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은 엄마에서 시작됐다. 옻 오른다며 굳이 몇시간을 들여 염색을 하던 아빠에게 뽕오디 염색약을 권하신건 엄마였으니까. 엄마는 다른 사람들의 사용 후기까지 전하며 아빠가 일하는 와중에도 전화를 해서 이번 추석엔 꼭 당신께서 권해준 염색약을 하란 펌프질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모두들 정말 대단한, 옻이 안 오르는 염색약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도 좀 신나하셨다. 10분이면 끝났고, 염색도 꽤 잘 됐으니까.

 저녁부터 간질거리던 머리가 아침이 되어선 퉁퉁붓고 진물이 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미안함에 주책스런 말들을 쏟아내고, 아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물만 닦아내시는 형국. 응급실에 가서 주사 맞고, 약도 드셨지만 차도가 없었다. 전에 다리에 염증이 생겼을 때 계란 노른자를 발랐던걸 생각해내 권해드리고, 인터넷으로 옻오를 때 어떻게 해야는지도 찾아봤다.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삼촌이 나타나셨다.

 삼촌은 한의사였던 외할아버지께 침을 배우셨다. 정식으로 자격증을 못따 삼촌이 침을 놓는건 불법의료행위였지만 가끔씩 가족들한테 침이나 뜸을 놔주곤 하셨다. 삼촌은 아빠 머리에 침을 놓더니 약쑥을 달여 감으면 좀 나아질거라며 빈둥대고 있는 나를 끌어내 댁이 있는 하제로 데리고 갔다. 인천에서 오신 이모분 내외도 드러누워 계시다 바람 쐰다며 동참하셨다.

 약쑥을 차에 싣고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삼촌께서 슈퍼를 들르자고 하셨다. 필요한게 있으시나보다 했더니 술을 사신다고 했다. 집에 가시면 저녁 드실 수 있을텐데 왜 그러시나 싶어 싫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좀 궁시렁대니 차 안에서 먹는 술맛이 꿀맛이라는둥, 말도 안 되는 핑계만 대셨다. 삼촌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억지를 부리실 때면 참 곤란해진다. 술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염전을 골프장으로 바꾼 곳을 구경해야겠다고 하셨다. 그길로 가면 빙빙 돌게 뻔한데도 상관없으시단다. 무슨 골프장을 구경해, 퉁퉁불은 소리를 내놓고 삼촌이 말씀하신 길로 들어섰다. 골프장을 지나 한참을 산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잠깐만 세워봐. 삼촌 소피 좀 봐야겠다.

 정말! 우리 삼촌 오늘 너무 버라이어티한데 하며 체념한 채 길가에 차를 세웠다. 삼촌은 적당한 곳에 차를 다시 세우라고 하더니 나도 내리라고 하셨다. 점입가경, 한번만 톡 건들면 바로 뚜껑을 제치고 끌어오를 것처럼 부아가 나있는데 이모가 그러신다.

 여기, 아빠 있는데 아냐?

 아,

 우린 잡목으로 우궈진 산길을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그제야 오해도 미움도 가시고 저무는 날의 처량한 심보만 남았다. 산새가 노래하고, 풀벌레들은 남은 여름을 아쉬워하며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이모부는 맘에 걸렸는데 이렇게 장인어른 뵙는다며 두런두런 말을 건네고, 삼촌은 엊그제 아버지가 꿈에 나타났는데 이렇게 찾아왔어요 하셨다. 술을 따라 드리고, 당신께서 피시나 싶었던 담배를 무덤에 꽂아드렸다. 생전에 담배를 좋아했던 아버지란 말도 덧붙여. 종교 때문에 절을 하진 못한채 어색하게 고사리가 참 많다며 딴청을 피우시는 이모도, 삼촌이 건네주시는 소주잔을 봉분에 슬쩍 흘리는 나도 겸연쩍긴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다채로운면들을 내가 잘 알고 있는, 익히 보아와서 뻔한 측면으로만 봐왔던 과오를 매번 저지르고 있다. 삼촌의 장난기 가득한 능청을 모험을 시작하려는 흥미진진함이 아니라 또 뻔한, 굳이 안 했으면 좋았을 일로 봐왔다. 나 역시 능청스러움이 아니면 표현 못할 것들을 가지고 살아갈 어른인데도 말이다.

 어느 날인가 어김없이 결혼 얘기를 꺼내는 친척들 속에서 삼촌이 입모양으로 '광주, 광주' 하셨던게 생각난다. 광주는 형부가 사는 곳. 광주의 의미인즉, 광주에 사는 사위 녀석에게 남자 하나 알아보겠단 말씀. 광주를 말한 것도, 내심 속내를 말 안 하고 능청을 떤 것도 다 삼촌. 그 안에 숨겨진 삼촌의 면면을 내 편할대로만 봐버린건 나. 삼촌과 나 사이의 간극만큼, 아니 내가 누군가를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보다 더 많이 죄송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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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09-18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촌의 마음이 참 와닿네요.

Arch 2008-09-18 22:31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저도 와닿아요. 머리에 큰 물음표가 있는 누군가의 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