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계천은 열광하는 이미지와 현실의 삶 사이에 있었다
현대인들은 '이미지로 보여주는 삶'에는 열광하고 탐욕적으로 소비하지만 '현실적인 삶'은 외면하고 배제한다. 그리고는 이내 이미지조차 낡은 것으로 만들어서 버려 버린다. 끊임없이 새것만을 갈구하는 네오마니아(neomania)들이 돼 가는 것이다. 그러나 삶은 여전히 현실로 남고 그것을 견디는 사람들이 있다. 르뽀는 열광하는 이미지와 삶 사이를 뒤집어주고, 연결시켜주며, 회복시켜주는 매개체이다. 낡은 현실을 견디는 사람들 곁에서 함께 견디며 삶을 나누는 작업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정서적인 진보'에 대해서 생각했다. 인간 속으로 깊게 들어가 그들의 누추, 그들의 죽음, 그들의 결핍, 그들의 잔인함, 파괴된 정신, 악다구니, 그들이 세상을 견뎌온 힘,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삶의 품위를 몸에 깊게 새기고 함께 나누는 것, 그것을 우리는 '정서적인 진보'라고 불렀다. 그들과 나누는 정서의 깊이가 내용의 깊이라고 받아들였다. 정서의 깊이는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의 만남에서 체득될 수 있었고 르뽀 작업은 그런 현실을 만나게 해주고 인간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해 주었다.
청계천은 열광하는 이미지와 현실의 삶 사이에 있었다. 먼지때가 잔뜩 낀 회색빛 시멘트 고가로 상징되는 근대적인 삶이 무너지는 순간 사람들은 맑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가 노니는 생태적이고 탈현대적인 삶을 욕망했다. 그 욕망은 진실하고 너무나 간절했다. 그러나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근대적인 삶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는지, 왜 그 욕망이 자신들에게 그렇게 간절한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청계천은 다른 사회적인 문제처럼 이미지로 소비되고 이내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청계천 사람들은 삶을 견디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채 근대적인 방식으로 탈현대적인 시대를 견디며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신경제라는 탈현대적인 이미지 속에 그들은 더 고통당하고 파괴되고 있었다. 그들에게 탈현대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허구의 삶이었다. 이미지는 탈현대, 현실은 더 나쁘게 변형된 근대였다.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처럼 그것은 이 시대의 화두이다. 왜 탈현대를 살아가는 시대에 우리들은 근대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이 물음을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이렇게 번안한다. '왜 삶의 문화를 원하고 쉼터를 원하는데 조경과 놀이터로 만드는가? 왜 삶의 복원을 원하는데 개발을 하는가?'
2. 수많은 주름들이 겹쳐 있는, 그곳이 청계천이었다
청계천은 우리의 사회처럼 매우 풍부하여 쉽게 재단할 수 없는 곳이었고 다채로운 세계로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다양하고 복잡하게 뒤엉킨 삶의 방식과 이해 관계가 존재했고,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추운 겨울날, 해질 무렵 노점상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모여서 낡은 나무 책상을 쪼개 모닥불 피워놓고 삼겹살에 막걸리, 소주 한잔하면서 생활을 나누는 곳, 황학동은 도시 주변적인 정서와 농촌적인 정서가 묘하게 섞인 마지막 공동체였다. 화려한 상품들과 요란한 락음악의 세례를 맞으면서 흔들거리며 걸어가는 젊은이들의 거리, 밀리오레, 두타에서는 짝퉁과 소비의 이미지로 가득 찬 현대적인 세계를 만났고, 위압적으로 서 있는 우열이 분명한 현대적이고 수직적인 건물구조에서 '다양성이 공존하는 수평적인 평등한 관계'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아파트를 개조하여 이미 상가로 바뀐 줄 알았던 주상복합건물 세운상가에서 학교에 갔다오는 초등학생을 만났을 때에는 놀이터도 없고, 나무도 없고, 흉물스런 보일러 파이프가 밖으로 노출된 그 감옥 같은 건물에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근대사회의 상징인 주상복합건물 세운상가, 그 파놉티콘적인 건물구조의 잔해 속에서 지금 막 유행처럼 새롭게 지어지고 있는 시티파크 등 주상복합체 건물들의 미래의 운명을 보는 것 같았다.
