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죽음'이라는 좀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 해 보자.
얼마 전에 장석남의 <번짐>이라는 시에서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이렇게 읊은 구절을 읽을 기억이 나는지...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느 순간, 숨이 끊어지고 심장이 멎는 순간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의학적으로 죽음의 순간을 결정하는 것에도 여러 가지 입장이 있단다.
그것조차도 <주관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거야.
사람은 의식이 없이도 그러니까 뇌가 활동하지 않는 뇌사상태일 때에도 청각같은 것은 살아있대.
감각을 한다는 것이지.
그러다가 호흡이 멈추면 사람이 죽은 거냐면
호흡이 멈추고도 심장이 뛰고 있는 경우도 있단다.
한국의 '법'은 '사망'을 '심장사'로 결정한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심장이 멈췄을 때를 죽음으로 친다, 고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지.
그래서 '뇌사'이 경우, 뇌는 멈췄으나 숨을 쉬고 심장이 뛴다면 살아있는 사람 취급을 하는 거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으니,
그것을 <번짐>으로 표현한 장석남도 멋지구나.
죽음의 순간은 그래서 번져 나가서 고인의 삶을 환하게 밝힌다.
죽고 나면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었는지 욕먹을 사람이었는지 평가받을 수도 있지.
죽음 이후에 안타까움을 많이 남기는 사람이 있고,
후련함을 남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죽음에 대한 절창은 뭐니뭐니해도 천상병의 <귀천>이 아닐까 해.
우선 한번 읽어 보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아주 짤막한 시다.
제목도 <하늘로 돌아가리>하는 뜻의 귀천이야.
천상병은 서울대 상대 재학 중, 1967년 동베를린사건(동백림사건)을 날조(거짓으로 지어냄)한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의 피해자란다.
감옥에 다녀온 후 바보가 되어버린 바보 시인이지.
그래도 특이하게 결혼을 하여 아내가 <귀천>이란 찻집을 내서 먹여 살리곤 했다더구나.
고문을 받으면서 죽음을 생각했던 것일까?
죽는 일은 <원래 우리가 온 그곳>으로 돌아가는 일일 뿐이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니...
인생을 <아침 이슬>에 비유하곤 한다.
풀잎에 가득 매달렸던 이슬은 햇살이 와 닿으면 금세 스러져 버리는 허망한 것이거든.
그래서 구운몽에서도 금강경의 한 구절을 빌려서 이렇게 노래했잖아.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고,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하라.
인간의 모든 일은 꿈 같고, 허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
이슬 같고 또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러함을 볼 것이다.
삶은 뭐 엄청 장엄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가 왔던 어던 기슭에서 놀던 것이래.
그러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가면 되는 가벼운 것이지.
3연이 절창이야. 삶은 곧 <소풍>과 같다는 발상.
비유는 '유사한 점'을 찾는 것이잖아.
소풍은 어때?
소풍을 2박 3일 가는 일은 없잖아.
금세 갔다 오는 것이고,
피곤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은 그런 거잖아.
재미도 조금 있지만, 사실은 시시하고 뭐 좀 그런 것.
그리고 순진한 아이들 시절에나 가는 그런 것.
이렇게 인생을 다 초월한 것 같은 관점을 <달관>한 것 같다고 표현하지.
이 시에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것도 한때일 뿐,
곧 스러져버리고 마는 존재로 '이슬과 노을'을 들고 있단다.
인간도 그것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지.
이렇게 '유사성'을 가져다 대는 것을 빗댄다고 하고, 어려운 말로 비유라고 해.
실제로 화자의 삶은 가난과 고통의 연속이었는데 마지막에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하고 표현했어.
삶에 대한 화자의 긍정적 태도가 잘 드러난 표현이라고 봐야겠지.
이 시의 주제라면, <삶에 대한 달관이 드러난 죽음에 대한 관조>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이 시가 감동을 준다면 어떤 면에설까?
시인의 인생이 비극적이었는데도 <아름다웠던 소풍>으로 미화하는 데 있을까?
시어의 단순성과 소박함이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시인의 서정을 더 북돋우고 있는 것 같다.
이 시에서 죽음과 삶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과연 '죽음'의 반대말이 '삶'인 것일까?
아니지?
여기서 죽음은 삶과 분리된, 구분된, 구별된 개념이 아니란다.
우리는 원래 어디에선가부터 인연을 맺어 왔고,
이승에 잠시 태어나 삶을 살았고,
삶이 끝나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불교의 윤회설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단다.
