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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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게도 출근 시간이 있다. 월급을 받는 직장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내세울만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스스로가 정한 출근 시간을 지키려고 애쓴다. 남편과 아이들이 각각 직장과 학교로 떠난 집안을 후다닥 정리하면 아홉시. 보무도 당당히 컴퓨터가 있는 나만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우리집 방 중 가장 큰 면적을 자랑한다.) 말하자면 나만의 출근인 셈이다.

  근무처(?)에서 내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업무는 당연 글쓰기이다. 대가들(박완서나 김원일이나 오르한 파묵 등)처럼 하루에 원고지 열 장 내지 스무 장씩 정해놓고 써야지, 하고 다짐을 한 적도 있다. 그렇게 하다보면 직장인의 업무처럼 글쓰기도 자연스레 내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라 의지대로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모니터 앞에만 앉으면 미숙한 업무처리로 질책을 앞둔 직장인처럼 안절부절못한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대가들을 벤치마킹하겠다던 불타던 의지는 온데간데 없다. 고백컨대, 정해진 원고 매수를 채우겠다는 그 약속은 지키는 날보다 지키지 못하는 날이 더 많다. 책상에 앉으면 곧바로 글쓰기 작업 파일을 클릭해야 하는 것이 순서일텐데 박약한 의지력은 언제나 인터넷에 먼저 접속하고야 한다. 이런저런 세상사, 간접 경험이라도 해야 쓸거리가 주어진다는 변명을 준비한 채...  움직이는 걸 지독히도 싫어하는 나에게 '간접경험'이라는 핑계는 더할나위 없는 방어벽이 되어준다.

  그러니 자연스레 의문 하나가 생긴다. 체험과 쓰는 것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함수관계가 있나?  가만 생각하면 요즘 작가들은 90년대 이전의 작가들에 비해 체험의 리얼리티가  - 비록 시대적, 상황적 요청이 전제되긴 했지만 -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체험의 현장성이 문학적 소재의 우위를 점하던 시대가 끝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세기가 바뀐 만큼 다양한 문학적 시선들이 창작의 여러 경계를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다.

  일례로 독자들에게 여전히 어필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인 김연수에 대해서 들어보자.  <나는 유령입니다>라는 작품집에서 일관되게 작가가 주장하는 것은 '체험의 직접성'이 아니라 '자료의 재구성력' 내지는 '자료의 작가적 해석'이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실크로드든 히말라야든 꼭 그 현장성을 획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각종 텍스트나 미디어 등 일련의 정보가 제공해주는 간접 자료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작품집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체험이 아니라 글쓰기 자체의 순도純度이다.

  이러한 주장을 증거라도 하듯 한 문학지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스스로 '대필작가'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작가가 하고 싶은 모든 말은 이미 과거에 있었거나 현재에 있는 것들이다. 작가란 주어진 자료를 자기 식으로 재구성하는 순수한 욕망의 대필자일 뿐이다. 결국 체험의 직접성이 문제가 아니라 자료의 해석을 밑바탕한 나름의 세계관이야말로 한 작가의 존재감을 말해준다. 작가의 직접 체험이 문학적 도구로 활용된다해도 그 자체가 소설이나 문학이 될 수는 없다. 거짓의 옷을 입은 진실, 즉 픽션이라는 가공을 거치지 않고서야 차라리 르포나, 수기를 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굳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의 진본은 언제나 동굴 밖에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그림자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깨닫는다. 따라서 진본을 찾는 끝없는 여정이 글쓰기의 숙명이라면 그것이 직접 체험이든, 간접 체험이든 그리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소설 쓰기의 돌이킬 수 없는  매력 중 하나는 허구의 합법적 담보에 있다. 소설 쓰기의 고통은 체험의 현장성 유무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가의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숱하게 제공되는 날것의 자료들로 진실한 거짓을 재구성하는 것. 그것이 살아있는 창작의 과정이라고 김연수는(아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험의 깊이와 폭이 다양할수록 좋은 글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직접 체험인지 간접 체험인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문제는 게으름 때문에 그 중 어느 것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있을 뿐.

