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찍고 또 노래하리

MB 5년을 카메라에 담은 칼라TV 프로듀서 처절한 기타맨



춥다. 겨울 아침 문을 나서면 무심결에 튀어나오는 말인데 요즘 이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 혹한의 날씨에 어쩌자고 철탑 위로 올라간 노동자들 때문이다. 아니다.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두 사람, 김주익과 정은임 때문이다.


“새벽 3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고.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 2003년 10월 17일 방송에서



인터넷 방송 PD, 다큐멘터리 감독, 그리고 뮤지션


2012년 12월 9일 오후 2시, 영하 8도까지 내려간 강추위 속에서 서울 시청광장으로 독립뮤지션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철탑에 방한용품 보내기 노란봉투 공연’이란 제목의 6시간짜리 거리 공연을 위해서다. 경기도 동두천과 평택에서, 충남 아산에서, 울산에서 철탑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자며 만들어진 자리다.


먼저 도착한 이들은 처음 공연을 제안했던 가수 백자와 그의 펜클럽, 그리고 발전기를 돌리고 음향을 손보느라 여념이 없는 ‘처절한 기타맨’(김일안, 44세)이다. 인터넷 방송 칼라TV 프로듀서, 한국독립영화협회 회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명동성당과 청계천 전태일 다리 그리고 각종 투쟁현장에서 노래하는 뮤지션, 처절한 기타맨과의 인연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삶이보이는창 르포문학교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깡마른 체격에 꽁지머리를 한 그는 글쟁이보다는 전위예술가가 더 어울려보였다. 술자리에서 “소싯적에 일본에 밀항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던 것 같다. 알고 지낸지 6년이 넘어가는데 그에 대해 별로 알고 있는 게 없다. 그를 만난 첫 번째 이유다.


인터뷰를 위해 장장 여섯 시간을 추위에 떨다가 공연을 마치고 칼라TV 사무실이 있는 합정동 한 막걸리 집에 마주 앉았다. 그런데 웬걸? 지극히 평범한 ‘학출’이란다.


“학번 물어보는 거, 대학 때 화염병 운운하며 무용담하는 거 정말 싫어한다고 꼭 써줘요. 얼마 전에도 무슨 술자리에서 어느 대학 CA출신 모임이 있다며 무용담을 하는데 옆에 사노맹 출신 한 명이 그러더라고. 난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는데 쓰발~. 일본 밀항은 누가 그래요? 내 입으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이래서 문제야. 돈 벌러 브로커 통해서 갔죠. 불법체류. 1년도 못 채우고 누가 찔러서 추방됐고.”


집이 좀 살았던 덕택에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고 그래서 클래식을 즐겨 들었던 사춘기 소년. 파스퇴르와 파브르를 좋아해 생물학자를 꿈꿨고 고3 때 ‘들국화’의 <행진>을 듣고 밴드를 하고 싶었던 청년. 1987년 항쟁의 해에 대학에 들어갔지만 사회과학 서적보다는 이외수의 소설에 탐닉했던 그는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고 제대를 하고 친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가면 빠징코장에 취직을 시켜준다고 해서 보름짜리 비자로 갔는데 가보니 자리가 없다고 그래요. 사기당한 거지. 운이 좋아서 친구 아버지가 있던 공장에 취직을 할 수 있었죠. 아마 그 시절에 자본주의가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학습을 하게 된 것 같아. 돌아올 때 한 100만 엔 정도 모았나. 엄마한테 줄 전기밥통하고 전자기타 하나 사가지고 왔죠.


복학하고 야학도 하고 알바로 노가다도 하고 그러다 졸업할 때가 됐는데 머리 깎는 것도 싫고 양복도 입기도 싫어서 이벤트 업체에 들어갔어요. 군대에 있는 드럼 치는 친구가 제대하면 밴드를 하기로 해서, 기다리면서 틈틈이 다큐멘터리 음악작업에 참여하다가 ‘지하창작단 파적’이라는 다큐멘터리 팀 활동도 했고.”


