라는 밴드를 했었고 메이데이나 이스크라 같은 급진적인 밴드들이 있었죠. 이런 형식에 이런 내용을 담으면 대중적인 파급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식이 있었어요. 나름의 의미와 성과도 있었죠. 그런데 음악의 정치성이 옮겨가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두리반에 저희를 비롯한 많은 밴드들이 참여했잖아요. 그 대부분의 밴드들이 사회적인 밴드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사회성이 강하게 표출되었죠. 과거처럼 각자 밴드들이 직접적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기보다는 각자 추구하는 바는 다양한데 어디에 모이는가 그 공간이 어떤 곳인가로 정치성이 표현된다고 할까요.

반시 = 과거처럼 정치성을 표방하는 밴드는 잘 보이지 않는 반면에 “거지 같은 세상” 같은 가사는 어느 밴드에서나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죠. 브로콜리너마저 같은 밴드는 저항적인 밴드라고 할 순 없지만 ‘졸업’이라는 노래에는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라는 가사가 나와요. 과거의 저항성은 선언된 것이라면 이젠 그런 선언 없이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것이라면, 심지어 내 음악 중에 그런 게 없어도 두리반 같은 상황에 내가 동의한다면 공연하는 거죠. 진화라고 생각해요.

김규항 = 정치성의 이행, 진화. 좋습니다. 보통의 시민과 노동자들은 어때 보입니까?

람혼 = 제가 최근에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랄까 하는 게 ‘청춘’에 관한 현상인데요. 예를 들면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책이라든가 힐링이니 멘토링 같은 것들이오. ‘88만원 세대’론을 비롯해서 청춘세대의 삶과 노동에 대해 사회 구조적으로 포착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아프니까 청춘이고, 청춘이란 사서 고생하는 거고, 천번 흔들려야 어른이 되고 식으로 너무나 쉽게 안이하게 봉합하고 있어요. 그런 강연에 사람들이 몰리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김규항 =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책 제목부터 현재 청년들의 현실로 보면 몰매를 맞아도 싼데 베스트셀러가 되고 저자는 떠받들어지죠.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책임과 태도의 문제로 돌리는 건 전형적인 우파의 사고인데 마치 기존 질서와 보수를 넘어서는 비전처럼 여겨지고 있죠. 안철수씨는 3시간밖에 안 잤다는 이야기를 즐겨 하던데 3시간만 자면 누구나 안철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일까요?(웃음) 싱거운 사람들입니다.

파랑 =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보면 공부할 만큼 했고 좌파적 교양도 있고 전반적으로 사회의 ‘진보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취향과 안목 차원에서요. 그런데 근본적으로 별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 느낌이에요. 이 많은 진보적 담론들이 실은 우파 체제를 한편으로 지탱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거죠. 이게 왜일까 하는 질문을 좀 더 치열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규항 = 그렇게 머물고 있는 현실에 비해선 인터넷이나 트위터 같은 데선 참 어울리지 않을 만큼 시끄럽죠. 그 부조화가 우습기도 하고 기괴하기도 합니다.

반시 = 전에는 이른바 보수언론들이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한달까, 권장한달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실제로 정치적 무관심이 쿨함의 일종이던 시절이 있었고요. 그런데 이젠 놀이의 영역에서든, 음악의 영역에서든, 수다의 영역에서든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쿨함인 사회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돌고 도는데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죠. 가장 큰 이유는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김규항 = 깊이 동감합니다.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락방 2012-09-13 08:14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 람혼님.
안그래도 어제 저녁 먹고 경향신문 팔랑팔랑 넘기다가 제가 람혼님의 모습이 실린 사진과 이 기사를 봤다는거 아니겠습니까! 저 혼자 막 반가워했어요. 히히히.

