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노블우드 클럽 5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 / 로크미디어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미스터리 독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것이 지난 2001년이었다.
가끔 땡기면 사서 읽곤 하던 추리 소설에 본격적으로 탐닉하게 된 것도 신문에 소개된 인터넷 커뮤니티들을 찾아 들어가 정보와 감상들을 얻어 듣기 시작한 이후다.
공교롭게도 그 시절은 미스터리 독자들에게는 암흑기였다. 서점에 깔려 있던 책들을 마지막으로 시그마 북스가 절판되기 시작하던 시기이며, 해문의 Q 미스터리도 절판 상태였고, 현재의 세계 추리 걸작선으로 재 발간되기 전이었다. 일신, 문공사 등의 미스터리 시리즈도 2000년 대로 접어들면서 더이상 서점에서 보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가끔 단행본으로 나오는 현대 스릴러 소설들을 제외하고는 새 책으로 구할 수 있는 미스터리라고는 해문의 빨간 책,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제외하고는 전무했던 시절.
오로지 헌책방을 전전하거나, 고수들이 올린 절판된 동서나 자유의 리스트와 리뷰들을 보면서 입맛만 다시던 시절.

이 후 셜록 홈즈 완역판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브라운 신부, 괴도 뤼팽, DMB 등 시리즈 기획물들이 줄줄이 출판되기 시작했고, 일본 미스터리 열풍에 힘입어 실시간으로 이웃 나라의 신작들을 접할 수 있게 된 요즈음에 이르렀다.

주저리 주저리 옛날 신세 한탄을 해 댄 이유는, 읽고 싶어도 읽을 책이 전무했던 암울했던 그 시절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작가 중 한 명이 다름아닌 존 딕슨 카였기 때문이다.

DMB로 재 발간된 <모자 수집광 사건>, <화형 법정> 등과 초역 되었던 <세 개의 관> 이 후, 미스터리 부흥의 시대에 한 걸음 비껴서 있는 듯이 보였던 딕슨 카의 소설들이 2009 년을 맞이하여 속속 새롭게 번역, 출간되고 있다. 왕의 귀환이라고 해야 할까. 해적판으로만 나왔었던 데뷔작 <밤에 걷다>, 딕슨 카의 대표작 리스트에 이름을 빼놓지 않고 올리던 <구부러진 경첩>과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카가 후반기에 주력했던 분야인 역사 미스터리들 중 최초의 번역인 <벨벳의 악마> 까지. 향 후 출간이 확정된 몇 몇 작품들을 더하면, 딕슨 카에 대한 미스터리 독자들의 오랜 갈증은 거의 해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은 그동안 접했던 카의 미스터리 소설에 비하여 대단히 흥미로운 서술 구조를 가지고 있다. 수사에 관련된 세 사람이 펠 박사에게 사건에 대해 자신이 겪었던 과정을 털어 놓는 하룻 밤 동안의 이야기다. 수사관 캐러더스, 경찰 부국장 허버트 암스트롱, 카의 팬들에게는 익숙한 해들리 총경까지. 처음 접한 사건은 대단히 불가해한 점들이 여럿 눈에 띄지만, 각각의 진술이 진행됨에 따라 대부분의 의문들은 풀려 나간다. 해들리 총경의 진술에서는 범인까지 확실해 보이는 수준으로 발전한다. 

여러가지 단서들을 바탕으로 탐정의 추리과정을 막판까지 꾹 묻어 두었다가 일시에 터뜨리며 모든 의문점들을 해소하는 일반적인 퍼즐 미스터리나 딕슨 카의 여타의 작품들과는 느낌이 좀 많이 다르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구조가 딕슨 카의 장점인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를 극대화 시키고 있는 듯 하다.

막판의 깜짝쇼를 포기하고, 서술 과정의 흥미를 유지하고 있기에 단 한건의 살인 사건과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트릭임에도 장편 소설의 결말까지 이야기의 힘을 유지한다. 중간 중간에 선보이는 딕슨 카 특유의 유머 코드도 놓칠 수 없는 재미다.
현대의 미스터리 스릴러물에 비교하자니, 다소 초라하고 순진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고 즐겨 읽던 추리소설의 가장 순수한 원형이 들어 있다.

1936년 발표된 거장의 대표작이 70년이 넘어서야 이 땅에 소개되었다. 하루에도 화제작들이 여러권 쏟아져 나오는 요즘이라서, 읽을만한 책도 없던 7-8년 전 소수의 매니아들이 모여서 리스트만 거론하며 안타까워 하던 그 시절이 아니라서, 카의 미번역작은 커녕 절판된 책들이라도 어느 헌책방에 있더라는 소문만으로 달려가던 그런 열성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전쟁을 겪고, 보릿고개를 겪었던 나의 부모님 세대에게서 숱하게 들었던 "예전엔 어려웠지. 지금은 정말 좋아졌다~"류의 훈계나 회고담은 아닐지라도, 새롭게 미스터리의 세계에 빠져든 신진 독자들과, 오매불망하던 전설의 작품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에도 이제는 그냥 무덤덤해진 오랜 독자들에게 이렇게 전해 주고 싶다.

"이 책이 나올 것이라고는 예전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라고.
 

p.s. 딕슨 카의 소설이 단순히 추억 상품으로 취급 받는 것은 억울하다. 재미나 품격 면에서 손색이 없는 고전이 단지 구닥다리라고 해서 외면 받는 것이 안타까울 뿐. 

p.s.2. 펠 박사의 사후 처리는 예전부터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파일로 번스의 방식이 맘에 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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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9-11-02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의 귀환도 열렬히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

oldhand 2009-11-02 20:25   좋아요 0 | URL
아래 페이퍼 댓글로 파란여우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저 어디 다른 곳에 간 적은 없습니다. 귀환이라기 보다는 그냥 잊어 먹을만 하면 한번씩 집에 들르는 뜸한 탕아라고나 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