친구가 제대하자마자 다니던 이벤트 회사도 그만두고 결성한 밴드는 여러 이유로 “망했다.” 때마침 IMF가 한국 경제도 거덜이 났으니 먹고살 길이 막막해졌다.


“그래도 알바하며 근근이 버텼죠. 달리 알바라고 드라마 촬영 현장에 깔려 있는 레일 위로 크레인 밀고 달리는 일. 일당 5만 원 정도였는데 한 달에 네다섯 번 나가서 그걸로 먹고 살고. 그 무렵 게임에 빠졌어요. 아는 선배가 피시방을 차려서 놀러갔다가 리니지란 게임을 하게 됐는데 딱 30분 만에 충격을 받아서, 앞으로는 영화가 아니라 게임의 시대다. 그때 나온 아이디가 ‘처절한 기타맨’이에요. 허영만 만화 『고독한 기타맨』있잖아. 근데 그건 누가 벌써 했더라고요. 그래서 뭐로 할까 하다가 처절한 기타맨. 그때 머리가 좀 돌아갔더라면 선배한테 피시방 팔아서 NC소프트 주식을 사라고 했을 텐데.(웃음) 피시방 알바 하면서 음악작업도 하고. 그러다가 막내 동생이 게임에 미쳐서 그것으로 게임 중독을 다룬 다큐멘터리도 하나 만들었죠.”


자, 여기까지가 기타맨의 탄생, 혹은 칼라TV의 전사(前史)쯤 되시겠다. 자리를 옮겨 이번에는 동태찌개에 소주다. 텔레비전에서는 대선 보도가 한창이다.



칼라TV가 기록한 MB 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백년전쟁-두 얼굴의 이승만>과 <백년전쟁 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누가 한국경제를 성장시켰는가>란 영상물이 화제다. 유튜브 조회 수가 100만 건에 육박한다고 한다. 고 김근태 씨의 수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남영동 1985>와 강풀의 만화를 원작으로 5.18 학살자 처벌을 다룬 영화 <26년>도 있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과거를 ‘성공’적으로 청산한 나라로 꼽힌다. 학살자였던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사형을 구형했던 나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라는 국가기구를 만들었던 나라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난 5년간 우리의 과거청산이 얼마나 허술했으며 우리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했는지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기록노동자들의 노조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트위터에 릴레이 성명을 한다고 하기에 멋진 문구를 찾다가 밀란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에 나온 “인간의 권력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이란 구절을 발견하고 용산참사를 다룬 연분홍치마의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이 떠올랐다. 지랄 맞았던 MB정부 5년을 카메라에 담았던 칼라TV의 ‘처절한 기타맨’에게 전화를 걸었던 두 번째 이유다.


“삶이보이는 창 르포문학교실에서 지금은 칼라TV를 그만둔 조피디(조대희)를 만나 민주노동당 영상팀을 도와주게 됐죠. 그때가 민주노동당이 분당될 때였으니까 진보신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 찍게 된 거죠. 당이 만들어지고 총선에 돌입하면서 칼라TV에 본격적으로 결합을 하게 됐고, 총선 직후 2008년 촛불이 터졌고. 촛불 때는 서울 시청 광장에 텐트를 치고 한 달 반을 거기서 먹고 자고 했지. 촛불이 기본적으로 한미FTA 문제였으니까 진보신당 게시판에 정태인 선생이 와주면 좋겠다고 글을 올렸어요. 그랬는데 다음날 바로 오더라고.”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100일간의 시위, 명박산성과 국민토성, 물대포와 ‘온수! 온수!’라는 구호, 폭력·비폭력 논쟁과 깃발논쟁, 다음 아고라와 유모차부대, 광화문에서의 72시간 연속 집회……. 한국 사회운동과 민주주의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기록될 현장을 인터넷 생중계라는 첨단의 방식으로 전했던 칼라TV는 언론을 넘어 촛불시위의 일부분이었다.


“그때 진보신당 홈페이지에 칼라TV 후원 배너를 달아달라고 그랬는데 당에서 일주일 넘게 안 달아주더라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 일주일 사이에만 진보신당으로 후원금이 1억 원 정도 들어왔대요.

