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후-황제의 긴장 관계에서 지주제로의 전환
- 상나라 신정제
- 주나라 천명사상
- 춘추전국 제후봉건제
- 진나라 중앙집권제
- 한나라 봉건제와 중앙집권의 균형
- 당나라 귀족제와 지주제
- 명청 지주제의 완성










상나라 통치자들의 정치권력이 조상신 권력에 기초해 있었다는 점에서, 상나라 통치는 일종의 신정神政, theocracy이다. "은(상)나라 사람들은 신을 존귀하게 여기고, 백성들을 인솔하여 신을 섬겼다. " 상나라 통치자들은 귀신 세계라는 상징 자원을 활용해서 자신들이 자연 및 사회 환경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한 데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복하기 이전부터, 주나라 왕들 역시 상나라와 마찬가지로 가족 신전에서 정교한 예식을 수행하였다. - P85

상나라를 정복한 뒤, 주나라는 종족적 배려로 귀신이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푼 결과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대신, 천명天命, the Manlate of Heaven 이라는 새로운개념을 활용해서 자신들의 승리를 정당화했다. 그 주장의 핵심은, 주나라가 무력이 강해서 상나라를 이긴 것이 아니라, 초월적 권위인 하늘이 가장 도덕적인 정치 세력인 주나라의 승리를 원했기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늘이 내리는 명령인 천명은 보편 도덕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어느 종족이든 도덕적이기만 하면 가리지 않고 축복하는 것이다. 상나라가 부도덕하게 처신하자 하늘은 천명을 거두고 주나라에 천명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은(상)나라에 벌을 내리고 그들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하늘이 잔학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자초한 것이다. " - P86

그러한 정당화는 종종 인성론 같은 보편적인 전제로부터 연역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기존 관습 공동체에 대한 반응을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예의 효용 자체를 비판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상을 통치하는 데 예가 핵심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둘째, 여전히 예치 이념을 강하게 옹호하되, 예치에 대해 의식적인 체계화·합리화 작업을 시도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관습 공동체의 비전에서 정치 사회 비전으로의 이동과 관련하여 상당히 징후적인것이었다.
- P163

맹자는 전 인민의 자유로운 동의에 의해 정치 사회가 출현한다고 보지 않았다. 맹자에게 보다 바람직한 정치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개인의 권리 때문이 아니라 공동의 안전과 혜택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근대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시민들이 통치자를 창출할 권리를 양도한다는 식의 생각도 없다. - P202

자신들의 인척과 협력자 들을 확대된 영토의 책임자로 과거하였고, 그 과정에서 정치권력을 멀리까지 확장하였다. 이것이 2장에서 언급한 바 있는 주나라 ‘봉건 제도‘이다.

 영토를 할당받은 지역 제후들은 주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동시에 자기 영역 내에서 백성들을 통제하고 권위를 행사하였다. 제후국 내에서는 도시에 기반을 둔 무장 귀족들과 시골에 기반을 둔 노예 농민들 간에 위계가 존재하였다.

 주나라 왕들의 권력이 약해지자 이러한 지역제후들의 통치 영역이 사실상 독립적인 정치체로 변모하였다. 봉건 제후들이 자신의 영토를 대상으로 재차 봉건을 실시하자, 반쯤은 독립적인 도시국가가 증대하였다. 다시 말해 강한 제후국들도 자신들의 영토를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자신의 인척과 협력자들에게 차상위 도시들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하나의 도시와 그에 딸린 시골이 정치적 통제의 기본 단위로 작동하게되었다. 그리고 친족 관계가 서주西周 시기의 도시들을 묶는 연대의 방식으로 기능하였다.
- P232

전국시대와 그에 선행하는 춘추시대의 차이는, 전국시대에이르러 제후들이 각자의 정치체에서 군주권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마크 루이스가 다수의 전국시대 제후국들을 군주 중심국이라고 부른 이유이다. 이 군주 중심국들은 자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징발하고 나라 전체를 전쟁 기계처럼 체제를 바꾸기 위하여 점차 행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였다. 이로써 진나라가 여러 전쟁 기계중에서 최강자였음이 증명되었다.
- P233

이사는 인척들을 분봉해도 그들의 관계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멀어지기 때문에 결국 그 후손들이 서로 싸우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주나라가 결국 파편화된 것은 이 우려를 재확인한 셈이었다. 이 토론의 결과 새로운 제국은 황제가 직접 관리를 임명하여 통치하기로 결정되었다. 진시황은 천하 전체를 군郡, commanderies/후대에는 prefectures으로 나누고, 군은 다시 현縣, counties으로 나누었다.  - P237

