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찌들과의 생활도 안정국면에 돌입. 이제서야 옥찌들의 성격 파악도 좀 되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경우도 조금 알 것 같다. 다른분들 다 눈치채고 알고 있는걸 난 이제서야 알게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얼마 전에 옥찌랑 한의원에 간적이 있는데 한의사가 이것저것 물어보며 '지희는 아토피가 있으니까 과자랑 아이스크림 사탕이랑은 되도록이 아니라 아예 먹지마.' 라고 하자, 옥찌는 '나도 다 아는데.' 라고 말하며 가소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 다음날 어린이집에서 애들을 데리고 나오는데 지희 선생님께서 옥찌가 생일잔치 하면서 통닭을 먹는데 아토피 때문에 안 먹는다고 했다는 말을 전하셨다. 옥찌에게 기특하다며 우리 지희는 앞으로 피부도 깨끗해지고 건강해질거라고 했다. 그러자 옥찌는 그럴줄 알았다는듯이 웃는데 나도 좀 웃긴게 내가 입이 닳도록 말할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걸 지도 다 아는걸 한의사가 말했다는 이유로 저렇게 좀 지키는 시늉을 하고. 갑자기 스키너의 실험까지 생각난다.

 지민이가 한번씩 떼를 쓸때면 최소한 세번은 얼르고 달랜다. 거의 여기서 멈춘적은 한번도 없다. 그럴때면 때리고 소리를 지르는데 끝까지 자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다 요며칠 자기 고집이 다할때까지 놔두기도 하고, 알아듣게 짧게 훈육을 했더니 조금 나아진듯 하더니 어제는 나아진 며칠걸 죄다 몰아 왕짜증을 부려 나한테 많이 혼났다. 씩씩대다 내가 얼르자 훌쩍대며 우는데 맘 아파 혼났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똥치똥치 하며 장난을 한다. 보니까 낮잠을 못자서 괜히 짜증을 내는거였는데 나도 짐이 많고 힘들어 같이 짜증이 나있어 잘 못받아줬던거였다. 어른들이라고 얼마나 세련되게 짜증을 감출까마는 울 민이가 좀 더 충동성을 억제하고 조용히 자신의 기분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긴하려나? 양육하기 어려운 아이일수록 머릿 속에선 굉장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거야란 생각이 가끔은 작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충동성만큼 에너지가 넘치고, 산만한만큼 꿈틀거리는 창의적인 장난이 많이 있으려니, 사랑할때 섬세해서 좋았던 점이 헤어질때면 쪼잔해서 싫다는 고전적인 분류가 아니어도 충분히 인내와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단 생각이다.

 요즘 민이는 책의 그림을 보며 자기가 이야기를 지어낸다. 지희는 책을 한권 읽을때마다 돼지에게 동전 하나씩을 준다니까 신이 나서 노트에 기록까지 하면서 읽다가 요샌 그것도 시들. 잘때면 성경책을 한번 훑어보고 잔다. 읽는것 같진 않고 아무래도 폼같긴 한데 폼치곤 꽤 진지하다. 요 녀석이 이모를 따라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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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8-09-21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민이는 '사과가 쿵'을 보고 있군요. 지희가 보는 그림책은 모르겠지만 그림이 맘에 들려고 하는걸요~ ^^
아이를 돌보며서 순간 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이 참 많더라구요.

Arch 2008-09-2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순이동생 영이란 책이에요.
 


 어쩌자고 밤에, 그것도 비가 질척거리게 오는 밤에 산길을 걸을 생각을 했을까. 모든 것은 터무니없는 자신감에서 비롯됐다. 낮에도 걷던 길을, 세상에 내가 여자라고 못걸을 수 있나. 아주 금방이라고. 빠른 걸음이면 20분 안에 갈 수 있어. 비가 오지만 사람 하나 없겠어? 사람이 없으면 또 어때. 이런 날 누군가를 기다려 해꼬지라도 할라치면 이 비에 벌써 감기에 걸려서 집에 들어갔을거야.

 들어가긴 누가 들어가고, 사람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새소리 풀벌레들도 다 숨어버렸는지 빗소리에 묻힌 발자국 소리만 뭉개져 들려왔다. 한번 실없이 웃으며 허허, 밤공기 좋군. 하고 싶은데 걸음만 재촉하게 됐다. 누구라도 만나면 나도 몰래 으악 소리를 지를만치 밤은 깊고, 산도 깊었다.