람혼 2012-09-14 04:56   URL
다락방님, 잘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그런데 신문지면과 인터넷판 기사 모두에 크나큰 실수가 있었어요. 저도 몰랐는데, 경향신문에 정정보도 요청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3 때부터 일을 하지 않고 살겠다, 이 시스템을 거부하고 살겠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 결혼하고 싶은 여성이 생긴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요.(웃음)"
이 문장은 제가 이야기한 게 아니라 파랑이 이야기한 것인데, 마치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람혼'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정 요청했습니다. 첫째, 저 문장의 어조는 결코 '람혼스러운' 문장이 아닙니다. 저의 문장이 아닌 문장이 마치 저의 것처럼 둔갑되어 있습니다. 둘째, 이러한 잘못된 표기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파랑에게뿐만 아니라 파랑이 사랑하고 있는 분께도 매우 큰 결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정정되어야 합니다.
(경향신문이 제 혼삿길을 막으려고 작정했다는 생각밖에는 안 듭니다.^^ㅋㅋㅋㅋㅋ)

다락방 2012-09-14 09:54   URL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죄송해요, 람혼님. 이렇게 웃어서요. 그런데 너무 웃음이 나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람혼 2012-09-14 13:10   URL
미안해하실 필요 없이 마음껏 웃으셔도 됩니다! 저도 사실 너무 웃겨요.^^ 하하하하하!
 

 
 
최근 한국어로 번역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책 <바그너는 위험한가>(김성호 옮김, 북인더갭, 2012)에 대해 제가 쓴 서평이 프레시안에 실렸습니다. 서평의 제목은 "바그너 '효과'에서 바그너 '사건'으로!"입니다. 서평과 책 모두 일독을 권합니다. 특히나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음악에 죽고 못 사는 저 같은 '지독한' 바그네리안들에게는 더더욱 필독을 요망합니다(이 책의 원제는 "Five Lessons on Wagner"/"Cinq leçons sur le 'cas' Wagner"입니다).

바디우의 이 책은 또한 슬라보이 지젝(Slavoj Žižek)의 매력적인 발문/후기(afterword)를 싣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가끔씩 제 스스로를 '반-바그너주의적 바그너주의자(non-Wagnerian Wagnerian)'라는 저만의 조어를 통해 규정하곤 하는데요, 아마도 철학계의 내로라하는 또 다른 두 '반-바그너주의적 바그너주의자'들일 바디우와 지젝이 함께 일종의 대위법처럼 구성하고 있는 철학적 이중주를 감상하는 재미도 이 책의 장점일 겁니다. 단, 이 책은 바그너의 음악이나 서양 오페라/악극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이나 경험이 없다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을 것이란 단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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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효과’에서 바그너 ‘사건’으로!

— 알랭 바디우의 <바그너는 위험한가> 서평

 

 

최정우 | 비평가, 작곡가, <사유의 악보> 저자

 

 

아마도 나는 독일 작곡가 바그너와 연관된 문제에 관해서라면 결코 ‘객관적’으로 글을 쓸 수 없는 사람들 축에 속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아주 ‘심각한’ 바그너주의자(Wagnerian)였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이다. 왜 나는 이 말을 일종의 고백처럼 발설할 수밖에 없을까. 바그너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이에 대해서는 다소 해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바그너주의’라는 말은 단순히 음악적인 취향이나 신념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모차르트주의’나 ‘베토벤주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비록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바그너주의’만큼의 광범위한 효과를 갖지 못한다). 이 말은 어떤 확정적인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내는 단어로 매우 자주 쓰이기도 하고(바그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파쇼나 나치에 근접해 있다는 어떤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편견들), 또한 때로는 심지어 어떤 윤리적인 선택까지를 포함하는 단어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바그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의 입장에 서 있을 거라는 어떤 ‘몰역사적’이고 ‘초월적’인 예단들). 비록 나는 에드워드 사이드나 가라타니 고진 등이 지나가면서 언급했던 이른바 ‘비(非)-유대인적 유대인(non-Jewish Jew)’이라는 정치적/윤리적 정체성에 빗대어 내 스스로를 ‘비(非)-바그너주의적 바그너주의자(non-Wagnerian Wagnerian)’라는 일견 지극히 모순적으로 보이는 조어로 부르곤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백과 변명의 언어적 환경 속에서 포착해야 할 중요한 징후는 따로 있다. 왜 ‘바그너주의자’라는 자기규정에 대해서만큼은, 이처럼 일종의 ‘해명’이, 심지어 일종의 ‘사과’마저 필요한 것일까. 이러한 사과나 해명은 비단 예술적인 입장의 소명이 아니다. ‘바그너’라는 이름이 단지 음악이나 예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 나아가 철학과 정치의 문제가 되어왔던 어제와 저간의 사정이 바로 이 하나의 징후적인 물음 안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과 그것을 둘러싼 대답들의 관점에서, 최근 번역된 알랭 바디우의 책 <바그너는 위험한가>(김성호 옮김, 북인더갭 펴냄)는 바로 저 ‘바그너 문제’가 지니고 있는 지극히 익숙한 선입견들에 관해 가장 적극적인 도발을 감행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가 ‘바그너의 경우’를 이야기하며 바그너에 대해 뚜렷한 대립각을 세운 이래로, 바그너 음악에 대한 입장의 선택은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태도의 선택과 밀접한 관련을 띠어 왔다. 바그너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이른바 ‘바그너 효과’는 음악과 철학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관한 문제, 미학과 정치 사이의 관계라는 보다 일반적인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포함하는 매우 광범위한 문제 지형으로 기능해 왔던 것이다.

