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혼란스럽다.

   책 읽는 자로서 나는  별종에다 까탈스러운가?  써야할 리뷰 대상이 된 책에 대해서는 될 수 있으면 타인의 리뷰를 미리 들춰보지 않는다는 게 그간의 내 소신이었다.  혹여 타인의 생각을 훔쳐보는데서 생길지도 모를 선입견이나 영향력을 우려하는 것이다.  한데, 이번에는 예외이다. 리뷰를 올린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왜 어떤 이유로 사람들은 이 책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렸는가? 정말로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 리뷰들을 읽고 나서도 진정한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내가 잘못 읽고 있는가? 읽히는 소설이긴 하지만 열광할만한 근거는 찾지 못하겠다.  딴지는 아니고,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면서도  소수의 취향에 해당하는  나같은 인간은 깊은 의문에 쌓인다. 소설을 읽을 때(책을 읽을 때) 내가 지향해온 소박한 철학(철칙이라 해두자)을 이제 거두어 들일 때가 되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프로 작가가 쓴 모든 읽을 거리는 될 수 있으면(될 수 있으면에 방점이다) 완벽한 문장을 지향해야 한다는 게 독자로서의 내  생각이다.  어떤 시인이 말했다.  시는 은유이기 때문에 말이 좀 안 되고, 비문을 써도 용서가 된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시인을 마음 속 깊이 신뢰하지는 않는다.  어디선가 읽은 이런 말이 떠오른다.  '어떤 시인이 진정 시인인가, 아닌가는 그가 쓴 산문으로 판가름 난다. 산문이 되지 않는 시인은 더 이상 시인이 아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호흡 긴 문장을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헐거운 문장력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를 쓰는 행위를 경계하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시든 소설이든, 모든 활자화된 것의 기본 예의는 문장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너무 과민한 걸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푸른숲, 2005)을 읽는 동안 유쾌했고, 동시에 짜증이 났다. 남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다는데 원래 냉혈한 기질이 있는지 눈물은 나지 않았다. 우선, 유쾌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구성은 빼어났고, 스토리라인은 선명했다.  작가는 목 좋은 자리를 선점해 단골을 유치한 포장마차 주인처럼 민첩하고 유연한 방식(호기심을 자아내는 구성과 적당히 신파가 섞인 서사)으로 대중성 확보에 성공한 듯 보인다.   이것이 작가 공지영의 힘이다.   쉽고 감성적인 언어로 작가와 독자가 동시에 원하는 목표점인 자연스런 감동과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낸 것은 분명 장점이다. 부럽고 본받을 일이긴 하다.  이것이 곧 대중소설의 존재 이유가 아니겠냐고 누군가가 목놓아 외친다면  이 리뷰를 쓰는 의미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작가는 프로이고 프로는 책임있는 문장들을 뱉어낼 의무가 있다. 물론 모든 작가들이 김훈이나 천운영처럼 미려하면서도 적확하고, 섬뜩하면서도 정교한 문장을 구사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위에 방점 찍은 것처럼 될, 수, 있, 으, 면,  제대로 된 문장을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감동과 공감만이 목적이라면 굳이 소설에서 그것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학이 예술의 고매한 범주 중 하나라고  볼 때, 그 예술성은 독자에게 전달되는 정서적 감동 외에 감동을 전달하는 문체적 특성에서도 발견되어야만 한다. 

  공지영 소설이  대중적, 외연적 확장을 하면 할수록 그 문체적(더 확실하게는 문장력) 결함의 아킬레스 건이 도드라져 보일 것이라는 우려는 나만의 생각일까.  나는 공지영 작가를 존경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다만, 좋은 문장을 만나기 위한 독자로서의 신경증적 강박이 있다는 것은 고백해야겠다. 물론, 독자로서 문학이 예술이 아니라 그저 오락이나 휴식에만 머물러도 좋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면  이 강박은 자연스레 없어질 것이다.

  읽기에 껄끄러웠던 첫 도입부의 몇 개 문장만 인용해본다.