가게 하나하나가 한 공정으로 연결된 공장형태를 띠면서 그 속에서 장인들처럼 전문적인 기술을 익혀 삶을 지켜온 공구상가 아저씨들에게서는 중세의 중후하면서도 오래된 시간을 보았고, 커다랗고 흰 플라스틱 둥근 천장 아래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는, 아직도 조선시대와 전쟁과 판자촌의 흔적이 남아 있고, 팥죽과 순대 속에 오래고 묵은 정서가 있는 광장시장에서는 현재 삶 속에서 과거의 삶이 어떻게 어울리며 살아가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전문적인 상인들의 노련함이 살아있는 동대문종합상가에서는 근대에 어른거리는 현대의 그림자를 보았고, 청계천의 젖줄 창신동과 이화동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한 자들의 비애와 강요된 정체성(停滯性)과 해체를, 자본주의에 이제 막 적응하기 시작한 러시아 타운의 상인들에게는 자신의 전 삶을 내 던지는 위험하고 대책 없는 희망과 아직도 놓을 수 없는 러시아인들의 내재된 힘을 보았다. 무엇보다 과거가 지워진 평화시장에서는 2000년대 촛불시위처럼 70년대 저항방식을 만났고 전태일과 2만여 명의 의류 노동자들이 손을 잡고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환영을 보았다. 길거리에 선 화려한 건물들에 가려져 있는 통일, 동화시장과 광희, 우노꼬레 사이사이에서는 청계천에 아직도 소중하게 남아있는 뒷 골목정서를 만났다.
그리고 우리가 찾아내지 못한 무수한 공간들,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 사람들…, 일상과 역사, 공간과 시간, 과거와 현재, 현대와 근대, 시골과 도시 또는 도시주변 정서들이 주름처럼 겹쳐있는, 그 겹친 주름들이 충돌하고 만나는 곳, 그것이 청계천이었다. 겹쳐진 주름 속에 감춰진 '어두운 영혼들'과 펼쳐지면서 나오는 '새로운 빛'은 우리를 흥분하게 했다.
3. 우리가 본 것은 부재와 결핍, 그리고 인간의 품위였다
청계천 공간과 공간을 걸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들에게서 근대와 현대가 주는 '부재와 결핍'을 보았다. 국가, 문화, 복지, 위생,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신문화 공간인 밀리오레조차 그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밀리오레 상인 가제웅 씨는 말한다. '복지시설이요? 그런 건 전무하죠. 애초부터 고민자체가 없어요.' 일하는 사람들에게 문화나 복지시설이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는 말은 충격을 주었다. 그 말은 먹고살기 바쁜데 무슨 문화나 복지가 필요하냐, 하는 목소리와 겹쳐졌다. 상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햇빛도 안 드는 조그만 부스에서 장시간 일을 하고, 그곳에서 쪼그리고 앉아 점심을 먹었다. 쇳가루를 마셔 가면서 일하고 있는 공구상가 아저씨들은 허름한 목욕탕에 돈 내고 들어가서 쌓인 쇠먼지를 씻어내고,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몇 군데 안 되는 좁은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이 누리는 문화수준이었다.
광장시장 할머니는 가장 추울 때조차 따뜻한 난로 없이 길가에서 사탕을 팔았다. 40년 동안 하다보니 적응이 되어서라고 말하는 할머니를 통해 그 동안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삶을 견뎌왔는지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추우면 요리조리 돌아댕기고, 그냥 손발만 안 깨지면 그대로 사는 거여'라며 담요도 없이 앉아있었다. 장남으로 태어난 공구상가 김보영 씨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전 생애를 가족들을 위해 희생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인터뷰 하는 동안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소리쳤다. '지금부터는 철저히 나만을 위해 살겠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고, 부모를 책임지고, 동생 교육시키고 그의 빚보증까지 감당하고, 문제 있는 부인과 자식까지 견뎌야 했던 그의 삶 속에서 우리는 국가의 부재를 보았다. 그런 부재는 김보영 씨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남편 대신 평생 자식을 키워온 광장시장에서 사탕을 파는 할머니, 청계천 개발로 대책 없이 쫓겨난 노점상들과 임대인들, 부인이 중병에 걸렸어도 변변히 큰 병원 가서 치료 한번 못하고 있는 붕어아저씨. 그 모든 문제들은 그들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고 힘들어 보였다.
