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존 케네디,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 서독의 콘라트 아데나워, 이스라엘의 다비드 벤구리온,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등 당시 전 세계지도자들은 참혹하고 파괴적인 전쟁을 경험했고, 어떤 이는 양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었다. 이들은 순진한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세계 안정, 국제 질서, 전쟁 억제 등 국제사회의 실용적인 목적이 각국의 이익과 일치했을 뿐이다.
- P25

우리는 책임의 시대에서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그 시대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격동의 현대사에서 예외적인 기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을 억제했다. 두 세력은 한동안 침묵했으며, 이 책의 독자들 대부분은 바로 이 시기에 태어났을 것이다. 이제 전쟁의 기억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태어난 세대와 달리, 1980년대에 영국과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핵심 가치로 여기지 않는다. 이들중 30퍼센트만이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조부모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노르망디 해안에서 목숨을 바쳤지만, 이들은 민주주의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책임의 시대와 관련해서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독자들도 이미 아는 내용이다. 바로 책임의 시대가 이미 끝났다는 사실이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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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올 수 있는 구조가 동업일 수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동업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팽배해서 왜 그럴까 주의깊게 살펴보는 중이에요. 제 생각에 동업을 할 수 있다면 시도하는것이 좋다고 봅니다. 그래야 ‘올인‘ 하지 않고, 배수의 진처럼 마지막이 되지 않을 수 있지 않겠어요? 그 외에도 여러 대안들이나와야 할 것 같아요..
- P204

문제는 여전히 상가 세입자 문제가 ‘보상‘만 있고 ‘보장‘은 없다.
는 것이다. 주거 세입자의 경우 사회보장적 성격의 주거 이전비지급과 임대주택 입주권, 순환용 주택 제공 등을 통해 재정착을비롯한 주거의 안정성을 보장하도록 하고 있으나, 상가 세입자들에 대해서는 금전적인 ‘보상‘ 이외에 영업의 계속성을 보장‘
할 만한 아무런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비록 상가 세입자들 - P191

우선 핸드폰을 끄고 시작한다. 지도, CGE 모두 계신 상태다.
해방이 어디에 있는지 대출 확인하고 근처까지는 대중교통을이해서 간다. 버스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린다. 해방전이 남산중떡에 있기도 하고 필자가 사는 일산에서 가장 가기 쉬운 곳이서울 역이다. 버스에서 내려보니 시내 기온이 35도는 족히 넘는것 같다. 숨이 턱 막힌다. 솔직히 택시를 탈까 잠시 고민했지만2초의 고민을 끝내고 걷기 시작한다. 지하도를 건너 후암동 쪽으로 나간다. 이곳은 5년 전에 다니던 직장이 있던 곳이라 구석구석 잘 안다. 음식점들을 보니 몇 개는 그대로 있다. 순대국밥집, 샌드위치집이 눈에 띈다. 이름도 그대로다. 바뀐 곳은 더 많다. 직장 다니던 시절에 한참 건축하던 건물이 완공된 것을 볼수 있다. 오피스텔인데 분양가가 엄청 비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런지 바로 건너편에 수제 햄버거집과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몇 개 생겼다. 전에는 서양의 느낌이 전혀 어울리지 않던곳이었는데...
후암동 길을 쭉 걸어가면서 도로 양 옆에 늘어선 가게들을 본다. 분위기가 비슷하다. 유동 인구는 거의 없는 듯하다. 물론 덤기도 했지만 딱히 사람이 돌아다닐 만한 이유도 없을 것 같다.
건물들도 대부분 2,3층이고 지어진 지 최소한 2,30년은 넘어 보인다. 고급 빌라와 30년 된 주공 아파트가 바로 옆에 붙어 있다.
1km 정도를 걸어가니 용산고등학교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원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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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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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게티가 사하라 사막을 건너간 이유

사하라 사막은 오래 전부터 무역상과 밀수꾼들의 길목이었다. 밀매꾼들은 사하라의 모래밭을 건너 북쪽으로 사람과 마약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남쪽으로 돌아오는 트럭을 빈차로 들여올 수는 없으니 무언가를 실어와야 했다. 이 문제의 가장 흔한 답이 스파게티‘ 였다. 사하라 사막과 밀매꾼들에 대해 잘 아는 어떤 이들은 사람 말고 사하라 사막을 통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상품(무게로 따졌을 때)이 바로 스파게티일 거라고 말한다. 마약 밀매와무기 밀매가 수익은 훨씬 크다. 그러나 많은 밀매꾼들이 화물을 다양화해서 심심치 않게 스파게티를 실어 나른다. 왜?
- P42

살인사건 피해자수 전체를 놓고 보면, 브라질은 세계에서 살인사건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가장 많은 나라다. 2015년에만 56,212명이 살해당했다.