  글이 써지지 않아 원고지를 붙잡고 울 수밖에 없는 것은 체험의 종류나 순도 때문이 아니라, 게으름 탓이라는 게 자명해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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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2-17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저자 서명본 책 읽다가 문장이 지겨워서 중단했거든요.
예전에는 이 작가의 옛 글 산책 같은 걸 참 좋아했는데..
이 책은 진도 안나가 죽을뻔했어요. 결국 지금도 손이 선뜻 안가는 책인데
대단하세요!

다크아이즈 2006-12-17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뿌넝숴, 다시 한달을 가고~ 등은 문학적 성과와 상관없이 지겹긴해요. 잘 써야겠다는 강박 때문인지, 부러 순우리말의 향연을 펼친 노고가 그 지겨움에 일조한듯도 해요.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
남재일 지음 / 강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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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재일을 알게 된 건 행운이다. 영화 관련 책을 뒤지다 만나게 되었는데 우선 영화 이야기로 읽히지 않아서 좋다. 사람을, 사회를 영화를 빌려 이야기하면서 이토록 밑줄 긋게 만드는 작가를 일찌기 만나본 적 없다.  송준의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이 좀 더 영화 평론에 가깝고  이왕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가 영화를 빌려 철학을 말하고 있다면 남재일은 이 책에서 인간, 아니 오로지 인간이고자 하는 개인을 이야기한다. 당연히 밑줄 그을 일이 많다. 밑줄 강요하는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 아니던가.

  그가 소개하는 영화가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무던히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내가 발견하지 못한, 혹은 발견했지만 미처 내 언어가 되지 못한 숱한 말들이 질서정연하게 꼬리를 문다.

  이 순교의 이미지 자체는 분명 감동적이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순교의 탈을 쓴 순장이었기 때문이다. 순교는 핍박받고 남루한 것들을 위한 소리 없는 희생이지 '대의'의 폭력과 교설로 개인을 매장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34쪽)

  이 영화가 '대의'를 수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즐거움을 얻을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빨리 천하통일을 이루어야 하고, 그러기 위애서는 절대적 권력을 누군가에게 위임해야 한다는 논리는 정말 지겹다. (35쪽)

  남루함은 선악을 넘어 인간 감각이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영원한 타자의 질감이다. 그래서 남루함을 화면에 들이밀면 관객은 반사적으로 불편해진다.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관객을 불편하게 한 것도 중증 뇌성소아마비 처녀를 전면에 들이밀기 때문일 것이다. (45 ~46쪽)

  사람의 인격을 판단할 수 있는 세 가지 순간이 있다. 첫째는 먹이가 걸렸을 때, 둘째 작별할 때, 셋째 적이 급소를 보였을 때. 이 가정에 따르면, 진지한 인격은 자기 밥그릇을 양보하면 생색을 내고, 초면의 친절이나 아첨보다 작별의 예의를 중시하고, 상대가 급소를 보이면 전의가 연민으로 바뀐다. 물론 이 길은 멀고 험하다. (51쪽)

   격동기의 남자들은 집을 비운다. 여자들은 숨을 죽이고 일만 한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풀꽃처럼 자란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언덕 너머의 풍문이고 잠결에 잠시 스쳐가는 바람이다. 한국의 근대는 줄곧 그랬다.(58쪽)

  영화평인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대한 통찰이 보이는가 하면 정갈한 미문으로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  읽는 자로서 항상 느끼지만, 읽는 즐거움이 클수록 절망감 또한 깊어진다는 사실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들처럼 쓸 수 없을 거라는 깊은 절망 때문에 괴로운 나날이다. 김훈이 그랬고, 이왕주도 그러했고, 천운영도 예외가 아니었고, 고종석을 거쳐 남재일에 이르러 또 몇의 강을 건너야 내게 희망의 불빛이 보이는 것일까.

