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날을 감기와 함께 지내고 있다. 약을 계속해서 먹고 있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잠을 청하고 있다. 그리하여 침대와 책상에는 코를 푼 더러운 휴지가 쌓이고 투명한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멍한 상태로 읽고 있던 책의 앞 부분을 다시 읽기를 반복하고 있으며 그 와중에도 책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다. 허연의 『내가 원하는 천사를 기다리며 그의 다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다시 읽는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

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

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

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

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제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p. 17)

 

 

 시인에게는 푸른색으로 남았던 그 시절, 내가 아는 한 소년에게서는 짙은 파랑색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 내가 소녀였을 시절에 내 모든 손편지의 수신인이었던 그 소년 말이다. 채송화를 좋아하고 채근담을 좋아했던 그 소년이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서 파랑을 보았다. 그저 짧게 주고 받은 메일에서 간단한 안부를 전하던 목소리에서 아주 짙은 파랑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내게 있어 자신이 나쁜 소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알지 못 할 것이다.

 

 

 <검은 지층의 노래>

 

 열병 않은 머리맡에서 아주 오래전 노래가 흐른다. 지층

의 흉터를 따라 흐르던 노래. 지층이 파 놓은 아주 미세한

홈을 따라 흐르던 노래. 가끔씩 상처 난 지층의 절개면에

서 불협한 소리를 내곤 하던 노래. 돌고 돌았던 검은 지충

의 노래. 누구의 뼈를 깎아서 만든 노래. 그 뼈를 기억하고

있는 검은 노래.

 

 판판이 깨진 노래. 한 시대와 또 다른 시대가 장중하게

죽어 갔던 노래. 모닥불에 던지면 한 줌도 안 됐던 노래.

애저녁에 영원할 수 없었던 노래. 손쓸 수 없는 파멸을 담

았던 노래. 차마 칼을 뽑지 못했던 그 봄밤에 들렸던 노래.

일몰 후에는 단조로 변했던 세월의 노래.

 

 세로로 서 버린 노래. 문자가 되어 버린 노래. (p. 47)

 

 

 허연의 시집에서 자꾸만 그 소년이 보인다. 문득, 지금은 어떤 색으로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내 기억 속에 남은 그 모습으로,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세상을 유영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아니,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면 좋겠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고 있다면, 원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면 더 좋겠다.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굳은 채 남겨진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

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

운 부분이 있다. 먹고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

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

형의 상스러움이 있다. 치열했으나 보여 주기 싫은 곳. 밥벌

이와 동선이 그대로 남은 곳. 절색의 여인도 상스러움 앞에

선 운다. 사투리로 운다. 살은 굳었고 나는 오늘 상스럽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p. 23>

 

 

 여전히 이 시에 멈춘다. 여전히 치열한 삶을 살고 있을 나쁜 소년을 위한 시 같아서, 여전히 사랑하는 일에 사는 일에 최선을 다할 나쁜 소년에게 보내는 시 같아서, 그 나쁜 소년을 바라보는 나쁜 소녀를 위한 시 같아서, 굳은 살은 늘어날 것이고, 상스러운 오늘을 살고 있을 수많은 나쁜 소년과 나쁜 소녀에게 괜찮냐고 묻는 것 같아서, 반복해서 읽고 읽는다.

 

 5월인데 어떤 날은 춥고, 어떤 날은 덥다. 나쁜 소년이 원하는 천사는 어떤 천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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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긋지긋한 어떤 날들 중의 하루 뿐인 오늘도 서글프게 흘러간다
    from 識案 2012-05-22 10:44 
    밤에 읽은 시와 아침에 읽은 시는 분명 같았다. 시를 읽는 눈과 마음이 달랐을 뿐이다. 차례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차분하게 읽는 대신 눈에 닿는 순서대로 시를 읽다가, 다시 차례대로 읽는다. 그러니 시라는 건 읽는다고 읽는 게 아니고 안다고 아는 게 아니며 이해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님이 분명하다. <나의 마다가스카르 1> ―세월 하나 지나갔다 별자리가 천천히 회전을 하는 동안 우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동안 마
 
 
이진 2012-05-15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쿵, 늦은 감기에 걸리셨군요. 하긴 요새 온도 차이가 너무 심하게 벌어진다 했어요.
자목련님 많이 아프신건 아니죠? 많이 아프시면 안되요.
허연의 시들은 참 예쁘네요.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고 딱딱 들어맞는게 정말 예뻐요.
저도 좋은 시를 고를 능력이 생기면 좋을텐데. 음.

자목련 2012-05-16 12:19   좋아요 0 | URL
소이님의 마음을 감기가 알아서 곧 사라질 것 같아요. 고마워요.

시들에게 예쁘다라고 말하는 그 마음이 좋은 시를 알아보는 거 아닐까요?
지금쯤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여유로운 시간일까 싶어요.^^

아이리시스 2012-05-1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졸려요ㅠㅠ
시 너무 좋은데 못 읽고 꾸벅꾸벅 (이러면서 댓글쓰고있다-_-;)

오오, 이 좋은 날들에 감기라니. 오늘 저녁은 돈가스 먹을 거예요! 자목련님도 맛난 거 많이 챙겨드시고 감기 뚝!
저도 제 천사를 좀 찾아주셔요. ^^

자목련 2012-05-16 12:17   좋아요 0 | URL
반짝이는 날을 감기가 시샘하는 것 같아요. 전 어제 노란 카레를 먹었습니다. 너무 많이 해서 남은 건, 점심에도 먹어야 할 것 같아요.ㅎㅎ

감기는 나아지고 있는데 완전하게 사라지지는 않아요. 아이리시스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님의 천사는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