6월 6일 72시간 생중계를 하면서 막연히 촛불이 이대로 가다 꺼지겠구나 싶기는 했지. 막막해보였으니까. 마지막 날 장면이 인상적이야. 무대에서는 사회자가 ‘촛불이 승리했다’고 외치고, 뒤편에서는 술판이 벌어지고, 한쪽은 시민들이 전경버스 밀고 있고, 한쪽에서는 음악에 맞춰 춤추고 있고. 그래도 긍정적으로 평가해요. 그것마저 없었으며 MB정부의 남은 5년 동안 더 후퇴했겠지. 나는 촛불이 구운동권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 거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지금 좌파의 상황이 그때부터 예견된 것이기도 하고.

촛불이 한창일 때 촛불 말고 다른 데를 찍어보자고 해서 작전을 짰어요. 칼라TV를 보는 사람들이 운동권, 노동운동에 대한 거부감이 많아서 매우 조심스러웠거든. 처음에 인천에 화물연대 파업하는 데 갔고 그 다음에 기륭을 갔지. 당연히 말이 많이 나왔어요. 그런 데를 왜 가냐? 그래도 나중에는 촛불과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함께 이야기가 되기도 했지.”


촛불시위가 끝나고 칼라TV는 진보신당과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당에서 독립해 좌파 언론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지엠대우 비정규직지회 천막농성, 강남성모병원 촛불시위, 기륭전자 농성장의 용역 침탈 현장 등을 누비던 칼라TV는 2009년 1월 19일 용산으로 간다.


“월요일이었는데 월요일 저녁마다 나는 명동성당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어요. 그날 공연을 마쳤는데 용산 철거투쟁 현장에서 화염병이 나왔다고 하더라고. 나는 몸이 안 좋아서 집으로 갈까 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교대해줘야 하니까 사무실에서 잠을 잤죠.

내가 예지몽을 좀 꾸는데 그날도 꿨어요. 바닷가인데 유원지에 천막을 치고 서커스를 하는 거야. 들어갔더니 너무 시끄러워서 못 있겠더라고. 그래서 바닷가를 걷고 있는데 하체는 거미, 상체는 사람인 예닐곱 되는 생명체들이 나한테 오더니 같이 가자고 하는 거야. 그런데 얼굴이 숯검댕이같이 까만 거야. 난 가기 싫다고 실랑이를 하다 눈을 뜨는 순간 애들이 사람이 죽었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새벽에 교대하러 가서 시신들 나가는 걸 찍었죠. 연행당하는 사람들 찍고.

남일당 망루에서 불이 나던 순간을 찍었던 박성훈은 아직도 망루에 불길이 확 올라와서 그 열기에 카메라를 들고 물러섰던 그때를 꿈에서 꾼다고 하더라고. 나도 그날 시신이 나가던 모습, 그날 꿈은 평생 못 잊을 거 같아요.

희망버스 촬영하러 내려갔다가 연행된 적이 있는데 그날 아침에도 사나운 꿈을 꿨어요. 쌍용자동차에서는 구사대에 맞은 적이 있는데 그때 기억도 오래 남지. 두들겨 맞은 것 말고 쌍차 마지막 진압 때였는데 정말 이상한 공간이었어요. 헬기가 뜨고 아수라장인데 이상하게 고요하고 적막이 흐르는 것 같은.”


어쩌면 칼라TV는 카메라 너머 23명의 죽음이 어렴풋이 보였던 것은 아닐까. 현장을 기록하는 일은 목격을 하고 증언을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건을 재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상처자국을, 사건의 이면을 끊임없이 들춰봐야 하는 일.


“많은 사람들이 칼라TV의 역할이 중요하고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고 해요. 그런데 현장에서 답을 찾기가 쉽지 않죠. 현장에서는 프레임으로 보게 되잖아요. 전국의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을 쭉 돌아다니며 찍는데 그것을 찍어놓은 영상이, 현장이 다 똑같은 거야. 시작할 때 묵념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고, 투쟁사 하고, 민중가수 나와 노래하고, 연대사, 몸짓패 공연……. 카메라가 아니라 프레임 밖에서 보면 분명히 차이, 다름이 존재하는데 그건 적어도 한두 달 현장에서 눌러 앉아서 기록해야 영상에 담을 수 있는데 칼라TV는 스쳐가면서 찍을 수밖에 없거든요. 현장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더 깊이 들어가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재정이나 여러 조건이 쉽지 않죠.”


