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캘린더를 보니 오늘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태어난 날이다. 나는 그의 이름은 익히 들어 봤으나 그의 작품은 여태껏 단 한 권도 읽지 못했다. 더 심하게 말하면 단 한 권의 책도 보관함에조차 넣은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어느 초여름날 저녁에 서울 시내에서《막돼먹은 영애씨》라는 제법 웃기는 뮤지컬을 보고 난 뒤, 밤늦게 다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산으로 귀가를 재촉하던 길에 '1FM 라디오'를 통해 들은 얘기는 내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그 음악프로의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코너에서 마침 보르헤스를 소개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 나는 스위스에서 머물던 시절 쇼펜하우어를 읽기 시작했다. 만일 나에게 한 명의 철학자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주저없이 그를 택할 것이다. 만일 우주의 수수께끼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면 나는 그 언어가 그의 책 속에 쓰여져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의 책을 독일어로 읽었고 나중에 스페인어로 번역된 것도 읽고 또 읽었다. ······



내가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또 읽을 때 받았던 느낌이 꼭 그랬었다. 그리고 용감하거나 혹은 무모하거나 간에 일단 그의 책을 '필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흥미롭고도 고된 작업은 내가 생각하기로도 꽤나 끈덕지게 이어졌지만 결국 나중엔 '그 시간에 다른 책이라도 좀 읽어 볼 요량으로'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는 또다른 목소리에 눌려 그만 중단되고 말았다. 오늘 다시 그 '무모한 작업'을 들춰보니 726쪽 '제3권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2고찰 <39. 숭고한 아름다움>'에서 멈춰져 있다. 책 뒷부분에 별다른 색인조차 없는 이 책이 무려 1,023쪽에 이르는 걸 생각해 보면, 중단된 '막노동'이 재개되더라도 가야 할 길이 제법 먼데 언제 저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내가 읽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책)


라디오 방송을 들은 다음날 아침에 인터넷으로 '보르헤스와 쇼펜하우어'를 검색해 봤더니, 오래 전에 연재되었던 [불교와 지성] 시리즈를 찾아낼 수 있었다. 불교와 서구의 대표적 지성들과의 교감을 깊이 있게 조망한 글이어서 쭈욱 한번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이 시리즈의 '1번 타자'로 나선 인물이 쇼펜하우어였고, 보르헤스는 15번째로 소개되었다.

보르헤스가 태어난 날, 그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고도 뭔가를 주절거린다는 게 좀 웃기는 일이고 작가한테도 좀 미안한 일이지만, 이러다보면 언젠가는 또 보르헤스와 만나 즐겁게 떠드는 날도 있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 * *

http://www.beopbo.com/news/index.html?section=93&category=171&item=193&page=3

[불교와 지성] 1. 쇼펜하우어 - 김진 울산대 교수
[불교와 지성] 2. 막스 뮐러 - 김용표 동국대 교수
[불교와 지성] 3. 특별기고 - 박이문 포항공대 명예교수
[불교와 지성] 4. 프리드리히 니체 - 김정현 원광대 교수
[불교와 지성] 5. 화이트 헤드 - 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
[불교와 지성] 6. 윌리엄 제임스 - 김종욱 동국대 교수
[불교와 지성] 7. 후설 -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
[불교와 지성] 8. 휘트먼 - 최희섭 전주대 교수
[불교와 지성] 9. T.S. 엘리엇 - 박경일 경희대 교수
[불교와 지성] 10. 아인슈타인 -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불교와 지성] 11. 소쉬르 - 이도흠 한양대 교수
[불교와 지성] 12. 예이츠 - 서혜숙 건국대 교수
[불교와 지성] 13. 베르그송 - 민희식 전 한양대 교수
[불교와 지성] 14. 하이데거 - 권순홍 군산대 교수
[불교와 지성] 15. 보르헤스 - 김홍근 성천문화재단 부원장
[불교와 지성] 16. 자크 라캉 - 김석 건국대 교수
[불교와 지성] 17. 닐스 보어 - 양형진 고려대 교수
[불교와 지성] 18. 조르쥬 바따이유 -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불교와 지성] 19. 헤르만 헤세 - 이인웅 한국외대 명예교수
[불교와 지성] 20. 칼 야스퍼스 - 신옥희 이화여대 명예교수
[불교와 지성] 21. 비트겐슈타인 - 홍성기 아주대 교수
[불교와 지성] 22. 카알 구스타프 융 - 김성관 원광대 교수
[불교와 지성] 23. 하인리히 짐머 - 심재관 금강대 HK연구교수
[불교와 지성] 24. 호세 바스꼰셀로스 - 강태진 대구가톨릭대 교수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2013-08-24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글쓰기를 하셨군요.
나중에 차근차근 옮겨적기를 이으시리라 생각해요.
한결 깊이 삶과 넋과 빛을
마음속으로 담으셨겠어요.