 

   비는 저 불빛들 속에서만 내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젖게 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를 테니까. (9쪽)

   이 겨울비처럼 어두워져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는 많이도 있었다. 그를 만난 후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10쪽)

 --- 도입부의 문장 일부이다. 어둠 속 비오는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도무지 나로서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젖게 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를' 이유가 없다.  사족이다.  뒤쪽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이 어둠 속에서 우리를 젖게 하는 것의 정체가 비라는 것쯤은 비를 맞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지 않겠는가. '불빛들 속에서만 내리고' 있는 비의 선명한 이미지를 묘사하다 보니,  '어둠 속'의 비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엷은 운무처럼 뿌연 빗속에서 달리던 차들 위로 태양처럼 붉은 신호등이 켜졌다. (10쪽)

--- 딱히 비문은 아니지만 이런 앞뒤 문맥상 불분명한 비유를 왜 써야하나? '뿌연 빗속'에  '태양'이라...

 

  어머니는 왜 자신의 친구였던 고모를 미워했을까. 그러니 나도 어머니를 미워한 것이 먼저였을까, 아니면 고모를 닮아버리겠다고 결심한 것이 먼저였을까. (14쪽) 

  그러나 그것은 미개지에 들어선 점령군이 부르는 승전가 같은 종류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건드리기만 하면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 오래되고 내밀한 상처였으며 설사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언제나 피를 흘리는 그런 종류의 아픔이이고 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반역에 실패한 패잔병들이 부르는 악에 받친 풍자가 같은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니다, 다른 점도 물론 많다. 고모는 나보다 우리 집안사람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어떤 물질적 향응도 자신을 위해 쓴 적이 없었다. (15쪽)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온 은하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야만 성이 차던 존재, 술에 취한 날이면, 닫힌 문들을 발길로 차면서 나는 진실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발음해본 적은 없지만 그 때 누군가 내 심장에 청진기를 가져다 대었다면 아마도 이런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15쪽)

  나는 위스키에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발견된, (21쪽)

---앞 뒤 연결이 생뚱맞고, 대구가 맞지 않아 부자연스러운 문장들.  도대체 왜 작가는 이런 부주의함들을  도처에 깔아놓아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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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2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글 하나 제대로 써보지도, 책 하나 제대로 내지도 못한 독자입니다만, 책 한 권이 있으면 열심히 읽는 독자로서 말하고 싶어요. 종종 공지영같은 수준미달을 보면 그의 책을 위해 베어지는 나무들이 아깝다고. `고등어' 이후에는 같은 말을 하고 또 하고, 되풀이해 하는 반복 재생 녹음기 같아요.

marine 2006-12-04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체 문제, 저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공지영에 대해서는 읽은 책이 별로 없어 왈가왈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문체는 작가의 기본적인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크아이즈 2006-12-04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드님, 블루마린님 동지를 만난 것 같기는 한데 작가에게는 좀 미안하네요. 부주의한 문장들, 예민한 독자들은 자꾸 신경 쓰이는 것 맞지요?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외출을 할 때면 습관적으로 책을 챙긴다. 혹,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거나, 늦는 상대를 기다려야 할 상황이면 책보다 나은 친구는 없다. <단순한 열정>, (문학동네, 2001).  우선 이 책은 휴대용으로 안성마춤이다. 중편 정도 되는 분량이니, 잠깐 시간을 달래기에는 그만이다. 약속 시간에 도착해보니 삼십분이 남았는데 내심 즐거웠다. 언제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미뤄온 책을 집어든다. 삼십분만 할애하면 되니까.

  이 책에서 말하는 에르노식 감정을 나는 20대 이후로는 잊어버렸다.(잃어버렸다, 가 맞을지도.) 따라서 그녀의 '단순한 열정'이 결코 사랑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는다. 집착이자, 욕망이요, 무모함이자, 감정의 낭비로 비칠 뿐이다. 남녀간의 사랑에서 주체적 날개를 달지 못하고 스스로를 속박한 채, 한 남자의 그 무엇(혹은 모든 것이라고 쳐두자)을 기다리고 기대한다는 건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철든 이후 나는 이런 식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배제해야할 사랑의 방식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자동차가 문 앞에 와서 멈추는 소리, 자동차 문이 쇠를 내며 닫히는 소리, 문지방을 넘는 그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는 순간이 오면 나는 항상 온 신경이 곤두서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 사람이 전화로 사나흘 쯤 후에 들르겠다고 알려와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해야할 일들, 예를 들면 친구들과의 식사마저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 사람을 기다리는 일 외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13쪽)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문지방을 넘는 그 사람의 발소리'와 '친구들과의 식사마저 짜증스러'울 정도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상대가 유부남이라는 걸 인정하고 만나는 만남이라면 스스로 주체적인 통제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과도한 감정의 낭비보다는 집착도 없이, 무모함도 없이, 욕망의 부피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기주도적 사랑 말이다.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지니고 있기 위해 다음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17쪽"을 권리는 에르노에게 있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유아적 집착일 뿐이다. 사랑에 대한 지나친 기대치나 미련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너무 일찍 청춘의 열정이 사라졌나?) 영혼이 피폐해지도록 광적이고, 집착하고, 미련 갖는 사랑은 사양하고 싶다. 더 이상 (상대가 유부남이냐, 아니냐의 잣대 따위는 상관이 없다.) 에르노처럼 상대에게 편지질을 하거나, 처음 보는 망또를 걸치고 현관앞을 서성이는 우스꽝스런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급물살의 소용돌이에 허우적대는 것은 한 번 정도로 족하지 않을까.