 

비근한 예로, 바그너의 반음계 작법과 라이트모티프 등의 음악적 어법들은 조성의 파괴와 연속성의 재해석이라는 현대음악의 길을 열었으며, 그가 주창했던 예술적 이상들과 신화적 관념들은 예술지상주의와 민족주의/국가주의 양쪽에 이념적인 자양분을 제공했다. 게다가 바그너의 이름은 언제나 독일의 신화적이거나 국가적이거나 민족적인 통일성, 혹은 나치 치하 독일제국의 예술적 대표이자 반영으로서 이해되어 왔다(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음악의 연주가 금지되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에서부터 아도르노를 거쳐 라쿠라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반(反)-바그너주의 철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바그너를 동일성과 통일성과 연속성을 ‘시끄럽게’ 추구한 음악가로, 곧 차이와 파편과 불연속적 다양성 등의 전복적 요소들을 ‘폭력적으로’ 등한시하고 추상해버린 예술가로 비판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디우는 <바그너는 위험한가>를 구성하는 다섯 개의 강의들을 통해 이러한 바그너에 대한 편견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복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현대철학의 핵심어들 중의 하나인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해서 바디우는 반-바그너주의 철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다. 바그너는 연속성의 추구 속에서 불연속성을 제거하고 사장시킨 작곡가가 아니라 오히려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맺는 새로운 관계를 담을 수 있는 전혀 다른 체제를 창안해낸 음악가라는 것이다. 무한선율과 반음계, 라이트모티프 등의 음악적 기법들을 통해서 압도적으로 드러나는 바그너 음악의 일견 ‘폭력적’인 연속성이 사실은 불연속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표현하는 전혀 다른 형상화 방식임을 주장함으로써 바디우는 바그너를 변호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국지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사이의 관계라든가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 또는 이행의 본질이라는 문제는 철학의 모든 분야에서, 그리고 특히 (말이 난 김에 언급만 하자면) 정치에서 하나의 중요한 문제다. 사실상 불연속성이 더 이상은 혁명의 전통적 형상 안에 정치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체 어떻게 표현되는가? 더 이상 그 어떤 불연속성도 없다고 결론지어야 하는가? (그것은 결국 역사의 종말이라는 관념과 유사한 관념이 될 것이다.) 아니면 불연속성이 연속성의 압도적 현현 뒤에 숨어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내 생각에 후자는 전형적인 바그너적 문제다. 사실 바그너는 일반적으로 불연속성을 연속성 안에 묻어버린 사람으로 이해된다(라쿠라바르트의 또 다른 라이트모티프). 반면 나는 바그너가 불연속성을 심오한 방식으로 전치시켜서 그것이 서사극과 음악 간의 결정 불가능성의 새로운 형상으로 기능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연속성과 불연속성 간의 새로운 모델을 발명했다고 생각한다.”(107~108쪽)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다시 한 번 바그너의 이름은 좁게는 예술의 문제를 가리키는 음악(가)의 이름임과 동시에 넓게는 철학적 이행의 문제를 가리키는 개념과 실천의 이름이기도 하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의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문제시될 때, 다시 한 번 등장하게 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총체성(totality)’과 ‘미학화(aesthetization)’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바디우가 바그너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조금 다른 형태로 반복하고 있는 저 벤야민의 정치적이고 역사철학적인 몸짓을 다시금 호출하고 기억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벤야민처럼 바디우도 여기서 정치나 예술의 ‘미학화’가 아닌 미학의 어떤 ‘정치화’를, 기존의 총체성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어떤 ‘총체성’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가 바라보는 바그너는, 미학화된 예술지상주의를 추구했던 음악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미학화를 가장 예민하게 경계하면서 미학의 정치화라는 미래 예술의 도래를 예고했던 예술가이다. 지젝이 <바그너는 위험한가>의 발문에서 쓰고 있는 “사건의 여파 속에 살아가기, 결과를 이끌어내기의 열려 있음”(318쪽)이라는 어구 역시 이러한 예술적 ‘구원’의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미학화’란 또한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한 사건의 정치화와 가장 대척되는 지점에 서 있는 일종의 ‘마취(anaesthetization)’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디우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는 바그너의 초상은 바로 이러한 ‘미학의 정치화’와 ‘총체성 없는 총체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형상이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그너는 악극이라는 종합예술의 이상을 통해 순수예술을 가장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표상으로 그려져 왔지만, 사실 ‘바그너 효과’란 오히려 그 반대로 그러한 순수예술의 경계 자체를 문제시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그너가 생각했던 저 ‘순수예술’이란 오히려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이라는 일견 모순된 형식, “새로운 형태의 위대함”을 가능하게 하는 도래할 미래의 예술적 형식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이에 관해 바디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표명하는 입장은 우리가 순수예술의 부활 직전에 와 있다는 것이겠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바그너가 호출되어야 한다. 내 가설은 순수예술이 다시 한 번 우리 미래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위대함은 더 이상 우리 과거의 일부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미래의 일부이기도 한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것은 예전과 똑같은 종류의 위대함은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위대함인가?/ 그것은 확실히 순수예술이지만,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 즉 총체성의 미학화로서의 순수예술이 아니라 오로지 총체성에서 분리되는 한에서의 순수예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명 새로운 유형의 위대함이다. 가령 이것은 영웅화 없는 영웅주의, 또는 전쟁의 패러다임에서 빠져나온 위대함이나 그 비슷한 것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125~126쪽)