청계천 사람들에게는 실미도 같은 '생존 경쟁'이 있었다. 밀리오레에서 'FILA' 속옷을 팔고 있는 최선희 씨는 자기의 상업 영역권 안에 또다른 'FILA' 속옷 파는 가게가 들어오면 자신의 상권이 죽기 때문에 출혈을 해서라도 새로운 자리에 또 가게를 내서 장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강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동종업종간에 경쟁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욕심이 생기면서' 몸을 혹사하게 되었다. 살아남기 위한 이러한 생존경쟁은 사람들 내면에 많은 생채기를 남겼고, 소중한 것들을 버리는 과정이기도 했다. 세운상가에서 퀵 서비스 일을 하는 정병문 씨는 딸 셋, 아내와 함께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런 생활을 하기까지 사랑하는 가난한 여자친구 대신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있는 부인을 선택한 경험이 있었다. 장남이고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던 그는 자신의 감정과 사람들의 관계를 현실에 맞춰 냉정하게 깎아내야 했고, 불가피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평범한 이런 삶 속에는 치열한 경쟁이 가져다 준 상처들의 위험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생존 경쟁은 더 심각한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광장시장에서 승복을 만드는 이순남 할머니는 그나마 되던 사업도 안되어 영세 상인으로 전락했다. 장사는 안되고 빚진 아들때문에 집도 판 할머니는 '종내는 사는 게 왜 이런지 대체 알 길이 없다'며 가슴을 쳤다. 창신동 청바지 하청 봉제공장을 하는 김홍균, 강애순 부부는 10년 전보다 디자인이 훨씬 복잡해진 청바지를 만드는데도 하청 단가는 15년 전이나 똑 같았다. 물가가 오르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싼값이며, 보이지 않은 형태로 단가가 강제적으로 인하되었다. 이것은 신경제 하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강제이다. 삶은 밑으로 내려 갈수록 더욱 치열하고 힘들어 지고 있었다.
그들은 또 개인 중심의 폐쇄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 동대문종합상가 B동에서 고흥침구점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는 문성남 씨는 얼마나 바쁜지 운전면허 딸 시간도 없다고 했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주위에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운전면허를 따지 못하였다. 23년째 그릇가게를 하고 있는 조재현 씨는 일하다보면 시간이 없어 저녁에 간간이 친구들 만나서 술 마시는 것 외에는 사람들과도 잘 만나지 않는다. 창신동 봉제공장 김홍균, 강애순 부부는 시간이 없어서 부부싸움도 못한다면서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이런 개인중심의 폐쇄적인 인간관계 때문에 밀리오레 최선희 씨는 '상인들의 단결은 3일이면 끝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분부분 계모임이나 상가모임에도 참가하고, 상대적으로 정치의식이 높아 6월항쟁 같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시기에는 참여하기도 하고, 노점상들은 연대투쟁의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의 공동체 의식도 있지만 일상의 대부분은 개인 중심의 폐쇄적인 인간관계을 맺고 있으며 그 이면에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있었다. 서로 생채기 내는 생존경쟁으로 인한 내면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인간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경쟁완화'를 통한 삶의 여유로움 회복이 필요하다.
상인들은 힘들게 견디면서 생존을 이끌어왔지만 그들이 갖는 힘만큼 정당한 인정을 받지 못했다. 한동안 청계천은 멸시와 배제의 공간이었다. 자신이 청계천에 살면서도 산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숨기는 사람이 많았다. 청계천을 떠난 한 상인은 '청계천의 청자도 말하기 싫다'고 했다. 그녀는 공부를 잘했지만 가난때문에 청계천에 와서 실가게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가게를 마련하여 동생들을 공부시켰다. 지금은 주부인 그녀는 인터뷰 요청을 거부했다. 청계천에서 일한 자신의 과거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내세우지도 비하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살면서 형성해 온 삶의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인터뷰 요청에 술 한잔 얼큰히 드시고 '세상이 이렇게 행복한데 무슨 인터뷰가 필요하냐'고 하던 황학동 노점상 붕어아저씨는 고속도로 간판 사업할 때 공무원들의 뇌물요구를 거절하고 돈 많이 벌 수 있는 그 사업을 놓아 버렸다. 그는 노점 일을 했다. 가난한 삶 속에는 붕어 아저씨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런 쉽지 않은 수많은 선택이 있다는 것 알면서 가난이 신성한 어떤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방 안에서 20년 동안 딸을 키운 서울다방 아주머니는 세상의 마지막 공간에서 길어 올린, 감성이 묻어나는 자신의 목소리를 키워냈고 우리가 작업하면서 '건강한 민중'이라고 불렀던 정병문 씨는 자신들이 여기까지 오게 열심히 살았다는 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티도 안 나게 열심히 사는 소박한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던 김홍균 부부, 청계천에 작은 가게 하나를 내는 게 꿈인 젊은이들 조석현, 박미현 젊은 연인들, 국가에 대해 당당하게 반기를 들었던 러시아 상인 바실리와 레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실현 할 수 없는 고물테마파크의 큰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꾸는 노점상 김영범 씨, 건전한 균형 감각이 빛나는 세운상가 안티모씨.... 일부 사람들이 높은 지위나 고급 옷, 고급 음식, 고급 예술 등 고급 문화를 향유하는 것에서 품위를 찾는다면 그들은 모두 자신을 지켜온 섬세하고 강인한 힘과 흘러가는 시간에 자신을 맡기고 그것에 의미를 주는 방식으로 품위를 지켰다. 사람들이 살아온 목소리에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그들의 다양한 삶이 어울러지고 평등하게 받아들여지는 삶의 생태 공간를 상상했다.