그때,

 저벅저벅 누군가의 소리가 났다. 슬쩍 뒤를 돌아다보니 등치가 큰 남자 한명이 보였다. 그치가 내가 뒤돌아본걸 못봤길, 내가 자기를 의식하고 있다는걸 눈치채고선 힘을 쓰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길. 제발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는 행인1이길. 남자의 걸음은 빨랐다. 그런데도 좀체로 나와의 보폭이 좁혀지지 않았다. 내가 표시 안 나게 걸음을 늦추는데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게 느껴졌다. 남자는 왜 한밤중에 산속을 걷는 걸까. 밤중에 돌아다니는 여자를 보면 이상하게 흥분하거나 그러는 사람은 아니겠지? 살인의 추억이 자꾸 생각났다. 빗소리와 음악 소리 그리고 살인. 안 돼. 다른걸 생각해! 지금 어디쯤 따라온걸까. 수작을 걸면 어떡하지. 아냐, 그냥 행인1일거야. 그냥 밤중에 산속을 그것도 비오는 산속을 걷고 싶어하는 사람일거라고. 그런 사람이란게 더 이상해.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내 뒤에서 걸어오는거냐고.

 그러다 어느 지점에선가 훅

 그가 나를 스쳐지나갔다.

 그러니까 아무런 사심도 별다른 의식도 없었던거다. 그 역시 나에 대해 행인2정도의 감정을 가진, 어쩌면 아무런 의식도 안 한 사람이었던거다. 게다가 뒤돌아봤을 때 봤던 커다란 체구가 아니었다. 나만한 체구에 운동복 차림. 운동하다 비를 만난거군. 아냐, 체구가 작은 사람의 독특한 성적취향을 아는데, 아냐. 상황 종료. 스쳤을 뿐이라니까! 과대망상과 상상력을 탓했다. 그의 빠른 걸음을 뒤쫓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같이 걸었다. 행여 대사가 있는 행인3이 등장했을 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허벅지에 쥐날 정도로 잰걸음으로 그를 좇다보니 내가 사는 동네로 가는 산의 출구가 보였다. 숨을 몰아쉬곤 하마터면 빠르게 걷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고맙단 말을 할뻔했다.

 비르지니 데팡트는 '킹콩걸'에서 여자들이 밤에 돌아다니려면 위험을 감수할 수 있어야한다고 했다. 애초의 의도는 감수였는데 돌이켜보니 감수의 대상도 내가 어떤걸 감수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는 상태였다. 이래서 '우물안 개구리'라니까.

한때 난 우스개 소리로 만약에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입을 아, 벌리고선 아무런 행위도 못하게 한다거나 상대방의 성기를 입으로 물어뜯어 흡사 쇼생크 탈출의 앤디가 구사했던 협박도 해볼 생각이었지만, 과연 그런 상황에서 내가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폭력적인 상황에 맞서 싸우거나 내가 가진 한계치까지 끌어올려 저항하기보다는 비굴하고, 형편없이 헛된 거짓말만 늘어놓았던 난데 그토록 충실하게 성기적인 폭력 앞에서 어떤식으로 나올지 어떻게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한밤중 비오는 산속의 발자국은 호신술이라도 익혀야하는건 아닐까란 꽤 저급한 해결책만 남겨놨다. 어쩌면 그건 어디든 갈 자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가져야할 그렇게 저열한 것만은 아닌 일이란 생각도 따라붙었다. 안 가면 그만이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싶은 순간에 갈 수 있는 자유는 어떻게 갖을 수 있을까란 지점에서 생각은 다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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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네스잔은 신기도 하여 자꾸 맥주 생각이 나게 한다. 금요일 밤, 전날과 다음날과도 다르게 시원한 맥주 한잔 하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들썩. 지인들을 소환해 집에서 조촐한 모임이라도 갖으려고 했더니만 불발이 되고, 복분자와 얼음을 믹서에 갈아서 먹는데 자꾸 맥주 생각이 간절해진다. 딱 한잔만 여한없이 딱 한잔만 먹으면 금세 행복해서 발을 맨땅에 통통 굴려대며 징징 나 이렇게 금요일에 기분이 좋아도 되냐고 할판인데, 그래서 술술 노래라도 흘러나와 그만 먹은 술보다 더 취해 쳉쳉 먼 하늘 보며 넋나간 웃음이라도 흘릴텐데......

기네스잔은 그립감이 좋다. 다섯 손가락으로 살며시 잡아도 금세 다정하게 안겨온다. 새끼 손가락을 살짝 엄지 방향으로 돌려도 너끈하다. 자, 이제 준비가 됐으니 날 부드럽게 마시기만 하면 된다는 투다. 복분자와 얼음 알갱이는 폴라포 포도맛이 난다. 그런대로 나쁘진 않다. 이 밤에 초췌한 몰골을 24시간 형광등이 쨍한 곳에 들이밀고 맥주 사먹을 맛이 나야 말이지. 기네스잔이라면 복분자 샤베트 10잔이라도 문제없다. 뭐든 자꾸 먹다보면 감각은 무뎌지고 이내 취하는건 똑같을테지.