  남재일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그 통찰의 신선함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균형감각 때문이다. 제목부터 보라!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  그가 얘기하는 어떤 말도 이 제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사랑은 인간 관계를 조직하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이자 인간 조건의 심연을 복개하는 강력한 판타지이다. 그런 만큼 지배 이데올로기는 입맛에 맞게 사회를 요리하면서 사랑을 단골 메뉴로 끌어온다. 박애, 가족애, 남녀 간의 사랑은 대개 탈정치적 휴머니즘, 가족주의, 낭만적 사랑이라는 그릇 속에 담긴 채 영화라는 식탁에 오른다. '비판적 사회학자'는 이 그릇을 깨버리거나 다른 그릇으로 바꾸고 싶어한다. 적어도 사랑의 존재를 믿는다. - 중략 - 하지만 계보학자는 사랑의 존재 자체에 회의적이다.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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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6-12-04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괜찮은가 보네요 보관함에만 담아 두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인데...

다크아이즈 2006-12-04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마린님 영화평론서로만 읽지 않는다면 참 괜찮은 책이에요.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엘리자베스 키스 외 지음, 송영달 옮김 / 책과함께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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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새로 썼기 때문에 지웁니다. 

귀한 댓글 흔적은 그대로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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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6-12-04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흥미가 확 당기네요

다크아이즈 2006-12-1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마린님 책을 함부로 대하는 저 같은 이도 '아끼고 싶은' 책이 생기더라니까요.

아영엄마 2006-12-14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크아이즈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

다크아이즈 2006-12-15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 감사합니다. 간만에 알라딘 와보니 별일이(!). 좋은 책 만나 몇 글자 주절거린 죄밖에^^*
 
자라 창비시선 253
문성해 지음 / 창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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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은 충격이다.

  문성해의 시집을 산 지는 한 달이 넘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들춰보았다. 간만에 알라딘에 들어와 독후감을 쓰려고 보니 그 어떤 리뷰도 없다. 조금 충격 받았다. 유명 시인은 아니지만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문성해 시인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매니아 한 두명 정도는 리뷰를 남기지 않았을까, 내심 기대를 했던 것이다. 한데 아무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시집이 나온지 일 년이 훨씬 넘었는데...

  시인이 대중적 인기가 없어서 그런가 싶어 그나마 대중적, 문학적 성과를 거뒀다고 회자되는 문태준 시인의 <맨발>을 클릭해보았다. 웬 걸? 그곳 사정도 여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겨우 세 편 정도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대한민국에 시를 사랑하는 인구가 소설이나, 여타 장르를 사랑하는 인구보다 훨씬 많은 걸로 안다. 한데 독후감 실적은 여타 장르에 비해 영 아니올시다, 이다. 알라디너들만 시에 대한 독후감을 쓰지 않을까, 아니면 시를 공부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은 독후감 따위에는 관심이 덜하다는 것일까. 괜한 호기심 하나 추가이다.

  각설하고, 문성해의 시를 좋아하게 된 것은 '공터에서 찾다'라는 시 때문이다. 언젠가 지방지 신춘문예 당선시에서 그 시를 발견하고  나는 전율에 휩싸였다. 시가 뭔지 잘 모르던 시절, 시를 이렇게 쓰는구나, 라고  한 방 먹이게 한 작품이 바로 '공터에서 찾다'라는 시였다. 혹 내가 시에 대한 편견을 갖고 이런 시를 좋아하나 싶어 심사위원을 살펴보니 이성복 시인이었다. 꼭 대가가 선택했기 때문에 믿음이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단에서 내로라 하는 시인이 뽑은 시를 내가 좋아하게 됐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기까지 하였다.  그 뒤 어느 문예지에서 발견한 '봄밤'이란 시도 나를 매료시켰다. 그 때 결심했다. 이 시인의 첫 시집을 꼭 사야겠다고. 시인은 내 결심에 화답이라도 하듯 몇 년 뒤 중앙지 신춘문예에 재당선 되었고(그 때 제목은 '귀로 듣는 눈'인가 그랬는데 그 시는 개인적으로 별로 와닿지 않았다. 독자로서의 내 마음을 아는지  이번 시집에 그 시가 수록되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늦은 감은 있지만 그녀의 시집이 내 손아귀에 들어온 것 자체가 행복하다. 돈 안 되는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가장 힘이 되는 것은 그들의 시집을 사주는 실존적 행위 자체일 것이다.  이렇게 당신의 시를 사서 읽고 있는 독자들이 있으니 힘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두 번째, 세 번째 시인의 시집이 나오면 기꺼이 사서 읽을 용의가 있다고 고백까지 해보는 것이다.  일반 독자인 나 같은 사람말고 진짜 시를 좋아하거나, 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시에 대한 독후감도 많이 올리기를 바라며.

