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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사냥꾼 - 유쾌한 과일주의자의 달콤한 지식여행
아담 리스 골너 지음, 김선영 옮김 / 살림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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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때기  

다른 사람들도 그런 표현을 쓰는 지 모르겠지만, 흔히 모든 이야기의 결론을(혹은 이야기 주제를) 하나로 모아가는 사람에게 '깔때기'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 책도 그런 깔때기 중의 하나다. 오직 과일이라는 하나의 소재로 시작한 이야기는 무수한 갈래로 풀어진다. 오로지 과일만을 먹는 과일주의자와 과일수집가, 과일탐정이 등장하고 과일전쟁과 유전자 조작, 과일에 대한 마케팅과 음모론까지 나온다. 거의 먹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희귀한 과일의 이야기도 나오고 누구나 한번쯤은 먹어보았을, 아니면 늘상 먹고 있는 과일도 등장한다.

과일에 대한 편력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과일에 대한 전문가들의 인터뷰와 저자인 아담 리스 골너의 취재와 연구, 그리고 과일을 언급한 각종 문헌도 볼 수 있다. 깊이있게 다루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과일에 대한 거의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술자리(혹은 그외의 이야기 자리)에서 깔때기는 사람을 피곤하게 또는 짜증스럽게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런 깔때기라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깡통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 경우 과일에 대한 추억의 장소는 과수원이 아니라 병원이다. 엄마를 따라 누군가의 병문안을 가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억새게 운이 좋으면 바나나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운이 없더라도 깡통에 담긴 백도나 황도 복숭아, 아니면 깐 포도가 담긴 통조림도 좋았다. (별로인 경우는 좀 나중에 등장한 귤 알갱이가 가득한 '쌕쌕이'였고 아주 나쁜 경우는 캔에 담긴 토마토 주스가 나오는 경우다.) 

그렇지만 커가면서 맛있는 과일은 바로 제철 과일이란 사실, 그것도 수확의 현장에서 바로 먹을 수록 맛있다는 것쯤은 알게 된다. 하지만 몇 해 전 장인어른 집에서 키우는 복숭아 나무에서 딴, 아이 주먹만한 복숭아를 먹었을 때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그 뒤로 되도록이면 복숭아를 딸 무렵 내려가보고는 하지만 어째 처음 맛보다는 못하다. (장마가 끝난 다음 비오기 직전 아주 짧은 시기에 따먹는 게 제일 맛있다고 장모님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 시간을 맞추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지만 거의 모든 과일은 운반하기 쉽고 보관이 간편하며 제일 맛있는 시점이 아니라 일정한 당도를 유지하기 편한 종자로 거듭거듭 개량되고 있다. 맛의 질만이 아니라 맛의 다양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으니 우리가 마트에서 사게 되는 과일은 어쩌면 깡통에 담기지만 않았을 뿐이지 대량재배, 수확, 유통되는 통조림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맛 

사실 입맛만큼 다양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식객'과 같은 이야기들에 자주 등장하는 요리대회는 좀 그렇다. 전주의 비빔밥과 안동의 헛제사밥을 같이 놓고 평가하는 것도 불가한 일이지만 어머니가 해준 밥과 요리사의 밥을 놓고 평가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다. 맛은 철저히 주관적이며 때와 장소, 전후의 느낌, 아우라라 부를 수 있는 것이 함께 모여진 특별한 경험의 산물이며 그렇게 기억에 자리잡는다.  

이 책의 저자 또한 서두에 8년 동안 사귀다 헤어진 애인과의 이별이 과일 편력의 출발이었음을 밝힌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저자의 '과일 사냥기'일 수도 있지만 '과일이 저자를 사냥한 기록'일 수 있다. 사람이 아무리 맛을 찾는다고 한들 참맛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어쩌다 만나게 된 기막힌 맛을 경험하면 마치 그게 나를 찾아온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과일을 통해 무르익어 가는 저자의 모습도 흥미롭다.  

 

부록 

     

코코 드 메르(coco de mer)라는 과일이다. 이 책에서 한 장을 할애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외설적인 생김새와 함께 신비한 역사를 갖고 있는 과일이다. 이 과일의 이름을 딴 여성 속옷 브랜드도 얼마 전에 생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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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 재현의 문제와 다른 철학자들
윤성우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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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물은 그것의 해석 가능성을 통해 예술이 된다.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 것 혹은 해석이 필요 없는 것은 예술이 될 수 없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예술앞에 선 철학자>  
   

 

   
  존재는 "모든 개체화하는 차이들"로 말해져야 하기에, 즉 오직 고유하게 하나의 바로 그것임으로만, 차이성으로만, 결국 특이성으로만 말해질 밖에 없다는 것이다. (p85)   
   

 

   
  사유함이란 언제나 해석함이다. 다시 말해 한 기호를 설명하고 전개하고 해독하고 번역하는 것이다. -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X를 본다는 것은 이미 그것을 무엇으로 짐작하는 것이며, 분류하는 것이며, 심지어는 무엇으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98)   
   

 

재현(representation)은 예술이론 분야에 오랜 테마로 알고 있다. 인식론에서는 '표상'이라고 한다. 또 마르크스 주의 혁명이론에서는 노동계급을 당이 대표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논쟁도 있었단다. 



