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직업 적성검사겸 취업성향분석이란 이름만 거창한 설문조사를 했다. 질문의 내용은 대부분 '그러니까 지금 취업을 하고싶으냐' 이건데 뜬금없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냐는둥 무단횡단은 하지 않느냐는둥의 질문이 섞여 있었다. 이게 근면성이나 준법정신이 투철한가를 가늠하는 척도라면 그 투박함이야말로 최고라고 할만하지만 뜬금없는건 확실했다. 대충대충 설문을 끝내고 딴짓을 하고 있는데 손언니가 낑낑대면서 설문지를 풀다가

-니, 무단횡단 그거 뭐라고 말했나.(손언니, 부산 출신이다.)

-응? 보통이라고 했는데.

-나는 오늘 아침만 해도 다섯번은 하고 왔어. 그런데 내가 뭐라고 했는줄 아나?

-뭐라고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설문조사, 이래서 믿을 수가 없다.

 우리 손언니는 설문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괄목할만한 직관을 보여주는데 특히 내가 춥다고 징징대자 선뜻 뛰어다니면 안 춥단 말을 해줘서 괜히 추워하는 나를 무색하게 만들고, 파마한 내 머리를 보고 남산같다고(산발이란 말 절대 아니다.) 말해서 남산같은 배는 들어봤어도 남산같은 머린 처음이라니까 뿌듯하게 웃는거다.

 손언니의 스타일도 상당하다. 전에는 미니스커트에 후드티를 입고 시험을 치러 나왔는데 사람들이 누가 중학생 딸을 둔 엄마로 보겠냐고 하니까 거만하게 막 웃으면서 자신이 섹시포즈 전문이라며 포즈를 취하는데 좀 보기 흉해서(언니는 이렇게 대해야 더 자극받고 재미있는 포즈를 취한다. 잡초 근성 비슷한) 막 구박을 했더니 부러워서 그러는거냐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서 내가 그 흉한 자세 인터넷에 올린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더니 '얼짱, 그거 말하는거가'라며 사람들 어이를 상실하게 했지만 내심 좀 귀여웠다. 뭘해도 귀여운 우리 손언니.

 손언니는 직업학교에 다니는걸 재미있어 한다. 자신에게 어디어디 학생이란 자격이 생겨서, 그냥 집에 있는 어디에 사는 누가 아니라 뭔가를 하고 있고 배우고 있다는 신분이란게 좋다고 한다. 공부하는 것보다 밥먹는걸 더 좋아하고, 술먹으면 가끔 결석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 이곳에 자신이 속해있다는걸 좋아하고 학교 다니는걸 재미있어한다. 수업 시간에 젊은 (남자) 동생들과 채팅하고, 동생들한테 '밥이야 맨날 먹는거 아냐, 내가 사주지'이러면서 배포를 자랑하기도 하고, 자기도 잘하면서 나보고 뭐뭐 가르쳐주면 사부로 모시고 충성을 다한다는 말로 날 한번씩 떠보기도 한다. 조금 우려되는 점은 내년에 이 과정이 끝나고 다시 다니려면 어떻게 제도의 헛점을 이용할지 궁리하는 것 정도? 그다지 치밀한 성격이 아닌지라 말뿐일거란걸 알고 있지만 혹시 내가 모르는 언니의 잠재력을 화락 발휘해서 재입학을 감행할지도. 이건 손언니의 에로틱한 잠재력?

 내일은 손언니가 밥을 싸오는 날인데 벌써부터 뭘 해올까 머릿속에서 드륵드륵 레시피를 돌리고 있다. 언니의 엉뚱한 발상과 끊임없이 말을 남발해 말의 희소성을 소거함으로써 청자의 주의를 흐트려놓은 다음 잽싸게 헛점을 찌르는 언술. 아마도 오랫동안 손언니를 좋아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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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분과 약주를 드시던 아빠.

-아빠 진지 드셔야지. 지금 차릴까.

이랬더니 웃으시면서 동생오면 드신다고 하셨다. 그러자 친구분께서 왜 그러느냐고 지금 먹지않냐고 했더니 울 아빠.

-쟤가 차리면 거지 밥상이고, 둘째가 차리면 왕자 밥상이라.

