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어트 걸
페터 회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음악은 '토카타와 푸가 D단조'와 '샤콘느'다.

페터 회의 <스밀라~>를 조금 읽다가 반납해버린 일이 있었는데,

언제 호흡이 좀 골라지면 다시 빌려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뭐, 유럽 작가의 작품이라 그런지, 미국 헐리우드 풍의 기승전결이 없는 것도 있고,

예술적 감각의 지나친 자랑질이 도배가 되는데,

스토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런저런 사념들이 '푸가'가 되어 반복된다.

 

굉장한 청각적 감각을 가진(소머즈가 그 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좀 다른) 주인공 카스퍼.

능력과 달리 도박빚과 탈세로 알쏭달쏭 수녀들과 한 배를 타게 된다.

스토리는 이 소설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도 같다.

 

삶은 뭐, 기승전결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의도가 담긴 듯도 싶다.

삶은 희극적이고 즉흥적인 코미디같은 면도 있지만,

당연히 삶은 슬픈 비극의 그림자도 드리운다.

그리고 그 일들은 반복 또 반복된다.

그런 것들을 음악의 형식을 빌려와서 화려하게 펼치고 있다.

 

샤콘느의 테마는 죽음이에요.

운명의 불가피함, 불변성을 들어보세요.

우리는 모두 죽어요.

여기 1학장에서 여러 대의 바이올린이 서로 대화하는 것 같은 환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바흐가 음역을 바꾸면서

네 개의 현을 동시에 긁어 소리를 낸 주법을 들어 보세요.

이 소리들은 우리 각자,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수많은 목소리예요.(540)

 

이런 음악적인 설명을 듣다 보면, 유튜브의 '샤콘느'와 '푸가'를 찾아 들을 수밖에 없다.

 

카스퍼가 들은 것은 피로였다.

일시적인 피로가 아니라 2,30년쯤 된 피로

카스퍼는 돈을 버는 것보다 뭔가 다른 것, 뭔가 더 많은 것을 원했던 위대한 서커스 감독들에게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

이것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사명을 지닌 사람,

그리고 그 사명이 자신을 완전히 삼켜버리도록 방치한 사람의 피로였다.

그리고 이제 서서히 그 안에서 소진되고 있다.(356)

 

<스밀라~>에서는 눈에 대한 감각이 펼쳐지려나... 기대가 될 만큼 청각에 몰두한 정열이 두드러진다.

음악의 형식에 대입시켜 인생을 풀어내는 작가라니,

읽기 쉽지는 않은 소설이지만, 그리고 뒷부분으로 가면서 긴장감은 많이 풀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나름 멋진 시도가 아닌가 싶다.

 

남들이 다 하는 일을 따라하는 것은 좀 시시하다.

<나는 가수다>가 유행한 뒤 <불후의 명곡>이나 <복면 가왕>, <히든 싱어>, <판타스틱 듀오>, <슈스케> 등의 가요 프로그램이 변주되는 것은 그저 그랬지만,

<팬텀 싱어>처럼 장르를 획기적으로 바꾼 프로그램은 신선해 보이는 것처럼

이 소설만의, 작가만의 영역이 확보되는 느낌이 든다.

 

도시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리나요?

삶과 행복한 시절.

그 이면은요?

고뇌. 모든 인간이 품고 있는 것과 같은 고뇌.(126)

 

이런 것을 음악적으로 풀어낸 것이 '바흐'였고, '토카타'와 '샤콘느'가 아니었나 싶다.

 

침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지.

적어도 나한테는 그래.

먼저 고귀한 침묵, 기도 이면에 들리는 침묵이 있어.

사람이 하느님 가까이 있을 때 나오는 침묵, 그 침묵은 짙어, 모든소리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와 같아.

그리고 또 하나의 침묵은 신에게서, 그리고 타인에게서 멀리 떨어진 절망과 부재의 침묵, 고독의 침묵이지.(289)

 

사뭇 철학적으로 풀어내는 대화들 속에서 주인공은 짓궂기도 하고 방정맞기도 하다.

