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의 기쁨 - 지금 우리의 식사는 즐거운가?
애덤 고프닉 지음, 이용재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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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르's Review

 

  

 식탁 위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 한 끼의 식사를 하며 굶주린 배를 채운다는 1차원적인 의미를 넘어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안에서 함께 교감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식탁 위에 차려진 한 끼의 식사는 먹는다는 행위 이상의 것으로 내게 인식되어 있다. 제아무리 맛깔스런 음식이라도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음식의 맛이 천양지차가 되는 것과 같이 식탁에서의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 전해지기도 하고 때론 피하고픈 불편한 시간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기 마련인데 과연 이 <식탁의 기쁨>에서는 무엇을 전해주게 될지, 책을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설렘이 밀려든다.

 음식을 예전에 비해 더 유행을 타는 대상으로 취급한 나머지, 식사는 더 사소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미식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 때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음식의 모든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미식은 배고픔의 본질, 식욕의 의미, 욕망의 유형과 자취, 어머니가 아들에게 레시피를 물려주는 방식으로서의 전통, 향신료를 섞고 재료를 혼합하고 사람을 얽는 방식으로서의 역사까지 접근한다. 우리는 마치 열쇠 구멍으로 내다보듯 소박한 기쁨의 렌즈를 통해 세계 전체를 그려본다. –본문

 너무도 중요한 시간들임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드루크는 사형 당하기 한 시간 전, 그에게 남아있는 시간 동안 부모님과 함께 나누었던 음식에 대해 생각했던 그와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은 이토록 우리에게 중요한 것임에도 현대의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식사라는 것을 그저 대충 때워 넘기는 것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소박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이 기쁨을 놓치고 있는 우리에게 저자는 그 잔잔한 기쁨을 이 책을 통해 전해주려 하고 있으며 그의 담담한 듯 하지만 진중한 문체는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레스토랑을 흔히 찾을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레스토랑이 처음 자리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듯 하다. 이전에는 공간이 아닌 음식으로 존재했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레스토랑이라는 현대의 모습과 같은 공간이 자리매김 하기 전까지, 파리에서의 외식은 공동 식탁이 전부였다. 커다란 식탁에 앉아 식당에서 제공하는 음식만을 먹을 수 있었던 당시의 모습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을 출입할 수 조차 없었으며 음식에 대한 불신마저 퍼져가고 있던 와중에 생토노레 가 샹투아소의 레스토랑은 건강한 음식을 내어 놓는 곳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는 근대의 레스토랑으로 자리 잡아 가게 되는 근간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쉬이 접할 수 있는 레시피 역시도 음식이 점차 발전되어 감에 따라 현재 마주하고 있는 음식을 다시금 만들어 누군가의 식탁에 오를 수 있도록 글로 남기게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요리책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19세기때라고 하니,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요리에 관한 모습들이 오래 전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네 요리책 가게에서 책을 훑어나가면서, 디저트 모더니즘은 다른 곳에서 불거져 나왔으며 내가 아는 것보다 혁명적인 목적을 품는다는 것을 천천히 알아차렸다. 바우하우스에 대한 미국의 건축적 대답, 즉 소박하고 엄격한 양식의 미국화가 포트먼 타워여다면, 유럽의 디저트 추세에 대한 미국의 대답이 포트먼 분위기의 디저트다. 여기 뉴욕에서 진실되고 타협 없는 혁명은 몇몇 레스토랑에 한정되어 있는데, 그중 한 곳인 와일리 듀프렌의 wd~50에 갔다. 단 음식 단식을 깨고 말린 파인애플과 파인애플 퓌레, 파인애플 튈을 곁들인 치즈 케이크, 레몬그라스 거품을 올린 레몬그라스 무스 등 페이스프리 셰프의 맛있는 디저트를 전부 먹었다. 셰프인 알렉스 스투팩은 치열하도록 지적이며, 분명하고 무미건조한 평가를 내렸다. 
 