 

그러나 이러한 총체성 없는 총체성, 위대함 없는 위대함이 과연 가능할까. 혹은, 미학화라는 마취의 기제를 벗어나는 비미학적 사건의 도래와 실천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또한 바꿔 말하자면, 바디우가 그의 다른 책 <비미학>의 도입부를 통해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과연 “미학적인 사변에 반대하여 비미학은 몇몇 예술 작품들의 독립적인 실존에 의해 생산되는 엄밀한 철학 내적인 효과들을 기술”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바디우는 바그너가 바로 그의 작품 <파르지팔>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곧 바그너의 현재적인 의미란 ‘종교적 초월이 결여되어 있는 의식(儀式)이 현대에도 가능한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바그너 음악 안에서 그의 마지막 악극 작품 <파르지팔>은 그 기독교 신비주의의 종교적 성격 때문에 원래부터도 매우 문제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었지만, 이러한 ‘의식’의 물음과 관련하여 특히 <파르지팔>은 매우 징후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나는 <파르지팔>의 주제는 현대적 의식(儀式)이 가능한가에 관한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주제는 의식의 문제이고, 이 문제는 <파르지팔>에 본질적이다. 그것은 종교의 문제와 구별된다. 왜 그런가? 의식은 한 집단, 또는 심지어 공동체의 자기 재현양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초월은 그 의식의 본질적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파르지팔>이 제기하는 문제는 초월 없는 의식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09~210쪽)

 