르포와 인터뷰를 하며 많은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 이랜드, 기륭 등 장기 파업 노동자들, 용산과 같은 재개발 피해자들, 병역거부자들, 성소수자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옮기고 기록하게 된다. 이러한 기록이 그들의 목소리를 온전하게 전하는 것이 될 수 있을까? 재현의 의미와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고민 속에서 이 책을 만났다.  



책은 들뢰즈를 중심으로 하이데거, 푸코, 베이컨, 굿맨, 바슐라르 등 다양한 철학자, 예술이론가들의 재현 이론을 다루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재현이란 재해석이며 재발견이고(이어야 하며), 재현의 지향점은 해석의 실천적 차원까지도 포섭하는 것이어야 한다.  



해석의 실천적 차원까지도 포섭하는 재현이란 무엇일까. 존재하는 대상,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 그 속에서 존재의 의미,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이들과 만나고 대화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의 무엇을 발견하고 변화(개선?)의 지점을 모색하는 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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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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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어느 봄날 이딸리아 또리노에서 쁘레모 레비(Primo Levi)라는 이름의 화학자이자 문학가가 자살했다. 일흔을 앞둔 나이. 유대인으로 태어나 반파시즘 저항운동에 가담했던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살아 돌아온 몇 안 되는 생존자 중의 한명이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은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는 증언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는 왜 죽음의 벼랑 끝에서 살아 돌아와, 그것도 40년도 더 지난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1996년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도쿄경제대학에서 교수가 된 서경식은 가슴 속에 이러한 의문을 품고 이딸리아로 건너가 그의 무덤을 찾는다. 그가 쁘레모 레비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서울로 유학을 간 그의 두 형, 서승과 서준식이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으로 9년째 옥살이를 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큰형 서승은 모진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할까 두려워 난로를 껴안고 분신자살을 시도한 끝에 온몸에 중화상을 입어 엄지발가락으로 지문날인을 해야 했으며 작은형 서준식은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형기를 마쳤음에도 감옥에 갇혀 옥중테러를 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암에 걸려 6개월 시한부 진단을 받은 어머니를 간병하며 쁘레모 레비가 전하는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읽어 내려갔다. 
 

아우슈비츠의 잔혹함을 어떻게 글로 다 옮길 수 있을까. 객차 양쪽 문을 열어 이쪽 문으로 내리는 사람은 가스실로 다른 쪽 문으로 내리는 사람은 수용소로 보내졌던 곳, 말 한 마디에 생사가 엇갈리고 신발과 외투가 생사를 결정지었던 곳, 7톤의 머리카락과 100만 벌의 의복들이 쌓였던 곳, 유대인을 비롯해 장애인, 성소수자, 집시 등 최소 250만명이 가스실에서 죽었고 50만명이 추위와 굶주림, 질병 속에서 죽어갔던 곳. 
 

거기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와 끊임없이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이라는 부끄러움 사이에서 고민하고 번뇌해야 했던 쁘레모 레비에게 닥친 현실은 잔인한 것이었으리라고 서경식은 전한다.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다. 홀로코스트로 인해 만들어진 이스라엘이 또 다른 모습의 학살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독일의 수정주의 역사논쟁-잘못은 독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이 시작되었다. 쁘레모 레비는 이스라엘이 파시즘적 방향으로 가는 것에 비판적 입장을 취해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86년 이른바 “가스실은 없었다”는 황당무계한 아우슈비츠 부정론을 접했을 때 레비가 어떤 비판을 할 수 있었을까? 
 

2010년 오늘, 이스라엘은 다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00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던 한국전쟁은 어떠한 성찰도 없이 다시금 자유를 위한 전쟁으로 기념되고 있다. 쁘레모 레비는 히틀러 치하 독일에는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하지 않는” 불문율이 널리 퍼져있었다고 한다. 우리도 혹시 비슷한 불문율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에 대해, 학살에 대해, 그리고 평화에 대해 말하고 질문하고 함께 답을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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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송두율, 이 거대한 질문 / 우석훈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
송두율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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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지난해 어느 다큐 감독으로부터 '송두율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곧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경계도시2>라고 했다. 솔직히 <경계도시1>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송두율이라는 이름은 마치 금기의 언어인 것처럼 내 몸 어딘가를 찌릿하게 했다.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래는 <경계도시2> 공식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SYNOPSIS
2003 년, 재독철학자 송두율 교수는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황에서 37년만의 귀국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는 열흘만에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간첩’으로 추락하고, 한국사회는 레드 컴플렉스의 광풍이 불어온다. 그리고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친구들조차 공포스러운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6년이 흘렀다. 2003년 그는 스파이였고, 2009년 그는 스파이가 아니다. 그때 그의 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한국사회는 그때와 얼마나 다른가?

