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잡지에 실은 글이다. 격월간으로 나오다 보니 약간 철지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요즘 새로운 글쓰기 형식에 대해 고민을 하지만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이래저래 임기응변 식으로 땜방만 하게 되는 거 같다.
이 글을 쓰는데 『블루 골드(Blue Gold)』도움을 많이 받았다. 다시 읽어보니 이 책에 대한 리뷰 같기도 하다.
공기(산소)나 식량처럼 물은 필수재이기도 상품이기도 하다. 혹자는 공공재라고 하고 또 누구는 "물은 인권"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 무엇보다 물은 그 자체로 생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물 문제에 대한 공부는 많이 한 셈인데, 태백이 워낙 복잡한 문제들로 얽혀있다보니 다 소화를 하지 못했다.
폐광지역으로 지역 살림살이 문제, 진폐증 환자 문제, 새롭게 들어선 강원랜드로 인해 도박과 노숙 등등의 문제, 그리고 생태 문제까지. 어쩌면 한국 근대사의 모든 문제가 담겨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불과 2박3일의 취재였지만 말이다.
사북항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다시 한 번 보고, 다시 한 번 더 다녀오고, 르포를 다시 써봐야겠다는 숙제를 남겨둔다. 미뤄둔 숙제가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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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일간의 물 부족 사태, 태백을 가다
2009년 1월 6일 태백시와 수자원공사 태백권관리단(태백수자원관리단)은 느닷없이 한 장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내용은 지난해 9월부터 계속된 가뭄으로 태백시의 상수원인 광동댐 저수율이 예년 30%밖에 되지 않아서 앞으로 눈이나 비가 오지 않을 경우 생활용수를 30일밖에 급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곧이어 1월 12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6시간동안 수돗물이 중단되었고, 15일부터는 오전 6시에 한 번, 저녁 6시에 한 번, 하루 두 차례 2~3시간만 수돗물이 공급되었으며, 이후 일부지역에서는 수돗물 공급이 아예 중단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4월 3일 제한급수가 해제될 때까지 재앙에 가까운 88일간의 물 부족 사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래된 경고, 갑작스런 재난
2009년 4월 8일. 태백을 향하는 차 안에서는 전국 각지의 산불 소식을 전하는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왔다. 경북 건령산과 백운산, 충북 식장산, 전북 풍악산…. 바짝 메마른 산들은 아주 작은 불씨로도 타들어가기 시작했고, 한 번 붙은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청명 한식 전후 열흘간 150건의 산불이 발생했으며 서울 남산 면적과 비슷한 310헥타르의 산림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강원도에서만 지난해의 다섯 배가 넘는 30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한반도가 바짝 말라 타들어가는 듯했다.
한반도만이 아니라 지구가 메말라가고 있다. 지구 온난화는 의심할 나위 없는 상식이 되어버렸다. 마실 물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는 사실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국제기구와 환경단체들은 벌써 몇 해 전부터 “지구상에 물 위기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지구 생존에 가장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해왔다.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국정부도 2016년에는 한국의 물 부족이 심각해진다는 발표를 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2009년 태백을 중심으로 한 정선, 고한, 사북 등 강원도 일대에 몇 십 년 만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겨울 가뭄이 덮쳤다. 강원도만이 아니다. 낙동강은 수량부족으로 수질이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전남 여수 섬지역 350여 가구는 3개월 동안 선박이나 소방차를 이용한 운반급수에 의존하였으며, 통영 욕지도와 사량도 주민 425가구도 일주에 두 번 오는 급수선에 의존하고 있다. 전북은 지난해 평균 강수량 60% 선인 900mm 이하를 기록하면서 2만여 명이 식수난에 시달렸으며, 경북 김천과 안동, 상주, 청송 등에 있는 5000여 가구 주민들도 제한급수 또는 단수로 인한 어려움을 겪었다.
정상급수 5일째, 태백에서 만난 사람들
점심 무렵 도착한 태백은 플래카드의 도시였다. 곳곳에 이번 사태와 관련한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내용은 주로 물 관리를 잘못한 수자원공사와 몇 개월 동안 주민의 어려움을 외면한 정부에 대한 성토와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것이었지만 간혹 전국 각지에서 생수병을 보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도 있었다. 지난 3월 언론들이 태백 주민들의 어려움을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태백으로 모인 생수가 340만 병을 넘어섰다고 한다.
