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12일 경기도 마석 가구공단에서는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의 대규모 불법체류자 단속이 이뤄졌다. 누구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하고 누구는 그야말로 인간사냥이었다며 당시를 전한다. 가구공단의 모든 출입로는 사전에 봉쇄되었고 법이 정한 단속절차와 규정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이주노동자들은 사슬에 묶여 보호소로 끌려갔고 몇몇은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갔으며 그 중 몇은 수술까지 받아야 했지만 법무부는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없다고 발표했다. 이번 단속은 몇 달 전 법무부가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에서 현재 50만 명의 이주노동자들 중 20만 명에 달하는 불법체류자를 향후 5년 이내에 10만 명으로 줄이겠다는 보고에 따라 실행된 것이다. 그 보고에는 또한 이주민들이 밀집한 마석 가구공단 일대가 슬럼화가 되어 범죄우려가 높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이러한 대규모 단속이 이 정부 들어서 벌어진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있어왔고 우리가 미등록 이주노동자, 소위 불법체류자와 국가경쟁력강화 사이의 함수관계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무수한 사건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사이 두 명 중 한 명 꼴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추방될 것이고 정부는 일자리를 10만개 더 만들었다고 발표할 것이다.
한국에 온지 9년이 된 하킴(인도네시아, 36)은 몇 해 전에 마석에서 일한 적이 있다. 톱밥을 비롯한 온갖 유해먼지가 날리고 하루 종일 뼈마디까지 진동시키는 소음 가운데서 하루 네 다섯 시간만 잠을 자면서 일을 해야 하는 가구공장은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곳이다. 거기서 그는 운이 좋게도 두 번이나 단속을 피했다. 두 번째에는 공장주가 몰래 열어준 비상문을 통해 옥상에 올라가 동료들이 잡혀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마석을 나왔다. 작년까지만 해도 일자리가 있으니 언제든 오라는 연락을 가끔 받았지만 다시 들어갈 생각은 없다. 경기가 지금보다 더 안 좋아져서 일자리를 도저히 찾을 수 없으면 그의 생각도 달라질 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도 마석에 일자리가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주노동자들이 경기변동에 따라 쓰고 버려지고 다시 재활용되는 사이 이주민 100만 명이 넘었다. 그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이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민들이다. 공단 주변이나 도심에 있는 이주여성들은 그나마 불러주는 한글교실도 있고 김장김치 담그기 행사 같은 것에 얼굴을 내밀 수도 있지만 농촌지역으로 내려갈수록 그들은 고립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나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같은 처지의 또래들끼리만 어울리며 지역 어른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물론 한국에서 결혼한 이주민들 사이의 자녀는 다문화 가정의 범주에서조차 제외된다.) 앞으로 10년 쯤 뒤면 이 아이들이 10대 후반의 청소년/녀, 20대 초반의 성인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사회가 얼마나 준비되었는가 하는 지적들이 간간히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다문화 정책은 한국문화에 적응시키기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다.



국경 없는 시장으로 해서 국경 없는 마을이 여기저기 생겨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은 국경을 훌쩍 뛰어넘어 버렸지만 노동은 그 국경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이고 국경보다 넘기 어려운 선들이 우리 안에 보다 분명히 그어졌다. 2008년 12월, 안산에 있는 ‘국경없는 마을’을 찾은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주와 노동

네팔에서 온 레이탄(23)은 손가락을 활짝 펴 보이며 10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한국에 온지 얼마나 되었느냐는 질문을 네팔에서 한국까지 몇 시간이나 걸렸는지를 묻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레이탄보다 두 해 먼저 한국에 온 셀마(네팔, 38)가 웃으며 2개월이 되었다고 고쳐 알려준다. 이 둘은 경기도 평택에 있는 공장 기숙사에 함께 묶고 있다. 쉬는 날을 맞아 셀마는 쇼핑도 할 겸 레이탄에게 이곳 ‘국경없는 마을’을 소개시켜주러 데리고 나온 길이다.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일을 해서 한 달에 100만원 남짓을 손에 쥐는 레이탄은 기대했던 것보다 월급이 적지만 이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한국에 와 일자리를 구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휴식이 없어 고달프기는 하지만 말이다.

