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에 실렸던 김순천 씨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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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상상력, 르포문학
이봐! 모든 게 무너지고 있어!
“문제는, 내가 보기에 모든 게 무너지고 있다는 거야” 도리스 레싱의 ‘황금노트북’에 나오는 주인공 안나가 몰리에게 했던 이 말이 마음에 깊게 다가와 떠나질 않는다. 신자유주의 시장주의자들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다채롭게 자신들이 세운 ‘희망’을 이야기 한다. 나는 ‘무슨 희망?’이라고 묻지 않는다. 이미 그들이 ‘계획한 희망’과 그 실행으로 세상은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삶은 사람들을 ‘임시거주자’로 만들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자신의 삶을 확신하지 못하고 계속 흔들리며 힘겨워하고 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는데 기존의 어법으로는 더 이상 무언가를 말 할 수 없는 답답하고 소란스러움, 그 멈춰지고 파괴되고 끊어진 지점에서 르포문학은 새롭게 생겨나는지도 모르겠다. 무너진 나를 세워 끊임없이 세상에 물음을 던지면서 새로운 건축을 세워나가는 과정, 이것이 르포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일 듯싶다. 요르단의 르포작가이자 시인인 암야드 나세르(Amjad Nasser)의 표현대로 “르포문학은 현대인의 삶에 다가가는 새로운 장르이고 새로운 (글쓰기) 방식”인 것이다.
피상적인 인식이 가장 위험하다
“ The global networking of the mainstream mass media has failed"
세계적인 르포작가에게 주는 ‘레트레 율리시스 르포문학상’ 심사 위원인 이사벨 힐턴은 현 시기 르포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주요 대중매체의 실패에서 찾았다. 주요 대중 매체들은 충돌로 가득찬 세계화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이면을 전달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아주 지겹다. 저널리즘으로 접근하는, 주요언론에 의해서 매일 보도되는 그런 종류의 세계화에 넌더리가 난다” 르포문학을 통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가질 것을 제기하며 프랑스 저널리스트인 안느 니바(Anne Nivat)는 힐턴 심사위원의 발언에 힘을 실어준다. 언론자본의 개입으로 내용이 왜곡되거나 혹은 언론사간의 경쟁이나 시간의 제약, 취재하는 기자들의 인식상의 한계로 그들이 전달하는 정보와 이미지는 서로 동질화 되거나 현실의 본모습에 깊게 다가가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지구촌의 아주 작은 마을까지 지배력을 행사한다.
일반 대중들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정보에 의해서 요동한다. 그들은 매스미디어에 의해 가상으로 재현한 것을 또 가상으로 체험한다. 그런 정보마저 대중들은 짧은 주의력만 기울일 뿐이다. 그들이 얻은 이미지와 정보는 매우 피상적이다. 이 ‘피상적인 인식’이 가장 위험하다. 그것은 세계를 깊게 이해할 수 없게 하며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간다. 결국 자신들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런 주요 대중매체가 실패한 자리에 ‘르포문학’ 넓게는 ‘르포예술’이 새롭게 재등장하고 있다. 르포예술은 다큐 영상, 르포문학, 르포미술, 다큐 사진들이 다 포함된다. 세계를 직접 깊게 체험해서 알리는 것에 르포가 갖는 독특한 시선이 있다. 좋은 르포문학은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생생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장’으로 가면을 쓴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사람들의 눈을 열어준다.