4. 삶에 깊이 들어가는 르뽀를 꿈꿨다
기획 단계까지 포함하여 작년 9월부터 8개월 동안 청계천 작업을 했다.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약칭 '삶창')의 '삶의 창을 여는 문학교실' 중 '르뽀문학교실' 강좌를 기획하면서 '삶창' 르뽀모임 팀과 수강생들과의 공동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삶에 깊이 들어가는 르뽀를 꿈꿨다. 비정상적으로 견디기 힘든 삶을 기록하기 위해, 진정한 문학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지나칠 만큼의 '직접적인 묘사'라는 비문학적인 태도를 취했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세계의 비참』이 보여주는 사회에 대한 깊은 시선과 직접적인 구술의 마이크로적인 생생함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했고, 형식은 앞에는 서술글을 뒤에는 인터뷰글을 넣어서 통일하였다. 몸짓, 시선, 어투, 표정, 심리 등 미묘한 것까지 포착하고 기록하려 애썼다.
작업을 하면서 힘든 과정이 많았다. 인터뷰 대상자 중에 정말 기록해 드려야 하는 분들 인터뷰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분들은 세상에 내세울 것 없는 자신들의 삶이 기록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공구상가에서 40년 동안 손수레를 끄신 할아버지, 청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일하는 지게꾼 아저씨, 20년 동안 방산지하상가에서 일해 온 상인 아주머니, 동대문종합상가 경비 아저씨, 황학동 아프리카 청년, 루마니아 여상인 등등. 그분들 중에는 친척들이 아직도 청계천에서 일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자신의 모습을 왜곡해서 냈다며 인터뷰를 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들은 각종 언론사와 신문기자와 사진기자들이 한바탕 휩쓸고 간 폐허 위를 걸었다. 그런 쓸쓸한 폐허 위를 걸으면서 더 정확히 청계천의 모습에 다가갈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터뷰만 해놓고 실지 못한 분들도 있었다. 청계천 2, 3공구 공사를 담당하고 있는 김00 씨는 인터뷰까지 풀었지만 글은 실리지 못했다. 청계천공사를 담당하긴 했지만 그 분은 청계천 복원 방향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없었다. 인터뷰 글이 실린다면 그 분이 서울시 쪽 대표로 발언한 것이 되고 청계천 복원에 대한 '청계천 복원 시민위원회'의 견해와 대립하는 것이 되었다. 글을 실지 않은 대신 김00 씨에게서 자신이 청계천 사업 때문에 급하게 발령이 났다는 것, 설계는 '설계시공 일괄 입찰 중 하나인 '패스터트럭'이라고 해서 설계가 미리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설계를 하면서 공사를 하는 방법을 취했고 그런 예는 많지는 않다'는 말을 해 주었다. 왜 그런 설계를 선택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해서가 아니겠냐고 답변을 해 주었고 1, 2, 3공구 합하여 공사비 총 액수가 3천 5백억 원이고 삼성, 현대, LG가 공사를 담당해서 하고 있다는 말도 해 주었다. 시청에 자료 구하러 갔다가 우연히 청계천 주변 '자금 지원 대상'이라는 자료를 봤는데 종로 1-4가, 5-6가 광장시장, 을지로 3, 4, 5가, 입정동, 산림동, 신당동, 왕십리, 창신, 숭인동, 마장동, 신설동 등이 다 개발지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청계천 개발은 단순히 하천 복원 차원이 아니라 서울시의 뉴타운을 계획하고 연계된 '대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좋지 못한 일도 일어났다. 피고 지고, 지고 피는 패랭이꽃을 좋아한다던 김보영 씨가 '뇌세혈관 출혈'로 쓰러졌다. 병원을 방문했을 때 아저씨는 필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와 인터뷰 한 사실도, '지금부터는 철저히 나만을 위해 살겠다'고 한 말도 기억하지 못했다. 아저씨의 손가락에는 용접불똥에 데인 수없이 많은 상처들이 나 있었다. 