라틴 아메리카 밖에 있는 나라의 도시들 중에서 톱 50에 들어 있는 도시는 미국의 디트로이트와 뉴올리언즈, 세인트 루이스와 볼티모어,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베이와 버펄로 시티뿐이다. 세인트 루이스와 볼티모어는 2015년에도 톱 50에 들어 있었다. 미국의 이 네 도시에서는 미국 전체 평균보다 열 배나 많은 사람들이 살인 사건으로 죽었다. 미국의 인구 10만 명당 살인사건 피해자 수는 4.9명이다. 남아프리카의 두 도시는 2016년에 새로 톱 50에 새롭게 진입했는데, 아마도 이 나라에서의 데이터 수집 기술이 향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다른 범죄의 발생률은 감소하고 있는 반면에 살인사건 발생률은 매년 5% 정도씩 증가하고 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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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통치자들의 정치권력이 조상신 권력에 기초해 있었다는 점에서, 상나라 통치는 일종의 신정神政, theocracy이다. "은(상)나라 사람들은 신을 존귀하게 여기고, 백성들을 인솔하여 신을 섬겼다. "26 상나라 통치자들은 귀신 세계라는 상징 자원을 활용해서 자신들이 자연 및 사회 환경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한 데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복하기 이전부터, 주나라 왕들 역시 상나라와 마찬가지로 가족 신전에서 정교한 예식을 수행하였다. 즉, 그들 역시 자신들의 조상을 - P85

숭배했던 것이다.27 그러나 상나라를 정복한 뒤, 주나라는 종족적 배려로 귀신이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푼 결과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대신, 천명天命, the Manlate of Heaven 이라는 새로운개념을 활용해서 자신들의 승리를 정당화했다. 그 주장의 핵심은, 주나라가 무력이 강해서 상나라를 이긴 것이 아니라, 초월적권위인 하늘이 가장 도덕적인 정치 세력인 주나라의 승리를 원했기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늘이 내리는 명령인 천명은 보편 도덕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어느 종족이든 도덕적이기만 하면 가리지 않고 축복하는 것이다. 상나라가 부도덕하게 처신하자하늘은 천명을 거두고 주나라에 천명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은(상)나라에 벌을 내리고 그들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하늘이 잔학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자초한 것이다. "29 - P86

야만 했다. 그러한 정당화는 종종 인성론 같은 보편적인 전제로부터 연역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기존 관습 공동체에 대한 반응을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예의 효용자체를 비판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상을 통치하는 데 예가 핵심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둘째, 여전히 예치 이념을 강하게 옹호하되, 예치에 대해 의식적인 체계화·합리화 작업을 시도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관습 공동체의 비전에서 정치 사회 비전으로의 이동과 관련하여 상당히 징후적인것이었다.
- P163

맹자는 전 인민의 자유로운 동의에 의해 정치 사회가 출현한다고 보지 않았다. 맹자에게 보다 바람직한 정치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개인의 권리 때문이 아니라 공동의 안전과 혜택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근대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시민들이 통치자를 창출할 권리를 양도한다는 식의 생각도 없다. - P202

뒤 자신들의 인척과 협력자 들을 확대된 영토의 책임자로 과거하였고, 그 과정에서 정치권력을 멀리까지 확장하였다. 이것이 2장에서 언급한 바 있는 주나라 ‘봉건 제도이다. 영토를 할당받은지역 제후들은 주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동시에 자기 영역 내에서 백성들을 통제하고 권위를 행사하였다. 제후국 내에서는 도시에 기반을 둔 무장 귀족들과 시골에 기반을 둔 노예 농민들 간에위계가 존재하였다. 주나라 왕들의 권력이 약해지자 이러한 지역제후들의 통치 영역이 사실상 독립적인 정치체로 변모하였다. 봉건 제후들이 자신의 영토를 대상으로 재차 봉건을 실시하자, 반쯤은 독립적인 도시국가가 증대하였다. 다시 말해 강한 제후국들도 자신들의 영토를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자신의 인척과 협력자들에게 차상위 도시들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하나의도시와 그에 딸린 시골이 정치적 통제의 기본 단위로 작동하게되었다. 그리고 친족 관계가 서주西周 시기의 도시들을 묶는 연대의 방식으로 기능하였다.
- P232

