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화서 - 2002-2015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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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런 말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은,

독특한 뇌 구조를 가진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 이성복이,

어떻게 하면 저런 표현을 얻게 되는지를 풀어 놓았다.

풀어 놓는 과정 역시... 시이다.

 

처염상정處染常淨 연꽃은 더러운 물에 살지만 항상 맑고,

화과동시花果同時 꽃과 열매를 동시에 얻는다.

 

화과동시라는 말은,

가르침에 따라 배운다든지,

원인에 따라 결과가 얻어진다는 것처럼,

세상의 상식을 깨뜨린다.

꽃과 열매가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스승보다 제자가 못하다고 여기는 것은 착오다.

 

제목이 좋다.

무한꽃차례... 잎차례도 멋진 말인데, 화서...도 멋지다.

아래서부터 피는 꽃은 꽃대가 자라면서 무한하게 피게 된단다.

 

성장에 제한이 없는 무한화서는

밑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것이에요.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니까요.(11)

 

그렇다.

현실의 아픔을 짚어주는 시는 없다.

그러나, 이성복이 짚어줄 때 조금은 따스하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이성복, 그날 중)

 

이런 역설이

이 땅의 현실을 잘 보여주니까.

 

 

눈에 띄게 흰 피부에 입술은 피빨강
꼿꼿하게 핀 허리에 새침한 똑단발

못된 걸음으로 또 어디를 가나
누굴 찾는 것 같아 이 외로운 마틸다

 

아이들이 부르는 이런 감각적인 노래는,

머릿속에 전복의 사고를 불러오지 않는다.

 

영화 '롱십'에 나오는 얘기.

황금종을 찾으려고 섬을 파헤치건 사람들이 마침내 포기하고 곡괭이를 내던지자

종소리가 울려 퍼져요.

섬 전체가 종이었던 거지요.

곡괭이가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

곡괭이의 전혀 다른 기능이 살아나는 거예요.

언어의 시적 사용도 그런 것 아닐까 해요.(21)

 

시의 언어는 일상어와 같지만, 곡괭이로 파서 얻을 수 없는 것.

희한하지만 야릇한 쾌감을 준다.

 

가야금 탈 때 손으로 지그시 눌러주어야 깊고 부드러운 음이 나오지요.

멋진 이미지로 장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이 '지긋함'이에요.(34)

 

오직 힘있는 사람만이 소극적 능력을 가질 수 있어요.(48)

 

뭐든지 의욕이 앞설 때 힘이 들어간다.

테니스나 골프같은 운동도 그렇고, 피아노나 플루트 같은 악기도 그렇다.

힘 빼세요. 라고 말하지만, 그 경지는 초보의 경지가 아닌 것이다.

한 치 앞을 걱정하는 이에게 힘 빼라니, 어불성설이다.

운전도 십 년, 이십 년이 넘어야, 지긋한 경지의 안정이 찾아온다.

 

시는 이미지와 메시지 사이에 있어요.

수레바퀴도 테두리가 돌면 중심축은 나아가지요.(78)

 

메시지를 전달하려 애쓸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찾아내려 애쓰라는 말인 듯.

 

위의 시들은 그래도 이미지가 그려져서 공감이 많이 되네요..
요즘 시들이 거의 외계인 수준이라서 도통 못알아듣는 시들이 많아요.
그렇다고 일반인들이 시에 대해 얼마나 연구하겠는지 전혀 고려는 없더란.
시 안팔린다고 시인들이 죽을상하더군요..

 

 

어제 쓴 손택수 시집 리뷰에

누군가가 단 댓글이다.

요즘 시들이 이미지 발굴에도, 메시지 전달에도 무관심한,

징징대는 소리들이란 생각에 공감이다.

 

사랑할 때나 운동할 때처럼

좀 힘든 부분이 있어야 제대로 된 시예요.(90)

 

결핍이 오히려 추억도 만들고, 의욕도 부추길 때가 있다.

 

악은 무감각이고 어리석음이에요.

시가 아니라면

우리 자신의 악을 무슨 수로 적발할 수 있겠어요.(153)

 

악의 본질은,

욕심에서 나오는 어리석음이고,

무감각과 무관심이다.

시는 그 무관심을 메스로 파헤쳐내는

처절한 장면인 셈.

 

깨달음에 목매지 마세요.

어리석음을 그냥 두고 바라보세요.

절해고도의 섬처럼,

파도 많이 치는 밤에는 섬도 보이지 않는 절해처럼...(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시 쓰기는 어렵다.

그래서 자꾸 시론으로 옮아가는 것인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겠다.

굳이 하드 커버로 하지 않았더라도 사랑받을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은 든다.

3권으로 분철해서

시집처럼 가벼운 것은 아주 맘에 든다.

 

 

 

 

 

 

대체로 한자어를 잘 표기하고 있으나,

159. 전향적 사고를 해야 해요. 가령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게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낳았다고 해 보세요... 이런 건, 구를 전을 써야 옳다. 轉向的... 앞 전을 쓰면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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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09-21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셨군요.
잘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