작업장 근처 낡은 식당에서 함께 된장찌개 먹으면서 아저씨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용접하다 불똥이 튀어도 3000℃에서 완전히 타버리면 아프지 않다'고, 아저씨는 3000℃가 넘는 자신의 고통 너머로 가버린 것이다. 보증금이 0이 되면서 명도 소송에 걸렸던 서울다방 아주머니는 재판을 받았다. 처음 재판을 받은데다가 긴장해서 눈이 침침하고 귀가 먹먹하다고 했다. 색이 바랜 낡은 회색빛 정장을 입고 재판정에 서 있는 아주머니에게 젊은 판사는 다방을 비워줄 것을 판결했다. 법정에서 나와서도 아주머니는 판사의 판결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집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쉽고 간단히 몇마디 말로 쫓아낼 수 있는지. 무엇보다 철거용역들과 경찰 만여명이 동원되던 날, 새벽에 함께 라면을 끓여먹었던 청계천 노점상 아저씨, 아줌마들이 몇 십년 지켜오던 자리를 떠나 동대문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추위에 얼었던 표정들이 생각난다. 한 아주머니 나에게 말했다. 언론에 글 써서 알려 우리가 이렇게 당하지 못하도록 도와달라고. 우리는 기록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자기 생활 수단을 가지면서 평일에는 짬짬히 주말에는 온전히 시간을 내어 르뽀모임 팀과 수강생들은 청계천 사람들의 삶을 기록했다. 그들은 몇 번씩 인터뷰원들을 찾아가 그 분들의 삶을 성실하고 정확하게 기록하려 노력했고 쓴 원고를 여러번 수정하는 열의를 보여 주기도 했다. 기록하면서 우리는 청계천 자체만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도 복원되기를 바랬다. 그 분들의 삶도 근대적인 회색빛 삶에서 벗어나 물이 흐르고 물고기가 노니는 삶이 되기를, 그들의 부재와 결핍, 생존경쟁으로 생긴 수많은 상처들이 치유되고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기를 원했다. 수술한 허리를 감싸고 글을 완성해준 필자도 있었고 명동성당에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단식농성해 가면서 글을 써낸 필자도 있었다. 인터뷰원이 허락을 하지않자 스무번도 넘게 삼고초려한 필자도 있었다. 글은 실리지 못했지만 1차 원고만 내놓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완성하지 못한 필자들도 있었다. 모두 그들의 고민과 열정으로 완성된 글들이다. 부족한 것들은 이 성과를 바탕으로 다시 채워나가야겠다
5.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말들, 청계천 전설, 민담, 신화로 유통되길
'어제가 행복한 날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시간이 흘러 우리가 사라지고 나면 지금이 행복하다는 것을 또 알게 되겠지' 33층의 거대한 주상복합건물이 지어질 빈 공터에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면서 막걸리 한잔 나누며 들었던 황학동 노점상 아저씨의 그 역설적인 말은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사라져 가는 것들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사회에서 강제로 배제된 어떤 부분이고 삶에서 배제 당한 흔적들이었다. 강제로 배제 당한 것들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우리들 삶 속으로 돌아온다고 우리는 믿는다, 인디언의 영혼처럼. '눈은 연기로 가득차 있고 귀는 소란스런 물로 가득차 있는' 세상에 청계천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를 내보낸다. 세상이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이 사라지고 소멸하더라도, 그들의 삶이 스며든 청계천은 남을 것이다. 우리가 기록한 것은 수많은 목소리 중에 극히 일부다. 여러 가지 이유로 기록하지 못하고, 듣지 못한 수많은 말들은 청계천의 전설로 혹은 민담과 신화가 되어 우리 곁에 머무를 것이다.
르뽀문학교실 강사 김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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