란 말씀을 하셨는데,

 아빠, 소근소근 말씀하셔도 다 들리거든! 그러니까 내가 밥 차리면 꽤 너저분하고 맛깔스러움은 애초의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데다 왜인지 찬밥 대우 받는단 말씀이신데 이건 순전히 오해다. 난 그저 설겆이할 그릇을 덜려고 조금 큰 그릇(거의 냄비)에 담아서 내는 것 뿐인데, 접시에 안 담아서 내는 것 뿐인데. 아저씨께서는 당황하셔서 그래도 저렇게 해야 나중에 살림 잘 한다는 소릴 인사치레로 해주셨다. 아빠 정말 그렇게 생각해?

 우리 아빠가 전에 내 외모에 대해서 하신 말씀도 웃겼는데 내가 하도 부엌데기처럼 지저분하게 하고 돌아다니자(머리는 안 감기 일쑤고, 옷은 치리-아빠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한데다 옷에 뭔가가 잔뜩 묻어있는) 심각하게 하신 말씀이

-너는 미운 얼굴은 아닌데 안 꾸며서...

라면 말끝을 흐리시길래

-그럼 나 꾸미면 좀 낫나?

이랬더니 차마 다른 말씀은 안 하시고 좀 씻고 다니란 얘기만 살짝 흘리셨다.

 어느 날인가는 생머리를 좋아하는 아빠 취향을 유감없이 드러내시면서 볶은 내 머릴 보곤 인물 버렸단 소릴 하시는거다. 그래서 그게 딸한테 할소리야라며 따졌더니

-내가 솔직한 사람이잖아.

이러시고.

 암튼, 예전엔 아빠한테 공부 조금 잘한걸로-이건 순전히 시골 학교에 다녀서이다.- 잘 우려먹고 다녔는데 요샌 말짱 갈굼만 당한다. 그래도 큰딸 포에버 모드는 가끔 나오셔서 어제는 갈비를 재는 엄마 옆에서 뭐를 넣어야 맛있다는 둥, 이건 이렇게 해야하는 둥 참견을 하시다 엄마가 그렇게 잘 알면 밤이나 좀 까란 소리를 하자, 갑자기 바쁜체를 하시는거다. 그래서 내가 큰소리로 '아, 난 밤 넣은 갈비 먹고 싶은데 밤을 깔줄 알아야지'라고 말하자 그럼 니가 까 이러시면서 칼 들고 생밤을 까시는거다. 물론 늘 그렇듯이 밤이 말라서 못까겠다며 느닷없이 버럭 화를 내는걸로 큰딸 포에버는 약간만 티내셨고.

 내년엔 아빠 환갑이시다. 그런거 할 필요 뭐 있냐고 말씀은 하시지만 그게 또 그게 아닌거다. 아, (지갑에 물주며) 이게 빨리 자라야 내년 아빠 생신 때 친척들이랑 밥이라도 먹는건데.-마지막은 개콘용 유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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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11-17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깐 설거지도 못하고, 밥도 못하고, 머리도 안 감고, 옷도 막 입고 다니고... 그외 기타 등등 ( '')

Arch 2008-11-17 22:22   좋아요 0 | URL
어머! 아프님과 제가 좀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설겆이는 못하는게 아니라(설거지가 맞나요?) 잘 하는데 설렁설렁 설렁탕 우리듯 하는거고, 밥은 좀 질어서 그렇지 먹을만은 해요. 머리는 남자 만날때는(여자 만날때도 가끔씩은, 울 아빠는 좀 무성적이죠.) 감고, 옷은 아, 이 부분에서만 의견일치가 있군요. 밥상을 좀 '그지같이' 차린다는 것 정도? 그지같이라고 하고, 이렇게 구구절절 구질구질 변명을 늘어놓으니 그외 기타 등등에서 방점을 찍어야할 것 같아요.

바람돌이 2008-11-17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지 밥상 왕자밥상 ㅎㅎ
거의 우리집이네요. 저도 먹는거 뭐 대충대충 이러는데 제 여동생은 솜씨도 솜씨려니와 깔끔하고 맛깔스럽게 차려내는 것 까지 잘하거든요. 뭐 그래서 편한 것도 있어요. 저한테는 아예 기대를 안하니... 시니에님도 편하시죠? ^^

Arch 2008-11-18 10:04   좋아요 0 | URL
당근이죠. 그래서 감수해야하는 부분 물론 있죠. 앞서의 갈굼 대상 일순위는 따놓은거고 가끔 실력 발휘라도 해볼라치면 무참하게 무시당하고, 행여 맛이 어쩌네 했다가는 주변에서 '저, 음식도 못하고 더럽고.. ' 막 이런 레이저 쏘임을 당하고.. 살림을 잘한다는거 대단히 멋진데 거의 모든 분야에서 못하는 저로선 ㅡ,.ㅜ;
 


샤워를 하고 옷을 입지 않았다. 물기를 수증기화해서(왠지 어마어마하다) 자연스럽게 몸을 말리려는건 아니었다. 숨어있는 살의 행방을 애타게 찾아내 인사라도 건네야겠다는 생각이 든건 벗고 돌아다닌 다음에야 떠올랐다. 그러니까 별다른 이유없이 한번 그래본거다.

