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만화영화 반딧불의 묘를 봤다. 복잡한 서사구조를 보여주진 않는다. "전쟁 속에 고생하며 죽어가는 남매의 슬픈 이야기" 정도로 압축될 수 있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이다. 그러나 그 단순함은 단아함으로 잔잔하게 다가오는 슬픔을 깊이 전해준다.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이 극에 달한 전쟁이 우리의 소중한 이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살해하는지....

여러 이야기가 가능하겠지만 곱씹게 되는 것은 죽어가는 꼬마아이, 그 작은 소녀의 얼굴이다. 그 얼굴은 어떤 이성적 판단이나 합리적인 사고를 사치로 여기게 한다. 존재가 혹은 우리 안의 님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내게 무엇을 요구는지, 또 내 안에 님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사고나 판단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의 근원적인 깊이에서 울려오는 욕망이다.

어떤 사고나 판단은 욕망의 자양분으로 자라난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면 문제는 욕망에 의해서 잘못된 판단이 이뤄지는 수많은 오류들을 어떻게 하느냐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논리적 이성에 근거한 보편적 진리가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진리가 고정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하다. 하지만 해석학적인 발견 이후에는 그런 본질론적인 진리관은 오해일뿐이고, 참과 거짓의 구분, 진위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다. 인식과 진리는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고 삶을 충일케하고 생명을 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경험적 판단에 의해서만 그 진리성이 판단될 수 있다.


인간은 어떤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상대의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을 그대로 공감하는 "마주-울림"으로 인해 열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붙들려 마주 울리는 강렬한 힘이 자신 안 깊은 곳에서 퍼져 나올 때, 힘겹더라도 그 간절한 바램과 욕망으로 인해 행복해 진다. 집착을 삼키는 집중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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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8-06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무니님 잘 읽었습니다, 퍼가도 되죠^^

다연엉가 2004-08-07 0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무늬님 다시 퍼갔습니다. 앞으로 종종 글 올려 주세요...자주 올게요.^^^^

물무늬 2004-08-07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감사드려요.
글을 자주 올릴 자신은 없는데...
그래도 님의 서재에서
이젠 구경만하고 오지는 않을께요.
 

잿빛 톤으로 일관된 화면, 검은 물결 위로 먹구름 가득한 하늘로 우뚝 솟은 해골과 오버랩된 유령선. 영화 고스트쉽의 포스터는 중심에 우뚝 솟은 유령선을 보여준다. 그 유령선은 인간의 통제 밖에, 아니 인간이 통제를 에워싼 망망대해에 떠 다니는 죽음, 고통, 분노, 절규와 한의 맺힘을 그려준다.

인간은 나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무의식의 표면 위에 살짝 비치는 '나'가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으리란 오해 속에 살아간다. 이성, 합리성, 논리성이란 도구로 무장한 자아는 그러나 끝모를 망망대해에 뒤덮인 작은 섬처럼 무의식의 검은 물결 위를 떠돌 뿐이다. 깊이 뿌리내린 무의식의 욕망을 따라 휘둘릴 뿐이다. 우리의 의식에 드러나는 바램들은 어디서 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냥 그렇게 던져졌을 뿐, 그 욕망에 끌려서 허겁지겁 달려가면서도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뤘다는 성취감에 도취되는 자기기만.

그러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무의식의 심해로부터 뜻밖의 욕망과 마주칠 때, 유령이니 악이니 하며 타자화한다. 고스트쉽에서도 유령선에서 만난 악의 화신은 타자로 투영된 자기 얼굴이다. 실은 황금을 독차지하려는 욕망에 눈이 어두운 인간 내면의 집착이 투영된 현현일 뿐이다. 자신의 무의식에 도사린 욕망의 맺힘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내가 아니라 저 밖의 악마, 유령이라고 타자화하며 밖으로 밖으로 도망친다.

고스트쉽은 이런 악순화의 구조를 살짝 보여준다. 그러나 무의식의 심해에서 떠오르는 것이 과연 악마성일 뿐인가? 무의식의 심해에 떠도는 것은 오히려 의식 표면에 의해서 감춰진 상처와 문제를 경고하는 부표가 아닐까? 오히려 무의식은 의식이 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막아주는 안전장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상처가 곪아서 죽을 지경에 이르면 위험을 경고하는 신호를 보내주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이 무의식의 생명력을 파괴하고 무너뜨릴 때, 자아와 타아를 차별하고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욕망의 독약을 삼켜댈 때, 토악질해낸 결과가 유령선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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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과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영화로 회자되고 있는 [살인의 추억]. 그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시종일관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곽찬 구성, 코미디보다 더 웃낀 현실을 통해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자연스러움, 한 사건을 통해서 그 시대 전체와 그 속에 살아간 사람들 모두를 한 번에 보여주고 있는 주제의식....오랜만에 흠잡을 데없는 영화 한 편을 만났다.

