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알라디너가 소개한 < 여자 만화 시리즈 에피소드 > 는 내용이 다음과 같다 : ① 날씨가 좋다 ② 빨래를 널고 ③ 화분도 내다놓는다 ④ 아, 날씨 좋네 ! 시부랄. ⑤ 빨래가 잘 마르니 태양은 훌륭한 가전제품. < 끗 ! > 이 에피소드'를 읽고 나니 정말 태양은 좋은 생활 가전제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능 좋은 빨래 건조기'이니 말이다. 이 생각'을 확대하면 태양은 다양한 기능을 가진 만능 가전 제품이다. 우선 " 태양은 주요 에너지 공급원으로, 인류가 이용하는 에너지의 대부분은 태양에 의존한다. 수력·풍력도 모두 태양에 유래하고, 나무·석유·석탄도 태양열을 저장한 것이며, 오직 조석력(潮汐力)·화산·온천·원자력 등이 직접 태양열에 의존하지 않는 에너지 자원 / 두산 대백과 中 " 이니 가정용 자가 발전기이며, 열 에너지를 전달하니 곤로'이기도 하다. 그뿐인가 ? 태양은 우울증 환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성분을 생성하기 때문에 천연 우울증 약'이기도 하며 비타민제이다. 그리고 가장 눈부신 광원이니 백열전구이며, 살균 효과가 있으니 살균소독기'이기도 하고, 석양이 물들면 야시시한 조명'을 선사하니 알전구 스탠드'이기도 하다. 하, 너무 다양한 기능을 가진 가전 제품'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를 " 가진 거라고는 맨발의 청춘 " 이라거나 불알 두 쪽'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알거지'들도 사실 따지고 보면 가장 근사하고 비싼 가전 제품'을 꽤나 소유한 사람이다. 밑비닥 알거지'라 해도 ㉠ 성능 좋은 빨래 건조대 ㉡ 비타민 건강보조제, ㉢ 항우울제 ㉣ 따스한 보일러 ㉤ 최소 12시간 정도 지속되는 백열전구 ㉥ 근사한 스탠드 ㉦ 살균 소독기 ㉧ 공기청정기 외 기타 등등을 보유한 것이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든든한 살림 밑천'을 구비하고 사는 삶'은 아닐까 ? 이래저래 태양은 정말 좋은 가전제품'이다. 동정 없는 세상'보다 끔찍한 삶은 볕(이라는 이름의 가전제품) 없는 삶이다. 신은 공평하다. 비록 성정 고약한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쫒아냈지만, 쫒아내고 보니 안쓰러운 것이라. 그래서 기본적인 살림 밑천'을 그들에게 보내준 것이다.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말이다. 볕은 신이 인간에게 주는 살림 밑천'이다.
- 신이 인간에게 주는 살림 밑천 中
치워라, 그늘 !
민달팽이
김신용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사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잎사귀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s가 손창섭의 < 인간동물원초 > 를 읽어 보라고 했을 때, 나는 시큰둥했다. 21세기에 무슨 50년대 소설'인가 ! 더군다나 흔해빠진 한국 소설을 말이다. 신경숙의 질질 짜는 서사와 김연수의 말랑말랑한 문장에 질려버린 터'였다. 더군다나 문예지를 구독해서 볼 만큼,문학에 대해 열정이 있는 문학 소녀와 문학 청년'들이 칭송하는 고은과 황석영의 작품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아는 것이 없으니 고은의 시'는 코끼리 코로 그린 추상화 같았다. 계룡산 뜬 구름 위에서 내다보는 듯한 산신령의 관조적 허세'가 읽혔다. 하여튼 약속을 했으니 읽어 보리라 마음 먹고 도서관을 찾았다. " 인간동물원초 " 는 단편이었다. 20분이면 다 읽을 분량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다. 그 후, 나흘 연속으로 도서관을 찾아서 손창섭 소설은 물론이고 손창섭과 관련된 서적을 모두 읽었다.