우선 태백시 중심가에 있는 황지연못을 찾았다. 낙동강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연못은 매우 아담하게 꾸며져 있는 공원으로 태백 주민들이 자주 찾는 쉼터이다. 태백시는 제한급수 시작 바로 다음날은 1월 13일부터 이곳에서 취수를 시작했다. 1989년 광동댐을 취수원으로 활용한 뒤 2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루에도 대여섯 번인가 물차가 와서 물을 끌어 담는데 신기하게도 못이 마르지는 않더라고요.” 초등학생 딸아이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 나온 김진원(43세, 교사) 씨의 말이다.
“몇 달 간 정말 고생 많았죠. 목욕은 엄두도 못 내고 머리도 며칠 만에 한 번 감을까말까. 그래도 우리 집은 아파트 저층이어서 하루에 두 번 나오는 수돗물이 그런대로 잘 나왔는데 고층은 그마저도 잘 안 나왔어요. 수압이 약하니까. 또 저녁 6시에 물을 받아야 하니까, 맞벌이하는데 서둘러 퇴근하거나 물을 받아놓고 다시 일하러 가기도 했죠. 사실 먹는 물이야 사서 마시면 됐지만 씻는 게 제일 힘들었죠.” 어린 아이가 있는 집, 식구 중에 환자가 있거나 노부모를 모시는 집의 경우 불편은 더욱 심했다. 버티다 못해 아예 짐을 꾸려 물이 나오는 지역으로 피난을 가는 집들도 생겼다.
“세탁기 돌리는 건 꿈도 못 꾸고 빨래는 일주일에 한 번 모아놨다가 했어요. 화장실도 식구들이 다 본 후에 한꺼번에 물을 붓고. 그래도 아파트에 사는 저희들은 사정이 나았죠. 아마 지금도 시 변두리나 고지대는 어려움이 많을 거예요.”
지난 3월 학교가 개학을 하면서 태백은 또 한 차례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아이들 급식 제공에 차질을 빚게 된 것이었다. 학교 교실 뒤편은 생수 박스로 가득 채워졌고 급식소 인근에는 물탱크가 설치되었다.
태백 황지동 한 연립에 혼자 살고 있는 김옥순(78세) 할머니는 연신 전국에서 생수를 보내주어 고맙다는 인사다. 광부였던 남편을 따라 경북에서 태백으로 온 지 30년 만에 이런 가뭄은 처음이었다.
“고생이야 이루 말루 다 못했지요. 쌀이 있어도 밥을 할 수가 있나. 설에도 아이들 오지 말라고, 물도 안 나오는데 무슨 명절이냐. 혼자서 그저 라면이나 끓여 먹었지요. 통장 집에 물 왔다 그러면 가서 가져오는데 생수병 큰 거(1.5리터) 6개 들고 집까지 오는 게….”
할머니는 지난해 진폐증이 심해져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나셨는지 눈물을 보이시며 말을 잇지 못한다. “빨리 죽어야지….”하는 소리에 옆에 있던 김명자(74세) 할머니는 “연금 꼬박꼬박 받아먹고 건강하게 살아야지, 왜 죽느냐?”며 다독이신다.
김명자 할머니는 이제 몇 안 남은 광업소 중 한 곳이 있는 철암동에 산다. 그곳은 몇 십 년 전에 덮었던 동네우물을 다시 열어 방송을 탔던 마을이다.
“예전에도 고생 많았지. 광업소마다 목욕탕이 있어서 일하는 사람들 씻는 거는 어렵지 않았지만 그래도 집집마다 수도꼭지 달린 게 오래 안됐잖아. 여기 황지연못도 예전에는 다 빨래하던 빨래터였어. 빨래가 가장 고생이지. 탄광 많을 때는 어디 널어놓을 수가 있나. 밖에다 널면 다 까매지는데. 근데 나이 들고 다시 물 길러 다니려니까…. 그래도 우리 땜에 군인들이 고생 많았어요. 우리 집은 물차도 못 올라오니까 집까지 물통 날러주느라.”