“ 정확히 관찰되고 기록된 현실은 언제나 가장 대담한 작가의 상상력보다 더 상상력이 풍부하고 흥미진진하다”
독일 68혁명세대 르포작가인 귄터 발라프의 말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창조적인 상상력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잘못된 오해 중에 하나이다. 현실을 깊게 이해하지 못한 상상력은 황폐하고 빈약하다. 남미의 환상적 리얼리즘의 대표작품인 <백년동안의 고독>을 쓴 가르시아 마르께스도 르포작품을 썼다. <칠레에 잠입한 미겔리틴의 모험>은 칠레의 망명 영화감독인 미겔리틴의 입을 빌려 군사쿠데타로 피살된 아옌데 대통령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지금도 칠레 사람들은 그를 아옌데라고 부르지 않고 대통령이라 부른다. 마르께스의 또 다른 장편소설 <납치일기>는 1990년 8월~1991년 6월 콜롬비아에서 실제 일어났던 납치사건을 그대로 옮긴 르포소설이다. 등장인물의 이름까지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
“문학적인 장치없이 완벽하게 검증된 정보를 바탕으로 작품을 썼지만 이 작품이 나의 기존 환상소설보다 더 환상적으로 보일 것으로 믿는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현실이 환상보다 더 환상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백년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마콘도는 콜롬비아를 본 따 만든 도시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풍부한 상상력은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의 이면이었던 것이다.
르포문학은 개인들이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만들어 가는 사회적 공간이다
-키쉬의 르포르타주 미학
르포문학이 무엇인가, 물으면 그 답은 르포문학을 해온 작가의 수만큼 이라고 말하고 싶다. 롤랑바르트가 ‘문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러저러 하다고 가르쳐진 것이 문학’이라고 했듯이 르포문학도 르포문학 하는 행위가 있고, 그 후에 르포문학이라고 가르쳐지는 게 르포문학이다. 그러므로 르포문학은 완성된 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 쓰여지는 것이다.
유럽에서 ‘르포문학’은 대중매체의 급격한 확장과 함께 등장했다.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쓴 존 리드도 이런 대중 매체의 발달로 세계적인 르포작가가 될 수 있었다. 라디오와 영화가 초기 발전 단계이고 텔레비전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엄청난 양의 정보를 숨가쁜 속도로 대중사회의 구석구석으로 전달해 주는 매체는 ‘대중 신문’이었다. 1920-30년대 독일에서는 일간지, 주간지, 잡지 등을 합하여 약 4700여개의 신문과 잡지가 발행되고 있었으며 일간지들은 하루에 3번이나 발행되었다. 수 없이 발간되는 신문, 잡지는 ‘저널리즘’을 탄생시켰다.
근대 시민사회가 등장하면서 일반 시민들이 새롭게 얻은 사적인 공간을 체험하면서 스스로 자신들의 삶들을 설명할 수 있는 힘이 생겼는데 그 주요한 시민공론의 장이 ‘문학’이었다. 문학을 통해 시민들은 자신들의 ’내면을 발견’한 것이다. 대중매체의 등장으로 ‘저널리즘’도 문학과 함께 그 ‘사적 개인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반열에 올랐다. 그것은 ‘사실’이 시민들에게 뛰어 들어오면서 생겨나는 사적인 공간이었다.
문학하는 사람들 측에서는 새로 나타난 저널리즘을 ‘언어를 오염’시키고 ‘잉크노예’라고 배척했다. 벤야민은 <일방통행로> 도입부에서 저널적인 새로운 흐름의 글쓰기를 옹호한다. 그는 ‘문학의 틀을 차용하는 모든 문학 행위를’ 불모의 것으로 치부하며 그대신 ‘리플렛, 소책자, 신문기사, 플레카드를 찬양’하고 주유소, 창녀 등 도시에 존재하는 일상적인 사물에 대한 글을 쓴다. 도입제목 ‘주유소’를 쓰면서 그는 “바로 지금 삶을 구성하는 힘은 신념이 아니라 사실이다”고 했다. 그러나 크라우스는 ‘신문들이 선동한 여러 전쟁들’을 상기시키면서 ‘존재하는 모든 신문의 계획적인 파괴’를 주장하기도 했다. 대중 신문의 상업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이런 저널리즘의 등장과 언론의 상업주의에 대해 성찰하면서 탄생한 것이 ‘르포르타주 문학’이었다. 르포르타주는 할러와 미첼의 정의에 따르면 ‘시사적 사건에 대한 보고로 사실성과 객관성을 요구하며, 일상에 대한 유용한 사실 서술을 넘어서는 예술적인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르포문학은 ‘사실이 뛰어 들어 발견한 내면’이었다.