 작년까지만해도 어느 순간 일정량의 알코올이 필요할 때가 오리라곤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인생이 적당한 것처럼 주량도 적당했고, 적당할 정도로 마신 술은 내게 적당한 만족감을 줬다. 적당함을 벗어나는건 지금이 적당하지 않다는 뜻일까? 실은 적당한 세계는 곧 붕괴되니 어서 기네스잔이라도 잡으란 마음의 소리를 무의식 중에 느낀걸까?

 혼자 마시면 술은 당췌 늘지를 않는다.  한손엔 복숭아를 다른 한 손으론 시를 쓴다는 시인이 키츠였던가, 그가 표현한 농밀한 감각의 순간을 따라갈 수야 없어 '첫 맥주 한 모금'은 들레르 씨에게 맡기겠다.
  

첫 맥주 한 모금
                             필립 들레르

 

 중요한 것은 딱 한 잔이다. 그 다음에 마시는 맥주는 마시는 시간만 점점 더 길어지고, 평범해 진다.

그 다음 잔들은 미지근하고, 들척지근하고 지리멸렬하게 흥청댈 뿐이다.

마지막 잔은 어쩌면 끝낸다는 환멸의 감정 덕택에 어떤 힘같은 것을 되찾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맨 처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첫 잔은! 목구멍이라고?

첫 잔은 목구멍을 넘어가기 전에 시작된다. 입술에서부터 벌써 이 거품 이는 황금빛 기쁨은 시작되는 것이다.

거품 때문에 맥주는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그리고는 쓴 맛을 걸러낸 행복이 천천히 입천장에 닿는다.

첫 잔은 아주 길게 느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벌컥벌컥 금방 마셔 버린다.

첫 잔은 본능적인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맥주 첫 잔이 주는 기쁨은 하나의 문장처럼 모두 기록된다.

이상적인 미끼 역학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많지도, 지나치게 적지도 않은 적당한 맥주의 양이다.

맥주를 들이켜면, 숨소리가 나고, 혀가 달싹댄다.

그리고 침묵은 이 즉각적인 행복이라는 문장에 구두점을 찍는다.

무한을 향해서 열리는, 믿을 수 없는 기쁨의 느낌..

동시에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가장 좋은 기쁨은 벌써 맛보아 버렸다는 것을. 우리는 술잔을 내려놓는다.

네모 난 압지로 만들어진 컵 받침 위에 올려 놓은뒤, 저만치 밀어놓기까지 한다.

우리는 맥주 색깔을 음미한다. 가짜 꿀, 차가운 태양, 우리는 모든 지혜와 기다림을 동원해서 지금 막 이루었다가

또 지금 막 사라져 버린 기적을 손에 넣고 싶어한다. 우리는 유리잔 바깥에 씌어 있는 맥주 이름을

만족스럽게 읽어본다. 컵과 내용물이 서로 질문을 던져대고, 텅빈 심연속에서 서로무언가 말을 주고 받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우리는 순금의 비밀을 간직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비밀을 주문으로 만들어 영원히 소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태양이 와서 빛의 방울을 흩뿌려 놓은 하얀색 작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실패한 연금술사는 황금의 외양만을 건져낼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맥주를 마실수록 기쁨은 더욱더 줄어든다. 그것은 쓰라린 행복이다. 

우리는 첫 잔을 잊기위해서 마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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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9-20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커피도, 첫 한모금이 최고

무스탕 2008-09-20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소주도, 첫 잔이 최고
 

속이 안 좋아 골골대고 있는데 아빠가 밥 먹으라며 방문을 두드리고

기다시피 나가선 밥 못먹는다는 말을 전하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울 엄마

-나온 김에 보리차 좀 끓이고 가.

아, 엄마.

나만 미워서 그러는줄 알았는데...

어느날엔 동생이 아파서 방에 누워 있는데

엄마가 부침개를 먹으라며 불러냈다고 했다.

동생이 아파서 먹기 싫다고 하자,

엄마,

-그럼 와서 부쳐.

아, 울 엄마.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날 위해 엄마가 준비한건 

따뜻한 밥도, 딸이 좋아하는 뭐뭐도 아닌 

마늘 왕창. 

내가 마늘 까는걸 너무 좋아한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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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9-19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완전~

순오기 2008-09-19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대단한 오마니셩!
그게 바로 아픔에서 해방시키는 비법이란 걸 아시나요, 시니에님?^^

Arch 2008-09-19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이번엔 엄마팬 되시는거?
순오기님~ 아, 그것까진 생각 못했지만, 흠 설마...
 

 사단은 엄마에서 시작됐다. 옻 오른다며 굳이 몇시간을 들여 염색을 하던 아빠에게 뽕오디 염색약을 권하신건 엄마였으니까. 엄마는 다른 사람들의 사용 후기까지 전하며 아빠가 일하는 와중에도 전화를 해서 이번 추석엔 꼭 당신께서 권해준 염색약을 하란 펌프질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모두들 정말 대단한, 옻이 안 오르는 염색약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도 좀 신나하셨다. 10분이면 끝났고, 염색도 꽤 잘 됐으니까.

