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밥을 먹은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커피와 싹을 잘라내고 구운 감자를 먹었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오늘, 언니가 심은 피망은 잘 자라고 있다. 피망에 물을 줄 때마다 집으로 돌아간 언니를 생각한다. 예전과 다르게 자주 다니러 오지만 그래도 생각난다.  

 

 

 

 

 

 

 

 

 

 

 어제는 언니가 심은 가지가 꽃을 피웠고 오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내년에는 피망 대신 토마토를 심어야 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언니가 심었다는 가지의 꽃을 떠올리니 유희경의 시집 『오늘 아침 단어』가 생각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시집에 ‘심었다는 작약’ 이란 제목의 시가 떠오른다.

 

  

 

 

 

 네가 심었다던 작약이 밤을 타고 굼실거리며 피어

나, 그게 언제 피는 꽃인지도 모르면서 이제 여름이

라 생각하고, 네게 마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그게 아니면, 화분에다 심었는지 그 화분이 어떻게

허연빛을 떨어뜨리는지 아는 것도 없으면서 네가 심

은 작약이 어둠을 끌고 와 발아래서 머리 쪽으로 다

시 코로 숨으며 번지며 입에서 피어나고, 둥근 것들

은 왜 그리 환한지 그게 아니면 지금은 어떻게 설명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봄은 이렇게 지

나고 다시 여름이구나 몸을 벽에 붙여보는 것이다 그

러니 작약이라니 나는 그게 어떻게 생긴 꽃인지도 모

르고 나도 아니고 너는 더구나 아닌 그 식물의 이름

이 둥그렇게 떠올라 나는 네가 심었다는 그것이 몹시

궁금하고 또 그런 작약이 마냥 지겨운 건 무슨 까닭

인지 심고 두 손을 소리 내어 털었을 네가, 그 꽃이.

심었다던 작약이 징그럽게 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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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날을 감기와 함께 지내고 있다. 약을 계속해서 먹고 있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잠을 청하고 있다. 그리하여 침대와 책상에는 코를 푼 더러운 휴지가 쌓이고 투명한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멍한 상태로 읽고 있던 책의 앞 부분을 다시 읽기를 반복하고 있으며 그 와중에도 책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다. 허연의 『내가 원하는 천사를 기다리며 그의 다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다시 읽는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

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

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

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

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제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p. 17)

 

 

 시인에게는 푸른색으로 남았던 그 시절, 내가 아는 한 소년에게서는 짙은 파랑색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 내가 소녀였을 시절에 내 모든 손편지의 수신인이었던 그 소년 말이다. 채송화를 좋아하고 채근담을 좋아했던 그 소년이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서 파랑을 보았다. 그저 짧게 주고 받은 메일에서 간단한 안부를 전하던 목소리에서 아주 짙은 파랑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내게 있어 자신이 나쁜 소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알지 못 할 것이다.

 

 

 <검은 지층의 노래>

 

 열병 않은 머리맡에서 아주 오래전 노래가 흐른다. 지층

의 흉터를 따라 흐르던 노래. 지층이 파 놓은 아주 미세한

홈을 따라 흐르던 노래. 가끔씩 상처 난 지층의 절개면에

서 불협한 소리를 내곤 하던 노래. 돌고 돌았던 검은 지충

의 노래. 누구의 뼈를 깎아서 만든 노래. 그 뼈를 기억하고

있는 검은 노래.

 

 판판이 깨진 노래. 한 시대와 또 다른 시대가 장중하게

죽어 갔던 노래. 모닥불에 던지면 한 줌도 안 됐던 노래.

애저녁에 영원할 수 없었던 노래. 손쓸 수 없는 파멸을 담

았던 노래. 차마 칼을 뽑지 못했던 그 봄밤에 들렸던 노래.

일몰 후에는 단조로 변했던 세월의 노래.

 

 세로로 서 버린 노래. 문자가 되어 버린 노래. (p. 47)

 

 

 허연의 시집에서 자꾸만 그 소년이 보인다. 문득, 지금은 어떤 색으로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내 기억 속에 남은 그 모습으로,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세상을 유영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아니,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면 좋겠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고 있다면, 원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면 더 좋겠다.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굳은 채 남겨진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

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

운 부분이 있다. 먹고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

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

형의 상스러움이 있다. 치열했으나 보여 주기 싫은 곳. 밥벌

이와 동선이 그대로 남은 곳. 절색의 여인도 상스러움 앞에

선 운다. 사투리로 운다. 살은 굳었고 나는 오늘 상스럽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p. 23>

 

 

 여전히 이 시에 멈춘다. 여전히 치열한 삶을 살고 있을 나쁜 소년을 위한 시 같아서, 여전히 사랑하는 일에 사는 일에 최선을 다할 나쁜 소년에게 보내는 시 같아서, 그 나쁜 소년을 바라보는 나쁜 소녀를 위한 시 같아서, 굳은 살은 늘어날 것이고, 상스러운 오늘을 살고 있을 수많은 나쁜 소년과 나쁜 소녀에게 괜찮냐고 묻는 것 같아서, 반복해서 읽고 읽는다.