르포문학의 창시자는 에곤 에르빈 키쉬였다. 프라하가 고향인 키쉬는 21세의 나이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프라하의 골목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는 카프카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저널리즘의 중심지인 베를린으로 와서 신문의 문화비평에세이인 ‘푀이통’란에 르포 글을 쓴다. 광고와 도시의 거리를 관찰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키쉬는 ‘인과 관계가 아니라 연상을 통해 스토리와 사유를 전개하며 또 전개된 내용에 대한 종합이나 결론 없이 텍스트를 끝내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키쉬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형식인 ‘몽타주’로 자신을 표현한 브레히트와 같은 사유 공간 안에 있었다. 그의 글은 세계를 더 이상 자신의 삶과 통합해서 경험하지 못하고 ‘파편적이고 우연적으로 경험하는 현대 대중사회의 개인의 의식구조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키쉬의 르포집 <쏘다니는 리포터>는 그의 세계가 잘 포착된 작품이다. 그는 ‘스스로 표방한 르포르타주의 미학, 낮은 것, 일상적인 것’에서 시대의 진실을 포착했다. 독일이 분단되면서 키쉬는 동독에서 괴테에 준하는 국민문학가로서 위상을 가진 반면 서독에서는 잊혀진 존재되었다. 독일이 통일된 이후 1994년 슈테른지는 키쉬 르포르타주상을 제정했다. 요즘 인터넷에서 여기저기 도시의 일상을 관찰하며 키쉬적인 글쓰기를 하는 네티즌들을 만난다. 그런 글쓰기도 르포문학의 새로운 형태라 할 수 있다.
문화가 깊지 않으면 르포문학도 빈약하다
‘르포를 비싸게 삽니다’
2006년 7월 일본에 갔을 때 한 인터넷 광고에서 이 문구를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르포를 비싸게 사다니 그 말은 아주 생소하고 낯설었다. 다양한 상품이 풍요롭게 넘쳐나는 자본주의 천국인 한국에서는 ‘르포’라는 상품을 주문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르포가 매우 활성화 되어있다.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르포작가만도 천여 명이 넘는다. 신문 잡지시장의 규모도 세계 1위이다. 2004년 일본 출판협회 보고에 따르면 1년간 일본에서 판매되는 잡지종류만 3394종이고 총 판매부수는 32억8천만부에 이른다. 일본 사람들은 신문기사보다 르포를 더 신뢰하며 작가별로 광범위한 매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다. <사색기행> 쓴 다치바나 다카시는 르포작업을 하기 위해 아사히신문을 그만두었으며 동경대에서는 그에게 연구실까지 마련해 주었다. 유명한 작가나 기자 중에는 그의 밑으로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면서 일을 배우는 경우도 있었다.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네코빌딩에는 그의 서재가 8개나 있다. 그 중 제3서재에서는 사상, 철학, 종교문제를 집필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그는 르포를 단순히 사회적 영역으로만 다룬 것이 아니라 사상, 과학, 철학까지 확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치바나 씨 외에도 당뇨병으로 썩어가는 손으로 죽는 순간까지 르포를 썼던 혼다씨, 조선 광부들의 문제를 다룬 하야시 에이다이씨 등 존경할만한 르포작가들이 많다. 일본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을 한분야로 인정하고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듯이 르포도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보지 못한 문제나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대신 이야기 해 주는, 현실을 기록하는 매체로서 사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실에 대한 풍부한 기록들이 어떻게 문화의 힘으로 창조되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은 일본의 르포보다 르포문학의 전통이 더 깊고 강하다. 유럽의 르포문학이 신문의 발달로 시민들이 공론의 장을 만들면서 성숙해 나갔다면 중국의 르포문학은 봉건주의와 외세의 인육의 연회장에서 힘겹게 싸울 수밖에 없었던 중국인들의 근대의식을 다뤘다. 개화기 때부터 출현한 르포문학은 5.4운동을 거쳐 루쉰, 구추백, 빙심의 지지를 받으면서 급격히 성장했다. 중국공산당도 르포문학을 지원해 주었다.