DIRECTOR’S NOTE
Dynamic Korea, 한국사회는 여전히 숨 가쁘다. 그렇게 사건으로부터 6년이 흘렀고, 사건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지나버린 과거 사건일 뿐이라면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리고 우리는 그때로부터 과연 얼마나 멀리 왔는가? 송두율 교수 사건을 통과하면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스스로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은 힘겨울 수밖에 없다. 무엇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우리를 움직이는지... 이 영화가 한국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내면의 거울이 되기를 희망한다.

[출처] [경계도시 2] 작품정보|작성자 bordercity2 


#7.
몇 해 전 출판사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를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적 있다. 나였는지, 그 자리에 다른 누구였는지 모르겠지만 후마니타스에서 낸 책들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책이 무었인지 물었고 그 대답이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라는 책이었다. 첫 장을 펼치자 책은 2003년 여름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가 귀국했을 무렵,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던 중 '노동당 입당', '북한 정치국 위원'이란 말들이 언론에 등장했을 때, 한 강연장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라고 강요받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독일 국적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다시 한 번 허탈했을 때, 그의 부인과 아들이 구명운동을 하고 다니는 것을 지켜봤을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고백하자면 나또한 그와의 '비판적 거리두기'라는 허울좋은 명분 아래 그저 광기를 피하고, 혹은 마녀사냥을 외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6.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1부는 구속 이후 심경을 메모형식으로 담고 있는 '한 경계인의 비망록'이며, 그가 한국에 머물렀던 2003년 가을부터 2004년 여름까지 썼던 강연문(그러나 끝내 발표되지 못한 강연문도 포함되어 있다)과 편지글, 재판 과정에서의 최후진술 등을 담은 것이 2부다. 3부는 그가 독일에 돌아온 이후 사회와 철학, 통일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이고, 4부는 박상훈 대표와의 대담이다. 

#5.
그리고 부록으로 '사태 전개의 기록'이 붙어 있는데, 여기서 나는 '송두율 사건'의 이해를 위해 이 부록을 먼저 짧막하게 요약하고 싶다. 

- 송두율 교수는 2003년 9월17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국정원에 자진출두, 이후 네 차례의 조사를 받는다.  
- 9월30일 국회에서 정형근 의원이 송두율 교수는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자백했다고,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이 사건이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 간첩 사건'이라고 언론에 공표했다. 
- 10월14일 송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노동당 탈당, 독일국적 포기 등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 10월22일 송 교수는 서울구치소에 입감되었고 2004년 1월까지 그의 스승이자 저명한 철학자 하버마스, 노벨문학상 수상자 권터 그라스 등이 탄원서를 제출했다.
- 2004년 4월13일 국제엠네스티는 송 교수를 양심수로 지정했다.
- 7월21일 2심판결에서 일부 무죄 및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으며 광주 망월동과 그의 고향 제주를 방문한 뒤 8월5일 독일로 출국했다. 

#4.
그는 국정원 조사를 각오하고 귀국했다고 했다. 물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간단하고 형식적인 조사라고 했지만 그러하더라도 이러한 조사를 거부하며 끝내 귀국을 거부했던 윤이상 선생에 비춰 국정원 조사를 받아들인 그에게 나는 약간의 실망감을 가졌다. 그런데 4부 대담을 보면 사실과 다르다.   
"조사에 응하려 했다면 그전에 벌써 한국에 갔겠지요. ... 국정원과 기념사업회가 그렇게 하기로 했다며 입국 시 공황에서 내게 요구했던 것이었을 뿐입니다."
당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얼마나 그를 모시고 싶었는지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던 나는 그의 말에 무게를 두고 싶다.
어쨌든 결코 간단하지도 형식적이지도 않은 국정원의 조사 가운데 그는 1973년 북한 입국 시 노동당에 가입하는 서류를 작성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말이 보수 정치인과 언론을 통해 툭 튀어져 나왔다.
이 때부터 과연 그는 정치국 후보위원인가 아닌가, 그가 거짓말을 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젊은 날 북한에 입국하며 노동당에 가입했다는 말을 스스로 밝히지 않은 것의 연장선 상에서 그를 못 믿을 사람이라고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송씨에게 실망... 국민에 보다 진솔해야" , "송씨 친북행위, 민주화운동 욕되게 해"... 보수 정치인의 말이 아니다. 김근태, 장기표의 발언이다. '좌파 지식인의 배신', '사상적 간통'... 물론 보수 언론의 경우 더욱 심했지만 국가보안법을 없애라고 요구해온 이른 바 개혁진영, 진보진영에서의 이같은 태도는 또한 놀라웠다. 이들이야 제도권 정치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작가 황석영이 그를 찾아가 "공개적으로 전향할 뜻을 발표하고 대국민 사과를 하고 영구 귀국 의사를 표명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국정원의 전향공작 전담반이 아니라 한국사회 존경받는 작가가 말이다.
국가보안법 체제,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자신이 속한 정치조직을 미리 말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되는 사회였다. 형법 어디를 뒤져도 거짓말이 죄라고 써있지 않지만 적어도 북한과 관련되어 거짓말을 한 사람은 죄값을 치뤄야 한다.
결국 재판에서 그가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부분은 무죄가 선고되었다. 독일국적을 가졌던 그가 북한에 들어간 것도 죄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죄는 단 한 가지, 북한을 좋게 이야기하고 남한을 헐뜯었다는 것. 그건 이미 그의 저술활동을 통해 이미 드러나있던 것이었다.  