저는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본문

 식탁 위에서 누릴 수 있는 음식이 주는 행복과 그것을 함께 누리는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 보다는 음식이 전해지기까지의 배경들, 카페와 레스토랑이 어떻게 형성되어왔는지, 우리가 말하는 레시피는 누구를 위하여, 왜 만들어져 왔는지에 대한 시작에서부터 또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는 편지 속 레시피를 따라 가다 보면 어느 새 오븐을 켜고서 음식을 만들어 보고 싶은 욕망마저도 들끓게 된다. 음식 안에 들어간 향신료나 소스는 알고 보면 이전의 역사 속에서 전해진 산물이라는 것들을 마주하면서 이 하나의 식탁은 그저 음식을 위한 장소가 아닌 이전의 수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전해온 유산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한끼의 식사가 기억을 조각하는 행위와 같다 말하는 그의 말을 따라 녹록하지 않은 책 읽기였기는 하지만 책을 읽고 난 이후 식탁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짐을 느끼게 된다. 음식 안에 녹아있는 역사와 문화가 현재의 한 접시에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책의 무게가 더욱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전에는 너무 당연하게 느꼈던 것들을 이제서야 바로 보게 된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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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제국 / 에번 D.G. 프레이저저 


 

 

독서 기간 : 2015.02.15~02.19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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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의 지구사 식탁 위의 글로벌 히스토리
윌리엄 루벨 지음, 이인선 옮김, 주영하 감수 / 휴머니스트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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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끈한 빵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눈에 띄는 제과점에 들어가서 쟁반과 집게를 들고서 먹고 싶은 빵을 집어 든 후 계산을 하고 나오는 것으로 내가 원하는 빵을 쉬이 얻을 수 있기에, 그저 쉽게 구할 수 있는 간식 혹은 간단한 식사쯤으로만 생각했을 뿐, 빵에 대해 그 이상의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듯 하다. 물론 오랜 동안 빵집 딸내미로 살았던 시절은 그 당시의 나의 별명이자 부모님의 일터라는 생각이긴 했으나 빵 자체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해본 적은 없는 듯 하다. 맛이 있다, 없다, 로만 나뉘었을 뿐 내 손안에 담겨 있는 빵의 역사나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빵은 곡물을 심고, 수확하며, 도정하고, 제분하는 고된 노동을 거쳐야 만들 수 있는 음식으로 묘사된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참혹한 결과가 바로 빵인 것이다. 실제로 최소 1만 년 전 농경이 처음 시작된 순간부터 비교적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빵이란 시시포스의 형벌같이 끝도 없이 되풀이 되는 노동을 뜻했다. 유럽과 북아메리카 지역의 산업화로 농업 효율이 높아지면서 오늘날에는 직접 밭을 일구고 곡물을 갈아 빵을 굽는 인구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줄어들었다. 사회적, 개인적 측면에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인류의 삶은 곡물 재배와 가공, 매일 먹을 빵을 만드는 일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문

 일본에서 전해진 이라는 발음이 현재의 이란 이름이 유래된 점에서부터 시작하여 날곡식을 소화시킬 수 없는 인간이 고대부터 만들어 먹었다는 빵에 대해서 언제, 어디서부터 그 시작이 되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오랜 시간 인간의 곁에서 함께 해 왔다는 것만으로도 빵의 역사와 기원을 찾아봄직한 충분한 이유를 전해주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빵의 유행도 몇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에 다양하게 변해왔듯이 이미 몇 천 년이 흐른 지금, 최초의 빵과 그 모습들을 알아내기는 쉽지는 않지만 다양한 방향으로 그 시대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흰 밀가루가 대중화된 지금과는 달리 이전에는 흰 밀가루로 빵을 구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부의 상징으로 나타났으며 때론 갓 구운 빵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지침에 따라 2~3일이 지난 후에 빵을 먹기도 하고 빵의 겉면을 제거하고 먹는 풍습이 유행하는 등, 빵에 대한 다양한 풍습들이 성행하고 있었다는 것은 또 다른 이색적인 면이었다.