oren 2013-08-25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라기 보다는 베껴쓰기였지만, 읽는 데서 그치고 마는 것보다는 '한결 마음속에 담은 느낌'이 좋았어요. 함께살기님께서 힘을 북돋아 주신 것처럼 나중에 마저 옮겨 적을 수 있기를 저도 함께 바래봅니다.

yamoo 2013-08-27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필사까지...사진을 보니 정말 열심히 읽으신 티가 팍팍나네요...근데, 저거 동서문화사판 아닌가요? 동서문화사 판은 번역이 별로던데. 김미영 역자의 쇼펜하워 번역본은 확실히 필사할 맘이 생기는 거 같아요. <충족이유율에 대한 네 겹의 뿌리>사서 필사해 보아야 겠어요.

불교와 지성이라는 연재도 있었군요!

그나저나 전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가 그렇게도 명문이라서 필사를 하려고 보니, 번역이 그리 좋지만은 않더라구요~ 오히려 이상하게 번역된 문장만 찾게 되더라구요..ㅜㅜ

oren 2013-08-29 17:38   좋아요 0 | URL
저는 '번역'에는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라서 '동서문화사판'에 대해서도 '전혀' 읽는 데 불편이 없었어요. 가끔씩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 더욱 어려워진 문장들을 만나면 몇 번씩 다시 읽으며 '원문의 뜻'을 미뤄 알아내느라 힘이 들 때도 있긴 하지만요.

김미영 역자의 번역본은 좀 더 쉽게 읽히는 듯한 느낌은 받았어요.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는 '박사 논문'이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딱딱한 논문체의 글이어서(고지식한 논문 심사위원들한테 제대로 된 '형식미'를 갖춰야 한다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필사'하기에는 별 재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창조적 진화>도 '프랑스어 원문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번역'이 분명 아쉽게 느껴지는 책인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책은 베르그송의 '생각' 자체가 워낙 매혹적이어서 그런 단점들은 사소해 보인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yamoo 2013-09-02 12:14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저는 베르그송의 그 대단한 내용을 얼마나 유려하게 문체로 담아냈길래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할까하고...기대에 기대를 하고 봐서 그런거 같습니다. 쭉쭉 읽어나가다가 갑자기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 3-4회독 하도다보면 이상하게 번역을 해 놓아서 의미가 바로바로 파악이 안 돼는 거였습니다...ㅜㅜ
사실 저는 창조적 진화를 읽어나가면서 첨 읽었을 적에는 못느꼈지만 2-3회독 할수록 역자가 저자의 명저를 졸작으로 탈바꿈해 놓은 거 같아 매우 기분이 좋지 않더군요. 그런데 번역의 완성도가 끝내준다는 얘기는 도대체 누가 했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이부분은 완독하는 대로 페이퍼에 올려보려고 합니다. 얼마나 조악한 번역인지...아무래도 저자가 제자에게 대신 번역한 부분이 군데군데 있는 거 같습니다. 번역의 질이 확연히 다르다고 할까요.

만약 제가 필사를 했다면 10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때려쳤을 거 같다는....저는 매혹적인 내용 자체를 파악하기 위해 정말 많은 안간힘을 쓰고 있답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