2009년 3년 넘게 기륭전자 투쟁을 영상으로 기록해오던 김천석 씨가 목숨을 끊었다. 2011년에는 ‘숲속홍길동’이라는 예명으로 유명했던 영상 활동가 이상현 씨도 생활고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이 두 죽음을 계기로 2012년 3월 ‘현장을 지키는 힘을’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천석이 죽었을 때 정말 힘들었죠. 정말 똘똘한 친구였는데……. 죽기 얼마 전에 자기가 찍은 영상을 피디수첩에 제공해서 그 돈으로 노트북을 샀어요. 나한테 자기도 이제 칼라TV처럼 인터넷 생방송을 할 거라면서, 칼라TV는 너무 편파적이라고 농담하고 그랬는데.”


원래 계획대로라면 2012년 총선에서 진보신당이 자리를 잡고 칼라TV도 안정되면 개인적인 다큐멘터리 작업과 음반 작업을 하려 했다고 한다. 물론 오늘도 그는 공중파 TV에서는 볼 수 없는 대통령 후보 김소연, 김순자의 일정을 좇으며 틈틈이 거리 공연을 하고 있다.


“나이 60을 먹고 머리가 하얗게 됐을 때도 한 달에 한 번 전태일 다리에서 노래해야죠. 최근에 토지, 임꺽정을 읽었는데 결국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피 값으로 이만큼 나아진 거잖아요. ‘괜찮아, 어차피 잘 안 될 거야’라고 우스갯소리로 노래하기도 하지만 결국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 사람들의 힘으로 세상은 나아지고 있고 칼라TV도 나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술집을 나오니 역시 날은 찼고 술 마시는 내내 그는 외로워보였다. 그래. 추우면 춥다, 외로우면 외롭다 말하자. 그래야 추운 사람끼리 외로운 사람끼리 손도 잡고 어깨도 걸 것 아닌가.  






- 삶의보이는창 1-2월호


댓글(3)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타맨 2013-01-24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약간 틀린 부분 올려봅니다. 지하창작집단 '파적'은 극영화 만드는 집단이였구요.
칼라TV 시작전에 민주 노동당 소속의 영상팀이 아니고
조피디랑 자발적으로 분당때 마지막 당대회등을 찍었고,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 힘을 이고요. 명동성당 앞 '들머리'에서 거리공연(월)
전태일 거리는 한달에 한번이라(도)...걱정하지마! 어차피 잘안될거야,고...
김순자 선본은 결국 못찍었고 김소연 선본만 주로 찍음
요샌 외로움 < 괴로움 이 더 큰 듯

나무처럼 2013-01-14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S까지 해주시는 친절한 기타맨, 감솨^^

kmk 2013-02-06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기조직동두천경찰 폭파 daum qkmk
 

일천구백팔십팔년, 그야말로 쌍팔년도 이야기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반실에서 담배 피우는 선배들을 동경한 탓에 덜컥 들어갔던 문예반. 책꽂이에 꽂혀있는 교지를 빼들었는데 맨 뒤에 실린 편집후기 중에 인상적인 것이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다."


다음 해 내가 교지를 만들고 보니 그 심정이 이해되었다. 


그때만 해도 충무로 골목 여관방을 잡고 교정을 봤다. 두꺼운 종이에 기름 종이 같은 게 덧씌워져 있어 거기에 교정 부호를 그려넣는 작업. 갱지를 반으로 접어 손수 가제본을 하고. 


처음부터 끝가지 수작업이 병행된 교지는 그야말로 자식 같은 느낌인데 어느 누구도 그렇게 소중히 다룰 것 같지 않은 느낌... 


그 뒤로 15년 쯤 뒤에 잡지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잡지가 나오면 불쑥 보이지 않던 오탈자가 눈에 들어온다. 아니 가시처럼 박힌다. 


