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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모자 미스터리 ㅣ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기원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평점 :
중학교 3학년 겨울, 연합고사를 치르고 빈둥거리며 지내던 나는 수업이 일찌감치 끝나자 영화를 보러 시내에 나갔었다. 영화 관람이 끝나고 즐겨 가던 서점에 들렀다.
당시 해문 출판사에서 발행 중이던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에 열광하고 있던 나는 크리스티 문고가 꽂혀 있는 서가 부터 찾았다. 몇 달 간격으로 해문의 빨간 책, 애거서 크리스티 문고가 목록을 늘려 가던 시기였다. 근간으로 예정돼 있는 <화요일 클럽의 살인>, <메소포타미아의 죽음> 같은 책들을 서점에서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하지만 이미 바로 그 전날 크리스티의 신간을 두 권이나 샀기 때문에 뭔가 다른 살만한 책을 찾아 보려고 했던 것도 같다.
'그래, 이제 크리스티 말고 다른 작가의 책들도 좀 읽어봐야 겠다.'란 마음으로 서가를 훑어 보다 보니, 해문의 추리 걸작선이 이전의 세로 쓰기 판을 개정해서 새로 발행된 것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집어 들었던 책은 다름 아닌 전설의 걸작 <환상의 여인>. 크리스티 문고는 1500원인데, 이 책은 비싸다. 2800원.
표지가 참으로 옛스럽도다.
그러고 나서 또 근처에 있던 다른 서점에 들렀더니 내 눈에 확 들어오는 파란 색을 띤 문고본이 있었다.
'오오라, 새로운 미스터리 문고가 나왔나 보다.'
그것이 바로 지금은 제법 희귀한 아이템이 된 '자유 추리 문고'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자유 추리 문고는 해문의 크리스티 문고처럼 2-3권 씩 순차적으로 발행된 것이 아니라 제법 일시에 많은 책이 한꺼번에 나왔던 것 같다. 물론 초판 발행일자와 당시 내가 자유 추리 문고를 서점에서 발견했을 때와는 6개월 정도의 시간적 간격이 있었지만, 그때에는 이미 50권의 목록이 서가를 꽉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미스터리에 대한 지식은 <세계의 명탐정 50인>으로 쌓아 올린 것이 전부였던 당시에도 자유 추리 문고의 목록은 꽤나 익숙한 작가들과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심하던 내가 '유명 작가의 데뷰작'이라는 이유로 골라 잡은 책이 다름 아닌 <로마 모자의 비밀>이었다.
1986년과 2011년의 간극. 껍데기는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
책을 산 날짜와 서점을 꼼꼼하게 책에 적어둔 관계로 책을 샀던 그날의 상황은 비교적 생생하게 옮길 수 있지만 정작 <로마 모자의 비밀>에 대한 독후 감상은 그다지 변변히 기억에 남아 있지 못하다. <환상의 여인>은 미친듯한 속도로 읽어 버렸지만, <로마 모자의 비밀>은 두 권이기도 하고, 내용도 그다지 속도감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읽었던 기억 정도만이 남아 있다. 팬더 추리 문고로 초등학교 때 읽었던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보다 재미없게 읽었던 것은 분명하다.
엘러리 퀸에 대한 본격적인 애정과 탐독은 그로부터 10여 년의 시간이 더 지난 후 시그마 북스로 쌓아 올린 것이 대부분이지만, 최초의 만남은 아동판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이고 최초로 접한 완역본은 자유 추리 문고였던 것이다.
시그마 북스 이후 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엘러리 퀸이 돌아왔다. 국내에 발간된 엘러리 퀸의 모든 작품들을 이미 소장하고 있지만, 순조로운 시리즈 출간을 응원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너무 오래전에 읽었던 지라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은 <로마 모자 미스터리>를 새로 사서 읽게 되었다. 유일하게 시그마 북스로 갖고 있지 않은 국명 시리즈이기도 하다.
25 년여만에 읽은 <로마 모자 미스터리>는 기대보다 재미있었다. 국명 시리즈를 관통하는 엘러리 퀸의 논리는 '소거법'이고, 그 첫작품인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서도 충분히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독자에의 도전을 통해 진정한 논리 미스터리를 표방한 엘러리 퀸은 이 후 일본의 신본격 세대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가장 충실하게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작품을 읽지 못한 작가라서 섣불리 언급하기는 좀 두렵지만 노리즈키 린타로나 구라치 준도 근사한 계승자로 불릴 수 있을 것 같다.
천상 직업이 논리를 추구해야 하는 개발자인 나는 이러한 소거법에 의한 범인 색출이 언제 봐도 짜릿하다. 오히려 엘러리 퀸의 중후기 작품들보다 초기 작을 더 좋아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반 다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지만, 이런 완벽한 논리적 추리 기법은 엘러리 퀸에 의해 완성되고 제창되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많은 후배 작가들이 그를 따르고, 모방하고, 넘어서고 싶어하는 것일 것이다.
처녀작이기에 접할 수 있는 몇 가지 재미있는 설정들도 이 작품의 가치에 빛을 더한다. J.J. 맥의 서문은 퀸 독자들에게 좋은 호사거리임에 틀림없다. 일찌감치 은퇴해서 결혼하고 이탈리아에서 유유자적 살아가는 엘러리는 누구이며, 중년이 되도록 독신인 채 왕성한 추리 작가와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라이츠 빌의 엘러리는 누구란 말인가. 당시에는 버나비 로스의 필명을 보고 J.J. 맥의 서문을 떠올리며 의심하는 독자들이 없었을까. 등등.
전성기의 걸작들에 비하면 소설적 재미나 짜릿한 반전, 그리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명쾌함은 다소 부족하고 소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로마 모자 미스터리>는 거장이 이후로 쌓아올린 커다란 탑의 주춧돌로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