기원전 202년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재위 B.C. 202~B.C. 195)은 내전에서 항우項羽에게 승리를 거둔 뒤 한나라를 창건하는 데성공했다. 한나라에 주어진 과제는 망해버린 주나라 ‘봉건 제도‘와 진나라의 엄혹한 중앙집권적 관료 행정이라는 이중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과연 질서와 안정을 담보하는 통치체제를 발전시킬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 P239

한고조는 중국의 동쪽 지역을 일종의 준準봉건체제로 만들었는데, 이는 해당 지역 권력자들에게 상당히 양보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무시하지 못할 규모의 군대를 갖고 있던 자기 추종자와 친척 들에게 여러 지역을 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열 개의 봉건국이 한나라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황제 직할 통치 지역은15개 군郡뿐이었다. - P240

한나라 경제景帝(재위 B.C. 157~B.C. 141)는 그간 제후국이 누렸던 조세권과 관리 임명권을 회수했고, 한무제漢武帝,
(재위 B.C. 141~B.C. 87)는 추은법推想法을 사용하여 제후국의 영역을 대폭 줄였다.

추은법이란 제후왕이 자신의 자식들을 왕자후王子候로 분봉하는 것은 허용하되, 후국侯國을 제후국의 군이 소유하는 토지에 세워야 한다고 강제하는 제도를 말한다. 추은법에 따르면, 왕자후를 많이 세우면 그만큼 제후국의 영토가 줄어들게 된다. 실제로 서한 말기에 많은 제후국이 3~4개의 현으로만 구성될 정도로 축소되었고, 그 결과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하여 한무제는 마침내 중국 대부분 영토를 굳건히 통제하는 데 성공하고, 외부로 주의를 돌렸다.  - P241

 한무제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농민들의 빈약한 자원을 바닥낼 정도로 세금을 거두었다. 이에 농민들은 토지를 권세 있는 가문에 팔아버리고, 유력 가문의 피보호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토지 지배에 대한 변화는 지주들의 역량을 강화했다. - P242

그러던 와중에 무인체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끊임없는 전쟁과 영토 확장의 시대를 겪고 나자 보편적인 군역 universal militaryservice 을 유지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보편적인 군역은 원래 진나라의 천하 정복을 가능하게 한 핵심 요소였다. 그런데 전한 前漢은 군인들과 사령관의 개인적인 유대에 기초한 사병 私兵의 성격이 강한 군대 semi-private armies 로 보편적 군역을 대체하였다.  - P243

 보편적인 군역을 폐지할 때 기대했던 것은 문민화를 통해 안정을 확보하고, 국가 예산과 조직적 노력을 탕진하지 않고도 직업적으로 숙달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이었다. 이는 모두 국가의 단기적인 이해에 부합하는 일일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아 이러한 전개는 국가의 힘을 약화하고 결국 무인들이 제국 정부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여지를 크게 열어놓은 셈이다. - P244

거대 지주들의 사회적인 힘은 계속 성장하였다. 당나라의 780년 재정 개혁에 이르러 지주의 성장은 정점에 달하였다. 당나라가 균전제를 양세법 兩稅法으로 대체한 것이다(5장에서 논의). 이것은 국가가 더 이상 성인 남자의 호구를 세금 계산 단위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가 농민의 동일성 peasant homogeneity 이라는 유구한 이상과 그 이상에 기반한 직접적 재정 행정 direct, fiscal administration 이라는 이상을 공식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이후로는 천하의 농민이 대체로 같다는 이상을 천명하기보다는, 토지와 부가 불균등하게 나누어져 있음을 인정한 뒤 개개인의 재산을 측정한 값을 기반으로 세금을 걷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부를 많이 가진 사람은 세금도 많이 내야 했다.
- P245

명나라와 청나라 정부는 시장과 지방사회에 낮은 세금을 매기는 등 대체로 사회에 대해 비개입적 태도를 보였다.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들이 구체적인 지방 행정에 직접 개입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는, 지방관 대 지방민의 비율이다. 한 계산에 따르면, 청나라 후기에 지방관 한 명이 담당하는 지방민은 20만~30만 명이나 되었고, 지방관은 과거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거의) 세습직인 지방 아전들의 도움을 받아 행정을 꾸려나갔다. 요컨대 명나라와 청나라, 즉 후기 중국 제국은 국가관료제라는 단일한 원리에 의해 더 이상 조직될 수 없었다.
후기 중국 제국은 사회적 유대의 동학 associative dynamic 을 상당 부분 받아들이고, 사회적 네트워크에 의존해가며 통치하였다.
- P248

진나라의 통치 방식과 가의의 대안의 핵심적인 차이는, 가의는 동질적인 정치체를 만들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매우 선호하였다는 점이다. 제국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결국 군사력이나 강제력이 아니라 공유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상징 조작에 기반한 통일 제국의 비전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가의의 사상은 유명한 한대 정치사상가인 동중서董仲(B.C.
176?~B.C. 104)와 크게 다르지 않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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