잡지를 만들며 표지갈이를 한 번, 낱장 갈이를 한 번... 그 뒤로 나는 나를, 내 눈을, 내 두뇌를 믿지 못한다. 교정교열 실력이 하도 형편이 없어 심각하게 나란 인간에 대해 고민한다. 


왜 순간에 충실하지 못한가? 왜 이리 대충대충인가? 


출판사로 직장을 옮긴 요즘에도 마찬가지다. 정말 공들인 책을 얼마 전에 출간했는데 오늘 버스에서 문득 심각한 오자를 발견했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독자에게, 저자에게, 책에게, 인쇄 노동자에게, 심지어 이 책을 찍어내느라 굉음을 질렀을 인쇄기에게도 미안하다. 


내가 쓰는 글이 그렇듯 내 삶이란 결국 오류를 범하는 것, 오점을 생산해내는 것인가... 누구는 엄살이라고 오바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되풀이된다는 것... 삶이란 한없이 가볍기도 하지만 때론 한없이 무겁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떠날 수 없는 사람들』(김성희 외 5명, 보리, 2012)

『가난의 시대』(최인기, 동녘, 2012)

『보이는 용산, 보이지 않는 용산』(김일태 외 5명, 마티, 2009)

 

 

기자가 찾아왔다. 기자는 두리반을 열 때 얼마가 들었냐고 물었다. 건설사가 제시하는 배상액은 얼마였냐고 물었다. 기자의 물음은 후졌다. - 유채림(두리반 철거민, 소설가)

 

 

2009년 1월 19일 철거민 삼십여 명이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 올라 망루를 지었고 그 다음날인 1월 20일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특공대 한 명이 주검이 되어 내려왔다. 그해 여름 나는 회의를 하러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순천향대학병원에 갔다. 병원 영안실 5층은 고인이 된 철거민 다섯 분의 빈소이자 유족들과 용산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 지명 수배자들이 머물던 곳이었다. 담배를 피울 때면 창문 너머로 용산 미군기지 운동장이 내려다보였다. 어느 날은 서양 아이들이 거기서 야구를 하기도 했다. 하루는 회의를 마치고 전철연, 당시 여당 국회의원의 말을 빌리면 “죽음을 팔아 장사를 해먹는 사람들”과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일행 중 누군가가 무심히 자신의 부모님 동네도 재개발 구역이 되었다는 말을 꺼내자 철거민 한 명이 “그냥 얼마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나와요.”라며 농을 쳤다. 다른 철거민은 “아이고, 부족하면 제가 보태겠습니다, 하고 나오는 게 상책이죠.”라며 한 술 더 떴다. 다들 헛헛한 웃음을 웃고 먹던 밥을 마저 먹었다.

그 무렵 많은 이들이 용산참사 현장만큼이나 순천향대학병원을 찾았다. 그 중에는 한 무리의 만화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유족들을 인터뷰했다. 그렇게 해서 용산참사 1주년에 『내가 살던 용산』(김성희 외 5명, 보리)이란 만화책이 나왔다.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났다. 그 사이 국무총리가 유족들을 찾아와 사과하고 장례도 치렀다. 생존자들은 징역을 살러 감옥으로 갔고 부상자들은 아직도 치료를 받거나 수술에 재수술을 거듭하고 있다. 참사 현장인 남일당 건물은 허물어졌고 지상 40층짜리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라던 그 자리는 주차장이 되었다. 하루 늦어질 때마다 500만 원씩 지체보상금을 물도록 계약했던 그 ‘다급한’ 공사는 여전히 굼뜨기만 하다. 용산 유족들의 이야기로 만화를 그렸던 작가들은 또 다른 용산을 찾아 나섰다. 그 책이 바로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용산을 지키는 사람들

 