거실을 어슬렁거리는 나를 본 엄마가,

-너 엉덩이에 그게 뭐니?

라고 물으실 때 살짝 민망했던걸 보면 확실히 작정한건 아니었던 것 같다. 눈을 반짝이며 엄마에게 얼굴을 바짝 갖다댄 후 다시 뒤돌아 넓은 면적의 엉덩이를 손끝으로 콕콕 찍어대며

-엄마 이건 그러니까 좀 야한건데, 울 엄마가 감당할 수 있으려나? 그러니까 이게 말야, 섹스할 때 물고 뜯고 할퀸 자국이야.

이랬다면 상당히 깨고 재미있을테지만 실상은 단순 멍자국에 불과했다. 여기, 굶는 인간 1인(그래봤자, 며칠, 몇주) 추가요.

어제까지만해도 한 개였던 멍이 오늘 보니 양쪽에 각각 하나씩 shift를 꾹 누르고 옮긴 것마냥 나란히 자리해있다.



그렇다. 요즘 인라인을 타고 있다.


완전 짠짜라한 뒷북 고지서다.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겠지만 기회가 잘 닿지 않았다. 뭔가를 시작하려면 의지와 애초의 의욕을 뒷받침해야 간신히가 됐고, 남들 다 한다고 하고 싶어지는거라면 애초에 난 뭘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단 느낌까지 들었다. 해서 단물 쪽 빠지고 그야말로 뒷북일 즈음에 인라인을 타기 시작했다.

걸을 때는 차 소리가 별로 안 들리는 곳이 좋고, 자전거를 탈 때는 울퉁불퉁 하지 않고 경사가 너무 심하지 않는 곳이 좋다. 걸음이라도 제대로 옮길 수만 있다면 다행인 며칠 전까지만해도 차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지 않는 공간만으로도 인라인타기에는 땡큐였다. 굳이 며칠 전이라고 한건 V자로 걷기 시작하던 실력이 며칠 사이에 좋아져서 이젠 조금씩 구를줄 알기 때문이다. 구를 수 있게 되면서 바닥의 굴곡이 느껴졌다. 단순하게 매끈한 아스팔트가 아니라 몸을 울렁이게 하고 다시 대오를 정비하게 하는 굴곡. 굴곡은 아직까지 부자연스럽고 종종 알아서 기게 만드는 착지법을 찾게 하지만 발바닥 아니 인라인 바퀴가 바닥에 닿는 느낌이 좋다. 발바닥의 모든 면적으로 바닥을 딛는게 아니라 쭈욱 미끌어지고 다시 다른쪽 발을 구른다. 지면을 발로 디디고 있다는 느낌이 생경해지는 순간 다른쪽 발이 다시 미끄러진다. 순환과 부드럽게 연결되는게 관건인데 발은 풍맞은 것마냥 떨리다가 혼자 갈지자로 뻗어대기 일쑤고, 다른발도 행여 질세라 정신없이 헤맨다. 그래도 이게 어디더냐. 앞으로 나가긴 하는거잖아.

아파트에서 인라인을 탄다고 돌아다니다보면 붐은 사라졌지만 고수는 죽지 않는단 말이 떠오른다. 과연 나보다야 낫지 싶은 정도가 아니라 월등한 숨은 인재들(거의가 어린 친구들)이 가끔씩 아파트의 코너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난 인도로 걷기만 해도 황송할텐데 인도 위, 하수구 창 위에서 바퀴를 굴리다니! 게다가 턴과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한 몇가지 동작들. 내가 쩔쩔매는걸 확인하는 그들의 얼굴엔 번뜩이는 자랑스러움이나 왜 못할까 싶은 표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무심함. 그들은 한없이 무심하게 방향을 틀어 겨울 바람처럼 쌩하고 사라진다. 같은 분야라도 레벨은 있고, 레벨의 상하에서 하수는 늘 고수의 뒤꽁무니만 바라볼 뿐이다.