그렇다면 바디우가 일견 매우 ‘시대착오적’인 방식으로 새삼 바그너의 경우를 들고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바그너는 위험한가>는 결코 바그너의 음악세계를 ‘미학적’으로 해설하거나 평가하는 책이 아니다. 바그너를 뒤집어보면서 바디우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사실 그의 정치철학적인 본령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바디우는 바그너의 ‘경우’ 혹은 바그너라는 ‘효과’를 넘어서 바그너라는 ‘사건’, 곧 ‘바그너’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사건의 불가능성을, 그리고 또한 그 불가능성이 지닌 어떤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폭발력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내가 확고하게 믿는바, 의식은 필요하다. 아마도 그것은 오늘날 필요하고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사태는 종종 그러하다. 진정한 문제는 그와 같이 필요하고도 불가능하다. 가능성은 더 이상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 바로 그 순간에 찾아온다. 사건이란 그런 것이다. 오늘날의 사건은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파르지팔>은 나름대로 예언적이다—의식을 가능하게 만들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 <파르지팔>에서 발생하는 일은 그것이다.”(225~226쪽)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돌아가 바그너의 이름을 둘러싼 저 모든 예술적 기호(記號/嗜好)들에 대한 고백과 변명과 해명과 사과의 말들이 어째서 하나의 징후로서 드러나는지를 다시금 되물어야 할 것이다. 바디우의 이 모든 언설들을 단지 바그너주의자이자 바그너애호가로서 그가 어렵게 시도하며 또한 시도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변명들로 봐서는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역시나 그만큼이나 지독한 바그너주의자이자 바그너애호가인 내가 여기서 또한 그 모든 변명들을 변호하는 또 다른 변명들을 쓰고 있지 않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반복하여 말하자면, 바그너의 이름은 바로 이러한 자기지시적인 물음들을 끊임없이 되묻게 하는 예술의 이름이자 정치의 이름이다. 바그너의 이름은 단지 협소한 예술 장르로 이해되는 음악의 이름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이름은 단지 어떤 예술적 사례라는 ‘경우’의 이름도 아니고 그러한 예술이 어떤 사회적 파급력과 영향력을 가지는가 하는 ‘효과’의 이름도 아니며, 바디우에 따르자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을 가리키며 예고하는 이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도르노는 메시아에 대한 ‘헛된 기다림’을 긍정하며 그러한 기다림의 시간이야말로 메시아에 대한 진정한 기다림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아마도 이러한 관점에서 아도르노는, 어쩌면 그의 본령과는 전혀 다르게, 벤야민이 그의 생애 끝까지 결코 완전히 해소하거나 해결할 수 없었던 저 메시아적 시간의 문제를 너무나 안전하고 안일하게 ‘미학화’했던 철학자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아도르노는 바그너의 음악이 어쨌든 궁극적 해결의 지점을 상정하며 지향하고 있는 어떤 ‘조작된 기다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아도르노에게 ‘거짓 기다림’이었다.

 

그러나 다시금 너무나 새삼스럽게 묻자면, 메시아는 어떻게 오는가. 그리고 가장 ‘비(非)-유대인적’이며 또한 심지어 가장 ‘비유대적(非紐帶的)’으로 보이는 바그너가 바로 이러한 메시아적 시간에 관한 질문에 그의 음악 전체로 응답하고 있다고 한다면 어쩌겠는가(그러므로 또한 지젝이 발문에서 ‘구원’이라는 결말의 문제와 관련하여 ‘바그너와 함께 그리스도를’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어떤 매력적인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바디우는 말하고 있다. 바그너는, 여전히, 하나의 사건이며, 또한 그 이름은 그렇게 사건으로 도래할 때에만, 그렇게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불가능한’ 하나의 사건으로 ‘가능’해질 때에만, 비로소 다시금 가장 문제적인 이름일 수 있다고. 따라서 바그너 ‘효과’에서 바그너 ‘사건’으로 이행하면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단순한 미학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정치적 실천의 문제가 되고 있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601111425

 

지난 6월쯤에 <프레시안>에 썼던 서평이 하나 있었는데, 링크 해둔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네요. 피터 버크(Peter Burke)의 <문화 혼종성(Cutural Hybridity)> 한국어 번역본에 대해 제가 썼던 서평입니다. 서평과 책 모두 일독을 권합니다.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따위의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와 싸우기 위해서라도, '잡종(hybrid)' 개념의 이론적 전유와 실천적 발명은 매우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잡종'이 사라진 '잡종의 시대'

