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년이라고 한다. 올해는 태풍도 한 번 지나지 않았고 일조량도 넉넉했던 덕분이라는데 어쩐 일인지 나락을 베는 농민들의 마음은 흉흉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된 까닭일까. 어쩌면 농업이 산업으로, 먹거리가 사고 팔리는 상품으로 바뀐 뒤부터 아닐까. 돈이 돈을 버는 세상에서, 어느 날 갑자기 그 돈이 반 토막 나버린 뒤숭숭한 요 몇 달 사이에도 농민의 노동의 결과는 고스란히 돈이 되지 못한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늦더위가 아직 기승을 부리던 9월 중순 무렵부터 농민들이 출하거부 투쟁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 지은 농토를 갈아엎고 관공서 앞에 쌀가마니를 쌓는 광경이야 이미 낯설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지만 출하거부라면 노동자들로 치면 총파업인 셈이다. 그만큼 벼랑 끝으로 내몰린 농민들을 만나러 전남 영광을 처음 찾은 것은 이제 막 추수가 시작될 무렵인 10월 초순이었다.
농민, 총파업에 찬성표를 던지다
“지난 8월 26일에 농민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나락 40kg 한 가마니에 수매가 6만 원, 정부 보조금 1만 원해서 7만 원이 되지 않으면 출하거부 찬반투표를 진행하겠다고 발표했죠. 그리고 쌀 유통구조 문제가 워낙 심각하니까 생산유통조정위원회를 만들자는 요구도 있었고. 바로 다음날 영광 대마면에서 비상총회를 했어요. 쌀농사 짓는 170개 농가가 모여서 투표를 했는데 찬성 164대 반대 6으로 출하거부 투쟁을 하기로 결정했죠.”
영광군 농민회 나운림 총무부장은 벽보 한 장을 펼쳐 보인다. 거기에는 “공공비축미 수매 전면 거부”, “농협이나 시중 출하 절대 금지”라는 행동지침과 함께 8월 27일 대마면을 시작으로 9월 24일까지 진행된 찬반투표 결과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영광군 8개 읍면에서 적게는 93.9%부터 많게는 97.3%까지 찬성표가 나왔다. 이 투표결과를 갖고 농민회는 9월 26일 농협, 영광군청 등 관계기관과 간담회를 가졌고 현재 영광군 농협은 면지부별로 수매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영광군은 전체 인구가 6만 정도고 쌀농사를 짓는 사람이 7천명쯤 되는데 그중에 5천6백명이 투표해서 95% 이상 찬성이 나온 거니까 거의 압도적 찬성인 셈이죠.”
총무부장은 벽보를 말아들고는 염산면 이장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으니 같이 가잔다. 직접 목소리를 들어보라는 얘기다.
“여기 벽보는 마을 회관에 붙이십쇼. 농협이 나락 값 6만 원 요구를 받을지 말지 내일까지 이사회를 거쳐서 결정을 한다고 허니 기다려보면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 만약 부결되면 비상대의원총회라도 요구해야 허고. 거기서도 부결되면 농협 틀어막는 거고. 그리 알고 이장님들은 그전에 마을에서 수매하는 일이 없도록 해줘야 해요.”
“투표한 사람들이야 다 그렇게끔 허겄지만 돈 급한 노인 분들이 팔겄다고 그러면 뭔 수로 막아야?”
“수탁제도도 있으니까 돈이 급하면 일단 농협에서 돈을 받아쓰고 출하거부는 계속하면 되여. 어렵게 생각하면 안 돼. 절대 쌀은 내지 마시고. 농협에서도 그 정도는 협조를 해줘야지 않겠어?”
“농협이 앞장서서 나락 값을 내리려고 하는 놈들인데…. 농협이 농민편이 아니고 지들 흑자 보려고 하잖어. 농협이 농민 등쳐먹는 데 아닌가.”