내가 고수가 되는 날, 나는 슬쩍 웃어주는 여유를 보여줄 생각이다. 초보자여, 그대 갈길 퍽 멀지만 꾸준히만 한다면 까짓 인라인 정도야. 뭐 이런 메시지의 웃음일텐데 과연 상대방은 그렇게 읽을지, 과연 그런 날이 오긴할지. 그나저나 넘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야 인라인 진도가 팍팍 나간다는데 네이버 동영상 강의 아저씨는 인라인 타기의 정신은 안 알려주니 초보자,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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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11-17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하셈~~ 전 응원만... 같이 하자는 소리는 죽어도 안나와요.
그나저나 요새 우리집 애들 드디어 8살됐다고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가 인라인을 보내줬으면 좋겠다는데 참 고민중입니다. ㅎㅎ

다락방 2008-11-17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깜짝이야. 전 시니에님이 정말로 어머님께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줄 알고, 악, 어떻게 저런 말을!! 하고 완전 놀랐잖아요. ㅎㅎ


음..역시 시니에님이 무슨 글을 쓰셔도 저는 '이런쪽'으로만 키포인트를 잡아내는 것 같아요. -.-

순오기 2008-11-17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아가씨~ 글발만 그럴거라고 생각하지만.^^
인라인 응원할테니 열심히 타세요. 같이 하자는 소리 죽어도 안나오는 2인.ㅋㅋㅋ

무스탕 2008-11-17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라인.. 타고 싶었지만 기회가 요상하게 안 닿아 못타고 있는 1인입니다.
몇년전에요, 아는 동생 하나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하는 하키를 한다는거에요 @.@
신고 서 있기도 불편한 바퀴달린 그것을 타고 하키씩이나?!
부러웠지요.. ㅠ_ㅠ
열쒸미 갈고 닦으셔서 어린 친구들 부럽지 않게 타세요. 꼭!!

Arch 2008-11-17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들~의 공통된 의견은 같이 하자고는 못하겠다는건데 '절대 못하는게' 정말 있을까요? 제가 어설픈 초보라 저 역시 같이 하자고 말은 못하지만 은근 인라인 충동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으실 것 같은데. 겨울 지나고 날이 따뜻해지면 한번 도전해보면 좋을 것같아요. 바람돌이님은 해아한테 배우시고, 순오기님도 순오기님의 부지런함을 인라인에 막 쏟고, 무스탕님은 (아, 이렇게 부르면 자꾸 부비고 싶어서 몸이 간질거려요.) 기회를 만들면 되겠군요. 아아! 하키인데 하기라고 했어요. 어어머!(속닥속닥)

다락방님, 인라인 얘기하는데 첫머리를 저렇게 잡아대는 저는 어쩌구요. 다락방님 아직 양호하신거예요^^ 저는 그런쪽 전문입니다. 그런 얘기 안 들어있어도 '막' 잡아내요.

무스탕 2008-11-17 10:26   좋아요 0 | URL
어므낫~! 하기랑 하키랑 무슨 사이일까용~~ *_*

자, 오시구랴!! 내 비록 물질적 품이 넓진 못하지만 환상적 '바담 품(바람 풍이 아님. 혀 짧은 소리로 꼭 읽으셔야 함)' 이니 얼마든지 품어드릴수 있습니다. 오실때 옥찌들은 필수요원!! :)

Arch 2008-11-17 10:35   좋아요 0 | URL
뭐예요. 옥찌들이 필수 아니던가요? 그런데 옥찌들에다 정성이까지 무스탕님 집 한번 들었다 내려놔야할걸요~^^ 크크 고치셨네^^ 바담품은 최지우 발음 맞죠? 아, 난 혀가 너무 길어서 원, 되야 말이지^^(아침부터 죄송해요. 우리 선생님 말로는 쥐약 먹은 증상이라고 하던데)
 



 이곳은 홍대의 여느 까페와 다르지 않다. 좀 다른게 있다면 군산에 있다는 것 정도? 그저그런 비슷한 까페의 재탕 인테리어라고 생각해봄직한


창가의 의자, 조박사 백반이며 가정식 백반은 까페 분위기가 어슷거리는 바깥 풍경이겠지만.


아이팟으로 틀어주는 음악, 음향기기도 스테레오 타입이다.


인공 나무며 그 아래로 흩어진 책까지, 어쩜 이리 익숙하단 말인가.