2004년 세계 르포작가에게 주는 율리시스 르포문학상을 <중국농민조사>를 쓴 중국작가 천구이디와 우춘타오 부부가 받았다. 그는 안후이성의 농촌마을 300여 개를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기록했다. 국유화된 토지를 부패한 지방정부가 강제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자살했다. 심지어 자살하는데 농약 살 돈이 없어 외상으로 사서 마시고 죽은 경우도 있었다. 이 르포집은 개혁. 개방이후 중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 걸작이었다. 홍콩, 대만에서도 출간되어 좋은 평을 얻었으며 중국에서는 금서가 되어 해적판의 왕국인 중국의 지하인쇄소에서 8백만부나 찍혀 팔렸다고 한다. 문학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천구이디는 우상이 되었고 그의 마당에는 자신들의 문제를 호소하러 온 수많은 농민들로 항상 붐볐다.
재미있는 것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으로 성장한 르포문학이 오히려 그 정부의 문제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는 당대문학상(현대문학상)이 있다. 국가 공식기관인 중국작가협회에서 주는 상인데 르포문학에 주는 ‘루쉰문학상’에 천구이디의 <화이허의 경고>외 여러편이 선정이 되었다. <화이허의 경고>는 양자강과 황하강 사이에 있는 화이강의 오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황폐한 현실을 드러낸 작품이었다. 이런 내용 때문에 소설, 시는 책으로 묶여서 나왔는데 르포문학부문만 나오지를 못했다. 국가기관에서 공식으로 상을 준 작품조차 책으로 묶여 나오지 못한 것이다. 중국은 천구이디처럼 고발성이 강한 작품을 쓰는 작가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작가들도 많다. 르포작가인 지앙하오는 몽골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이혼하여 초원에서 방랑생활을 했다. 숲에서 약초를 캐고 말을 훔치면서 생활했다. 그 경험을 담은 <드러나는 도적의 비밀 >로 그 역시 율리시스 르포문학 상을 받았다. 요즘에는 중국 르포문학의 소재가 9.11테러와 IT산업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좋은 르포문학은 좋은 세계를 꿈꾸게 한다
마음속에 남은 르포문학 작품이 하나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22명이 3년간에 걸쳐 참여하면서 쓴 <세계의 비참>이라는 르포집이다. 그들은 유럽, 아메리카 등 많은 나라에서 신자유적인 정책이 가져온 폭력성을 순전히 학문적인 개념적으로만 파악할 수 없어서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 기록을 했다고 했다. 신자유주의 일상 속에 존재하는 ‘사회적 불행’에 대한 조건을 탐구한 것이다. 임대주택 사람들, 임시직과 정규직 노동자, 필름편집인, 기자, 학생 등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인터뷰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사회학자들이 평온한 듯 보이는 일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다양한 ‘고통’을 섬세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중층적이고 다면적인 일상의 복잡함을 뚫고 세계를 새롭게 재해석할 수 있는 깊은 시선 덕분이었다. ‘통탄해서도 안 되고, 비웃어도 안 되며, 혐오해서도 안 된다. 오직 이해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스피노자의 이 말은 그들이 기록하는 내내 마음에 간직했던 것이다. 이러한 깊은 이해를 가진 르포집은 인간의 정신영역을 확장해 준다. 사실을 기록하는 르포문학이 풍성해야 이것을 기초로 인문학적인 정신세계는 확장되고 상상의 세계를 마음껏 창조할 수 있다. 잘못된 사실에 의해 상상된 세계는 얼마나 끔찍한가. 좋은 르포작품은 좋은 세계를 꿈꾸게 해준다.
“르포문학은 첫 번째는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그런 후에 우리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작가이자 철학자인 중국의 자오신산의 말이다. 이것이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는 세상에 그래도 르포문학에서 힘을 얻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