전국시대와 그에 선행하는 춘추시대의 차이는, 전국시대에이르러 제후들이 각자의 정치체에서 군주권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마크 루이스가 다수의 전국시대 제후국들을 군주 중심국이라고 부른 이유이다. 이 군주 중심국들은 자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징발하고 나라 전체를 전쟁 기계처럼 체제를 바꾸기 위하여 점차 행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였다. 이로써 진나라가 여러 전쟁 기계중에서 최강자였음이 증명되었다.
- P233

이사는 인척들을 분봉해도 그들의 관계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멀어지기 때문에 결국 그 후손들이 서로 싸우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주나라가 결국 파편화된 것은 이 우려를 재확인한 셈이었다. 이 토론의결과 새로운 제국은 황제가 직접 관리를 임명하여 통치하기로 결정되었다. 진시황은 천하 전체를 군郡, commanderies/후대에는 prefec-tures으로 나누고, 군은 다시 현縣, counties으로 나누었다.  - P237

기원전 202년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재위 B.C. 202~B.C. 195)은 내전에서 항우項羽에게 승리를 거둔 뒤 한나라를 창건하는 데성공했다. 한나라에 주어진 과제는 망해버린 주나라 ‘봉건 제도와 진나라의 엄혹한 중앙집권적 관료 행정이라는 이중의 함정에빠지지 않고 과연 질서와 안정을 담보하는 통치체제를 발전시킬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 P239

한고조는 중국의 동쪽 지역을 일종의 준準봉건체제로 만들었는데, 이는 해당 지역 권력자들에게 상당히 양보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무시하지 못할 규모의 군대를 갖고 있던 자기 추종자와 친척 들에게 여러 지역을 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열 개의 봉건국이 한나라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황제 직할 통치 지역은15개 군郡뿐이었다. - P240

한나라 경제景帝(재위 B.C. 157~B.C. 141)는 그간 제후국이 누렸던 조세권과 관리 임명권을 회수했고, 한무제漢武帝,
(재위 B.C. 141~B.C. 87)는 추은법推想法을 사용하여 제후국의 영역을 대폭 줄였다.13 추은법이란 제후왕이 자신의 자식들을 왕자후王子候로 분봉하는 것은 허용하되, 후국侯國을 제후국의 군이 소유하는 토지에 세워야 한다고 강제하는 제도를 말한다. 추은법에따르면, 왕자후를 많이 세우면 그만큼 제후국의 영토가 줄어들게된다. 실제로 서한 말기에 많은 제후국이 3~4개의 현으로만 구성될 정도로 축소되었고, 그 결과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하여 한무제는 마침내 중국 대부분 영토를 굳건히 통제하는 데 성공하고, 외부로 주의를 돌렸다.  - P241

 한무제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농민들의 빈약한자원을 바닥낼 정도로 세금을 거두었다. 이에 농민들은 토지를권세 있는 가문에 팔아버리고, 유력 가문의 피보호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토지 지배에 대한 변화는 지주들의 역량을 강화 - P242

그러던 와중에 무인체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끊임없는 전쟁과 영토 확장의 시대를 겪고 나자 보편적인 군역universal militaryservice 을 유지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보편적인 군역은 원래진나라의 천하 정복을 가능하게 한 핵심 요소였다. 그런데 전한前漢은 군인들과 사령관의 개인적인 유대에 기초한 사병私兵의 성격이 강한 군대semi-private armies 로 보편적 군역을 대체하였다. 후 - P243

 보편적인 군역을 폐지할 때 기대했던 것은 문민화를 통해 안정을 확보하고, 국가 예산과 조직적 노력을 탕진하지 않고도 직업적으로 숙달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이었다. 이는 모두 국가의 단기적인 이해에 부합하는 일일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아 이러한 전개는 국가의 힘을 약화하고 결국 무인들이 제국 정부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여지를 크게 열어놓은 셈이다. - P244