오픈된 주방도 이젠 더이상 새로울게 없는, 디테일 빼고는 다른 곳과 그다지 차이가 없는 이 곳, 러블리


홍차며 커피가 아주 특별하게 맛있는 것도 아니다. 쿠키가 살짝 맛있긴 하지만 홀딱 반할 정도는 아니다.

 의자가 아주 편한 것도 아니고, 북까페처럼 읽고싶은 책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다. 칫릭까지는 기대 안 해도 총, 균, 쇠를 여기서 볼줄이야. 아니, 제목은 이토록까지 넣어서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목소리로 조잘대놓고는 왜이리 반감있단 소리만 하는걸까. 이 모든 부정문은 곧이어 펼쳐질  반전을 보여줄 것처럼 집요하다. 그러니까 이건 처음 몇번, 러블리에 대해서 잘 몰랐을 때 갖게된 산발적인 느낌이었다. 사장님이 나를 알아보고선 컬린스잔에 얼음을 가득 담아올때쯤이 되어서야 나의 러블리는 총총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러블리, 이곳은 정말 까페를 하고 싶은 누군가의 손길이 곳곳에 스며든 곳이며 번거로운 드립커피며, 증기식 커피까지, 자그마한 소도구까지 고르고 골랐을 누군가의 맘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누구나 꿈꿨겠지만 잘할 수 없었을 까페를 섬세하게 단장하고, 쿠키를 굽는 이 남자, 러블리의 사장을 볼때면  자신이 정말 좋아서 하는 일에 애정을 갖으면 바라보는 사람의 취향과는 별개로 감동을 줄 수 있다는걸 알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다찌마와 리가 내 취향과는 한뼘쯤 거리를 두면서도 감독이 이 영화, 정말 하고 싶어했구나 신나하면서 만들었겠다란 생각이 들자 혼자 키득대며 어깨를 들썩이며 영화를 보게됐던 것처럼. 

 그러자 이곳의 틈새와 일반적이라고 생각한 풍경마저 사랑스러워졌다. 좀 더 눈길을 준다면 곳곳에 숨겨진 아기자기한 소품과 차곡차곡 정리된 식기들이 보이고, 그러다 컵받침에마저 정감어린 시선을 주고야 말것만 같았다. 나는 이곳에 자주 드나들어 사장님이 직접 그렸을법한 귀여운 캐릭터 쿠폰에 도장을 쾅쾅 찍었고, 아마도 곧 달콤한 치즈케잌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웃는게 약간 어색한 이곳 사장님은 어떤 멘트를 날리며 (살갑게 대하는 타입은 전혀 아니다.)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맛있는, 러블리만의 느낌을 전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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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11-1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카페를 꿈꾸는 이들이 종종 있더만, 난 절대 노우~~~
누군가 카페를 한다면 난 가끔 즐기러 가고 싶을 뿐!
왜냐면 손님이 있든 없든 가게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게 싫어서 절대 못할 거 같거든요.ㅜㅜ

다락방 2008-11-17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니에님. 혹시 러블리의 사장님은 알라디너가 아닐까요? 막 알라디너였으면 좋겠어요. 흣.
저는 가끔 타인을 만나게 될 때 이사람은 알라디너일까 아닐까를 혼자 생각해보곤 하거든요. 그래서 "인터넷 서점은 어딜 이용하세요?" 를 묻기도 해요.

Arch 2008-11-17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 피속엔 자유분방함이 흐르고 있을 것 같아요. 지키는거 말고, 막 재미있게 노는거라고 생각하면 누군가 내 공간에 놀러왔다가 재미있게 놀다가는거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다락방님, 그분, 책 안 읽게 생겼는데. 책 읽게 생긴 얼굴은 뭔지 말해보라고하면 말도 못할거면서. 그래도 제가 슬쩍 한번 물어볼게요. 만약 정말 알라디너면 히히...(웃음의 의미를 다락방님이 자주 생각하는 '그쪽'하고 연관시켜도 무방함)

다락방 2008-11-17 13:02   좋아요 0 | URL
(덩달아) 히히..

Arch 2008-11-17 13:41   좋아요 0 | URL
(덩달아) 으 음...(그쪽의 소리로 상상해도 됨. ㅋㅋ 자꾸 이런다. 맛들였어요.)

