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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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첫 발령을 기다리며 여름을 보내면서 <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아버지와 그의 인생에 대해 그리고 사춘기 시절 그와 나 사이에 찾아온 이 거리에 대해 말하고 쓰고 싶었다. 계층 간의 거리나 이름이 없는 특별한 거리에 대해. 마치 이별한 사랑처럼 - P19

최근에서아 나는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달았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
시처럼 쓴 추억도 환희에 찬 조롱도 없을 것이다. 단조로운 글이 자연스럽게 내게 온다. 내가 부모님께 중요한 소식을 말하기 위해 썼던 글과 같은 글이. - P20

그의 못된 성질은 그의 삶의 원동력이었고, 가난을 버티게 하는 힘이었으며, 자신이 남자답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폭력적으로 만들었던 것은 집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책 혹은 신문에 빠져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읽거나 쓰는 일을 배울 시간이 없었다. 계산, 그건 할 줄 알았다. - P21

반은 장사꾼, 반은 노동자, 양쪽에 발을 걸치면서 그는 외로움과 불신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고, L시에서 행진하는 크루아드푀와 자신의 재산을 앗아갈 수도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혼자만 간직했다. 장사하는 데에 그런 건 필요하지 않다고. - P37

그렇지만 욕망을 위한 욕망이었을 뿐이다. 사실상 무엇이 아름다운지,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아버지는 유행하는 색깔과 모양을 따르기 위해 페인트공, 소목공의 충고를 늘 따랐다. 하나씩 물건을 골라 꾸밀 수 있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
분수를 알아야 해, 그가 늘 하던 말이다. - P52

그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앞에서 뻣뻣해지고 소심해졌으며, 어떤 질문도 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영리하게 처신했다. 이 경우 열등함을 인식하되 그것을 최대한 숨기면서 거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강박 관념: <사람들은(이웃, 손님들, 모두)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 P54

진보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전혀 확신이 없어도 자신이 듣거나 읽었던 말을 시험 삼아 써보는 어머니와는 다르게, 자신의 언어가 아닌 말들을 쓰는 것을 거부했다. - P56

내 기억 속에 언어에 관한 모든 것은 돈 문제보다 더한 원망과 아픈 언쟁의 원인이었다. - P57

모든 것이 무료였다. 그는 모든 것을 제공하는 시스템에 일종의 경의를 느꼈다. 국가가 단번에 세상에 내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내가 학기 중에 학교를 떠나자 그는 혼란스러워했다. 그는 거름 밭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토록 확실한 곳에서 자유 때문에 떠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 P80

아버지는 내 미래의 남편을 자기 아들처럼 여기며, 그와 학벌의 차이를 넘어 남자들끼리의 은밀한 유대감을 가질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매우 기뻐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정원과 혼자 직접 만든 차고를 보여줬다. 자신의 딸을 사랑하는 그 청년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줄 것이라는 흼아을 품고 그가 할 줄 아는 것을 바친 것이다.
......
그는 자신이 모아 놓은 돈으로 이 젊은 신혼부부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랐다. 한없이 베풀어서 그와 사위 사이를 갈라놓는 문화와 권력의 차이를 만회하길 바랐던 것이다. - P85

나는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익명의 존재들자 자신도 모르게 힘 혹은 굴욕의 징표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서 아버지가 살던 환경의 잊고 있던 현실을 되찾았다. - P90

나는 교양 있는 부르주아의 세상으로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두고 가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일을 마쳤다. - P99

어쩌면 그의 가장 커다란 자부심 아니 심지어 그의 존재 이유는 자신을 멸시하는 세상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 P100

"기술교육 중학교는, 잘 안 됐어요." 그녀는 내가 자신의 진로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왜 기술교육 중학교에 보내졌는지, 무슨 분야로 갔는지 잊어버렸다. 나는 그녀에게 "또 봐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미 왼손에 다음 사람의 물건을 들고, 오른 손으로는 계산기를 보지도 않고 두드렸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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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오공훈 옮김 / 그러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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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힘이 셌지만, 매사에 느렸다. 그는 느리게 생각했고 느리게 말했고 느리게 걸었다. 하지만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걸음을 자취를 남겼고, 더욱이 에거의 견해에 따르면 그런 자취는 바로 적절한 곳에 남겨졌다. - P26

때때로 온화한 여름밤이 되면, 그는 갓 풀을 베어낸 목초지 어딘가에 담요를 펴고 반듯이 누운 뒤 별이 가득 찬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 앞에 무한하게 펼쳐진 미래를. 그리고 때때로 몸을 쭉 뻗은 채 누워 있을 때면, 등 아래 땅이 천천히 부드럽게 올라갔다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고, 이 순간 산 전체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P30

토마스 카틀은 1946년 비터만 운트 죄네가 파산할 때까지, 회사에서 일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공식 집계된 총 서른일곱 몇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1930년대부터 점점 빠르게 확대된 케이블카 건설 작업에 투입됐다가 목숨을 잃은 노동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 P57