레이탄은 오늘 휴대전화를 살 생각이다. 거리 곳곳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공짜폰이 있네, 1만원이면 즉시 개통이 가능하네, 호객꾼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주노동자들도 이 정보화 사회에 발을 디딘 이상 예외일 수는 없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처음 배우게 되는 것이 욕설과 함께 담배이다. 전화와 욕설과 담배는 이제 레이탄의 일상이 되어간다. 어떤 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기도 할 것이고 또 어떤 것은 더욱 고향을 그립게 할 것이다. 

셀마는 네팔에 부인과 여섯 살 된 딸이 하나 있다. 그는 요즘 잔업이 줄면서 고향집에 일주일에 두 세 번 하던 전화통화를 한 번으로 줄였다. 반면 지갑 속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는 일이 더욱 잦아졌다. 이주는 어떤 결핍을 동반한다. 그것이 돈이 되었든, 일자리가 되었든, 새로운 문화가 되었든 결핍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그 무엇이 그들의 이주노동을 견디게 만든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제대로 된 보상을 받고 있는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국경없는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널리 알려진 이곳은 나름의 이주노동의 내력이 있는 곳이다. 20여 년 전 안산에 반월공단이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로동과 개봉동, 수원과 부천 등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한국 노동자들과 그들의 식솔들에 의해 배나무 밭이던 원곡동 산등성이에는 우후죽순처럼 벌집들이 세워졌다. 출근 시간 공단으로 들어가는 통근버스는 항상 원곡동 정류장에서 만차가 되었고 퇴근시간이 되면 다른 지역에 거주하던 노동자들도 이곳에 내려 한 잔 술을 걸치고 갔다. 그러던 풍경이 사라지고 지금과 같이 50여 개의 나라 사람들로 북적이는 국제적 거리로 탈바꿈한 계기는 1997년 IMF 사태였다고 안산이주민센터 대표 박천응 목사는 말한다.

“90년대 초반부터 이미 안산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거주하지는 못했어요. (원곡동이) 워낙 교통이 좋으니 이곳으로 많이 모이기는 했지만 방을 가진 주민들이 외국인들에게 방을 내놓기를 꺼려했죠. 그래서 다들 공장 기숙사나 시내에 머물면서 공단까지 출퇴근을 하고 그랬죠. 그런데 IMF 사태가 터지고 일자리가 없어지니까 한국 노동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방들이 텅 빌 수밖에 없었죠. 그러면서 이 동네가 티켓다방이랑 작은 단란주점이 즐비한 슬럼 비슷하게 되어 갔어요. 계속 방을 놀릴 수는 없으니까 주민들이 하나 둘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을 받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안산지역이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 괜찮은 곳으로 알려지면서 급속도로 많이 모이게 되었죠. 한때는 두 세평 남짓 한 방에 열 명이 넘게 사는 방도 있었어요.”

반월공단이 들어설 당시 여기로 모여들어 벌집을 지었던 한국 노동자들은 다 어디로 흘러들어 갔을까. 지금 국경없는 마을 거리를 지나는 이주노동자들 중에도,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가게 상인들 중에도 90년대의 원곡동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원곡동에서의 이주는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국경과 시장

지난 20세기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간도와 연변으로, 남에서 북, 북에서 남으로, 농촌에서 도시로, 그리고 독일과 중동으로 쉴 새 없이 노동을 찾아 이주했다. 어쩌면 이주노동은 특정시기, 특정장소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현대의 거역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리적 국경을 넘는 일만큼이나 마음속의 국경을 넘나드는 일은 아직도 우리에게 생소하다. 

한국인 아내와 결혼한 뒤 13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푸웬(인도네시아, 46)을 만난 것은 국경없는 마을 초입에 있는 공원에서였다. 그는 부천에 살고 있지만 가끔 고향 친구들도 만나고 고향음식도 먹을 겸 이곳에 들린다. 푸웬은 처음 한국에 와서 버스를 탔던 경험을 잊지 않고 있다.