#3. 
3부 '다시 경계의 공간을 열며'에서 그는 경계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경계선은 원래 전투적 개념이다.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선으로서 공격과 방어를 가르는 배타적 개념이다. ... 그러한 경계가 선이 아니라 면이나 공간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경계면이나 경계공간은 이미 이쪽과 저쪽 사이에 자리 잡을 수 없는 제3의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로 배타적인 이쪽과 저쪽은 대체로 이러한 제3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려 들거나 아니면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불안해하기도 한다."
"0과 1 사이에는 무수한 가치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제3의 무엇을 인정하는 이러한 태도는 불확실성이나 애매성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그것도 당장에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논거는,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의 헛소리거나 아니면 중간에서 미적거리는 기회주의자의 억지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경계인'이 때로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2.
그는 이 책 서문 말미에 이렇게 썼다.
"야만과 광기가 무섭게 휘몰아쳤던, 너무나도 낯선 땅에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바쳐 남편과 아버지를 지켜냈던 아내와 두 아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1.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송두율 교수가 일상의 철학적 주제를 엮어 만든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고 그에 대한 긴 편지를 받았다.
" (2004년 독일로 돌아간 뒤) 지난 2년 반 동안 선생님 문제에 대한 논의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송두율 사건'은 선생님의 출국과 더불어 사회적 공론의 의제에서 갑작스럽게 실종되어 버린 겁니다. .. 모든 논의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 결국 2003년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약 10개월, 그리고 그 안팎의 시기를 추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기록'을 다시 접하면서 과연 이 땅에서 지식인이라 부를 만한 여지가 얼마나 남았나 하는 회의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권력의 핵심은 망각하게 하는 것이라며 기억하기 위한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우리는 그 평범한 진리조차 실천해 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 그래서 이번 책이 '침묵과 망각의 카르텔'이라 부를 만한 그간의 상황에 대해 뭔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0.
며칠 전 윤구병 선생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을 들었다. 거기서 철학하는 일은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또한 묻지 않으면 답할 수 없다고 했다. 혹시 나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제대로 된 답만을 구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깨우치기 위해서는 들어야 하고, 듣게 위해서 물어야 하고, 묻기 위해 제대로 된 물음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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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0-03-12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개봉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ㅎㅎ
 
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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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이란 부제가 붙은, "치즈와 구더기"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책.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재미있다. 16세기 마녀사냥과 종교개혁의 틈바구니에서 우주는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이 탄생하여 신과 인간이 비롯되었다는 독특한 세계관을 가졌던, 그래서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몰려 죽어야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다. 
 
미시사 쪽에서는 유명하다는 카를로 진즈부르크는 그의 종교재판 기록을 분석하며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가 읽었을 법한 책, 그의 사고가 어떻게 발전되고 깊어졌는지를 소설처럼, 평전처럼, 또는 르포처럼 엮었다.  

그 가운데 16세기 글을 읽을 줄 알았기에 금단의 영역을 넘보았던 한 인간,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생각한 것을 이야기한 죄로 이단으로 몰려 가정이 파탄나고 죽음에 이르러야 했던 사람, 그러면서도 신념을 버릴 수 없었던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는 수 세기를 건너뛰어, 이탈리아에서 이곳 한국에서 만날 수 있었다.  


P.S 진즈부르크의 다른 책들도 어서 번역되길 기대한다. 요즘들어 부쩍 이탈리아 쪽 작품에 관심이 가는데 거의 번역되어 출간된 책이 드물다. 한국의 출판계는 편식이 너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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