소양인 같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화려한 건반악기의 토카타를 위한 인물로는 소양인이 제격이다.

소음인이라면 샤콘느의 늪에서 허우적대기만 할 뿐, 푸가의 화성을 울리기는 힘들 수도 있을 터이니...

 

술은 바이올린과 같다.

도대체 그냥 놔두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책을 들고 잔을 비웠다.(80)

 

그래서 그가 울리는 바이올린은 샤콘느다.

 

"난 당신보다 가진 게 많아.

아이들도 있고, 가정도 있어. 사랑하는 사람도...

일상생활에서 만족을 느끼는 재주로 보면 당신은 빵점이야.

하지만, 당신의 갈망은, 가끔 난 당신의 갈망이 부러워."

만진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다. 우린 결코 서로에게 닿을 수 없다. 그래도...(160)

 

소양인이 주인공이어야 하는 것이다. 갈망으로 방방뛸 수 있는 사람.

서로에게 닿을 수 없어도, 샤콘느의 절망의 늪에서만 허우적대지는 않을 사람이...

 

"지금 옆에 누구 있어? 당신은 혼자 있으면 안 돼."

"친구가 있어. 하느님의 조율사. 나의 반음을 낮춰줄 사람."(344)

 

소양이라서, 옆에는 조금 진정시킬 수호천사가 필요하다.

수호천사는 소양인의 음조를 반음 낮춰 진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런 느낌, 좋다.

 

여성스러움에는 어떤 특정한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특별한 음조가 있거나 특별한 색깔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성스러움은 하나의 과정이다.

주도적인 일곱 번째 화음이

주도적이지 않은 장조에 울려 퍼지면 여성스러운 소리가 난다.

그때까지 그는 불협화음 속에서 살았다.(346)

 

같은 표현도 참 예쁘게 한다. 그러니 그는 천상 소양인이다.

 

차에서 나는 소음은 기이하다.

음속 장벽에도 걸리지 않고

그냥 하늘로 올라갔다가 어딘가에 내려 앉는다.

마치 화학물질 누출사고에서 나온 낙진처럼.(349)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에 빗대는 공감각적 표현.

하긴, 모든 것을 청각에 몰두시키려니 나올 수밖에 없는 표현이지만,

이 사람의 두뇌 회로는 어떻게 흐르는 것일지, 몹시 궁금해진다.

 

난 예술가요, 내 신경이 움직이는 걸 느끼고 싶소.(411)

 

피를 흘리면서도 마취를 통해 감각이 둔해지는 것을 거부하고 싶을 정도로 신경이 움직이는 걸 느끼고 싶은 사람.

예술의 피가 맥동하는 심사를 글로 읽는 일도 재미있다.

 

뭔가를 원하는 기도는 할 수 없어.

적어도 다른 음표를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어.

다만 자신이 타고난 음표를 최대한 잘 연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지.(152)

 

기도에 대한 생각도 그럴싸하다.

인간이 타고난 음표가 있다면, 그 음표의 선율을 최대한 잘 연주하는 것이지,

음표를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는 일은 과욕이란 말일지...

 

그 비밀은 G 단조의 비극이었다.

아이와 관계있는 비극. 그녀는 자식이 없다.

A 장조의 완벽주의가 누그러지지 않는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제5도에서 한 단계 높은 음조를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음향학적인 성숙과 같다.(158)

 

인생의 성숙을 음향과 빗대놓으니, 뭔가 있어 보인다.

음향학적인 성숙이라...

 

뭔가 그런 것들을 풀어 놓기 위해서 장치를 만들었는데,

풍성한 부페음식을 앞에 두고 부른 배를 두드리듯,

소설이 쉽지는 않지만 조목조목 멋진 표현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책.

 

 

 

356. 횡경막...은 '횡격막'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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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7-02-04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글샘님은 월간 샘터와 상관 있으신가요? 그냥궁금해서요.

글샘 2017-02-07 00:55   좋아요 0 | URL
낭만인생님은 김사부와 뭔 상관이 있으시남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