  모든 에너지와 감정을 쏟아 부은 채 일상의 질서조차 조절할 수 없는 사랑이야말로 이런 글을 쓰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지극히 개인적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소설이란 상표를 달고 발표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황폐한 월 보고서 정도로 읽히는 걸 보니, 나도 시니컬을 너무 잦은 친구로 삼는가 보다. 집착하지 말라, 기다리지 말라, 다만 상황을 즐겨라. 그런 사랑의 보고서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은 당당하고, 담백하고, 쿨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덜 부끄럽고, 덜 죄책감에 시달리고, 덜 상처받는다.

  마치 일본 사소설류를 접할 때(정말이지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나 적응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느끼는 거부감과 비슷한 감정이라고나 할까.  에르노처럼만 사랑하지 않으면 된다, 라는 것을 독자로서 재확인할 뿐이다. 거짓없이 자신이 경험한 것만 쓴다는 것에 매료되어 관심을 가졌지만, 이런 식의 경험에만 천착한다면 정중히 사절이다. 왠지 조금 읽다만 <칼같은 글쓰기>도 흥미를 잃을 것만 같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이라고 선언할 때 이런 책이 보편타당성을 갖게 되는 시대, 혹은 이런 책에 대한 독자층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경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의 선언이 근대문학(거시적, 역사적 사회적 역할로서의 문학)에 대한 종언이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문학(미시적, 개별적, 개인적인 의미로서의 문학)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후자도 문학적 개연성을 충분히 획득했다고 (그런 쪽으로 탁월한 작가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믿고 있지만, 글쎄, <단순한 열정>류에는 내 너그러움이 동하지 않는다.

  마침, 책을 다 읽고나자 약속한 사람들이 왔고, 우리는 일을 했다. 그 두 시간 동안 속이 거북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상대가, 단지 나이가 조금 많다는 이유로 반말을 천연덕스럽게(친밀한 반말과 계층을 구분지으려는 반말은 너무나 다르다. 도대체 나이로 계층을 구별하려는 이 유교적 관습을 나는 혐오한다.)해댔던 것이다. 이 책이 그 상황에서는 속거북함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이 책을 패러디한 그녀의 또 다른 애인인 필립 빌랭이 쓴 <포옹>에도 눈길이 가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쳐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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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0-01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셨군요. 저역시 한 번 읽었을 때에는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낭비될 열정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고는 두 번, 세 번 읽었을 때에 느낌이 또 달라졌더랬습니다. 두 번 세 번 읽었을 때에는 좀 험난한 사랑에 빠져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주 묘하게 동일시를 햇으니까요.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언제나 빛이 났습니다.
그런데 필립 빌랭의 포옹은, 읽자 마자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기분이었어요. 상대의 유명세에 기대에 나도 한 번 떠보자, 하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읽었어요. 이리 된다면, 유명해 지기 위해 유명 남자 배우와 사귀는 무명 여배우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크아이즈 2006-10-01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접수했어요.^^* 누구든 경험한 만큼 텍스트에서 본다, 라고나 할까요? 이십대 때 제가 이 책을 읽었다면 아마 님과 똑 같은 생각을 했을 거에요. 제 독해를 의심할 필요도, 쥬드님의 몰입을 방해할 그 어떤 이유도 없겠는걸요. 개운합니다.