- 피터 버크, <문화 혼종성> 서평

 

 

소위 혼종(hybrid)과 혼합(fusion)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아무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세계라는 시공간이 그러한 혼종과 혼합의 어떤 절정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러한 이름들로 '우리'의 시대가 규정되고 소비되며 유통된 지 이미 오래라는 의미에서, 혹은 조금 더 세밀하고 적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시공간이 그러한 규정적 개념어들이 지닌 '다양성'을 통해 오히려 반대로 매우 '단일하게' 규정되어 오고 있는 지가 벌써 오래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어쩌면 오직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만, '우리'의 시대와 세계는 말 그대로 혼종과 혼합의 시공간이다.

 

'우리'의 시공간은 혼종과 혼합이라는 어떤 '객관적' 현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시공간이 아니라 어쩌면 바로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개념들로 인해 매우 '상상적으로' 작동되고 조작되는 시공간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혼종과 혼합의 상상적 시공간 한복판에서, 아니 그러한 한복판이 도래한 듯 보인지도 이미 한참 된 어떤 한복판에서, 한 책의 번역은 좀 새삼스럽게 느껴지거나 심지어 뒤늦은 감마저 있다(이러한 '지연'의 감각은 이 책의 출판 연도인 2009년과 한국어 번역본의 출판 연도인 2012년 사이의 물리적인 시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피터 버크(Peter Burke)의 책 <문화 혼종성>(강상우 옮김, 이음 펴냄)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나 '우리'가 (혹은 바로 그 '우리'라는 이름으로 규정되는 어떤 집단적 정체성이) 속해 있는 남한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다문화(多文化)'라는 또 다른 폭력적 용어가 소위 '한국적 관용(tolérance)'을 의미하는 지극히 어용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전가의 보도로 사용되면서부터, '우리'에게도 저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작용은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서 "우리에게도"라는 저 가장 익숙한 듯 보이는 어구의 맥락 자체가 문화적으로 그리고 혼종적으로 가장 이데올로기적이며 따라서 가장 문제적이라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여전히 가장 낯선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따라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문화 혼종성에 대한 전형적이고 중립적인 (혹은 그렇게 전형적이고 중립적으로 보이는) 교과서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이 책의 가장 일차적인 미덕은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매우 영미적인) 교과서적 서술에 있으므로.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문화 혼종성이 현재 어떤 첨예한 위기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개념과 현상이 어떤 민감한 기로에 서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정보'를 과연 다른 책들로부터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은 각 장의 제목을 이루고 있는 저 "각양각색의"라는 혼종적인 꾸밈말에 걸맞게 실로 각양각색의 사례와 예시들을 통해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의 포괄적 지도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부분들은 차후 더 진행될 수 있는 비판적 독해의 단서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서구인은 음악의 영역, 특히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중앙아프리카의 피그미족과 같은 다른 문화로부터 음악을 차용한 뒤에, 결과물의 저작권은 자신이 갖고 본토 음악가들과 저작료를 공유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제3세계 음악을 유럽이나 북미에서 '가공'되는 일종의 원자재처럼 취급해왔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지난 500여 년간 서구 학자들은 자주 세계 다른 지역들의 식물이나 치료법 등에 대한 토착적 지식들을 이용해왔지만, 그 원천에 대해 항상 인정하지는 않았다." (19쪽)

 