“돈은 없지. 마방 기다리는 게 한계가 있지. 쉬운 일이 아니여. 빚 갚을 데는 이자가 차곡차곡 쌓일 텐데.”
“그러니까 늘 쌀값이 정부 하자는 대로 따라가는 거고 맨날 농민들만 손해 보는 거여.”
“아니, 우리 동네는 전부 다 안내기로 했다니깐. 일단 하기로 했으면 해야제. 이번에 우리가 나락을 아예 안 내버려야 정부에서 쌀값을 좌지우지 못하지.”
어느 한 구석 끼어들 새도 없이 농협과 정부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잠시 회의장을 나와 담배를 태우던 염산면 두리1구 박완진 이장(66)은 “이거는 앞으로 농사짓지 말라는 이야기”라며 입을 연다.
“비료 값이 20kg 한 포대에 5천 원 하던 것이 2만 원을 넘어섰고, 기름 값은 작년에 700원 하던 것이 1,300원이 됐고, 사료 값은 재작년부터 여덟 차례나 올라서 거의 100% 인상됐어. 그런데 쌀값은 10년 전에 비해서 오히려 내렸다니께. 6만 원 하던 것이 4만8천 원으로 떨어진 것이 언제여? 그런데 몇 해가 지나도 오를 생각을 안 해. 농사를 지어서 한 해 5천만 원 벌면 빚이 1억이여. 농사를 짓는 만큼 빚이 늘어. 시골에 사람이 점점 주니까 이젠 아예 사람 못 살 곳으로 만드는 거여, 뭐여?”
옆에 있던 염산면 농민회 강상호 씨(45)는 “사태가 이런데 정부가 앞장서서 올해는 대풍이라고 언론플레이를 하며 벌써부터 쌀값을 잡으려” 하는데 농민들이 더욱 분개한다고 거든다. 지난 추석을 며칠 앞두고는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나서서 농산물 가격을 40% 인하하겠다는 호언장담을 했고 추석 연휴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배 값 폭락에 비관한 나주의 한 농민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물가지수 1순위가 쌀이라고 하니 이 정부에서 서민경제 안정을 빌미로 시장에 물량을 쏟아내면서 “어떻게든 쌀값을 때려잡으려고 할 게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 강 씨의 말이다.
돈도 빽도 없는데 쪽수마저 줄고
영광읍에 있는 농민회 사무실로 돌아와 전국농민회총연맹 회의에 참석하고 온 주경채 농민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올해는 특별한 해!”라고 한다.
“전농이 자체 계산해보니까 쌀 생산비가 15% 올랐는데 농수산부는 딱 절반인 7.5% 상승했다고 발표했어요. 그럼 쌀값을 15%가 아니라 7.5%만큼이라도 올려라. 그렇게 않으면 우리는 쌀을 안 내놓겠다, 이겁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농민들이 오른 생산비만큼 제값을 받겠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도 있어요. 왜 생산비가 올랐습니까. 유가 상승과 기후변화 때문이잖아요.”
지난 2년간 세계 주요 곡물가격이 많게는 500%까지 폭등했다. 기후변화로 곡물생산량이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바이오에너지 개발로 식량은 줄어든 반면 WTO와 FTA 등으로 각국의 농업기반이 급속도로 허물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주요 쌀 생산국들은 자국의 식량부족을 우려해서 쌀 판매 규제를 시작했고 식량 부족으로 세계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
“식량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나라가 무려 37개국이라고 합니다. 필리핀의 농업이 붕괴된 것을 봐요. 식량 자급률 25%, 그것도 쌀을 제외하면 고작 5%인 한국도 농업정책이 이대로 간다면 5년 내에 식량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정부는 해외 식량기지 운운하고 있는데 이것은 군대 없애고 용병 쓰자는 거나 다름없는, 식량주권을 아예 포기하자는 거지요.”