크리스탈 2008-06-11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글 잘 읽었습니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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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망설임없이 책을 샀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살다보면 누군가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가 되기도 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고급 호텔 사장이 되기도 한다. 가끔 나도 이국적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그 경험에 진정성만 배어있다면 중산층 평범한 일상이든, 하류층 곤고한 지옥이든 별 상관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는 될 수 있으면 파리의 접시닦이가 한 번 되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이국적 생활, 특히 파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이 책을 산 첫 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는 조지 오웰이 본 파리나 런던의 묘사력에 관한 호기심 때문이었으리라. 단언컨데,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는다. 단, 독자를 생각하지 않는 구성의 허술함 때문에 지루하게 읽히는 부분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그였다면 분량을 딱 반으로 줄이겠다. 르뽀 형식을 띄고 있지만 클라이막스가 없어 그 얘기가 그 얘기 같다.  등장 인물과 분량만 줄여도 흡인력 있는 읽을 거리가 되어 줄 텐데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파리나 런던에 가지 않더라도 밑바닥 생활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생생한 묘사 때문에 파리의 X호텔 레스토랑에 가지 않고서도 그 지하 공간의 온갖 악취를 맡은 듯하고, 런던의 부랑아가 되어 보지 않고서도 강변 벤취를 지나는, 노숙자를 깨우는 기차소리를 듣는 듯하다.  보라, 냉소의 경지를 넘어선 이 적나라한 묘사를.

   주방의 불결함은 더 심했다. 프랑스 요리사는 수프에 침을 뱉는다고 하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단지 사실을 진술한 것뿐이다. 물론 요리사 자신이 먹는 수프가 아닌 경우이다. 요리사는 예술가이지만, 그의 예술은 청결에 있지 않다. 그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더럽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음식이 세련되게 보이려면 더러운 처리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고기를 만지는 수석 요리사들의) 손가락은 모두 이날 아침에 백 번은 빨았던 그 손가락들이다. 이번엔 웨이터가 또 자신의 손가락을 그 고깃국물에 담근다. (중략) 대체적으로 음식 값을 비싸게 치를수록 그 음식과 함께 먹는 땀과 침도 많아진다. (104 ~105p 부분)

  강변 둑길에선 뭐니뭐니해고 일찌감치 잠드는 게 상책이지. 여덟 시까진 벤치를 차지해야 돼. 벤치가 그리 많지도 않고 또 다 차 있을 때도 가끔 있거든. 그리곤 곧장 잠이 들어야 돼. 열 두시가 넘으면 너무 추워 잠이 잘 안 오고 새벽 네 시만 되면 경찰이 내쫓거든. 근데 잠드는 게 쉽진 않아. 염병할 시가전차는 번번이 머리 옆을 날아다니지. 강 건너 옥상 광고 조명은 켜졌다 꺼졌다 해서 눈이 부셔. 추위도 매섭지. 거기서 자는 이들은 대개 신문지로 몸을 마는데, 그게 그리 도움은 안 돼. 세 시간 잤다면 억세게 운 좋은 거야. (278~279p)

   비루한 인간들을 관찰하는 끈덕진 시선은 동물농장과 1984년 같은 작품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비천한 계급도 중산층 사람들과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똑 같은 사회 구성원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으나 언제나 지나친 자기 연민이 문제이다. 일반 여성은 언감 생심 꿈도 못 꾼다.  매춘부를 보고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부랑자들을 포착해내는 작가의 그 통찰이라니.  

  자기연민은 그의 성격을 이해하는 실마리였다. 한순간도 불운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듯했다. 그는 긴 침묵을 깨고는 난데없이 '옷가지를 전당 잡히기 시작하면 지옥이지, 응?"하거나 '그 부랑자 구호소의 홍차는 홍차가 아니라 오줌이야.' 하면서 설명했고, 이것 말고는 이 세상에 생각할 것이 없다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더 잘 사는 사람들, 즉 그의 사회적 지평을 넘어서는 부자들은 아니고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을 벌레처럼 비천하게 질투했다. 그는 화가가 유명해지기를 갈망하듯 일을 갈망했다.  (중략)  그는 동경과 증오가 뒤섞인 채로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젊고 예쁜 여자들은 그에게 너무나 분에 넘쳐서 생각도 안 했지만, 매춘부를 보면 그의 입안에 침이 고였다. (200 ~201 부분)

    책('소설'이 타당하겠다)을 읽을 때, 설명에 밑줄을 긋지 말고 풍경에 밑줄을 그어라, 고 누군가가 말했다. 아마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 읽은 듯한데 그 말은 이 책에서도 유효하다. 설명 이전에 풍경으로 그려지는 그림을 활자에서 맛보는 것이야말로 책 읽기의 묘미이기도 하다.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별이 네 개 밖에 안 뜨는 것은 불필요한 분량과 구성의 지리멸렬에서 오는 지겨움 때문이다. 군데 군데 숨은 보석이 있으니 그것을 찾는 재미로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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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0-0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날벌레가 추락사 했다고 해서 없는 돈 다 짜내어 산 우유를 버리다니, 그래도 믿을 구석이 있는 궁핍함은 그런가 보다, 생각하기도 했어요.

