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자고 밤에, 그것도 비가 질척거리게 오는 밤에 산길을 걸을 생각을 했을까. 모든 것은 터무니없는 자신감에서 비롯됐다. 낮에도 걷던 길을, 세상에 내가 여자라고 못걸을 수 있나. 아주 금방이라고. 빠른 걸음이면 20분 안에 갈 수 있어. 비가 오지만 사람 하나 없겠어? 사람이 없으면 또 어때. 이런 날 누군가를 기다려 해꼬지라도 할라치면 이 비에 벌써 감기에 걸려서 집에 들어갔을거야.

 들어가긴 누가 들어가고, 사람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새소리 풀벌레들도 다 숨어버렸는지 빗소리에 묻힌 발자국 소리만 뭉개져 들려왔다. 한번 실없이 웃으며 허허, 밤공기 좋군. 하고 싶은데 걸음만 재촉하게 됐다. 누구라도 만나면 나도 몰래 으악 소리를 지를만치 밤은 깊고, 산도 깊었다.

그때,

 저벅저벅 누군가의 소리가 났다. 슬쩍 뒤를 돌아다보니 등치가 큰 남자 한명이 보였다. 그치가 내가 뒤돌아본걸 못봤길, 내가 자기를 의식하고 있다는걸 눈치채고선 힘을 쓰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길. 제발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는 행인1이길. 남자의 걸음은 빨랐다. 그런데도 좀체로 나와의 보폭이 좁혀지지 않았다. 내가 표시 안 나게 걸음을 늦추는데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게 느껴졌다. 남자는 왜 한밤중에 산속을 걷는 걸까. 밤중에 돌아다니는 여자를 보면 이상하게 흥분하거나 그러는 사람은 아니겠지? 살인의 추억이 자꾸 생각났다. 빗소리와 음악 소리 그리고 살인. 안 돼. 다른걸 생각해! 지금 어디쯤 따라온걸까. 수작을 걸면 어떡하지. 아냐, 그냥 행인1일거야. 그냥 밤중에 산속을 그것도 비오는 산속을 걷고 싶어하는 사람일거라고. 그런 사람이란게 더 이상해.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내 뒤에서 걸어오는거냐고.

 그러다 어느 지점에선가 훅

 그가 나를 스쳐지나갔다.

 그러니까 아무런 사심도 별다른 의식도 없었던거다. 그 역시 나에 대해 행인2정도의 감정을 가진, 어쩌면 아무런 의식도 안 한 사람이었던거다. 게다가 뒤돌아봤을 때 봤던 커다란 체구가 아니었다. 나만한 체구에 운동복 차림. 운동하다 비를 만난거군. 아냐, 체구가 작은 사람의 독특한 성적취향을 아는데, 아냐. 상황 종료. 스쳤을 뿐이라니까! 과대망상과 상상력을 탓했다. 그의 빠른 걸음을 뒤쫓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같이 걸었다. 행여 대사가 있는 행인3이 등장했을 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허벅지에 쥐날 정도로 잰걸음으로 그를 좇다보니 내가 사는 동네로 가는 산의 출구가 보였다. 숨을 몰아쉬곤 하마터면 빠르게 걷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고맙단 말을 할뻔했다.

 비르지니 데팡트는 '킹콩걸'에서 여자들이 밤에 돌아다니려면 위험을 감수할 수 있어야한다고 했다. 애초의 의도는 감수였는데 돌이켜보니 감수의 대상도 내가 어떤걸 감수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는 상태였다. 이래서 '우물안 개구리'라니까.

한때 난 우스개 소리로 만약에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입을 아, 벌리고선 아무런 행위도 못하게 한다거나 상대방의 성기를 입으로 물어뜯어 흡사 쇼생크 탈출의 앤디가 구사했던 협박도 해볼 생각이었지만, 과연 그런 상황에서 내가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폭력적인 상황에 맞서 싸우거나 내가 가진 한계치까지 끌어올려 저항하기보다는 비굴하고, 형편없이 헛된 거짓말만 늘어놓았던 난데 그토록 충실하게 성기적인 폭력 앞에서 어떤식으로 나올지 어떻게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한밤중 비오는 산속의 발자국은 호신술이라도 익혀야하는건 아닐까란 꽤 저급한 해결책만 남겨놨다. 어쩌면 그건 어디든 갈 자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가져야할 그렇게 저열한 것만은 아닌 일이란 생각도 따라붙었다. 안 가면 그만이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싶은 순간에 갈 수 있는 자유는 어떻게 갖을 수 있을까란 지점에서 생각은 다시 이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