물 부족 사태의 세 가지 원인
언론들은 이번 사태의 원인을 대략 세 가지로 꼽는다. 극심한 가뭄과 태백수자원관리단의 물 관리 부실, 그리고 낡은 상수도관으로 인한 전국 최고의 누수율이다. 황지연못에서 만난 주민들 중 고령층으로 갈수록 평생 겪어보지 못한 가뭄이었다며 기후를 탓하는 목소리가 많았던 반면 젊은 사람일수록 ‘인재’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또한 몇몇 주민들은 인근 정선에 있는 카지노 강원랜드와 여기저기 들어서고 있는 스키장, 리조트 등에서 물을 많이 쓰기 때문일 것이란 나름의 추측을 하기도 했다.
“강원랜드나 스키장 때문이라는 건 사실과 달라요. 물론 마실 물도 없는데 인공눈을 만들고 하니까 보기는 안 좋죠. 하지만 관광객을 상대로 하니까 제한급수를 못하고 물을 자체적으로 동강 같은 곳에서 사왔거든요. 사실 어느 게 더 근본적인 원인인지 잘 모르겠어요. 우선 태백시 상수도 누수율이 고질적인 문제죠. 여기 누수율이 49%로 전국 평균 14.6%, 강원도 평균 22%를 훌쩍 뛰어넘고 있거든요.” <태백정선 인터넷뉴스>의 홍춘봉 기자의 이야기다. 태백시의 누수율이 이렇게 높은 이유는 대부분의 상수도 설치를 정부나 지자체가 아니라 1970년대부터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한 탄광업체들이 각자의 사택들 중심으로 했기 때문이다.
“태백시는 상수도관이 어디에, 어떻게 묻혀있는지 파악을 못하고 있어요. 사실 시가 생기기도 전에 일이잖아요. 또 누수 되는 걸 보수하려면 330억의 예산이 필요한데 태백시는 돈이 없다는 거죠.”
태백시수자원관리단의 부실관리에 책임을 묻는 측은 이번 물 부족 사태 해결을 위해 태백시공무원노조와 각계 사회단체로 구성된 태백시지역현안대책위원회가 중심에 있다. 이들은 태백수자원관리단이 가뭄을 대비해 충분한 양의 물을 광동댐에 저장해두어야 했음에도 너무 일찍, 너무 많이 방류를 해버린 데 원인이 있다고 지적하며 감사원에 감사 청구를 해놓은 상태다. 홍 기자는 “감사원 결과가 나와 봐야겠지만 첫째로 이번 가뭄이 예측 가능했는가 하면 그러기 어려웠을 거라고 보고. 안일하게 대처한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게 근본적이고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기 어려운 거 아닌가 싶죠. 어쨌든 양쪽 이야기가 엇갈리니까 감사 결과를 봐야겠지만…”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한국은 물 부족 국가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유엔환경기구(UNEP)에서 물 부족 여부를 알려주는 지표를 내놓고 있는데 한국의 연강수량은 세계평균 880mm보다 많은 1250mm이지만 높은 인구밀도로 1인당 강수량은 세계평균의 1/8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강수의 대부분은 여름철에 집중되어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매년 홍수와 가뭄이 되풀이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광동댐도 홍수에 대비해 방류한 뒤 태풍도 비켜가고 바로 가뭄이 닥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 태백수자원관리단의 해명이다.
이러한 한국 지형과 기후의 특성을 들며 개발론자들은 더 많은 물그릇, 댐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사태를 맞아서도 정부는 발 빠르게 광동댐 인근에 소규모 댐 건설을 위한 예산을 확보했다. 하지만 환경단체들은 댐 건설이 아니라 효율적인 물 관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인구가 늘고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물 사용량이 많아지고 있는데 무턱대고 공급량을 늘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물은 지구가 무한정 공급하는 자원이 아니라는 점과 물 부족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왔고 또 겪게 될 사람들과 지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태백 시내를 벗어나 철암동으로 갔다. 이곳 주민들에게 지난 80여 일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설거지물을 아끼려고 종이컵을 썼어요. 생수도 사다 마시니까 빠듯한 생활비가 이래저래 많이 나갔죠. 우리 집은 20년 넘게 안 쓰던 재래식 화장실 문을 다시 뜯어내고 쓰고 있어요. 저 앞 동네에는 간이 화장실을 가져다놨는데 아침이면 줄이 길게 늘어서죠.” 하루아침에 일상이 2, 30년 전으로 돌아갔다며 철암동에서 만난 이철용(54세) 씨는 만약 서울에서 몇 달 동안 물이 안 나왔더라도 정부가 이렇게 손 놓고 있었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 근대화와 물’이란 글에서 홍성태 교수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근대화된 삶의 전제조건”이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물이 안 나오는 상황은 전근대적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며 지난 80여 일간 태백에서는 제 역할을 하는 정부가 부재했다는 말도 된다. “만약 서울이었다면”이라는 그이의 분노는 너무나 당연하다.