“버스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무도 옆자리에 앉지 않는 거예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졌죠. 내가 한국에 살면서 우리 부모님들은 한국 텔레비전도 사고 세탁기랑 냉장고도 샀어요. 하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한국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요. 한국에서 일하다 돌아간 사람들이 한국에서 좋은 경험을 하고 가는 건 아니니까요.”

문득 오래 전에 만났던 베트남 대학생이 한국의 국제결혼 행태에 대해 분개하면서 “일본이나 미국이 한국보다 훨씬 잘 살지만 그들이 한국 사람들처럼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한 집단이 가진 천박함이나 품격은 다른 집단과의 만남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공원 맞은 편 ‘월드마트’라는 간판을 단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는 중국인 점원과 스리랑카에서 온 이주노동자 사이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 가격흥정이 쉽지 않다. 보기 딱했는지 가게 주인이 나선다. 주인아주머니의 말투에도 연변 사투리가 묻어난다. 이곳에서 가게 문을 연지 5년이 좀 넘었다는 아주머니는 비록 말은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이야기를 들으면 이제 그 사람의 국적을 판별해낼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국경없는 마을 국제공용어인 한국어에 능숙한 탓에 그녀는 방금과 같은 어려움을 자주 겪지는 않는다. 방금 그 스리랑카 사람도 이 가게 점원도 사고파는 데 어려움이 없을 만큼의 한국어를 곧 익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안 좋은 게 여기만이 아니니까, 요새 힘들지 않은 사람들이 없잖아요? 경제가 나빠서인지 단속이 강화되어서인지 사람 숫자가 줄기는 줄었어요. 물건 값도 많이 깎으려고 하고.”

원곡동 거리를 지나는 이주민들 대부분은 한두 개씩의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다닌다. 일주일치 혹은 몇 주치의 먹을거리를 쉬는 날인 오늘 장만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날이 추워진지도 꽤 되었는데 며칠 전 한파 덕분인지 전기장판을 들고 가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마주칠 수 있다. 겨울은 이래저래 쓰임새가 늘어나는 계절이다.

바다 건너 뉴욕에서 시작된 경제 한파가 원곡동까지 불어 닥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국에 온지 3년이 된 아구르(인도네시아, 35)는 지금 있는 공장의 일거리가 줄지 않아 다행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을 못하는 친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대부분 정부에서  불법체류자로 지칭하는 체류기한 3년을 넘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서 단속을 강화하자 공장주들은 이들의 고용을 꺼리고 있다. 대대적인 단속 이후에는 산업연수생이 오면 그 숫자만큼 이들을 자르고 연수생을 고용한다. 작업량이 줄게 되면 해고 1순위가 되는 것도 당연히 이들이다.

한편 자발적(?)으로 한국을 떠나는 이들도 있다. 아구르의 한 친구는 불법체류 상태에서 일을 하다 몇 달 치 월급을 못 받게 되자 한 이주노동자센터와 의논한 끝에 결국 출국을 선택했다. 그 것만이 밀린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장에 나와 물건을 고르는 일이 어쩌면 이들의 삶이서 가장 마음 편한 선택의 순간일 것이다. 이보다 어려운 선택을 이들은 수도 없이 거쳐 왔고 앞으로도 거쳐야 한다. 외환송금환전소 앞에서 만난 조우세(인도네시아, 32)는 내년 6월이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어 한국에 남을 것인지 돌아갈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한다. 그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월급은 줄고 먹는 거는 계속 비싸져서” 집으로 보내는 액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는 그동안 받은 돈으로 농사지을 땅을 마련했지만 선뜻 돌아가지 못하는 까닭은 이 국제적인 불황의 여파는 한국만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에도 미칠 것이고 오히려 한국보다 경제사정이 더 안 좋은 인도네시아에서의 살림살이가 더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요일에도 영업을 하는 국경없는 마을 은행 앞에는 송금하려는 이주민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시선