영화를 보기 전에 누군가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면서 끝이 이상하다고 했다. 범인이 누구냐고.....
나와 함께 영화를 본 동행도 끝나고 나오면서 범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해본 나는 아마 "그 시대 전체"를 표현하는 어떤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연쇄살인의 욕망을 잉태하게 한 그 시대의 정자가 단지 어느 한 육체를 숙주로 삼았을 뿐이다. 그 살인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싹도 피워볼 수 없었던 그 시대의 척박한 현실이 공범이다. 그 현실은 분노와 폭력을 무력하게 하고, 이성과 합리성은 절망과 광기로 물들게 했다.

영화의 시작은 시골 소년이 메뚜기를 잡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어린 아이의 순수한 장난에 죽어가는 메뚜기처럼 살인이 자행되고, 현장에 도착한 경찰의 통제는 소년의 말장난으로 인해 웃음꺼리로 미끄러져 나간다. 장난거리로 농락당하고 변질되는 상황은 그 뒤로 이어지는 모든 수사와 진지한 접근도 웃음꺼리로 변해버린다. 놀이같은 죽임과 수사에 대한 농락은 시종일관 계속된다.

이런 연쇄살인이 자행되고 경찰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불구였던 시대의 터널 속이었기에 가능했다. 첫번째 시체가 발견된 곳은 농수로에 덮개가 씌여져 있는 굴이었고, 범인이라고 확신했던 청년을 놓아줘야 했던 곳은 기차 터널이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긴장 속에 놓인 터널, 전쟁으로 짙밟힌 이 땅의 전근대적 상황이 근대화의 가면을 뒤짚어쓰려던 순간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 바로 그 터널의 입구에 서서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시대의 살인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며 누가 살인범이냐 혹은 지금이라도 잡아야되지 않느냐는 질문은 중요한 장면을 놓치는 것이다.

들뢰즈는 사건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계열의 역동적 구조를 통해서 보여준다. 한 사건은 복잡한 여러 계열의 연결 구조 속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다. 그 사건은 그 사건 자체만으로 의미가 발생할 수 없다. 그 관계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범인을 잡으면 좋겠을 것이다. 하지만 그 범인이란 비바람 부는 날 자동차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 하나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 그 범인이 맺히기 위해서 불었던 바람과 달리는 자동차의 속력과 흔들림, 유리창의 미세한 결, 떨어진 물발울의 양...이 모두가 하나의 계열을 이룬 것이다.

살인의 추억은 1980년대의 그 모든 계열을 살며시 비춰주는 우발적 빈자리를 보여준 것이다. 어떤 한 범인이란 잡힐 수 없는 우발적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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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으로부터의 확장 : 기적의 일상화, 내면화
스티그마타, 성흔은 누미노제나 성현의 종교적 체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두렵고 떨리는 경험으로 인간 전존재가 변하는 경험.
그러나 스티그마타와 같은 기적은 압도하는 외적이고 절대적인 권위이다. 이런 체험에 근거한 신앙은 외적 힘에 눌리고, 그 힘으로 자아는 짓이겨진다. 오히려 그런 자기 학대에서 더 큰 종교적 격정과 감격을 느낀다. 어떤 절대적 힘, 절대적 기준(로고스), 절대적 경전에 근원하는 신앙은 주체와 객체간의 거리를 주체의 삭제를 통해 지워버린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오히려 외적인 절대성이 모두 허물어진 폐허 속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부터 온 우주로 확장되는 신앙이 있다. 이 때는 자아의 벽이 허물어져 모든 존재와 하나됨으로써 주객의 분리가 극복된다. 이 경우에는 어떤 절대적 힘에 의지해서 혼란과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치않다. 혼돈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속에 진득허니 머물면서 일상의 우연하고 평범한 사건들 속에서 기적을 발견하고 전존재자에 대한 신뢰를 느낀다.
전자는 서양의 종교성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 흔히들 말하고, 후자는 동양의 종교성이라고들 말한다. 사실 그런 양태들은 양 쪽에 다 혼재해있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던 예수의 말씀에 의한 신앙은 분명 후자에 가깝다.
외적 권위에 종속되는 종교성은 비판적 자기 수용이 자리할 곳이 없다. 오히려 앞못보는 격정적 열정이 극단적인 잘못을 범할 위험이 있다. 그리고 고통과 고난을 피해 절대적 행복 속으로만 도피하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오히려 고통과 혼란이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생명의 싹을 발견하고, 안정과 불안의 이분법적 분별지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지니게 된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기적인 진정 사실인가? 허나 후자의 경우에는 우연하고 평범한 사실이 자기 안에서 특별한 사건으로 부활한다. 그리고 주변에 널려있는 우연한 사실들을 생명의 사건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이웃에게 생명을 전한다.

