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직업 적성검사겸 취업성향분석이란 이름만 거창한 설문조사를 했다. 질문의 내용은 대부분 '그러니까 지금 취업을 하고싶으냐' 이건데 뜬금없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냐는둥 무단횡단은 하지 않느냐는둥의 질문이 섞여 있었다. 이게 근면성이나 준법정신이 투철한가를 가늠하는 척도라면 그 투박함이야말로 최고라고 할만하지만 뜬금없는건 확실했다. 대충대충 설문을 끝내고 딴짓을 하고 있는데 손언니가 낑낑대면서 설문지를 풀다가
-니, 무단횡단 그거 뭐라고 말했나.(손언니, 부산 출신이다.)
-응? 보통이라고 했는데.
-나는 오늘 아침만 해도 다섯번은 하고 왔어. 그런데 내가 뭐라고 했는줄 아나?
-뭐라고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설문조사, 이래서 믿을 수가 없다.
우리 손언니는 설문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괄목할만한 직관을 보여주는데 특히 내가 춥다고 징징대자 선뜻 뛰어다니면 안 춥단 말을 해줘서 괜히 추워하는 나를 무색하게 만들고, 파마한 내 머리를 보고 남산같다고(산발이란 말 절대 아니다.) 말해서 남산같은 배는 들어봤어도 남산같은 머린 처음이라니까 뿌듯하게 웃는거다.
손언니의 스타일도 상당하다. 전에는 미니스커트에 후드티를 입고 시험을 치러 나왔는데 사람들이 누가 중학생 딸을 둔 엄마로 보겠냐고 하니까 거만하게 막 웃으면서 자신이 섹시포즈 전문이라며 포즈를 취하는데 좀 보기 흉해서(언니는 이렇게 대해야 더 자극받고 재미있는 포즈를 취한다. 잡초 근성 비슷한) 막 구박을 했더니 부러워서 그러는거냐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서 내가 그 흉한 자세 인터넷에 올린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더니 '얼짱, 그거 말하는거가'라며 사람들 어이를 상실하게 했지만 내심 좀 귀여웠다. 뭘해도 귀여운 우리 손언니.
손언니는 직업학교에 다니는걸 재미있어 한다. 자신에게 어디어디 학생이란 자격이 생겨서, 그냥 집에 있는 어디에 사는 누가 아니라 뭔가를 하고 있고 배우고 있다는 신분이란게 좋다고 한다. 공부하는 것보다 밥먹는걸 더 좋아하고, 술먹으면 가끔 결석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 이곳에 자신이 속해있다는걸 좋아하고 학교 다니는걸 재미있어한다. 수업 시간에 젊은 (남자) 동생들과 채팅하고, 동생들한테 '밥이야 맨날 먹는거 아냐, 내가 사주지'이러면서 배포를 자랑하기도 하고, 자기도 잘하면서 나보고 뭐뭐 가르쳐주면 사부로 모시고 충성을 다한다는 말로 날 한번씩 떠보기도 한다. 조금 우려되는 점은 내년에 이 과정이 끝나고 다시 다니려면 어떻게 제도의 헛점을 이용할지 궁리하는 것 정도? 그다지 치밀한 성격이 아닌지라 말뿐일거란걸 알고 있지만 혹시 내가 모르는 언니의 잠재력을 화락 발휘해서 재입학을 감행할지도. 이건 손언니의 에로틱한 잠재력?
내일은 손언니가 밥을 싸오는 날인데 벌써부터 뭘 해올까 머릿속에서 드륵드륵 레시피를 돌리고 있다. 언니의 엉뚱한 발상과 끊임없이 말을 남발해 말의 희소성을 소거함으로써 청자의 주의를 흐트려놓은 다음 잽싸게 헛점을 찌르는 언술. 아마도 오랫동안 손언니를 좋아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