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본문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서막에서도 알려주고 있다시피 그의 인생을 요약해서 바라본다면 그야말로 평범한 삶을 지내가 떠난 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의 처연한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의 인생이 실패한 것이라 치부할 수도 있다. 첫 눈에 반한 이디스와 결혼에 골인하기는 하지만 너무도 성향이 달랐던 그들은 말 그대로 한 집에 살고는 있으나 각기 다른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자신과 많은 부분이 비슷했던 딸 그레이스가 유년시절을 넘어가는 순간 자의와는 상관 없이 점점 변모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그레이스는 임신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과 함께 홀연히 그들의 곁을 떠나버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딸의 남편은 결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된 전쟁으로 전장에 나가게 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결혼과 동시에 미망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레이스는 결국 아이는 시댁의 손에 맡긴 채 그녀는 점점 알코올에 빠져들고 있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에 바라본 딸의 모습이었으니 그의 삶을 들여다보노라면 그가 행복한 삶을 보냈다기 보다는 힘겨운 시간들을 지나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의 주위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질질 끌리듯이 흘러갔다. 그는 집에서 아내와 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려고 했지만, 괴상한 강의 시간표 때문에 애매한 시간에만 집에 있을 수 있었으므로, 이디스의 빡빡한 일일 계획표와는 맞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자주 집에 있는 것에 아내가 신경질적이 될 만큼 동요해서 말문을 닫아버리거나 때로는 정말로 앓아눕기까지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집에 머무르는 동안 그레이스를 자주 볼 수도 없었따. 이디스가 딸의 일정을 세심하게 짜놓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짬’이 나는 것은 저녁시간뿐인데, 스토너는 일주일에 나흘이나 늦은 시간에 저녁강의가 잡혀 있었다. 그래서 강의가 끝날 무렵이면 대게 그레이스는 잠들어 있었다. –본문
생의 유일한 사랑이라 믿었던 아내는 늘 지쳐있는 모습이었고 그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 찬성하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삶을 끌고 나가기 위해 점차 변화되어 가고 있다. 이디스의 아버지인 호러스 보스트윅가 머천츠트러스트의 부실 경영으로 인한 부도를 맞게 되자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 순간을 전후로 하여 이지스의 모습은 급변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의 사망 사건 전의 이지스가 사건 후의 그녀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실제 그녀의 모습들을 보면 스토너에게 현명한 아내이자 그레이스에게 좋은 어머니의 모습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수는 있었으니, 그가 오롯이 피어났던 순간은 캐서린을 마주했던 그 순간뿐 이었을까.
그의 직장인 대학에서의 시간으로 눈을 돌려 보면, 작은 농가에서 태어난 그가 영문학 교수의 자리까지 올라 평생의 시간을 자신이 하고픈 공부를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던 시간은 그로서는 더 할 나위 없이 흡족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로맥스나 핀치처럼 학장이 되거나 학과장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평생을 부교수의 자리에만 있었어야 했다는 점, 로맥스가 담당 교수였던 워커 학생에 너무도 다른 신념 때문에 그는 대부분의 시간들을 신임 교수와 같이 불합리한 시간표를 배정받아야 했던 점, 이로 인해 딸 그레이스와 함께 보낼 시간이 없었다는 점은 물론 가족과의 시간들도 점차 줄어들어야만 했으니 과연 그의 삶이 괜찮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가.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 없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그의 의식 가장자리에 뭔가가 모이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좀 더 생생해지려고 힘을 모으고 있었지만, 그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원한다면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세상은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었다. –본문
평이하다 못해 남들보다 뒤쳐진 듯한 삶을 살았던 스토너를 보며 과연 그의 삶이 성공적인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나는 그의 삶에서 대체 무엇을 바랐던 것인가, 라는 생각이 다시금 스치게 된다.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자식은 모든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학에 들어가 승승장구하며 성장해 나가야만 하고, 늘 열정적인 사랑으로 충만한 가정의 모습이여야 그것이 바로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들 말이다. 내가, 아니 우리가, 세상이 그에게 당신은 남들보다 못한 삶을 살았소, 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는 그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을 단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 속 토끼처럼, 약삭빠르고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삶을 천천히, 세상이 알아주는지 여부에는 상관없이 마지막을 향해 진득하니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 그는 눈을 감는 순간 천상병 시인의 ‘소풍’의 마지막 구절처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를 외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러한 삶이었다면 우리의 수 많은 잣대를 넘어서서 그는 자신의 삶이 아름다웠다 말했을 것만 같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생을 마음 속에 꿈꾸고 있지만 대부분의 이들을 스토너와 같이 평이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정 스토너처럼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살아왔더라면 우리 모두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스토너처럼 진득한 나의 삶을 살아봐야겠다는 다짐을 조용히 외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