철암동에서와 마찬가지로 저녁 무렵 들린 중앙시장 통에서도 황지연못에서 만난 주민들과는 달리 강원도 폐광지역을 홀대하는 데 대한 섭섭함과 분노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정부는 자기들이 뭐 필요해야 여기에 뭘 해주지 그렇지 않으면 암 것도 안 해줘. 강원도가, 태백이 수 십 년 동안 석탄 캐서 전국에 연료 다 대줬잖아. 근데 폐광되니까 니들 살 길 알아서 찾으라고 입 싹 닦고. 카지노도 뭐 사실 여기 사람들 위해 해준 건가?”
“왜, 그래도 없으니 보단 낫지. 근데 그것도 여기 사람들이 죽겄다고 데모하고 그러니까 결국 해줬지, 뭐.”
태백으로 들어오는 도로의 상당수는 5.16 쿠데타 이후 삼청교육대의 전신 쯤 되는 ‘국토개발단 근로대’가 딱은 길이라고 한다. “전국에서 깡패들 잡아다가 여기 와서 도로를 닦게 했지. 그때야 포클레인이 있어, 뭐가 있어. 근데 도로 하나를 다 닦아야 풀어주니 도리가 있나.”
1980년대 석탄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기, 태백에서는 강아지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 정도였지만 그 그늘에는 ‘사북항쟁’으로 대표되는 착취가 있었고 툭 하면 터지는 탄광사고에도 목숨을 내놓고 ‘막장’에 들어가야 했던 애환과 고달픔이 있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어떤 이는 슬쩍 다가와 자못 의미심장하게 “사실 제한급수가 풀린 게 비가 와서가 아니라 태백 인심이 심상치 않아서”라며 “어떻게 비다운 비가 한 번도 안 왔는데 국무총리가 왔다가니까 냉큼 물이 나오느냐.”고 일러준다.
블루 골드vs물의 평등과 민주주의
시가 생긴 이래 국무총리가 태백을 찾은 건 처음이라 한다. 한승수 국무총리와 관련부처 장관들이 태백을 찾은 건 세계 물의 날을 맞아 태백의 실정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난지 엿새 뒤인 3월 28일이었다. 당시 정부가 태백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거나 노후 된 상수도관을 전면 교해하겠다는 특단의 대책을 내놓을 것이라 기대했던 주민들은 국무총리가 구체적 대책 없이 원론적인 말만 하고 돌아간 것에 큰 불만을 표시했다. 민심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고 4월 5일 전후해서는 서울에서 대규모 집회도 잡아놓았다. 그러던 차에 4월 3일 급작스럽게 제한급수가 해제된 것이다.
“앞으로 두고 봐야죠. 수자원공사는 6월까지는 공급할 수 있다고 하는데.” 다음날 ‘태백 생명의 숲’이란 단체 사무실에서 만난 홍진표 사무국장의 말이다. 폐광지역을 살리기 위한 대안으로 생태운동을 선택한 그가 이번 사태를 보는 시각은 홍춘봉 기자와는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태백시가 태백 주민을 다 거지로 만들었다.”며 분노하고 있다.
“누수율은 수압이 떨어지면 더 높아지니까 최근에는 50%가 넘었을 겁니다. 절반이 버려진다는 거죠. 그러는 동안 과연 태백시는 뭘 했느냐는 말이죠. 민선 지자체 3기라고 하는데 예산 타령이나 하며 정부에 손 벌리고. 물이 부족해지니까 생수병 보내달라고 또 손이나 벌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도 제대로 못하고 태백시민들이 여기다 대고 고맙습니다, 저기다 대고 고맙습니다, 하게 만들었잖아요.” 게다가 태백시에서는 그 생수병들로 상징 조형물까지 만들겠다고 하니 그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물론 가뭄이 극심했죠. 그런데 기후변화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될 거예요. 문제는 물을 너무 많이 쓴다는 거예요. 강원랜드 같은 시설도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지만 물을 엄청나게 쓰는 곳이잖아요. 이런 게 막 생기는데 댐 하나 더 짓는다고 해결되겠어요? 그런 점에서 수도세를 현실화할 필요도 있어요. 돈이 없어서 물을 못 쓰는 사람은 없게 만들어야 하지만 전기세처럼 많이 쓰는 사람이 많이 내게 해야 하고, 근본적으로는 물을 이렇게 많이 쓰는 생활 자체를 바꿔야 해요. 1985년 광동댐을 지을 때 태백에 12만 명이 살았고 예상했던 인구가 20만이었어요. 지금은 5만인데 20만 명이 쓰는 만큼 물을 쓴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죠.”