이 시의 화자가 죽음을 맞는다면, 글쎄, 슬프다기 보다 평화로운 얼굴로 맞을 것 같기도 하구나.
다음엔 황동규의 <풍장>이란 시를 보자.
사람이 죽으면 장례의 풍습엔 여러 가지가 있대.
한국은 주로 매장과 화장을 하지만, 요즘엔 수목장이라고 나무 밑에 뼛가루를 묻는 일도 흔다단다.
몽골 사람들은 '조장'을 하기도 한대. 들판에 냅두면 새들이 와서 처분해 주는 것이지.
이 시의 풍장은 '풍화'되도록 시신을 자연에 내버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 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황동규, 풍장 1)
'풍장'은 한국의 '법'에 따르면 금지되어 있단다.
법을 위반하면 처벌을 받게 되어있지. 그래서 시신을 들판이나 어디 무인도에 가져다 버리면 벌을 받는다.
좀 웃기지 않니?
어차피 시신은 아무 쓸모도 없는 건데,
유언에 따라 산에 묻든, 바다에 뿌리든, 나무 밑에 묻든, 무인도에 내버리든...
인간이 얼마나 주관적인 존재인지 알 수 있단다.
그런데도 죽으면 풍장시켜 달라고 한 것은, 그만큼 죽어서라도 자유를 맛보고 싶다는 이야기지.
사람이 죽으면 얼마나 성가신지 몰라.
그냥 가져다 묻는 게 아니란다.
무조건 의사의 <사망진단>이 떨어져야 하고,
그 뒤에 관에 넣을 수 있고, 장례식이란 거추장스런 절차를 거쳐야 하고,
마지막이란 이름으로 고인의 지인들이 와서 대접도 해야 하고...
손님이 오면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곡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2,3일 지나서 관을 싣고 화장장으로 가서 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든 해야 한단다.
화장한 것도 일정 기간 항아리에 넣어서 납골당에 모셔야 한다니 참,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서 화자는 그저 홀가분하게 죽고 싶다는 욕망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
옷도 전자시계도 그대로 달아 놓으란 이야기는 아무런 꾸밈없이 죽고 싶다는 희망이다.
사람이 죽으면 새로 '수의'라고 해서 옷도 삼베로 입힌다. 당연히 돈도 비싸지.
군산과 곰소는 전라북도의 지명이다.
무인도에 가서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살을 말리'고 싶은 화자의 소망.
세상의 구속, 질곡(수갑과 족쇄를 뜻하는 말, 구속과 비슷한 말, 어렵지만 꼭 알아 둬야할 말)이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화장도 해탈도 없이' 가고 싶은 화자는 세속의 가식적인 장례가 무의미함을 드러낸단다.
죽고 나서 종교적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모두 '니미 뽕(영화 글러브의 용어 ㅋ)'이란 외침이기도 하다.
죽어서도 가죽가방 안에서 다리 오그리고 있다가,
뭍에 배가 닿는 기척에 시간을 떨어뜨리겠다는 등의 표현으로 보면,
죽어서도 아주 사라지는 것 같지는 않은 삶의 연관성을 조금 드러내고 있단다.
그렇지만, 육신에 대하여 지나치게 형식적인 장례에 대하여,
인간의 삶은 과도하게 겉치레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천상병의 <귀천>이 순수한 아이가 깔깔거리듯 읊은 시라면,
황동규의 <풍장1>은 얽매이는 것이 너무도 많은 세상사가 귀찮아진 어른이 남긴 시 같지.
주제라면 <자유로운 죽음을 맞고 싶은 의지> 정도면 되겠지.
죽음이란 현실에서의 존재가 소멸되어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란 의식도 있고 말이야.
'바람'이란 자연에 묻어 가고픈, <순환>의 의지가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죽어서라도 자유롭고 싶다는 것을 보아,
살아서의 현실이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것이었던지 추측해 볼 수 있다.
황동규의 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전에 배운 적 있잖아?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고은, 문의 마을에 가서)
이 시는 시인이 동료 시인의 모친상을 맞아 찾아간 충북 청원군에 있는 문의마을에서
죽음과 삶에 대한 깨달음을 경건하고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는 시란다.
우리는 보통 '죽음'이라고 하면 무서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서프라이즈 같은 데서는 '귀신'이 뭔가 신령스런 노릇을 한다고 설정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생명체는 드래곤 볼 일곱 개를 모으기 전까지는 모두 유한한 존재다.
