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의의 쐐기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경찰 소설'은 이제 다양하게 분화한 미스터리 소설의 하위 장르 중에 없어서는 안될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경찰 소설은 단지 경찰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추리소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경찰 소설은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실제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경찰의 조직 수사는 과거 명탐정들의 들러리 역할만 떠 맡아야 했던 바보스러운 경찰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경찰은 어떠한 명탐정보다도 많은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 경찰 소설은 경찰의 수사활동을 사실에 가깝게 묘사한 작품들이다.

 

에드 맥베인은 87분서 시리즈를 통해 '경찰 소설'을 정립한 작가다. 제 1작인 <경찰 혐오자> 이래 2005년 타계할 때 까지 5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50편이 넘는 87분서 시리즈를 발표하였다. 87분서 시리즈는 특출난 주인공이 없다. 가상의 도시 아이솔라 시의 경찰청 산하 87분서 소속 형사들이 집단으로 등장한다. 각 작품마다 이야기를 주도해 가는 형사들이 바뀌기도 하며, 범죄 해결 과정에서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새로이 형사실에 신참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87분서 형사들의 시간은 지극히 느리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시리즈를 50년 가까이 이어가지만 작품 내의 형사들은 10년의 나이도 채 먹지 않는 것 같다.

 

시리즈 한편 한편은 요새 나오는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들에 비해 상당히 짧은 분량이다. 그만큼 군더더기도 없다. 그렇지만 맥베인 특유의 빠른 호흡과 간결한 문장이 주는 매력에 빠지기에는 충분하다. 50~70년 대의 영미 미스터리는 그동안 국내 미스터리 시장에 공백기나 마찬가지였다. 작년에서야 처음 국내에 소개된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도 이시기의 대표작이다. 87분서 시리즈도 예외가 아닌데, 50편이 넘는 작품 중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작품은 모두 10편이 채 안될 것이다. 그나마 해적판에 가깝게 나왔던 작품들은 모두 절판되어 구하기도 어렵고, 여러군데서 나온 시리즈 1작인 <경찰 혐오자>와 해문에서 나온 <10 플러스 1>만이 현재 새책으로 구해 볼 수 있는 '유이한' 작품이었다.

 

 

왜 <경찰 혐오자>만 줄기차게 중복 출판되는가!라고 울부짖었던(?) 기억도 이제 10년 가까운 예전 일이 되었다. 그리고 2013년 새해 벽두에 반가운 신간 소식이 들려왔다. 구 동서 추리문고로 출판되었다가 절판되었던 <살의의 쐐기>가 새로 번역, 출판된 것이다. 이 땅의 맥베인 팬들이여 경배할 지어다. 내가 읽어본 많지 않은 87분서 시리즈 중 <살의의 쐐기>는 최상급의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시리즈를 미처 접하지 못한 독자라도 독립적인 각각의 이야기들을 즐기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이 책은 뒷 날개에 87분서의 주요 형사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살의의 쐐기>는 읽기 시작하면 결코 멈출수 없는 엄청난 속도감과 긴박감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결말에 대한 궁금증에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정신 없이 책장을 넘기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책장을 덮는 순간 제목이 의미하는 절묘한 중의성을 깨달으며 다시 한 번 만족하게 될 것이다.

 

 

** 이 책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책이기도 하다. 소설가들은 "이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소설가가 되었다"라고 말할만한 작품이 하나 씩은 있다고 한다. 출판사도 "이 책을 내고 싶어서 출판사를 만들었다"라고 할 만한 책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띄엄띄엄 읽던 추리소설을 본격적으로 탐독하기 시작한 것이 지난 2001년의 일이다. 지금은 없어진 추리소설 독자들의 커뮤니티인 모사이트를 알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많은 고수들이 남긴 리뷰와 작품 소개, 토론 등을 접하며 미스터리 애호가로의 첫 발을 디디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 시절 그 사이트에서 가장 돋보이는 분 중 한 분이 "carella "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분이었다. 87분서 시리즈에서 가장 많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인 '스티브 카렐라'형사에서 유래된 닉네임이다.

 

세월이 흘러 좁디 좁은 미스터리 장르 소설 바닥이다 보니 온라인 상에서 동경하는 고수였던 carella 님과 알고 지내게 되었다. 몇 년전 carella 님은 '미스터리 소설 애독자가 출판사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책을 직접 출판한다'라는 오랜 꿈을 실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출판사를 차리게 되면 꼭 내고 싶었다는 87 분서 시리즈를 만들어 독자들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국내에서 가장 에드 맥베인과 87분서 시리즈에 대해 정통한 독자가 출판인이 되어 직접 만들어 낸 책인 것이다. 본문 뒤에 수록된 풍성한 해설이 이를 증명한다.

 

출판 시장이 유래없는 불황의 시기를 겪으며 어려운 와중에 고군분투하고 있는 carella 님의 건투를 빈다. 이 책은 꼭 많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적어도 그만한 재미는 충분히 갖고 있다. 깔끔한 장정의 책등을 보며 이 책이 시리즈로 줄줄이 나와서 내 책장의 한 켠을 장식하고 있는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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