세계 물 소비량은 20년마다 두 배씩 증가했다. 빨리 근대화한 한국의 경우 물 소비량도 그만큼 빠른 속도로 늘었다. 아파트에 사는 한 가구는 매년 50만 리터의 물을 사용한다. 생활환경만 바뀐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생활용수는 전체 물 소비량의 10%에 불과하고 20~25%는 공업용수로 쓰인다.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물은 40만 리터다. 제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친환경 산업이라고 알려진 IT산업도 막대한 오염수를 발생시키고 컴퓨터 한 대를 생산하는데도 대단히 많은 물을 필요로 한다. 나머지 65% 이상의 물을 쓰는 농업의 경우에도 기업농으로 갈수록 물 소비량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전 세계‘물 유통’은 연간 4천억 달러라는 금액으로 환산되고 있다. 지난해 잠시 주춤했던 수돗물 민영화 논의가 슬며시 고개를 드는 까닭이다. 벌써 14년 전인 1995년 열린 ‘국제 물 심포지엄’에서 세계물정책연구소 소장은 “20세기가 석유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물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그후 다국적 기업들은 물이야말로 블루 골드(Blue Gold)라며 생수 판매를 비롯한 ‘물 시장’장악에 열을 올리고 있고, 한국정부 또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수돗물 민영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틈바구니에서 물 양극화로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는 국가가 있고, 양동이를 들고 28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 어떤 대륙의 아이들이 있으며, 예상치 못하게 물 부족이라는 재앙을 만난 태백이 있다.
수련의 59일과 평등한 물
“석유가 없으면 석탄을, 쌀이 없으면 밀을, 그러나 물이 없으면 무엇을?” 태백 시내에 걸린 한 플래카드 글귀다.
과연 물은 무엇인가. 물의 주인은 누구인가. 누가 국가와 기업에게 물을 사고 팔 권리를 주었나. 물을 어떻게 나눠 쓸 것인가. 꼬리를 무는 물음을 뒤로 하고 태백을 떠나오는 길에 한강 발원지로 알려진 검룡소에 들렸다.
검룡소는 황지연못과는 달리 태백 시내에서 30여 분 떨어진 계곡에 있다. 인근 고개 이름이 삼수령인데서 알 수 있듯 태백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세 갈래로 나뉘어 한강, 낙동강, 그리고 동해로 흘러든다고 한다. 검룡소 입구에 차를 세우고 호젓한 산책길을 15분정도 걷다보면 검룡소가 나온다. 태백 시내 메마른 하천과 달리 신비롭게도 샘물이 줄기차기 솟구치는 모양을 쳐다보고 있자니 왠지 별세계에 온 느낌이다.
다행히도 4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전국적으로 몇 차례의 단비가 내렸다. 국무총리에게도 태백시장에게도 너무나 고마운 단비였겠지만 무엇보다 태백 주민들이 반겼을 터이다. 하지만 불길함을 떨칠 수는 없다.
‘수련의 59일’이란 이야기가 있다. 한 연못에 수련이 ‘2+2, 4+4,…’처럼 산술적으로 피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인류가 생태계를 파괴하듯)‘2×2, 4×4,…’처럼 기하급수적으로 피어나 60일째 되는 날 연못을 뒤덮는다고 가정하자. 수련으로 뒤덮혀 물이 썩기 하루 전인 59일째 연못의 풍경은 어떨까? 연못 절반만 수련이 덮인 채 그런대로 보기 좋은 풍경을 연출한다. 오늘은 며칠 째 날일까. 본래부터 평등한 물을 어떻게 평등하게 할 수 있을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