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는다. 식사를 하는 사람이 늘어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늘어난 사람에 따라 각자 지정된 자리에 앉는다.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정해진 자리는, 누가 정하는가? 아이의 경우는 어른이 정할 것이고, 손님의 경우는 주인이 정하게 된다. 어른의 경우는 먼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 정하게 된다. 그러나 혼자 식탁을 차지할 경우에도 같은 자리에 앉게 된다. 습관 때문이다. 사물의 위치도 다르지 않다. 종종 사용하는 그릇과 컵을 바꾼다. 가구를 옮기기도 한다. 화분이나 책의 위치는 바뀔 뿐 사라지지 않는다. 꽃은 다시 피고, 땅 속의 씨앗은 다시 싹을 틔운다. 사라지는 건 오직 사람뿐이다. 당신의 공간은 남았는데 당신은 없다.
존 버거와 아들 이브 버거가 쓰고 그린 『아내의 빈방 : 죽은 후에』는 아내와 엄마를 그리워하는 시간의 기록이다. 사진으로,그림으로, 편지로, 일기로 이어진 아내와 남편, 엄마와 아들은 여전히 함께 한다.
당신이 집 앞에 심어 놓거나 화분에 담아 발코니에 올려놓은 식물들에 물을 즐 때면, 나는 기도와 이어진 어떤 것, 그리고 기도와 사랑 사이에 어떤 연관을 보곤 했다오. 물이 온도는 날씨에 따라, 양동이가 햇빛 아래 얼마나 있었는지에 따라 달랐지. 어떤 때는 체온보다 따뜻했고, 어떤 때는 시릴 정도로 차갑더군. 하지만 그런 차이 때문에 그 행동에 담긴 사랑스러움까지 달라지는 건 아니었고, 작업모를 쓰고 물을 주는 당신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도 달라지지 않았소. (12쪽)
좋은 날에는 엄마를 느낄 수 있어요. 보통은 제 머리 위에서―우리 머리 위에서요. 퍼져 가는 존재감. 마치 엄마가 미소를 띠고 계신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있는 일에 엄마도 동의해 주시는 거라고 믿고 싶지만, 제 생각에 동의라는 것도 다른 판단과 마찬가지로, 지금 엄마가 계신 곳과는 관계가 없겠죠. 그건 여기 지상에 있는 우리의 일이에요. (34쪽)
햇살이 좋은 오후, 나도 엄마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브 버거처럼 말이다. 엄마의 공간, 엄마의 자리, 엄마의 영역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엄마에겐 화장대라 불릴 공간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손거울도 없었다. 엄마만을 위한 공간은 죽음 후에야 생겨났다.
김 숨의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에도 자리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영역에 대한 것이었다. 소설에서 며느리는 직장을 다녀야 하는 이유로 시어머니에게 육아를 부탁한다. 아들네 집으로 들어온 시어머니는 육아와 살림을 도맡는다. 그 후로 집은 시어머니가 가꾸는 화분과 같았다. 집 안의 모든 사물과 동선은 시어머니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원래는 저기가 아니잖아요.”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고 차분하고 단호하게 말하려 애썼다. “전화기가 놓여 있던 자리가 말이에요.”
“아니…… 저기다…… 저기…….”
갈라지고 흐릿했지만 여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사실 전화기가 텔레비전 왼편에 있든, 오른편에 있든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전화를 걸고 받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고작 전화기가 놓여 있어야 할 자리를, 그것도 제자리를 두고 따지려니 우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136~137쪽)
공간을 점유한 만큼 존재의 크기도 커진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살아계셨을 때 안방은 할머니가 사용하셨다. 그러니까 가장 큰 공간을 할머니 혼자 쓰셨다. 손주가 태어남에 따라 함께 사용했지만 언제나 그 방의 주인은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권력이 가장 컸던 것이다.
나만의 공간을 꿈꿨던 시절을 지났고 모두의 공간이 그립다. 명절 때마다 모여드는 식구들로 가로, 세로, 아무렇게나 잠들었던 밤은 다시 경험할 수 없다. 당신이 만든 음식들, 친척집을 돌며 성묘를 다니던 시절, 마을 어구에 길게 늘어선 자동차들이 신기했던 시절을 떠올린다. 아, 마음이 심란한 걸 보니 정말 추석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