 저녁부터 간질거리던 머리가 아침이 되어선 퉁퉁붓고 진물이 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미안함에 주책스런 말들을 쏟아내고, 아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물만 닦아내시는 형국. 응급실에 가서 주사 맞고, 약도 드셨지만 차도가 없었다. 전에 다리에 염증이 생겼을 때 계란 노른자를 발랐던걸 생각해내 권해드리고, 인터넷으로 옻오를 때 어떻게 해야는지도 찾아봤다.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삼촌이 나타나셨다.

 삼촌은 한의사였던 외할아버지께 침을 배우셨다. 정식으로 자격증을 못따 삼촌이 침을 놓는건 불법의료행위였지만 가끔씩 가족들한테 침이나 뜸을 놔주곤 하셨다. 삼촌은 아빠 머리에 침을 놓더니 약쑥을 달여 감으면 좀 나아질거라며 빈둥대고 있는 나를 끌어내 댁이 있는 하제로 데리고 갔다. 인천에서 오신 이모분 내외도 드러누워 계시다 바람 쐰다며 동참하셨다.

 약쑥을 차에 싣고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삼촌께서 슈퍼를 들르자고 하셨다. 필요한게 있으시나보다 했더니 술을 사신다고 했다. 집에 가시면 저녁 드실 수 있을텐데 왜 그러시나 싶어 싫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좀 궁시렁대니 차 안에서 먹는 술맛이 꿀맛이라는둥, 말도 안 되는 핑계만 대셨다. 삼촌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억지를 부리실 때면 참 곤란해진다. 술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염전을 골프장으로 바꾼 곳을 구경해야겠다고 하셨다. 그길로 가면 빙빙 돌게 뻔한데도 상관없으시단다. 무슨 골프장을 구경해, 퉁퉁불은 소리를 내놓고 삼촌이 말씀하신 길로 들어섰다. 골프장을 지나 한참을 산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잠깐만 세워봐. 삼촌 소피 좀 봐야겠다.

 정말! 우리 삼촌 오늘 너무 버라이어티한데 하며 체념한 채 길가에 차를 세웠다. 삼촌은 적당한 곳에 차를 다시 세우라고 하더니 나도 내리라고 하셨다. 점입가경, 한번만 톡 건들면 바로 뚜껑을 제치고 끌어오를 것처럼 부아가 나있는데 이모가 그러신다.

 여기, 아빠 있는데 아냐?

 아,

 우린 잡목으로 우궈진 산길을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그제야 오해도 미움도 가시고 저무는 날의 처량한 심보만 남았다. 산새가 노래하고, 풀벌레들은 남은 여름을 아쉬워하며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이모부는 맘에 걸렸는데 이렇게 장인어른 뵙는다며 두런두런 말을 건네고, 삼촌은 엊그제 아버지가 꿈에 나타났는데 이렇게 찾아왔어요 하셨다. 술을 따라 드리고, 당신께서 피시나 싶었던 담배를 무덤에 꽂아드렸다. 생전에 담배를 좋아했던 아버지란 말도 덧붙여. 종교 때문에 절을 하진 못한채 어색하게 고사리가 참 많다며 딴청을 피우시는 이모도, 삼촌이 건네주시는 소주잔을 봉분에 슬쩍 흘리는 나도 겸연쩍긴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다채로운면들을 내가 잘 알고 있는, 익히 보아와서 뻔한 측면으로만 봐왔던 과오를 매번 저지르고 있다. 삼촌의 장난기 가득한 능청을 모험을 시작하려는 흥미진진함이 아니라 또 뻔한, 굳이 안 했으면 좋았을 일로 봐왔다. 나 역시 능청스러움이 아니면 표현 못할 것들을 가지고 살아갈 어른인데도 말이다.

 어느 날인가 어김없이 결혼 얘기를 꺼내는 친척들 속에서 삼촌이 입모양으로 '광주, 광주' 하셨던게 생각난다. 광주는 형부가 사는 곳. 광주의 의미인즉, 광주에 사는 사위 녀석에게 남자 하나 알아보겠단 말씀. 광주를 말한 것도, 내심 속내를 말 안 하고 능청을 떤 것도 다 삼촌. 그 안에 숨겨진 삼촌의 면면을 내 편할대로만 봐버린건 나. 삼촌과 나 사이의 간극만큼, 아니 내가 누군가를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보다 더 많이 죄송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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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09-18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촌의 마음이 참 와닿네요.

Arch 2008-09-18 22:31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저도 와닿아요. 머리에 큰 물음표가 있는 누군가의 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