거대 지주들의 사회적인 힘은 계속 성장하였다. 당나라의780년 재정 개혁에 이르러 지주의 성장은 정점에 달하였다. 당나라가 균전제를 양세법兩稅法으로 대체한 것이다(5장에서 논의). 이것은 국가가 더 이상 성인 남자의 호구를 세금 계산 단위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가 농민의 동일성peasant homogeneity 이라는 유구한 이상과 그 이상에 기반한직접적 재정 행정 direct, hscal administration 이라는 이상을 공식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이후로는 천하의 농민이 대체로같다는 이상을 천명하기보다는, 토지와 부가 불균등하게 나누어져 있음을 인정한 뒤 개개인의 재산을 측정한 값을 기반으로 세금을 걷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부를 많이 가진 사람은 세금도 많이 내야 했다.
- P245

명나라와 청나라 정부는 시장과 지방사회에 낮은 세금을 매기는 등 대체로 사회에 대해 비개입적 태도를 보였다.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들이 구체적인 지방 행정에 직접 개입할 수없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는, 지방관 대 지방민의 비율이다. 한 계산에 따르면, 청나라 후기에 지방관 한 명이 담당하는지방민은 20만~30만 명이나 되었고, 지방관은 과거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거의) 세습직인 지방 아전들의 도움을 받아 행정을 꾸려나갔다. 요컨대 명나라와 청나라, 즉 후기 중국 제국은 국가관료제라는 단일한 원리에 의해 더 이상 조직될 수 없었다.
후기 중국 제국은 사회적 유대의 동학associative dynamic 을 상당 부분 받아들이고, 사회적 네트워크에 의존해가며 통치하였다.
- P248

진나라의 통치 방식과 가의의 대안의 핵심적인 차이는, 가의는 동질적인 정치체를 만들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매우 선호하였다는 점이다. 제국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결국 군사력이나 강제력이 아니라 공유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상징 조작에 기반한 통일 제국의 비전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가의의 사상은 유명한 한대 정치사상가인 동중서董仲(B.C.
176?~B.C. 104)와 크게 다르지 않다.
- P291

외국인들도 당나라 중앙 관료제의 상당 부분을 점유할 수 있었다. 외국 학생들을 위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貢科가 바로 그것이다. 빈공과에 합격하기 위해 다수의 외국인이 장안의 과거 시험 준비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빈공과에 합격한 일본인, 한국인(신라인), 소그드인sogd人, 東特 등 외국인도 중요한 공무를 맡았다. 그 결과 번관譯官, officials of foreign origin이 조정에서 늘어났다. 『당육전唐六典』에 따르면, 중앙 관료의 5분의 1이 번관이었다. 간단히 말해 국가 관료제역시 문화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혼합된 세계의 일부였던 것이다. 한족 출신이 아닌 이들도 이 관료제라는 경력 사다리를 타고 최상의 위치에 오를 수 있 - P315

 정치체의 귀족적 성격은 귀족의 배타적 권리를 법적으로 규정한 이른바 팔의八議, Eight Deliberations에 분명히 드러난다.13 예컨대 같은범죄라 하더라도 피해자의 상대적인 지위에 따라 다른 형벌이 적용되었다. 귀족 대부분은 고문을 받지 않았으며,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14 이후 중국의 법률에서도 그유제遺制를 발견할 수 있다.
- P317

 신민들을 서로 다른 신분 집단으로 나누는 것이당률을 관통하는 원리였다. 당률의 귀족적 성격은 진秦나라 법률의 평등적 성격과 크게 대조된다. 진나라 법률에 따르면, 황제를제외하고는 사회 구성원 누구나 신민으로서 차등 없는 법적 신분을 할당받았다. 반면, 당률은 신민을 엄격한 신분 위계에 따라 구분한 뒤 체계적으로 통제하고자 하였다. 당률은 상호 통합된 위계적인 전체를 이루고자 하는 국가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었다.
- P317

당시唐詩는 당나라 귀족들 간의 사회적 교류와 세련된 대화의 주된 형식으로 떠오르면서 귀족들 간의 문화적 응집력을 보여주는 데 한몫했다. 당시‘를 정의하는 주된 특징 중 하나는 계기성 occasional character이다. 25 당시를 짓는 일은 고독한 상태에서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외로운 작업이 아니라, 적절한 계기를 맞아 현실 혹은 상상 속의 사람에게 건네는 일종의 반응response 이다. 다시 말해 당나라 때 시詩란 깊숙한 사적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효과적인 공적 연설을 위한 형식에 가까웠다.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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