 

 5월인데 어떤 날은 춥고, 어떤 날은 덥다. 나쁜 소년이 원하는 천사는 어떤 천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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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긋지긋한 어떤 날들 중의 하루 뿐인 오늘도 서글프게 흘러간다
    from 識案 2012-05-22 10:44 
    밤에 읽은 시와 아침에 읽은 시는 분명 같았다. 시를 읽는 눈과 마음이 달랐을 뿐이다. 차례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차분하게 읽는 대신 눈에 닿는 순서대로 시를 읽다가, 다시 차례대로 읽는다. 그러니 시라는 건 읽는다고 읽는 게 아니고 안다고 아는 게 아니며 이해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님이 분명하다. <나의 마다가스카르 1> ―세월 하나 지나갔다 별자리가 천천히 회전을 하는 동안 우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동안 마
 
 
이진 2012-05-15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쿵, 늦은 감기에 걸리셨군요. 하긴 요새 온도 차이가 너무 심하게 벌어진다 했어요.
자목련님 많이 아프신건 아니죠? 많이 아프시면 안되요.
허연의 시들은 참 예쁘네요.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고 딱딱 들어맞는게 정말 예뻐요.
저도 좋은 시를 고를 능력이 생기면 좋을텐데. 음.

자목련 2012-05-16 12:19   좋아요 0 | URL
소이님의 마음을 감기가 알아서 곧 사라질 것 같아요. 고마워요.

시들에게 예쁘다라고 말하는 그 마음이 좋은 시를 알아보는 거 아닐까요?
지금쯤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여유로운 시간일까 싶어요.^^

아이리시스 2012-05-1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졸려요ㅠㅠ
시 너무 좋은데 못 읽고 꾸벅꾸벅 (이러면서 댓글쓰고있다-_-;)

오오, 이 좋은 날들에 감기라니. 오늘 저녁은 돈가스 먹을 거예요! 자목련님도 맛난 거 많이 챙겨드시고 감기 뚝!
저도 제 천사를 좀 찾아주셔요. ^^

자목련 2012-05-16 12:17   좋아요 0 | URL
반짝이는 날을 감기가 시샘하는 것 같아요. 전 어제 노란 카레를 먹었습니다. 너무 많이 해서 남은 건, 점심에도 먹어야 할 것 같아요.ㅎㅎ

감기는 나아지고 있는데 완전하게 사라지지는 않아요. 아이리시스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님의 천사는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몰라요!!
 

 

  

지난 주는 생일 주간이었다.(이웃님의 표현을 빌려왔다.) 그러니까 생일이었던 4월 9일을 포함한 주가 되겠다.  생일 하루 전에는  고교 선배인 J 언니가 달콤한 케익을 들고 찾아왔다. 차를 마시고 그간 나누지 못한 일상을 들려주고 들었다. 서로가 좋아하는 작가와 책에 대해 시와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전에 고운 스카프가 먼저 도착했다. 내가 사랑하는 C가 보낸 것이다. 목이 아닌 손목에 둘렀다. 맨 살에 닿는 느낌이 부드럽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말이다. 당신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야. 고마운 나의 그대, 사랑해!!    

 

  

 큰 언니가 사서 택배로 보내준 커다란 블루베리 컵은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블루베리와 딸기 두 가지다. 무척 갖고 싶던 컵이라 아주 좋다. 어떤 날은 녹차를 마시고, 어떤 날은 커피를 마시고, 어떤 날은 맥주 컵 대신 맥주도 마시고 싶은 컵이다. ㅎㅎ 과한 소비인지 모른다. 적어도 내겐 말이다.  저 컵을 구매하는 대신 책을 샀더라면 몇 권을 샀을까 생각을 했으니까. 



  

 생일 주간 내내 미역국을 먹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찌하다 보니 그랬다. 해서, 정작 생일날 아침엔 미역국을 먹지 못했다. 날씨는 화장했고 기분도 좋았던 날이다. 저녁엔 외식을 했다. 때마침 식당에서 미역국이 나왔다. 가족들과 함께 먹는 저녁이라 더 좋았다. 생일도 365일 중의 하루일 뿐, 별반 다르지 않은 날일 수 있다.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없었다면 말이다. 그네들의 마음이 모아져서 나는 행복했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당신들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 거하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고맙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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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4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5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커피대신 오미자차를 마시며 이런 노래를 듣고 있다. <이 어둠의 이 슬픔 - 도시의 그림자>, <기억날 그날이 와도 - 홍성민 >, <노을의 연가 - 주영훈>, <사랑해요 -고은희, 이정란>, <오랜만에 - 김현철>,<내게로 - 장혜진>,<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 -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오래된 노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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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1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1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그러니까 그저께 3월 15일에 잠깐 울었다. 울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잠깐 내 나이를 생각했고, 3월의 절반이 지났다는 생각을 했다. 순간, 불안이 몰려왔다. 2010년은 어떤 리스트로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계획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 74일이 지났다. 74라는 숫자가 크게 다가왔다. 정신을 차려야지 않냐는 질책의 소리를 들었다. 

 저녁에 고모와 통화를 했다. 사촌들의 근황과 다른 고모들의 소식을 들었고 여전하게 걱정의 잔소리를 들었다. 알았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성의없는 대답을 했다. 고모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살뜰하게 나를 챙길까 알면서도 그랬다. 드라마를 하나 보고 읽다 만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는 왜 울었을까, 생각했다. 

 봄이라는데, 여전하게 춥다. 바람 탓인지, 아직 창을 열고 베란다에서 햇살을 맞지 못했다. 그래도 곧 여기 저기 꽃이 필 것이다. 곧 연두를 지나 초록이 가득할 것이다. 그렇게 하루, 하루 여물 것이다. 봄은 곧 지나갈 게 분명하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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