또한 이 책의 거의 모든 내용이 이른바 문화적 '덧쓰기(palimpsest)'에 대한 풍부한 사례들과 그에 대한 분류에 바쳐지고 있다는 점 역시 높게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문화적 혼종성이란 쓰고 지우며 그 지움의 흔적을 지닌 채 다시금 덧입히는 일을 반복하는 것일 터이므로. 그러나 이 책의 전반적인 서술의 특징은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의 다양한 예시들을 따라 그 개념을 매우 정확하게 규정해보려는 욕망을 둘러싸고 형성되어 있으며, 어쩌면 바로 이러한 특성은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양날의 검일 것이다. 따라서 문화 혼종성에 대한 어떤 날 선 문제의식과 날카롭게 벼려진 비판 의식을 얻고 또 되묻기 위해서라면 이 책은 아마도 거의 쓸모가 없거나 아주 기본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책 말미에 수록된 이택광의 해제를 오히려 피터 버크의 본문보다 더 주의 깊게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택광의 해제 역시 다소 교과서적으로 작성된 감이 없지 않지만(그리고 예상외의 그 논문 식 어투가 계속해서 독해를 방해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이택광은 피터 버크가 그 자신의 주제인 '문화적 혼종성'에 대해 할 이야기를 다 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매우 우회적인 방식으로 암시하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은밀하면서도 확실한 불만으로부터 자신의 해제를 위한 시동을 걸고 있다.

 

따라서 이 해제를 단순한 '해설'로 읽지 않고 오히려 문화적 혼종성을 일견 매우 중립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듯 보이는 피터 버크의 기만적인 방식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서 읽어낼 때 우리는 이 해제의 의미와 위치와 맥락을 더욱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왜 (피터 버크의)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서술이 언제나 어떤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점을 더욱 예리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을 읽는 전략과 목표는, 단순히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정보의 습득에 멈춰서는 안 되며, 피터 버크 그 스스로가 오히려 저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지극히 보수적이고 안일하게 접근하고 있는 저 서술 방식 자체에 대한 비판과 해체라는 더욱 적극적인 독해 행위에까지 다다라야 한다. 아마도 이러한 독해의 방식이 이 책을 가장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어쩌면 가장 '다문화적으로' 읽는 전략이 될 것이다(그러므로 독서란 무엇보다 하나의 전략인 것).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철 지난 유행의 이론 혹은 일의적이고 동일적인 세계화의 숨겨진 전략이자 이데올로기였음을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그리고 그러한 순간이 지난 지는, 지났다고 생각된 지는, 실로 오래되었는데), 오히려 우리는 저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 포스트모더니즘의 (아직 죽지 않은) 유령을, 그 유령의 (아직 지워지지 않은) 이름을 다시 부르고 다시 소환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냉전 시대 이후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지닌 가장 정치적이자 이론적인 알리바이였다고 한다면, 문화적 혼종성이란 세계화와 전지구화가 지닌 가장 국가적이자 국지적인 알리바이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주에 반대하는 유목이란, 다시 말해 정착과 영토화를 거스르는 노마드(nomad)의 개념이란, 현재 그 정치적 파괴력을 잃고 얼마나 '낭만화'되고 '안전화'되었는가. 말하자면, 그와 마찬가지의 일이 저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실로 똑같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hybrid'라는 개념은 '혼종성'이라는 지극히 점잖은 용어로 옮겨지는 동일성의 다른 가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본래' 뜻에 걸맞게(그러나 또한 'hybrid'에 있어 '본래'라는 기원과 시작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잡종'이라는 보다 잡스러운 의미로, 종잡을 수 없는 파괴적인 날것의 의미로 되새겨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아마도 이 책이 지닌 한계와 문제점을 통해서, 이 책이 지닌 서술 방식에 대한 비판 의식을 통해서, 아마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말미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의 크레올화"(169쪽)이라는 개념에 특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것은 실로 양가적인 개념이어서, 때로는 수구적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통합적 질서 구축을 위해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반대로 가장 파편적이면서도 당파적이고 급진적인 논의들을 위한 이론적 근거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들'이 아닌) '우리'는 작가의 (영문판) 서문으로 새삼 다시 돌아가 작가 그 자신의 변명 혹은 자기변호를 재차 되새겨 읽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종의 고백임과 동시에 하나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에서 자연스럽게 논의되는 주제이기도 한 문화적 전지구화(cultural globalization)는 작가인 나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혹은 일종의 복수를 했다고) 할 수 있다." (11쪽)

 