 플랫브래드는 대부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식탁 위에 올랐으며 로프브레드는 플랫브래드를 먹는 이들보다는 풍요로운 이들의 식탁에 놓였다는 이야기는 처음에 들었을 때는 어불성설처럼 느껴졌지만 저자가 전해주는 단서들을 찾아가면서 왜 그러한 논제가 대두되고 있는지에 대해 하나씩 배워가게 되면서 당시의 모습은 물론 반죽을 하는 과정이나 빵을 굽는 모습들까지도 마주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일본식 빵의 시조는 에가와 히데타쓰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군용 식량인 효로빵을개발했다. 효로빵은 전투 때 쌀밥을 짓는 것보다 미리 만들어놓은 빵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 개발된 것이다. 한편, 1868년 사쓰마에 있었던 후게쓰도라는 과자점에 군용 빵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서양식 군대를 만들고 싶었던 메이지유신 전후의 일부 사무라이도 전투 식량으로 빵이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 밀가루와 쌀가루에 계란 등을 배합해 맥주 이스트로 발효시킨 갑면포라는 빵이 개발되었다. 이 갑면포는 간팡이라고도 불렸다. (중략) 지금도 한국 군대에서 지급되는 건빵이 바로 이 간팡에서 유래한 것이다. -본문

고대 이집트의 모습에서부터 우리나라의 빵의 역사까지 따라오는 동안 이전에는 집에서 만들어먹던 빵을 이제는 취미용 홈베이킹의 모습으로만 남아있고, 판매 목적을 위한 수제 빵집이나 공장 제빵 업계의 형태로만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의 빵은 또 어떠한 모습으로 변모해 우리의 역사에 남게 될지 내심 궁금해진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빵의 역사 안에도 인류의 변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니. 이전에는 그저 한 조각의 빵이었던 것이 곱씹을수록 역사의 한편으로 다가옴에 따라 묵직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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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의 역사 / 하인리히 E. 야콥저 


 

 

독서 기간 : 2015.02.11~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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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의 탄생 - 2014 제5회 김만중문학상 금상 수상작
조완선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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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명작을 읽는 내내 감탄은 물론 어떻게 이 이야기들이 시작되었을까에 대한 궁금증, 과연 이 이야기들의 시초는 무엇이었을지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늘 그 결말을 안고서 그 물음은 고이 묻어두곤 했다. 

우리나라의 고전 소설인 '홍길동전' '허생전'의 탄생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그 찰나의 물음이 이 <걸작의 탄생>이라는 이야기의 시작이 되었고 그 시작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게 되어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허균. 허난설헌이 누이이자 그의 형 역시도 너무도 유명한 문인이었던 그는 조선의 땅 위에서는 '괴물'로 불리고 있었다. 그의 천재적이며 허심탄회했던 행보는 그를 죽음의 문턱으로 밀어넣게 되는 것은 물론 그가 남긴 책들은 금서로 지정되어 읽어서는 안되는,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될 것이 되고 만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허균의 이름이 잊혀질 즈음, 박지원에게 한 책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줄만 알았던 허균의 서책이 남아있다는 소식을 전해주게 된다. 연암에게 그 책을 안고서 다시 들르겠다던 책쾌의 소식이 오랜 시간동안이나 전해지지 않아 궁금해 하던 그에게 조열의 사망소식을 전해듣게 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과연 책쾌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는 누구의 손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어디에 있을지에 대한 물음은 이 이야기를 쫓아가는 박지원의 여정 위에 당시 허균의 일을 중첩시키며 서서히 내막을 드러내게 된다.