한편 주경채 회장은 “전농이 수입개방 저지에 온 힘을 기울이느라 기름 없이는 농사를 짓지 못하는 구조의 개혁, 생태농업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농업은 그 국가의 기초이기에 준 사회주의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다”며 “국민의 주식을 확보하고 수급을 안정화하는 것”이 농민회의 가장 큰 과제일 수밖에 없다고 못 박았다. 반면에 정부는 농민의 숫자는 물론 농토도 점차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이 농지의 50%만을 경작하도록 하면서 나머지 50%를 정부의 지원 속에서 예비농지로 두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대마면으로 들어가는 영광군 농민회 이석하 교육부장을 따라 나섰다. 대마면은 영광군에서 소농이 제일 많은 지역으로 “다들 어려운 살림에도 추수가 끝나면 꼭 쌀 한가마 씩은 농민회 투쟁기금으로 비축을 하는 마을”이란다.
“출하거부 찬반투표는 하반기 사업계획을 잡다가 나왔어요. 상황이 너무 심각하니까. 투쟁방법은 농민들 입에서 다 나와요. ‘쌀을 아예 내놓지 말아야 한다.’ 협상이 잘 안 되면 민간 RPC(미곡종합처리장)은 영업방해가 되니까 못해도 농협 RPC는 물리력을 써서라도 막아야겠죠. 농민들이 먼저 그래요. ‘어디를 콱 막아버려야 한다.’ (웃음) 지난 몇 년간 농민투쟁의 교훈이라면 목표를 세우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농민들이 주체로 결정 내려야 된다는 거. 그래야 계속 싸울 수 있고 이기는 싸움을 할 수 있다는 거죠.”
그 교훈이 곧 출하거부 찬반투표라는 방식이다. 다른 군의 경우 200여 차례의 간담회를 진행하는 데도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출하거부 투표에서 찬성이 95%를 넘긴 이유가 치솟는 생산비와 낮은 쌀값에만 있는 것은 아닌 듯 했다. “비료 값이 오른 것도 문제였지만 비료가 제때 공급되지 않았어요. 농사에는 다 때가 있어서 비료를 줘야 할 때 줘야 하는데” 비료회사가 가격 상승을 기대하며 공급시기를 늦췄다는 말이다.
“그때 농협에서 국제적으로 유가가 어떻고 하면서 비료 값 오른 것을 농민들이 이해해야 한다고 양해를 구하고 다녔어요. 아니 그러면 지금 쌀값도 농협이 나서서 소비자한테 생산비가 이렇게 올랐으니 어쩔 수 없다고 설득해야 맞는 거죠.”
농협도 정부도 지자체도 농민들 편이 아니고 “농민이 기댈 곳이라고는 서로들밖에 없어서 그나마 아직 농촌 인심이 남아 있는 것”이라던 한 여성농민회 간부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석하 부장의 말마따나 “20년 전에 1천만 농민이라 그랬는데 어느덧 500만 되고 금세 350만 되고. 가진 것도 없고 빽도 없는데 쪽수마저 줄고 있으니”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대마면에서 영농회장을 맡고 있는 신태욱 씨(69)가 이 부장을 보고는 대뜸 “저 광우병 촛불집회 모양으로 청와대 앞에 솥단지 걸고 몇날 며칠을 싸워야 혀.”라고 말하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장사해서 돈 벌 줄이나 알았지 농민들 이야기는 콧구녕으로도 안 들을 정부가 이명박 정부”일 것이니 말이다. 이석하 부장은 정말 텐트라도 쳐야겠다고 장단을 맞추는데 아무래도 농민회 회의에서 진지하게 논의될 성싶다.
“젊은이들이 아니라 우리 같은 노인들이 가서 데모를 해야 경찰들도 함부로 못 허지. 우리 같은 노인네야 지들이 잡아다가 뭐할 것이여.”