정말 끝내주는 작가'였다.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손창섭만큼 전복적이며 파괴적인 작가'는 없었다. 세태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평가 절하된 < 삼부녀 > 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현대 소설들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독보적이었다. 손창섭은 " 불온의 제왕 " 이다. 그를 알기 쉽게 소개하자면 " 데이빗 린치的 " 이다. 내가 손창섭에 대해 이렇게 들뜬 이유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잔뜩 기대를 한 채 손창섭 소설'을 접했다면 오히려 무덤덤하지 않았을까 ? 그런 면에서 보자면 김신용이라는 시인의 발견은 나에게는 경이로움이었다. 내게는 우연히 접한 시인'이었기 때문에 기쁨은 더 컸다. 그것은 주류가 되지 못한 채 꾀죄죄한 홍대 변두리 클럽을 전전긍긍하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인디 밴드'를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신용은 이미 문단에서 꽤 유명한 시인이었다)
도장골 시편'에 수록된 < 민달팽이 > 는 패각 한 채 없이 헐벗은 민달팽이의 겨우-삶'을 바라본다. 집도 없이 벌거벗은 미물에 대한 시인의 통속적 접근이 뻔하듯이, 시 속에 등장하는 아내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떼어 민달팽이 위로 그늘을 만들어준다. 없이 사는 것에 대한 연민'이다. 만약에 시가 여기서 끝났다면 이 시는 시시한 시가 되었을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 치워라, 그늘 ! " 이라고 쓴다. 이 문장은 마치 민달팽이가 인간에게 던지는 속말 같다. 타자의 동정에 대해서 단호히 거부하는 몸짓을 통해서 민달팽이는 단단한 실존'을 스스로 증명한다. " 치워라, 그늘 ! " 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 볕을 가리지 말라 ! " 와 일맥상통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렇다, 볕을 가린 잎사귀는 알렉산더 대왕'이고, 민달팽이는 꾀죄죄한 디오게네스'다. 김신용 시인은 민달팽이를 보며 그 무시무시한 알렉산더 대왕 앞에서도 쫄지 않으셨던 맞짱 디오게네스 선생'을 떠올린다.
어쩌면 디오게네스'는 역사상 최초로 " 일조권 " 을 주장했던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일조권의 사전적 의미는 : " 태양 광선을 확보할 수 있는 권리. 인접 건물 따위에 의하여 자기 집에 태양 광선이 충분히 닿지 못하여 생기는 신체, 정신, 재산의 피해에 대하여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 / 네이버 국어 사전 " 이다. < 볕 > 은 결국 공공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남양유업 사태'에서 내가 눈여겨본 것은 완장을 찬 놈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지랄을 하는 낯익은 풍경이 아니라 남양(南陽)이라는 기업 브랜드 네이밍'이었다. 남쪽 남에 볕 양'을 사용했다. 품질 좋은 볕'을 지향한다는 소리이다. 문제는 남양유업이 노동자가 사는 터 앞에 볕(陽 : 볕 양 ) 이 잘 드는 으리으리한 집을 지어 노동자의 집에 그늘(凉 : 서늘할 량 )을 드리운다는 점이다. 남양(南陽) 유업은 결국 납량(納陽) 유업인 셈이다. 납량유업 노동자가 외친 절규는 " 볕을 가리지 말라 ! " 는 소리이며 " 치워라, 그늘 ! " 이라는 외침이다.

언론사 평균 연봉
인간은 누구나 볕을 공정하게 쬘 권리가 있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 볕을 가리지 말라 ! " 는 요구를 배부른 소리'라거나 빨갱이들이 하는 소리라고 일갈한다. 1억 4천만 원짜리 드럼통(국회의원 연봉)이 6천만 원짜리 철밥통 보고 귀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노동자는 6천만 원짜리 철밥통 이상을 욕망하면 불순한 욕망을 품은 세력이 된다. 조선일보는 날마다 < 6000만 원 호화 연봉論 >을 주장하며 철도 노조를 너절한 집단이라고 비난했지만 정작 조선일보 기자들의 평균 연봉'이 8274만 원'을 넘는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 누누이 강조하자면 순우리말 가운데 한 글자'인 단어는 절대적인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 사랑 > 이라는 단어가 2음절이고 < 밥 > 이라는 단어가 1음절인 이유는 사랑보다는 밥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몸의 기관들 : 낯, 눈, 코, 입, 귀, 손, 발, 좆, 젖'이 모두 1음절인 이유도 없어서는 안 될 신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 볕 > 도 마찬가지다. < 밥 > 만큼 중요하다. < 좆 > 만큼 중요하다. 디오게네스는 왜 알렉산더 대왕 앞에서 볕'을 화두로 이야기를 꺼냈을까 ? 남의 볕을 탐하지 말라. 세상 모든 권력을 쥔 알렉산더 대왕도 꾀죄죄한 디오게네스의 일조권 요구에 옆으로 비켜서지 않았더냐. 당신은 누군가에게 따스한 볕이 된 적이 있었더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