다락방 2008-11-17 14:37   좋아요 0 | URL
아잉~ 난 몰라욧! >.<
 

 아빠가 울산에서 일하시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셨다. 할아버지의 등장과 더불어 오랜만에 보는 사람을 향한 옥찌들의 적극적인 편애가 펼쳐졌다. 옥찌들은 새로운 사람만 좋아해! 밥 먹을 때는 서로 할아버지 옆에 앉으려고 싸우고, 무슨 말만 떨어지면 심부름한다며 아웅다웅하고. 나참, 난 순식간에 부엌데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셋이서 눈꼴시게 잘 지내다가 잠시 아빠가 염색하시고 목욕을 하러 간 사이에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방에서 잠자코 방안을 어지르며 말썽을 피우는 내게 들리는 그들의 대화

아빠-지민아, 할아버지 담배 어디다 놨어.

옥찌-할아버지. 여기도 많네. 다섯개면 되지 않아? 

아빠-여섯갑 있었는데 하나는 어디다 둔거야?

민-(한참 있다가)내가 알려주면 안 혼낼거야?

아빠-(관대하게 껄껄 웃으시며) 응, 말해봐.

 대체 어떻게 한걸까? 잠시 뒤 고함소리와 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가봤다.

 민인 담배 한갑을 죄다 꺾어놨는지 이불을 걷은 곳에 담배의 잔해들이 무참하게 흩어져 있었고, 아빠는 몇개만 살짝 빼놓은줄 알았는데 다 분질러 놨다며 화를 내셨고, 민은 혼내지 않는다는 말만 믿고 진실을 말했다가 화를 당했다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지희는 연신

-지민아, 괜찮지? 누나가 있잖아.

라며 아니! 옥찌가 맞아? 싶을 정도로 침착하게 민을 달랬다.

 그 뒤 세 사람은 협상이 결렬된 세 정상들처럼 어색하게 있다가 고기를 먹으러 가는 자리에서 화해 무드가 무르익다가 선뜻 마이쭈를 사주는 할아버지의 호방한 면에 감동받아 극적으로 예전 관계로 돌아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옥찌들은 할아버지 손만 잡겠다고 이모를 밀치기도 했다. 다행히 나의 들러붙는 재주에 홀딱 속아 몇번 손을 잡아보긴 했다.

 집에 돌아와 놀이터 가기 전에 민은, 쌀통에 환약을 집어넣어 이모가 혹시나 심심할까 배려를 해줬고 아빠는 아빠대로 베란다에 나가셨다가 화분을 깨주는 가히 민의 할아버지다운 면모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오늘은 옥찌의 생일



 지희 고모가 떡케잌을 만들어서 보내주셨다. 저 귀퉁이 갉아먹은 자국은 물론 민이 솜씨. 촛불을 몇번이나 불어도 못끄고 노래 부를때는 쑥쓰럽다며 입모양으로만 따라부르런 옥찌.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 예뻤던 옥찌. 지금처럼 밝고 건강하게 자라길 바란다.... 등등. 잠자는 옥찌의 귓가에 가만 속삭이고 싶은 말들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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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11-15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트콤 작가가 되셔도 좋을 것 같아요. 아 옥찌와 민이, 거기다가 아버지의 협연까지. 멋진 연주(?)였어요. 그리고 옥찌의 생일을 축하해요~ 떡케이크 너무 맛있어 보이네요. 옥찌 인증샷도 필요해요!

웽스북스 2008-11-15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사랑스러운 일상이에요. 다섯개면 되지 않아? ㅋㅋㅋㅋㅋㅋ

할아버지 말을 믿고 다 이실직고하다니. 아. 순진한 민. (그래도 걸릴테지만 말이죠 ㅎㅎ)
옥찌~ 생일축하해 ^_^

Arch 2008-11-15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그거 베바 영향인거죠? ㅋ 옥찌 인증샷을 올리라고 하면 냉큼 올릴줄 알았죠? 네, 그러려고 했는데 동영상 밖에 없어요. 동영상 올리려다 네이버 링크도 안 되고 해서, 마노아님의 칭찬은 늘 최대치 같아요 흠흠^^(자만 모드 중)

웬디양님, 실제론 전투적인데, 사실 반전이 있는게 민은 자기가 혼날줄 다 안거예요. 그러니까 안 혼낼거지라며 확답을 받은거죠. 그러니까 민이 순진하단 웬디양님의 느낌은 절반만 맞는거랍니다. 그러니까, (<--얘 지금 뭐하는 중?) 전 지금 첩보 놀이 중입니다. 일러바치기라고도 하죠.

순오기 2008-11-16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대단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