마을 이장들이 쇳소리를 내가며 정부를 성토하고 일흔을 앞둔 농사꾼이 풍찬노숙의 싸움을 다짐하는데 길을 나서자니 해질 녘 들판은 온통 황금빛이다.
더 멍들 가슴이라도 남았을까
10월 중순 다시 영광을 찾았을 때 정치권이며 언론은 온통 쌀 직불금 부정수령 파문으로 들끓고 있었다. 농협중앙회가 올 상반기 3천3백억 원의 순이익 감소에도 6백억 원의 성과급을 직원들에게 지급한 것이 언론을 통해 밝혀진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농민의 가슴을 시퍼렇게 멍들게 하는 일이 터진 것이다. 하지만 영광에 도착해서 만난 농민들은 가을걷이에 화낼 겨를조차 없는지 그래봤자 달라질 게 없으리란 체념 탓인지 그저 논 귀퉁이 벼를 베어 콤바인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고 누운 볏짚을 묶어세우고 국도변에 나락을 널뿐이다.
“뭐, 하루 이틀 된 문젠가. 여기 남의 땅 붙이는 사람들 다 땅주인 무서워서 냉가슴 앓고, 이장도 어쩌지 못해 맘고생들 하고. 그런 거 아는 사람은 다 알지. 그래도 정치하는 놈들, 무슨 장관인가 차관인가, 그런 양반들까지 그 돈 타먹는 줄은 몰랐네.”
볕드는 시간에 맞춰 나락을 널러 나온 영광읍 신월리 이용기 씨(74)도 먼 산 보듯 하더니 “직불금이나마나 나 같은 늙은이야 곧 가겠지만서두 앞으로 농사 더 지어야 할 사람은 큰일”이라며 탄식한다.
“애들이 넷인데 지금이야 다 키워서 시집장가 보냈지. 쉴 틈 없이 일했어. 담배도 하고 고추도 하고. 시간나면 노가다도 하러 댕기고. 그렇게 벌었으니까 애들 학비라도 댔지. 이제는 농사 일체 짓지 말어야 돼. 내가 아직도 한 열 마지기, 2천 평쯤 짓는데 트랙터로 로타리 치면 한 마지기에 10만 원이야. 열 마지기면 100만 원. 또 한마지기에 거름이 세 포대는 들어가. 그것도 다 하면 100만 원 돈 되지. 그런데 여기서 8만 원에 사간 쌀 40kg 한 포대가 서울 가면 22만 원이더라구.”
옆에서 한참 듣고만 있던 아주머니도 거든다. 올 봄에는 현지에서 10kg에 3천 원 받는 오이가 마트에서 3개에 2천 원에 팔리더란다. 10kg면 오이가 50개. “그 오이가 겨울 내내 하우스에서 한 드럼에 20만 원, 30만 원 기름을 먹고 자란 오이”라니 직불금에 멍들 농민의 가슴이 한 마디라도 남아있을까 싶다.
대마면 가는 길에 만난 안주영 씨(43)는 고등학생 하나, 중학생 하나, 초등학생 하나에 재작년에 늦둥이까지 본 어머니다. 남편이 콤바인으로 벼를 베면 트럭을 콤바인 옆에 붙여서 나락을 옮겨 싣는 게 그이의 일이다.
“농사 지어가지고는 못 살아요. 애들 학비도 그렇고 도시만큼은 아니어도 학원도 보내고 그래야 하는데. 그런데 올해 물가가 너무 뛰어가지고. 기계 고장 나면 수리비에 인건비, 부품비까지 안 뛴 게 없어요.”
농기계 구입하느라 농협에서 받은 융자를 아직 다 갚지 못한 탓에 당장 돈 빌릴 구멍도 없다. 또 기름 값은 뛰었는데 이웃에서 농기계를 쓰자고 하면 안 빌려줄 수도 없고 오른 기름 값만큼 올려 받지도 못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저 같은 경우는 딸기 하죠. 하우스에서. 그게 수입은 좀 괜찮은데 수확 철이 되면 하루라도 안 따면 물러서 버려야 돼요. 다른 과일이랑 달라서 손이 많이 가니까. 요새 농촌은 농번기 같은 거 따로 없어요. 먹고 살려면 추수 끝나고 모종 키워야지. 하우스에 심고 2월부터 5월까지 매달려야지. 또 금세 모내기해야지.”