서울 용산구 신계동, 고양 일산구 덕이동, 부천 원미구 중3동, 성남 수정구 단대동, 서울 동작구 상도4동……. 도처에 있는 ‘용산’은 눈물겹다. 자신이 거둬들인 길고양이와 딸이 키우던 햄스터까지 용역깡패에게 죽임을 당하고, 집도 허물어져 이제 더는 잃을 것이 없어진 뒤에야 거짓말처럼 가슴통증이 나아졌다는 정아 엄마는 자신의 집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e편한 세상’ 아파트 앞을 아직도 떠나지 못한다(유승하, ‘니 편한 세상’). 용산 망루를 지을 때 힘을 보태려 함께 올랐다가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3년째 징역을 살고 있는 김창수 씨. 그의 아내 수영 씨와 아들 은찬이, 은수는 매일매일 악몽과도 같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여기도 용산처럼 누가 죽어 나가야, 우리가 죽어야 관심을 가져줄까요?”라고 묻는 수영 씨의 동료는 전기까지 끊겨버린 천막에서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나지만 떠날 곳을 찾지 못한다(김홍묘, ‘갈 곳이 없다’). 어엿한 가구업체 사장님에서 하루아침에 세 딸과 함께 철거민으로 전락한 덕이동의 마지막 철거민 김명자 씨. 그녀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작가는 “나는 지금껏, 이런 나라에서 살고 있었던가?”라며 탄식하지만 그 나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세계”이기에 페이지는 온통 새카맣게 칠해졌다(심흥아 '그 길 옆에').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용산에서 이 나라 공권력이 벌인 잔인무도함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가려졌던 또 다른 용산, 수많은 용산에서 여전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떠날 수도 물러날 곳도 없는 이 처절한 싸움의 기록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존엄은 결코 철거될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만화라는 장르의 특성을 살려 어렵지 않고 지루하지 않게 인간의 역사에서 토지소유의 불평등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심화되었는지(김수박, ‘땅따먹기’), 한국 사회에서 철거와 재개발의 역사와 그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꿈결같은’, 김성희). 오늘날 철거민의 현실과 주거권의 이해를 위해 이 책 한 권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들은 누구이며 여기는 어디인가

 


순천향병원 장례식장 앞마당, 비닐하우스로 지어진 분향소 옆 상황실에서 최인기는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20년 동안 전국노점상연합과 전국빈민연합에서 활동했던 빈민운동가다. 용산참사 후 그는 “시대별로 도시빈민운동의 주동력이었던 철거민운동과 노점상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이 과정 속에서 사라져간 열사들의 희생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짚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곧 인터넷 언론매체 <참세상>에 ‘우리사회 빈문운동사’라는 연재를 시작했고 『가난의 시대』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였다.


1부 ‘대한민국 도시빈민운동사’는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각 시대별로 도시빈민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도시빈민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또한 그동안 민주화운동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1960년대 광주대단지 사건과 1970년대 무등산 타잔 사건, 1980년대 상계동 투쟁과 같은 사건들이 전체 빈민운동의 흐름 속에서 조망되고 있다. 그리고 이재식, 최정환, 이덕인, 최옥란 열사 등 빈민운동 가운데 목숨을 잃었던 이들의 삶과 죽음이 빈민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무슨 숙제를 남겼는지도 정리해놓았다.


