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재구성 - 제28회 신동엽창작상 수상작 창비시선 306
안현미 지음 / 창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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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

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

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

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와유(臥䢟), 전문)

 

이 시집에서 오래오래 여러 번 읽어보던 시다.

분위기가 오늘 날씨와 맞춤해서인지,

내가 전생에 한지에 시 좀 적고, 국화주 좀 마셔서인지, 이런 것이 좋다.

 

어제 아내가 뜬금없이 "르노와르는 가난하지 않게, 풍족하게 살았을 거 같애.

그림들이 참 따스해~"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검색에 들어가 보니, 역시 그랬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그는 궁핍에 시달리지 않고 일찍부터 넉넉한 생활을 했다 한다.

작품에는 그 사람의 '궁기'가 드러난다.

'근기'가 다 반영된다.

이 사람 글 역시 르노와르보다는 뚤루즈 로트렉 류에 가까울 것인데...

 

당신이 내 절망의 이유이던 때가 있었다

당신이 내 희망의 전부이던 때가 있었다

그 이전 이전엔 당신이 내 아무것도 아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 이전에도 당신은 당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이후에도 당신은 당신일 것이다

 

시시해서 미치겠는 사랑!(모계, 부분)

 

아무리 뜨거웠던 사랑도,

이전 이전에는 아무 것도 아닌,

그저 당신일 뿐인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때는 희망의 전부자 절망의 이유였던... 그러나 이제는 거울앞에 서... 시시해서 미치겠는 것이

삶이고 사랑인가...

 

인간 이전에 안현미는 천상 여자다.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 메이는 소리(여자비, 전문)

 

인간의 생에 대한 본능은 여자가 더 지극하다.

아마도 몸 속에 아이집을 가지고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탯줄로 먹인 기억이,

그리고 피부를 통해 흘러나오는 천연 자양분인 젖을 먹인 기억이

여자를 삶의 투사로 만든다.

 

여자비

멋진 시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날 느닷없이 왼손을 잘리고 남은 생

을 오른손잡이로 살아가야 하는 왼손잡이처럼, 자신의 뿌

리를 잘리고 남은 생을 자신의 뿌리 바깥에서만 살아가야

한다(뉴타운 천국, 부분)

 

용산일 것이다. 뉴타운은...

용산 그 땅을 허물고 새집 지으려던 명단에도 <삼성>이 있었다.

당연히 메르스 병원 이름을 감추던 배경에도 그들이 있었다.

불교에서 '반달과 별 셋'은 마음심(心)을 파자한 것인데,

그렇게 소중한 마음 짓밟고 들어선 곳은, 과연 새로운 마을일까?

 

어안렌즈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인간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

 

 

나무처럼 거울 하나 서 있다

그 거울 속엔 거울을 닮은 연못 하나 있다

그 연못 속엔 거울처럼 서 있는 나무 하나 있다

그나무 늙은 가지 하나 거울 속으로 뻗고 있다

그 나무 질긴 뿌리 하나 연못 바닥에 이르고 있다

거울 속에도 연못 속에도 나무 속에도 여자는 없는데

여자가 쌓아둔 오래된 미래가

수생식물처럼 자라고 있다

수생식물처럼 부유하고 있다

 

거울처럼 거울이 있다

나무처럼 나무가 있다

연못처럼 연못이 있다

거울 속에도 연못 속에도 나무 속에도 없는 여자가

시간을, 물고기를 , 사각지대를 기르고 있다

수생식물처럼 자라고 있다

수생식물처럼 부유하고 있다

 

 

한 사람은 한 세계다.

그 사람 안에 또 한 세계가 자란다.

거울 저편에서는 방향이 반대인 채로,

연못 저 아래서는 거꾸로 선 채로,

인간의 세계는 자라난다.

 

질기고 단단하게

그러나 부유하면서...

흔들리면서 살아 간다.

 

시집을 읽노라면,

맘에 쏙 드는 시도 있고, 그저 그런 시들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시집을 자주 사는 편이다.

 

삶 역시 그러하듯,

맘에 꼭 드는 날도 사람도 있고,

별로인 날도 사람도 있게 마련이니까.

 

꼭 드는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여겨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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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15-06-15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안현미 시집을 사서 읽어보고 싶어요..원래 시집은 안사야지 했는데..늘 한개의 시를 보고 샀다가...끝까지 못 읽고 버려 둔 게 부지기수이거든요...물론 그건 제 마음이 시를 받아들이기에...너무 성급하기 때문이란 걸 알지만....^^;

글샘 2015-06-16 14:06   좋아요 1 | URL
저는 소설은 안 사도 시집은 사서 봅니다. 시집 한 권에서 한 편만 건져도 ㅋ 성공이지만요. 말을 벼리고 벼려서 시집을 내는 일에 용기를 주는 일 같아서 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