특히 하우스 농사는 일손이 많이 드는데 인력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는 농촌에서도 인력사무소를 통해서 사람을 써야 하는데 농번기에는 일당이 7만 원에서 10만 원까지도 간다. “올해는 고추농사도 조금 했는데 초반에 약을 못 줘서 망쳤어요. 하우스에 설비를 해서 농약을 치자니 설치비가 만만치 않고, 사람을 사서 일일이 하자니 그것도 벅차고. 하우스 파이프 값도 6개월 사이에 세 번이나 올랐거든요. 세 살 된 딸애가 남편이랑 하는 소리를 언제 들었는지 하루는 ‘죽겄다’ 그러데요. 정말 그 말이 절로 나와요.”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거들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농사를 지었다는 임우택 씨(64)는 농사일이 싫어서 열아홉 때 서울 있는 공장에서 2년간 일을 했다.
“그때는 잠도 안 재우고 일을 시키더구만. 난 원래 잠이 없어서 좋았지. 거기서 모은 돈으로 낙농을 했는데 3년째에 폭삭 망했어. 그때 빚이 지금까정 이어지네.”
그래도 예전에는 농사짓기가 나았다. 공무원 하다가 농사짓는 친구도 있었으니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호시절인 셈이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초반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추진되면서 급속도로 어려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농사지으면서 밭떼기 한번 갈아엎지 않은 사람 없을 거여. 그 심정이야 말로 못하지. 자식 농사라고 농사가 애 키우는 거랑 하나 안 달러. 벼는 농사꾼 발자국 소리 듣고 큰다고 안 혀? 고렇코롬 키운 걸 갈아엎어 봐. 소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여. 예전에는 소 한 마리면 300만 원 넘던 시절도 있었는디. 요새는 사료 값이 하도 올라서 아침저녁으로 풀 베는 것이 일이여. 이 볏짚도 한 달 안 돼서 먹어치울 걸.”
먹고 사는 게 바빠서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데모는 열심히 못했다는 임씨. “지금은 농민회에서 뭐 하자 그러면 다 혀지. 여든 먹은 노인네들도 다 나갈 거여. 지금은 정부에서 하자는대로 하는 사람 없으니께.”라며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한 10년만 지나면 농사지을 사람도 데모할 사람도 다 없어지지 않을까 몰라.” 하며 다시 허리를 숙이고 볏짚을 끌어 모은다.
우리에게 농촌은, 땅은 무엇인가
10년. 2013년부터 보리수매가 중단되고 그 다음해부터는 농업용 면세유 지원제도도 없어진다. 그리고 2015년은 쌀이 전면 개방되는 해이다. 지난 20년 만에 농지 25%가 사라졌다. 직불금 문제를 담은 그 문제의 감사원 보고서에서는 직불금 제도개선과 함께 우리나라 농지를 더 줄여야 한다는 권고도 들어있다고 한다.
취재를 마치고 올라오려다 이석하 부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는 광주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농사를 지으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보기 드문 젊은 농사꾼이다. 영광에서 굴비 다음으로 쳐준다는 대합조개 한 접시에 소주 한 병을 놓고 마주 앉았다.
“농민운동 할 생각은 없었어요. 89년에 대학에 들어갔으니까 학생운동을 안 한 건 아니지만. 농민회는 내려와서 우리 마을에 골프장이다, 쓰레기 처리장이다, 그런 거 반대하면서. 그리고 쌀값 문제 심각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도와주다가 한발 한발 빠져든 거죠. 그냥 나는 농촌에 살아야겠다, 농사짓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릴 때는 정말 여기를 떠나고 싶었는데 막상 고등학교를 광주로 가니까 도시에서 도저히 못 살겠더라고요. 대학 다니면서도 항상 졸업하면 농사지으러 가야지 했죠.”