", 홍길동에 대해 알고자 왔습니다."
허균은 봉추거사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동안 조선 팔도를 떠돌면서 각양각색의 도인을 만나봤지만, 봉추거사처럼 강렬한 기운이 솟구치는 인물은 처음이었다
.
 "
허허, 참으로 별난 놈이로구나. 홍길동이 이승을 떠난 지가 백 년이 넘었거늘 어찌 이제 와서 그리 호들갑을 떠는 게냐? 육신을 놓쳐 애간장을 태우더니 이제 혼백이라도 잡아 원풀이를 하러 왔단 말이냐?" -본문

 허균이 홍길동의 발자취를 찾아가며 남겨 놓았던 <교산 기행>이 조열이 전해주려 했던 책이었다는 것과 조열의 죽음의 비밀을 하나씩 밝혀나가는 박지원에게 허균이 바라왔던 세상의 모습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홍길동전을 남기기 위해 홍길동의 모습을 찾아 다녔던 허균에게 결국 도래한 것이 끔찍한 죽음이었듯이 책쾌 조열의 마지막을 쫓아가던 그에게도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되는데 이미 세상에서 사라지리라 생각했던 허균이 꿈꾸던 유토피아의 세상은 또 다른 모습으로 수 많은 이들이 찾고 있었음이 드러나게 되면서 비밀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모두의 염원을 담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도무지 이 두 가지의 이야기가 함께할 수 없었을 것 같은 이야기가 공존하여 새로우면서도 이전의 행적들을 따라가게 하는, 긴 호흡이지만 단번에 따라잡게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한다. 연암이 마지막에 웃고 있는 그 순간, 허균도 그 장면을 보았더라면 함께 웃지 않았을가. 모두가 바라는 평등한 세상의 염원은 그때나 지금이나 모두가 바라왔던 것인데 과연 우리는 그 시대를 맞이했는가에 대한 모습을 곱씹으며, 이 즐거운 여정이 또 다시 시작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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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심청 / 방민호저


 

 

독서 기간 : 2015.02.17~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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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뚱뚱한 남자를 죽이겠습니까? - 당신이 피할 수 없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질문
데이비드 에드먼즈 지음, 석기용 옮김 / 이마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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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름에 대해서 쉬이 대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도덕적인 물음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쉽게 생각하고 설명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으나, 이 안의 트롤리 실험들을 마주하는 순간, 과연 무엇이 답이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들로 한창을 머리를 굴리게 된다. 그저 답이 있는 문제라면 어떻게든 풀어가겠지만, 아니 무조건 선택해야 하는 것이 그저 문제라면 안된다면 어느 것이든 찍어서라도 답을 고르겠지만 사람의 생명을 담보하여 답해야 하는 이 문제들은 쉬이 답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이 책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시체들이 즐비하고 핏자국이 흥건하게 남겨질 것이다. 본문 속에서 고통을 겪을 동물은 딱 한 마리뿐이지만 인간들은 많이 죽을 것이다. 그들은 대개 아무런 죄도 없이 기괴한 상황 속에 사로잡힌 희생자들이다. 어떤 거구의 남자는 육교에서 떠밀려 떨어질 수도 있고, 또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본문

도덕적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시체들이 즐비하고 핏자국이 흥건한 이 이야기들이 대체 필요할까. 뚱뚱한 남자를 죽이겠느냐는 이 질문은 책을 펼치고 있는 내내 독자들을 따라오는 질문으로 트롤리를 멈추기 위해서 한 명의 사람을 죽여 다수의 사람을 구하느냐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이 상황을 방광하고서 바라만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계속되게 되는데 하나의 답을 구했다 싶으면 또 다시 도래하는 질문은 과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에 대한 물음이 계속되게 하고 있다.

딜레마라고 하기에는 가혹한, 꼭 누군가가 죽어야만 답이 나오는 이 문제들을 과연 풀어나가야만 할까, 라는 질문을 되내보기도 하지만 죽음을 기반으로 하지 않다고 한다면 이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는 것일까. 선로 위의 여섯 명의 남자와 병원 위의 여섯 명의 남자는 다르지 않을 운명 속에 있지만 그들에게 내리는 선택은 어찌하여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일까. 합리적이라는 인간인 우리는 어떤 선택들을 할 수 있고 그 선택의 기로에서 무엇을 고민하게 되는지에 그 다양한 이야기가 이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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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샌덜저

독서 기간 : 2015.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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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심청 - 사랑으로 죽다
방민호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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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대표 고전 소설인 <심청전>에 대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 심학규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인당수에 제 한 몸 바쳤던 심청이를 보노라면 지극한 효성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죽음으로 갈라 진 줄만 알았던 심학규와 심청이의 재회를 통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그들을 보면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과 함께 착하게 사는 이들에게는 이렇게 따스한 결말이 전해지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으로 책을 덮으며 안도감을 느꼈었다.