다크아이즈 2006-10-0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아마 완벽한 경험담이라기보단 취재력이 가미된 소설이기 때문에 그런 허술함(?)이 있었지 않을까요?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은 파리 빠진 우유도 없어서 못 먹잖아요.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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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없었다면 여성들의 삶이 어떠했을까?  인간사 이래로 여성 삶의 진일보를 담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독서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런 가정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책 한 권이 있다.

  독일 작가 슈테판 볼만은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고 선언한다. 작가는 한 때 여성의 독서가 지극히 위태로운 것으로 취급받던 시대가 있었음을 고찰하고 있다. 근대 이전의 유럽 여성들이 처한 상황이 그랬다. 여성들이 세상에 대한 대범한 호기심을 갖는 것이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고급한 사회는 남성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작가는 유럽의 명화 속에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책 읽는 여자들을 불러낸다. 동시대 밖으로 나온 여성은 하녀이거나 안주인이거나 후작부인이거나 아주 가끔은 왕비이기도 하다. 그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불온한 여자의 혐의가 짙었다. 그림 속의 여자들은 한결같이 책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불온한 자유주의자들은 가슴 속에 화약고 한 짐씩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남성의 거울로 비추어볼 때 그 시대 여성의 독서는 백해무익한 것이었다. 세상을 지배하고 호령하는 것은 남성 고유의 영역인데, 더 많은 것을 여성과 공유하는 것은 피곤한 일에 속했다.

  이것을 눈치 챈 여성들은 그들만의 독서 장소를 물색할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이 먼 길을 떠나기를 바라고, 읽을 거리만 있다면 전장에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도 좋았다. 그녀가 하녀라면 볕 잘 드는 다락방이 제격일 것이다. 읽다만 중세시대의 로맨스의 뒷장을 위해 그녀는 어서 빨리 주인이 집을 비우고 먼 길을 떠나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주인의 실내화도, 씻어야 할 물주전자도 읽어야 할 책보다 우선일 수는 없었다. 불온한 독서의 자유야말로 달콤한 휴식의 절정이 아니었던가.

  그녀가 만일 높은 신분의 여자였다면 침실이 그녀의 독서실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높은 신분과 관계없이 여전히 여성에게 세속적이고도 낭만적인 내용의 책 읽기는 허용되지 않았다. 방해꾼 없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근육을 한껏 이완시킨 채 그녀들은 독서가 주는 자유로운 광풍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공간적 은밀함이야말로 책 읽기의 독자적 상상을 보장해주었던 것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소수 엘리트들이었다. 엄격하게 말하면,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소수 엘리트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불과 백여 년 전만 해도 이런 생각은 팽배했다. 종교서적을 제외하고는 여자가 독서를 한다는 것은 '천성'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동서양을 가릴 필요도 없다. 자신만의 규방으로 내몰린 여성들은 책의 향연에 정식으로 초대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초대받지 못했는지 알 겨를도 없이 여성들은 다락으로 침실로 창고로 내몰렸던 것이다. 그곳에서 세상을 읽고, 낭만적 유희를 꿈꿨다. 남성들이 볼 때 그것은 불온한 자각이었고, 음탕한 유희였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그 정보들을 여성들과 공유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여성에게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욕구와 드넓은 우주 질서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았을까.  억누를수록 여성들은 유쾌한 고립 행위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남성이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독서야말로 세상과 소통하는 멋진 통풍구라는 것을 안 이상 물러설 수는 없지 않은가. 숨어서 책 읽는 여자들이야 말로 페미니스트의 원조가 아니었을까.