2. 밖으로부터의 침투: 무너지는 예루살렘 성
이 영화에서는 성흔이 불신앙인의 몸에 나타난다. 캐톨릭 교회의 절대적 권위에 반하는 사건인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속에 샘솟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흔폐하려는 도마복음을 인용해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나무를 쪼개도, 돌을 들어올려도 그 모든 곳에 내가 있다"는 말씀을 통해 조직과 체제의 권위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무신론자의 몸에 나타나는 성흔의 고통, 그 고통 속에 성육하는 예수의 모습은 가난한 자와 고통 받는 자의 삶과 몸 속에 함께 계신 사랑을 연상하게 한다. 그렇게 교회의 벽을 허물고 드러나는 예수의 사랑, 그 계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주교는 그 계시의 몸을 죽이려한다. 이것도 현재 교리와 교권, 절대적 권위를 스스로 움켜쥔 교회가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 속에 함께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더욱 고통을 가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마지막 성흔으로 죽어가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 그 몸을 품에 안은 신부의 모습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아련히 사라지는 길을 배경으로 우리 함께 걸어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이 영화에서 좀 이상한 부분은 메신져로 사용되는 사람을 중요시 하지 않는 죽은 신부의 영혼이 마치 사탄이나 악마처럼 묘사되는 부분이다. 이것을 공포영화라는 장르적 한계로 보거나 혹은 도마복음에 담긴 예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교회 밖의 사람들을 고통 가운데로 몰아가는 잘못을 범하는 것으로 묘사됨으로써 종교 자체에 대한 비판도 담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사실 후자의 경우에는 진리가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교회의 잘못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드러내는 하나님은 영화에서 묘사는 것처럼 악마로 보인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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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3층; 코기토?

근대 철학의 시발점으로 여겨지는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소위 코기토 명제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바로 그 명제를 해체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13층은 가상현실 속에 인간의 세계를 그대로 재현해놓고, 그곳에 접속할 수 있는 곳이다. 그 가상현실의 특이한 점은 특별히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나 접속자가 있어야 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세계는 독립적으로 스스로 돌아가고, 그 속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가상현실의 존재라는 모른채 스스로 판단하는 듯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건으로 인해, 그곳의 인간이 자신의 세계가 단순히 전기신호로 만들어진 가상세계임을 알게 된다. 게다가 그 세계를 만들어낸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계도 실은 가상세계라는 것이 밝혀진다. 가상세계 속의 가상세계였던 것이다.
그 가상세계 내의 사람들은 생각하고 판단하며 사랑하고 증오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존재하는가? 바로 이 영화는 이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근대적 사고방식에서 존재한다는 것의 허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현실세계의 여인이 가상세계 속의 주인공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그 모호한 경계를 허물어 간다.
물론 영화는 가상세계의 주인공이 결국 현실세계로 옮겨감으로써 현실세계의 중요성을 해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얼마나 모호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꼼꼼히 생각해보면 가상세계 속의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또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는가?, 그리고 전자신호 내에서 자아의식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어있고 정신은 전기신호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그것이 맞는가? 등으로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을 통해서 이것이 가능하고 생각하기만 하면, 바로 우리가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이 실은 가상현실 속을 살아가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반문을 가능하게 한다. 기독교의 관점으로 이 세계는 피조된 세계이고, 불교의 관점에서 이 세계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가상세계 속의 가상인물이 스스로가 가상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되면서 겪은 혼란이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바로 그 질문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영향을 주는가를 물어야 한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그 곳에서 우리의 착각이 드러나고 보다 진실하고 자유로운 삶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되지 않을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생각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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