국경없는 마을 한 편에 자리하고 있는 ‘안산 외국인 주민센터’는 매우 현대적인 건물이다. 건물 앞 설치물이며 벽화 하나에도 지역 특성에 맞게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였다. 매년 열리는 이주노동자들의 축구대회 ‘안산 월드컵’에 대한 언론보도를 접하고 이곳에 가게를 열어볼까 수소문을 하는 중이라는 라울(필리핀, 40)을 그 앞에서 만났다. 그는 지난 해 천안에서 한 중국 여성과 만나 결혼을 하고 한국에 정착할 생각이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국경없는 마을에서 주민들과 이주민들이 허물없이 지내지는 않는 모양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동네에서만큼은 이방인을 향한 경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마음에 든다.

처음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은 지하철 4호선 안산역에서 지하보도를 건너 국경없는 마을로 들어서는 순간 어느 새 이방인으로 변해버린 자신과 무수한 이방인들이 모여 다수를 이룬 이주민들을 발견하고는 당혹감을 느낀다. 이 감정은 낯설음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새로움에 대한 설렘일 수도 있는데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경험과 생각, 그리고 시선일 것이다. 국경없는 마을 가로등마다 펄럭이는 다채로운 국기들과 그 아래 버젓이 걸려있는 ‘불법 흉기 소지자 단속’을 알리는 플레카드는 이주민들의 별다른 시선을 끌지 못한다.

요기를 할 겸 들어선 만두집에서는 한국인 주인장이 만두를 빚고 있다. 중국동포인 그의 아내는 탁자에 올려진 칼국수에 손도 대지 못하고 꽈배기 반죽하느라 정신이 없다.

“우리는 천원 장사여서 그런지 경기가 안 좋은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는데.”라면서도 주인장은 천원에 두개 하는 만두를 연신 빚어낸다. 그래도 임대료가 슬슬 올라서 걱정이라는 그가 하루에 빚는 만두의 개수는 수천 개는 족히 될 것이란다. 아마도 그의 아내는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나야 칼국수에 젓가락을 가져갈 수 있을 듯 보였다.

국경없는 마을에서도 중국동포들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듯 보였다. 중국음식점이며 마트나 채소 가게 등에서 중국동포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건설현장에서 시작해 용역업체를 차린 이들도 있다. 이들이 그나마 한국사회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언어적 이점과 함께 피부색도 크게 작용했다. 음식점과 같은 서비스업에서 중국동포가 아닌 이주민을 찾아보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에 한눈에도 외국인임이 알아차릴 수 있는 누르(방글라데시, 24)는 국경없는 마을에 왜 자주 오느냐는 질문에 방글라데시 말인 벵갈어가 나오는 노래방이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지난주에는 몽골 친구와 함께 노래방을 가기도 했다. 그의 꿈은 돈을 벌어서 방글라데시에서 노래방을 여는 것이라는데 연신 웃음을 지어보이는 누르의 이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원곡동 제2의 동사무소 격인 안산 외국인 주민센터는 지난 3월 문을 열었다. 아직도 많은 주민센터(동사무소)에서 이주민 담당 공무원이 아예 없거나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지만 이곳에서는 열일곱 명의 공무원이 상주하고 있고 8개국의 언어로 상담이 가능한 통역지원실도 갖추고 있으며 한국어교실을 비롯한 이주민들의 각종 모임과 행사가 진행된다.

운이 좋게도 나는 캄보디아 이주민 한국어교실 수료식을 참관할 수 있었다. 여기 모인 이주민들은 오늘 한껏 멋을 부린 모습들이다. 충남 당진에서 한국어교실에 참석하기 위해 일요일마다 올라왔다는 초롱원(캄보디아, 25)은 좀 더 한국어를 배워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한편 몇몇의 이주여성들은 한국어를 배우기보다는 이렇게 한 주에 한 번씩 고향사람들 만나는 것이 더 큰 즐거움인 듯 보였다.