  이제 여성에게 독서는 더 이상 위험한 것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오히려 책 권하는 사회가 되었다. 책 때문에 불온해진만큼이나 세상을 보는 눈이 커진다면 그 보다 나은 독서의 진가가 어디 있겠는가. 덜 불온한 여성일수록 더 상처받는다. 상처 많은 사람들이 이 한 권의 책에서 힘을 얻는다면 이 또한 독서의 효용이 아니겠는가. 과감하고 은밀한 독서일수록 그 파장은 크다.  이 환한 봄날 과도한 휴머니즘이나, 교훈서, 미담 수준에서 벗어난 독서광이 되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상처입은 영혼들이여, 주저없이 유쾌한 고립의 여정을 떠나자. 책 읽는 여성은 불온하니까. 그리하여 종내엔 매혹에 이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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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8-28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수 앨리트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 그래서 욕은 대부분 여성비하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도 많다지요. 80%가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녀도 그렇지 않나요? 그런 의미에서는 신조어도 일종의 욕의 매개체인지도 몰라요.
책 권하는 사회, 라지만 실제 제가 읽는 책들을 본 몇몇 남자들은 저를 약간 무서운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럴 때면 친절한 금자씨처럼 웃으며 말하고 싶기도 했어요.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후훗.

다크아이즈 2006-08-2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섭게' 본 남자들은 Jude님을 잘못 본 것일테고, 제 생각에는 많이 읽을수록 '불온'해지는 것은 맞다고 봐요. 네, 당연히 불온해져야죠. <친절한 금자씨처럼 웃으며> 호홋..
 
대지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
펄 벅 지음, 안정효 옮김 / 문예출판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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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제목만으로도 유명한 책을 이제야 읽는다.  극도로 혼란한 청말기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그들(중국인)만의 삶이 아닌 바로 우리들의 삶도 읽을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그 시대, 일찌감치 개화한 일본(극히 일부분이긴 하지만)을  빼놓고는 동양인의 삶이 대지에 나오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에.

왕룽은 그 시대의 보편적인 시각이 마련해둔, 철저한 남성적인 삶을 산다. 못 생긴 종 오란을 황씨댁에서 사 와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늙고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볼품없는 남자에겐 그 정도도 호사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오란 역시 그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적 삶을 잘 이끌어간다. 자신의 운명을 때론 거부하고, 때론 원망도 해보지만 현실을 받아들인 채 자신의 삶을 묵묵히 이끌어가는 것 외에 나은 방법을 알지 못한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오란이 있는한 왕룽의 대지는 안전할 것이다.

가뭄으로 힘든 역경을 겪기도 하지만 그마저 자연의 법칙이니 순응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대지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최상위 마니페스토는 단연 노동의 신성함(독자로서는 신산함으로 보이는)이다. 밤새 눈구덩에 쓰러진 아비를 구하기 위해 제 목숨마저 버리는 소년처럼  그들은  제 한몸 투신하는 것이다. 비록 보석과 재물을 훔치는 편법을 쓰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대지의 소중함을 신앙처럼 고수했기 때문에 때문에 땅 가진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가뭄과 홍수를 겪으면서도 그들이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땅이었다.  부자가 되고 난 뒤에 갖는 허망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왕룽은 롄화에게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시간 나고 돈 남는 남자가 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듯 왕룽은 한동안 롄화에게 빠져지낸다. 그래도 땅은  새로운 곡식을 주인에게 선사한다. 잔잔한  일상 또한 겉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롄화의 존재가 있거나 말거나 오란은 묵묵히 자신의 길만 간다. 때론 현실적으로, 때론 영악하게도 보이나 근본적인 성정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보수적인 여성의 삶일 뿐이다. 자식을 건사하고, 바람 피우는 왕룽에게도 큰 모반을 꾀할 정도의 반항심도 없다. 여성의 삶은 으레 남성의 뒤치닥거리나 하고, 자식의 안녕을 비는 것이라 생각하며 견뎌낼 뿐이다. 

서양식  문명의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펄벅여사가 본 이러한 동양적 삶들이 이채롭게 보였을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을 퓰리처와 노벨상이라는 큰 상을 움켜 쥐게한 원동력이 된 것은 아닌지.  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인의 삶이  어느 정도 객관성이 유지된 채 사실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왕룽 일대기를 보면서 아직도 우리네 삶은 완전히 왕룽식에서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권위적인 남성과  그 권위의 그늘 아래서 자신이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채 편안함을 가장하며 살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대지를 지키며 산 왕룽의 불유쾌한 자유와 유쾌하다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 그 밭고랑을 걸어간 숱한 오란들이 행간에서 느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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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sanna 2009-05-15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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