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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
남재일 지음 / 강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남재일을 알게 된 건 행운이다. 영화 관련 책을 뒤지다 만나게 되었는데 우선 영화 이야기로 읽히지 않아서 좋다. 사람을, 사회를 영화를 빌려 이야기하면서 이토록 밑줄 긋게 만드는 작가를 일찌기 만나본 적 없다. 송준의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이 좀 더 영화 평론에 가깝고 이왕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가 영화를 빌려 철학을 말하고 있다면 남재일은 이 책에서 인간, 아니 오로지 인간이고자 하는 개인을 이야기한다. 당연히 밑줄 그을 일이 많다. 밑줄 강요하는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 아니던가.
그가 소개하는 영화가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무던히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내가 발견하지 못한, 혹은 발견했지만 미처 내 언어가 되지 못한 숱한 말들이 질서정연하게 꼬리를 문다.
이 순교의 이미지 자체는 분명 감동적이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순교의 탈을 쓴 순장이었기 때문이다. 순교는 핍박받고 남루한 것들을 위한 소리 없는 희생이지 '대의'의 폭력과 교설로 개인을 매장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34쪽)
이 영화가 '대의'를 수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즐거움을 얻을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빨리 천하통일을 이루어야 하고, 그러기 위애서는 절대적 권력을 누군가에게 위임해야 한다는 논리는 정말 지겹다. (35쪽)
남루함은 선악을 넘어 인간 감각이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영원한 타자의 질감이다. 그래서 남루함을 화면에 들이밀면 관객은 반사적으로 불편해진다.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관객을 불편하게 한 것도 중증 뇌성소아마비 처녀를 전면에 들이밀기 때문일 것이다. (45 ~46쪽)
사람의 인격을 판단할 수 있는 세 가지 순간이 있다. 첫째는 먹이가 걸렸을 때, 둘째 작별할 때, 셋째 적이 급소를 보였을 때. 이 가정에 따르면, 진지한 인격은 자기 밥그릇을 양보하면 생색을 내고, 초면의 친절이나 아첨보다 작별의 예의를 중시하고, 상대가 급소를 보이면 전의가 연민으로 바뀐다. 물론 이 길은 멀고 험하다. (51쪽)
격동기의 남자들은 집을 비운다. 여자들은 숨을 죽이고 일만 한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풀꽃처럼 자란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언덕 너머의 풍문이고 잠결에 잠시 스쳐가는 바람이다. 한국의 근대는 줄곧 그랬다.(58쪽)
영화평인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대한 통찰이 보이는가 하면 정갈한 미문으로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 읽는 자로서 항상 느끼지만, 읽는 즐거움이 클수록 절망감 또한 깊어진다는 사실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들처럼 쓸 수 없을 거라는 깊은 절망 때문에 괴로운 나날이다. 김훈이 그랬고, 이왕주도 그러했고, 천운영도 예외가 아니었고, 고종석을 거쳐 남재일에 이르러 또 몇의 강을 건너야 내게 희망의 불빛이 보이는 것일까.
남재일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그 통찰의 신선함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균형감각 때문이다. 제목부터 보라!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 그가 얘기하는 어떤 말도 이 제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사랑은 인간 관계를 조직하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이자 인간 조건의 심연을 복개하는 강력한 판타지이다. 그런 만큼 지배 이데올로기는 입맛에 맞게 사회를 요리하면서 사랑을 단골 메뉴로 끌어온다. 박애, 가족애, 남녀 간의 사랑은 대개 탈정치적 휴머니즘, 가족주의, 낭만적 사랑이라는 그릇 속에 담긴 채 영화라는 식탁에 오른다. '비판적 사회학자'는 이 그릇을 깨버리거나 다른 그릇으로 바꾸고 싶어한다. 적어도 사랑의 존재를 믿는다. - 중략 - 하지만 계보학자는 사랑의 존재 자체에 회의적이다. (1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