농사를 짓던 어머니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읍내에서 약재사를 하던 큰 형도 극구 말렸다. 결국 형과는 몇 년 동안 말도 안 하는 지경까지 가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 그는 아버지로부터 통장까지 넘겨받고 어엿한 전업농이 되었다.
“농사일 힘든 거야, 그만큼도 땀 안 흘리고 먹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땀 흘리면서 일하고 일 마치고 함께 술 한 잔 하는 게 사는 맛이죠. 또 곡식 여무는 거 바라볼 적에, 추수할 때 뿌듯하고. 그런데 부모 마음이 다 자식 잘 되었으면 하듯이 농사지으면서 요개 잘 됐으면 하는데 만원 받을 게 천원 받으면 왠지 뭐 잘못 한 거 같고, 그게 마음이 아프죠.”
현실이 암울하고 미래가 어둡다지만 “누군가는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 있는 게 세상이치”라는 그 믿음이 그를 지탱하는 힘인 듯하다. “SF영화에서처럼 하루에 요만한 알약 하나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온다거나 어느 날 갑자기 지구 같은 별을 발견해서 거기서 식량이 쏟아지지만 않는다면야” 농사짓는 일은 없어질 수는 없고 농사를 짓는 한 “농민들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게 농민운동”이라니 말이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흰소리도 나올 무렵 영광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는 그의 선배가 합석을 하게 되었고 3년을 끌어온 끝에 내년 2월 폐교하기로 결정이 났다는 대마서초등학교 이야기가 나오면서 화제는 자연스레 농촌의 아이들로 번져갔다. 국제 결혼한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 IMF에 직격탄을 맞아 가정이 깨지고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맡겨진 아이들. 한 편에서는 학생 수가 모자라 문을 닫는 학교가 생기고 다른 한 편에서는 전혀 새로운 성장환경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학교로 밀려들고 있다.
“농촌은 도시 사람들 먹거리만 생산하는 곳이 아니에요. 이 아이들이 그나마 공동체가 남아있는 여기가 아니었다면 다 어디로 갔겠어요.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들마저도 돌아가시고 나면 걱정이죠. 별로 먼 이야기도 아니에요.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인데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아무런 뒷받침도 되지 않는 농촌에서 이 문제는 그저 방치되고 있어요.”
5년 뒤 식량폭동을 우려하는 농민운동가처럼 선생님은 5년 뒤에 우리사회와 교육현장이 마주해야 할 사태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석하 부장은 “이거야 말로 르포꺼리 아니에요?”하며 취재방향을 돌리라고 농담을 건네는데 내게는 취기가 싹 가시는 얘기다. 취재를 하며 나 또한 농촌을 식량이 생산되는 거대한 공장쯤으로 여겼던 것은 아닌가.
삶의 현장이 투자의 대상, 무엇을 투입하면 그 무엇 이상의 성과가 나와야 하는 공간으로 되는 순간 쌀 직불금 파문도, 그 근본원인으로 지목되는 부재지주의 문제도 바로잡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어딘가에 식량이 부족하면 다른 나라 땅에 식량기지를 세우면 된다는 생각, 석유도 그랬으니 식량 때문이라면 전쟁도 불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주식과 펀드가 반 토막이 나기 전부터 노동의 대가가 절반으로 줄어버린, 그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마저도 절반이 되어버린 농민들,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 이름만 달리하는 반쪽짜리들이 얼마나 더 쓰러 넘어져야 이 파렴치한 욕망의 수레바퀴가 멈출 것인지 누가 귓뜸이라도 해줬으면 싶다.
- 2008년 11-12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