"부인 일은 정말 유감이네. 하지만 눈사태가 폭파 때문에 일어났다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아. 마지막 폭파는 눈사태가 일어나기 몇 주 전에 있었다고!" 총지배인이 말했다. - P75

당시 에거는 크란추슈토커에게 은밀히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인생에서 잃을 것이 전혀 없기는 했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얻을 가망은 아직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 P81

그래도 불평하고 싶지는 않아. 내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시간에, 눈 속에서 추위에 떨며 몸이 뻣뻣해진 채 누워 있는 사람도 많으니까. 아마 당신도 별을 바라보고 있겠지. - P94

에거는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과 함께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있을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당황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에거는 자신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마치 자기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계획을 시도하는 어른들을 그저 구경만 하고 있는 어린아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05

하지만 아무리 오래 걸려도 2시간짜리인 등을 하는 동안 관광객의 오만한 태도는 뜨거워진 머리에서 솟는 땀과 함께 증발해버리고, 오로지 등반을 완주한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 아울러 뼛속 깊이 스며든 피로만 남게 된다는 점을 에거는 잘 알고 있었다. - P117

에거는 예기치 않은 만남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뿔 달린 하네스가 사라진 날과 다시 불쑥 나타난 날 사이에는, 거의 한평생에 가까운 시간의 간극이 놓여 있었다. 에거는 마음의 눈을 통해 펄쩍펄쩍 뛰어오르던 흐릿한 사람 형체가 차츰 멀어지다가 새하얀 눈보라의 정적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빙하 틈까지 갈 수 있었을까? 거기서 무엇을 찾으려 했던 걸까? - P137

에거는 심장 쪽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고, .... 한쪽 뺨이 탁자 표면에 닿았다. 에거는 그런 자세로 쓰러진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 뛰는 소리가 멈추자, 고요함에 귀를 기울였다. 참을성 있게 심장이 다시 뛰기를 기다렸다. 더 이상 심장이 뛰지 않자, 그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죽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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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비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6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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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줌의 사람들을 통해 삶의 길이와 완성도는 비례하지 않으며 자유와 숙명은 한 몸임을 보여주는 수작. 돈도, 가정도, 명예도, 이데올로기도, 이들이 어느 밤하늘 홀로 날다 바라본 대평원의 등불 하나가 만들어준 순간을 대체할 수는 없다. 파비앵에 빛 속에서 산화되는 장면은 오래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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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비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6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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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특히 내가 심리학적으로 상당히 중요하다 생각하는 모순된 진실, 즉 인간의 행복은 자유 속에 있지 않고 의무를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밝혀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열정적으로 자기가 해야 하는 일, 그 위험한 임무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임무를 완수했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한 휴식을 얻는다.
......
사람은 자기 안에서 목적을 찾지 않고, 자신을 지배하고 살아가게 하는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따르며 희생한다. - P9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숨기듯이 용기를 숨긴다. - P11

‘그들이 강렬한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밀어줘야 해,‘ 그는 생각했다,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불러오는 강렬한 삶으로 나아가도록. 그런 삶만이 중요하니까.‘ - P36

‘그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편기들은 어디선가 여전히 투쟁주이었다. 야간비행은 밤새 지켜봐야 하는 질병처럼 계속되었다. 손과 무릎,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어둠과 맞서 싸우는 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바다에서 헤쳐나오듯 맹목적으로 두 팔을 휘저어야 하는 이 사람들을 도와야 했다. - P53

‘열심히 일한 결과가 겨우 이거란 말인가! 난 이제 오십이야. 오십 년을 한결같이 열심히 일하고 단련하고 싸워서 사건의 흐름을 바꾸어놓았지. 그런데 이제 나를 휘어잡고 내 안에 가득차 세상만사 이보다 더 긴요한 일은 없을 듯한 느낌을 주는 게 이런 통증이라니...... 참 어이가 없군.‘ - P57

‘나는 그를 두려움에서 구하는 거야. 내가 공격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고. 그를 통해 나타나는, 미지의 것 앞에서 인간을 마비시키는 그런 방해물을 공격하는 거지. 내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동정하고, 그의 모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는 불가사의의 세계로부터 돌아왔다고 생각할 거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바로 이 불가사의뿐이지." - P71

‘너무나 아름답군.‘ 파비앵은 생각했다. 그는 보석처럼 빼곡히 들어찬 별들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다. 파비앵과 그의 동료 말고는 아무도 없는, 살아 있는 것이라곤 없는 세계에서. 그들은 보석이 가득한 방에 갇혀 다시는 그 방을 나올 수 없는, 동화 속 도시의 도둑들 같았다. 그들은 얼음처럼 차갑게 반짝이는 보석들 가운데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 죽을 운명을 맞이하여 떠돌고 있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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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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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쫌만 멀리서 보면 한평생 걱정하고 발버둥 쳐도 그저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민들레 씨앗 같은 삶들. 의미나 희망이란 것 자체가 지극히 인간적 기복에 불과. 용빈에게 다가온 저 묘한 사내를 보건데, 용빈도 곧 시대에 휩쓸리게 될 것 뻔하고. 어리게만 그려진 막내 용해나 제대로 살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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