문화적 전지구화가 작가 자신에 미친 '영향'이 정말 '복수'였는가 하는 문제(혹은 그것이 외부의 '복수'라는 이름을 가장한 지극히 내밀한 어떤 '욕망'이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영향' 혹은 '복수'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책은 쓰일(作/用) 수조차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예민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일종의 폭력적 단순화 작업, 잡종의 문화 현상에 대한 일종의 이론적 동일화 작용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책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해 이 책의 존재 자체가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한 가능성의 주제가 근거하고 있는 어떤 근본적 불가능성의 지점을 매우 징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말하자면 이러한 책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이 책의 주제인 문화 혼종성이 지닌 어떤 불가능성의 조건 그 자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미덕, 혹은 '우리'에게 이 책의 '번역'이 주는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바로 이것일 터, 아마도 우리가 '우리'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 대답하고 되물어야 하는 시작점이 바로 여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작은 결코 기원이나 원천이 아닌 끊임없이 갱신되고 또 갱신되어야 할 어떤 문제적인 시발점일 것이며, 이 책은 '우리'에게 바로 그 '우리'라는 개념의 의미를 되물으며 이렇듯 끊임없이 문제적인 방식으로 다가올 때에만 어떤 의미를 산출하게 될 것이다. 유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대에 유목의 정치적 가능성을 새삼스럽게 다시 되물어야 하듯, '우리'는 아마도 이 책을 통해 잡종이 불가능한 시대의 잡종이 지닌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정우 | 비평가, 작곡가, <사유의 악보> 저자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076743 

 

 

"어느 비평가처럼 '절충주의와 예술적 아취는 병립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재즈가 본질적으로 절충적인 음악 형식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재즈는 출발부터 '사생아'였으며, 영원히 그럴 것이다. 다른 예술 형식과 마찬가지로, 재즈를 순수와 절충 형식으로 구분해볼 때 오늘날 순수해 보이는 것은 아주 오래전에 발생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얼마나 절충적이며 얼마나 복합적인 것이었는지를 우리가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 요아힘 에른스트 베렌트(Joachim Ernst Berendt), <재즈북(Das Jazzbuch)>(한종현 옮김, 자음과모음, 2012), 8쪽.

 

 

<재즈북>.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2004년에 초판이, 2006년에 재판이 나왔던 책인데,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구한 판본은 올해 8월 초에 출간된 3판. 서문을 읽다가 위의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마지막 문장의 한국어가 약간 어색하긴 하다). 비단 재즈뿐이랴. 예술도, 철학도, 그 자신의 절충적이며 복합적인 기원의 '기원성'을 너무나 자주 망각한다. 아니, 보다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 '기원'이란, 그렇게 '순수한' 것으로 상정되고 상상되며 (바로 그러한 상상적 상정을 통해) 회고되기에 비로소, 그렇게 상정되고 상상되며 회고될 때에야 비로소, 그렇게 '기원'으로 기능하고 작동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망각한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조금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리고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적확함이 지닌 역설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껴안고 말하자면, '기원'의 가능조건이란 오히려 바로 이러한 '망각'에 다름 아니다.

 

<재즈북>의 차례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읽고 싶은 부분들만 조금씩 읽었는데, 재즈 초심자에게는 두고두고 확인해가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일 테고, 재즈 애호가에게는 재즈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점검해보면서 정리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일 거라 생각된다. "Quintet du Hot Club de France"를 "퀸텟 '두' 핫 클럽 드 프랑스"(547쪽)로 표기하고 있는 게 아주 작은 흠이라면 흠이겠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드팀전 2012-08-28 09:16   댓글달기 | URL
'자음과 모음'에서 다시 나왔군요. 과거의 판형은 아닌 듯 하군요.ㅎㅎ 너무 크거나 또는 너무 길거나. 지난해 봄에 나온 <문화/과학> '21세기 주체형성론'을 살펴보고 있는데, 람혼님의 글이 있어서 반가왔습니다. '한밤의 미학이 한낮의 정치...'

람혼 2012-08-28 11:26   URL
네, 과거 판형보다 조금 작게, 조금더 도톰하게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아무튼 책은 참 예쁩니다.^^ 그나저나 그 글을 읽으셨군요? 작년에 썼던 글이었는데, 저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2012-08-28 09:27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8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