청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가보았다.
안 가지는 게 아니고 못 가져서, 못 가진 괴로움이 평생의 한이 되어, 한시도 한탄에서 벗어나보지 못한 아버니의 얼굴이다.
이렇게 사시면 아니 되는 것을. 이제는 욕망을 내려놓으실 때도 된 것을.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청이는 아버지를 마음 깊은 곳에서 미워하면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사람들에게는 효성스러운 칭찬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지만 꼭꼭 숨겨둔 진짜 자기 망므을 아버지를 너무도 원망하고 부끄럽게 여겨왔던 것이다. –본문

그렇게 심청이에 대한 이야기를 잊고 지낸 지 어언 이십 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심청전에 대해 마주하게 되면서, 어릴 적 읽었던 심청이는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아비를 구하고자 하는 효심이 지극했던 그녀도 실은 연정을 담아 새록새록한 마음을 느끼고 있던 수줍은 소녀였다는 것을, 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심봉사는 실은 욕정과 욕망에 휘감겨 있던 추접한 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들이 아비와 딸로 부녀의 끈으로 이생에 마주한 것은 전생의 숙명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전에 알고 있던 심청전의 이야기가 완전히 뒤집혀서 다시금 전해지게 된다.

 윤상 오라버니의 바람대로 아버지를 버리고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했다면 심청이는 이 생에서만큼은 사랑만이 가득한 곳에서 그렇게 행복한 여염집 아녀자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윤상 역시도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머슴의 자식으로 살아야 했기에, 자식의 하늘이 되어 그 뒤에서 넉넉히 품어주어야 할 아버지의 부재를 태어나는 순간부터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윤상과의 연정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이 두 남녀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이 죄를 어찌하나.
돌이켜보면 자기는 인당수에 몸을 바칠 때도 윤상이 오라버니의 바람을 철저히 외면해버렸다.
, 그렇듯 윤상이 오라버니를 멀리 하고 싶었던가.
그것은 아니었다. 세상에 나서 사내라고는 귀덕 오라버니와 윤상이 오라버니밖에는 몰랐다. 마음 바쳐 사랑한 것은 윤상이 오라버니뿐이었다. 오라버니의 가슴 깊은 곳에 박혀 있는 그 한을 사랑했다. 그 깊은 상처를 보듬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늘 그를 외면하기만 했다. 그를 버려 대신에 아버지를 구하려 했다. –본문

 그러나 그들의 앞에는 전생에서의 죄를 안고서 현생에서 부녀의 연으로 태어난 심청이와 심봉사를 뛰어 넘을 수 없었으니, 심청이가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순간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궁궐의 잔치에서 마주한 두 번의 순간 모두 심청이는 마음은 윤상에게 향해 있었지만 늘 그녀가 있어야 했던 곳은 아버지인 심학규를 곁이었다.

 전생의 연이 이어진 현생의 삶에서 그 질긴 끈이 이어져 있는 동안에는 그 무엇도 이뤄질 수 없는 것일까. 죽음을 향해 가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고 다만 이 생에서의 참된 뜻을 알고자 하는 바람으로 청이가 심봉사의 곁을 지키고 있던 그 순간 이 모든 연정을 담아 홀로 아픔을 안고 윤상은 이 생과의 작별을 고하고 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전생의 끈을 놓은 청이과 심봉사는 홀연히 각자의 길을 가게 되는데 지혜로운 왕비로 세상을 보냈던 그녀는 왕의 승하와 함께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게 된다. 이 생애 다 못한 윤상과의 사랑을 내생에서는 이룰 수 있을지. 전생의 깊은 수렁이 덮어버린 현생의 시간들이 부디 내생에는 그들만의 오롯한 시간을 보내보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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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뺑덕 / 백가흠저


 

 

독서 기간 : 2015.02.10~02.12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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