죽음은 삶의 <번짐>이기도 하고,
그래서 또 죽음은 <소풍>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유로워지고 싶은 <절차>로서의 풍장을 소망하기도 하고 했던 거지.
이 시에서 문의(文義) 마을은 죽음과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공간으로 설정되고 있다.
시골마을에 가서,
거기까지 닿은 길이 꼬불꼬불 찾아갔는데,
거기서 또 산길로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보면서,
아, 이런 유사성이 있구나... 하는 발견을 적은 거야.
동료 시인의 초상집이라고 찾아가는데, 힘들게 묻고 또 물어가면서 꼬불꼬불 찾아간 길 끝에 상가(喪家)가 있겠지.
그런데, 그 집이 목적지였지만,
그 목적지의 옆과 뒤에는 다시 길이 몇 갈래 펼쳐져 있었던 걸 보면서,
아, 삶의 종착역까지 우리는 힘겹게 꼬불꼬불 살아 가겠지.
그렇지만 종착역에 가 보면, 거기가 끝이 아닐 거야.
거기서 시작되는 길이 다시 몇 갈래 펼쳐져 있을 거야.
이런 오묘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시인들이란다.
여기서 <길>은 중의(重義)적으로 쓰였지. 두 가지 뜻으로...
하나는 화자가 걸은 길이고, 또 하나는 인생길이고...
죽은 뒤에도 길이 이어진단다.
대신에 삶의 길은 시끌벅적 소란스러운 그것이지만,
죽음의 길은 길이 <적막>하겠지.
<귀를 닫고> 쓸쓸하고 비정한 길은 <추운 쪽>으로 뻗어 있단다.
그 <적막하고 추운 길>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길이 되겠지.
죽은 자는 그렇게 떠나보내고,
그러나,
살아있는 자들은 그 길에서 돌아가 집으로 간다.
거기서 고인의 유품을 태워 재를 날리지.
그러다 문득 팔짱 끼고 바라본 산.
이제까지 <먼 산>이라 생각했던 앞산이 <너무 가깝게> 느껴진다.
초상을 치르는 과정에서 <삶과 죽음>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느낌을 갖게 되겠지.
눈에게 묻는다.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하고.
죽은 이의 무덤을 눈이 포근하게 덮어 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눈은 살고 있는 사람의 집도, 길도 다 덮어주고 있기도 하잖아.
그러니, 눈은 죽음과 삶을 모두 덮어주는,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포용하고 안아주는> 그런 시어라고 보면 될 것 같아.
2연은 마찬가지 모티프로 보면 될 거 같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은
삶이 번져 죽음이 되는 것과 한치도 다름 없는 표현이구나.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기에, 사절(사양)하다가,
어쩔 수 없이 죽게 되었음인데,
저만큼(거리감) 가다가 삶을 되돌아보게 되겠지.
죽음의 위치에서 삶을 되돌아 보니,
아, 참으로 모든 것은 <낮>구나.
참으로 보잘것이 없구나.
살면서 그토록 애걸복걸 매달렸던, 인간관계, 명예, 재산, 지위, 그 모든 것들이...
참으로 <낮은 것>이었구나.
이렇게 한 순간에 <겸허함>을 되찾게 한 공간이 <문의 마을>이었다.
거기에 눈이 쌓인다.
살면서 참으로 <돌에 맞기 싫어> 그렇게 애를 태웠던 날들이었는데,
인간관계에서, 명예, 재산, 지위, 그 모든 것들에서 돌을 맞기 싫어 공을 들였는데,
삶을 떠나고 보니,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이 시의 주제 의식은 <삶과 죽음이 하나의 실체>라는 깨달음이 되겠다.
죽음을 통해 삶의 경건함을 깨닫고, 겸허함을 되찾는다는 이야기겠다.
죽음은 참 멀리 있는 것 같지만, 누구도 비껴갈 수는 없는 것이겠지.
이런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서 다양한 죽음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저 부유하게 <잘살기>만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잘 살기>를 위해 노력할 것인가?
이런 철학적 사색의 기회를 갖는 것도 좋은 일일 게다.
입춘이 지나더니 날이 많이 풀렸다.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물질성을 가진 존재라고 그러지.
사색하는 인간의 삶이 온 건물에 울리는 파이프오르간 소리처럼 웅장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단다.
사색으로 얻어진 자기의 입장, 신념, 소신 이런 것들이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단다.
아빠의 시 읽기가 지향하는 바가 그런 것이기도 하고...
환절기일수록 감기 조심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