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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
펄 벅 지음, 안정효 옮김 / 문예출판사 / 2003년 5월
평점 :
그 제목만으로도 유명한 책을 이제야 읽는다. 극도로 혼란한 청말기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그들(중국인)만의 삶이 아닌 바로 우리들의 삶도 읽을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그 시대, 일찌감치 개화한 일본(극히 일부분이긴 하지만)을 빼놓고는 동양인의 삶이 대지에 나오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에.
왕룽은 그 시대의 보편적인 시각이 마련해둔, 철저한 남성적인 삶을 산다. 못 생긴 종 오란을 황씨댁에서 사 와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늙고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볼품없는 남자에겐 그 정도도 호사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오란 역시 그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적 삶을 잘 이끌어간다. 자신의 운명을 때론 거부하고, 때론 원망도 해보지만 현실을 받아들인 채 자신의 삶을 묵묵히 이끌어가는 것 외에 나은 방법을 알지 못한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오란이 있는한 왕룽의 대지는 안전할 것이다.
가뭄으로 힘든 역경을 겪기도 하지만 그마저 자연의 법칙이니 순응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대지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최상위 마니페스토는 단연 노동의 신성함(독자로서는 신산함으로 보이는)이다. 밤새 눈구덩에 쓰러진 아비를 구하기 위해 제 목숨마저 버리는 소년처럼 그들은 제 한몸 투신하는 것이다. 비록 보석과 재물을 훔치는 편법을 쓰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대지의 소중함을 신앙처럼 고수했기 때문에 때문에 땅 가진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가뭄과 홍수를 겪으면서도 그들이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땅이었다. 부자가 되고 난 뒤에 갖는 허망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왕룽은 롄화에게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시간 나고 돈 남는 남자가 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듯 왕룽은 한동안 롄화에게 빠져지낸다. 그래도 땅은 새로운 곡식을 주인에게 선사한다. 잔잔한 일상 또한 겉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롄화의 존재가 있거나 말거나 오란은 묵묵히 자신의 길만 간다. 때론 현실적으로, 때론 영악하게도 보이나 근본적인 성정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보수적인 여성의 삶일 뿐이다. 자식을 건사하고, 바람 피우는 왕룽에게도 큰 모반을 꾀할 정도의 반항심도 없다. 여성의 삶은 으레 남성의 뒤치닥거리나 하고, 자식의 안녕을 비는 것이라 생각하며 견뎌낼 뿐이다.
서양식 문명의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펄벅여사가 본 이러한 동양적 삶들이 이채롭게 보였을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을 퓰리처와 노벨상이라는 큰 상을 움켜 쥐게한 원동력이 된 것은 아닌지. 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인의 삶이 어느 정도 객관성이 유지된 채 사실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왕룽 일대기를 보면서 아직도 우리네 삶은 완전히 왕룽식에서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권위적인 남성과 그 권위의 그늘 아래서 자신이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채 편안함을 가장하며 살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대지를 지키며 산 왕룽의 불유쾌한 자유와 유쾌하다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 그 밭고랑을 걸어간 숱한 오란들이 행간에서 느껴지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