2부 ‘도시빈민운동, 어디로 가야하는가?’는 현재 도시빈민의 현황과 주거정책, 그리고 철거민운동과 노점상운동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다룬다. 시대 상황과 운동의 발전에 따라 분화되었던 빈민운동 조직의 변천사와 함께 사회변혁 운동에서 철거민과 노점상의 계급적 지위는 과연 무엇인지, 이들은 어떤 역할을 요구받았으며 또 감당해왔는지에 대한 분석은 한국 사회운동이, 그리고 그 한 축으로서의 빈민운동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한 운동가의 활동경험에 바탕을 둔 기록인 만큼 다분히 주관적인 평가와 해석, 많은 논쟁거리를 안고 있다. 또한 빈민운동으로 조직조차 되지 못했던 전쟁고아나 행려병자, 넝마주의, 그리고 IMF 이후 등장한 홈리스 운동이나 이주민 운동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이 책이 철거민과 노점상을 중심으로 한 도시빈민운동사란 점에서 이런 허물을 저자에게 돌릴 수는 없다. 다만 도시빈민, 더 나아가 배제되고 가려진 채 그 존재마저도 부정당하는 무수한 사람들에 대한 폭 넓고 깊이 있는 기록과 연구가 이 책을 계기로 꾸준히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펴낸 『보이는 용산, 보이지 않는 용산』은 흥미롭다. ‘서울학모노그래프’(모노그래프는 하나의 사회적 단위를 구조적, 다차원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시리즈의 두 번째로 역사학, 사회학, 도시행정학, 조경학, 도시공학,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이들의 눈으로 바라본 용산이야기가 담겨 있다. 조선시대 물자가 모이는 요충지였던 용산이 일본인에게 점거당하는 과정과 그 가운데 현지민의 저항, 러일전쟁을 명분으로 용산에 대규모 군사기지가 들어서게 된 사연(양승우 ‘일제시대 일본인의 용산 점유과정’), 미군기지와 철도로 인해 단절되고 파편화된 공간으로서의 용산을 어떻게 재편할 것인가의 문제(김한배, ‘보이지 않는 경관, 상흔에서 희망으로’), 용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발이 사유화될 위험에 대한 지적(서우석, ‘용산개발의 사회학’)과 이태원의 이슬람 음식점을 통한 도시공간의 미시적 분석(송도영, ‘음식 문화의 영토성을 통해 본 이태원 공간의 문화적 다원화’)까지 용산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장소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특히 용산참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용산 개발 과정에서 제트리피케이션(도시 빈곤계층이 많이 사는 지역이 개발되면서 부유한 계층이 유입되고 땅값이 올라 빈곤층이 내몰리는 현상)을 우려하는 부분은 마치 참사를 예견한 듯하다. 그러하기에 “남산과 한강이라는 서울의 지배적 자연환경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자 “근현대사의 상흔들을 압축적·중측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지역”(40쪽), “20세기 근대사의 왜곡으로 폐쇄와 단절과 분열의 도시구조를 떠안게 되었던” 용산이 “총체적 단절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64쪽)는 구절은 용산과 서울만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야 하는 이 땅, 구체적 장소로서의 생활공간에서 어떤 삶을 꾸려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장소는 사건으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사건은 특정 장소에서 발생하지만 그 장소를 넘어설 때 비로소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받는다. 용산참사 이후 수많은 다큐멘터리 영화, 그림과 판화, 사진과 만화, 시와 노래가 용산을 다루고 있다. 그 까닭은 용산이 이 시대의 욕망과 성찰의 어떤 지점, 그 핵심과 맞닿아 있는 동시에 그 경계를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4월 용산참사의 실질적인 책임자라 할 수 있는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이 총선에 출마하자 유족들은 그의 낙선을 위해 경주로 급히 내려가 농성을 시작했다. 그리고 유족들은 김석기로부터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경찰로서 사태를 해결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기에 경찰의 진압은 정당했다는 말을 면전에서 듣고 오열했다. 일주일 뒤 유족들은 서울로 돌아와 대한문 앞에 마련된 스물두 명의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를 찾아 ‘희망지킴이’로 참여했다. 이 모욕과 위로,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그로테스크한 현실, 우리가 건너고 있는 용산의 모습이다.

 

 

- 실천문학 2012년 여름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권의 책을 읽다가 다른 책 서평을 써야 해서 급 중단... 서평을 쓰는대로 바로 다시 읽을, 읽어야만 하는 책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이사람에게 권위를 기각합니다
인권이내게로왔다 국가보안법이 내게로 왔다
연중기획 총선과 대선, 인권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최현숙 선거를 다시 생각한다
특집 친절한 법의 모욕
공판중심주의와 형사재판의 미래
사법 불신과 권위주의
사람in인권 우칸촌 사건과 ‘중국의 봄’
탈핵과 발전의 권리
누가, 어디에 있나요?
인권의장르를찾아서 어른의 시간과 청소년의 시간
다른 시선 ‘코피 사건’에 관한 못다 한 이야기
월경(越境) 어떤 귀환
말랑말랑 녹색당 태양은 고지서를 보내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