많은 결혼 이민자들, 이주여성들이 한국어교실, 한글교실을 찾는다. 한국어는 그들이 한국에서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반면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와 문화는 열등한 것으로 무시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어떤 이주민 단체는 이주여성들을 상대로 자기 나라 동화를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교실을 열기도 한다. 한 베트남 이주여성은 남편과 사별했지만 현재 안산 중심가에서 베트남 쌀국수 집을 열어서 안정되게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박천응 목사는 누가 그녀에게 김치를 한국 사람만큼 담글 줄 모른다고 뭐라 할 수 있겠냐며 한국사회의 다문화 정책을 꼬집었다. 진정한 다문화란 다른 것이 공존하고 만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수료증이 전달되고 간단한 다과회까지 마치자 사람들은 삼삼오오 건물을 빠져나간다. 이들이 한국어를 더 잘 배워서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캄보디아 말을 가르쳐주는 상상을 해본다.

한편 안산이주민센터의 류성환 사무국장은 외국인 주민센터를 비롯해서 여러 이주관련 단체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숫자는 전체 1%에 불과하다고 한다. “행사나 모임이 아무리 많아도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한 사람에게 여기서도 나와라, 저기서도 나와라 하며 경쟁하는 경우도 생겨요. 어떤 이주여성은 제발 좀 가만히 내버려둬라 그러기도 하지요.”




인터뷰

날이 저물 무렵 목도 축일 겸 외국인 주민센터 맞은편에 보아둔 인도네시아 식당을 찾았다. 문을 여는 순간 스무 명 남짓한 시선이 내게 쏠리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내게는 매우 낯설지만 그들에게는 매우 익숙할법한 시선과 공기다. 맥주 한 병을 시켜놓고 앉았다. 식당은 마치 먼 휴양지처럼 인도네시아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게다가 시큼한 동남아시아 특유의 담배냄새까지. 어느 덧 긴장이 풀리고, 맥주병이 반 쯤 비어 갈 즈음에는 저편 테이블에 안주도 없이 달랑 소주 한 병을 두고 앉아있는 이가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이 무슬림인 까닭에 인도네시아 사람들 중에서 술 마시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다가가 양해를 구하고 합석을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리이디(인도네시아, 34)라며 내게 명함을 한 장 달라고 했다. 월급을 못 받으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지도 물어본다.

“지금은 월급 받아요. 계약서에 월급 100만원 써 있어요. 그런데 계약서 없으면 언제 100만원 그랬냐 하고 80, 90만원 줘요. 한국사람 왜 거짓말해요? 원래 거짓말 잘 해요? 왜 그러는 거예요?”

한국에 온지 5년째인 리이디는 인천 남동공단에서 일을 하고 있고 재작년에 한국에 온 그의 부인은 경북 구미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그는 부인을 만나러 버스를 타고 구미로 내려간다. 술기운이 올랐는지 그는 말이 많아졌다.

“한국경제 잘 살아, 인도네시아 못 살아. 나 한국에 와서 일해. 인도네시아 잘 살고 한국 못 살면 나 안 와! 지금 한국 사장 좋아. 나 일 열심히 해. 한국 사장, 과장 막 이 새끼, 씨발, 욕하고 그러면 일 열심히 안 해. 한국사람 왜 그러는 거예요?”

나쁜 사람들이어서, 돈 욕심이 많아서, 자기도 그렇게 당해서, 궁색한 답변이 몇 차례 반복되었지만 그의 ‘한국사람 왜 그러는 거예요?’는 계속 되풀이되었다. 인도네시아에는 이제 일곱 살이 된 그의 아들 휘크리가 있다. 아들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얼굴이 잠시 환해진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에 오토바이 가게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동생이 운영하는 그 가게로 돌아가 휘크리를 뒤에 태우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안 도로를 달릴 날이 언제 올 것인가. 
 

 


국경없는 마을에서의 인터뷰는 툭툭 끊겼다. 질문은 가닿지 못하고 메아리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무수한 이국의 언어들이 떠돌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리이디는 옆에 앉아서 어디엔가 전화를 걸고 있다. 지금도 그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상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목소리를 높일 뿐인지 알 수 없다. 한국어교실에서 만난 이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만난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반말에 익숙하다. 그들은 한국어를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 2009년 1월 <공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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