  이제 고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 의심은 더욱 식욕을 부풀리고 나는 // 이것을 기꺼이 먹기로 작정한다 //  완강하던 페트병에 드디어 금이 가고 //  텅 빈 속살 들여다본 순간, 나는 // 속았음을 직감한다

  어둠 속을 휘적휘적 걸어갈 때 // 앗! 저기 또 푸른 슬리퍼 한 짝이...... //  내 야성의 턱뼈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문성해 - 공터에서 찾다, 부분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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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1-29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성해 시인은 처음 만나요. 허긴 처음 아는 작가가 어디 한 두명이래야 말이죠.
저도 예전에 시집 리뷰 한 세편 썼던가 그래요.
뭐, 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의 책만 썼으니 별로 반응이 없습니다.
한국문학, 특히 소설류에는 와르르 몰리면서 시인에게는 참 인색한 동네에요.
다만, 몇몇분은 시집을 아주 좋아하죠. 많지 않아서 자주 눈에 띄지 않을 뿐에요.
아, 저는 시집을 좋아하지만 '시집'은 가지 않았답니다.(왜 말하는건데?)ㅋ

다크아이즈 2006-11-29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저도 '시집'은 가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살아요. '결혼'은 했구요. 너무 페미니스트적 발언인가?^^*
 
천년의 그림여행 - 양장본
스테파노 추피 지음, 이화진.서현주.주은정 옮김 / 예경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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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집안이 이래저래 어설프다. 아무렇게나 나뒹굴던 책을 정리하던 딸아이가 화집 한 권을 들춰보인다. 시대별로 짜깁기한 서양 그림책이다.

  "<시녀들>에서 화가가 그리는 초상화는 공주가 아니라 왕 아니에요?"

  뜬금없는 질문에 무슨 소린가 싶다. 말인즉슨,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작품 <시녀들>에 관한 화집의 설명이 그 그림을 직접 보고 온 엄마의 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워낙 중의적인 감각이 내포된 그림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딸이 보던 화집을 같이 들여다본다. 과연 화집 설명만으로 유추하자면 그림 속에 직접 등장하는 벨라스케스가 캔버스에 붓질하는 대상이 공주 마르가리타의 뒷모습일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해설자가 잠시 착각했을 수도 있겠다고 딸아이에게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전면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당연 마르가리타 공주이다.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4세의 첫 아이인 금발머리 소녀는 흰 드레스로 한껏 치장한 채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다소 과장된 듯한 시녀들의호위 속에 오른쪽의 난쟁이 부녀가 관람자의 시선을 강렬하게 붙잡는다. 왕궁 안 어릿광대인 난쟁이는 오늘 만큼은 졸음에 겨운 개 등짝을 후려차도 좋다. 마음껏 귀족 흉내를 내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개를 살짝 돌린 공주의 기품있는 미소는 온전히 국왕부부를 위한 것이다. 그 환한 공주의 재롱을 보며 국왕부부는 궁정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리는 초상화의 모델이 되고 있는 중이다, 궁정 오후의 망중한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결코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펠리페4세 국왕부처의 존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약 그림 속에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유추는 불가능하다. 아니, 화가 벨라스케스만 등장했다 해서 섣불리 그러한 결론에 디다를 수는 없다. 이 그림의 관전 키포인트는 왼쪽 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캔버스와 붓을 든 벨라스케스의 모습이다. 화면을 압도하는 세로의 긴 캔버스는 뒷면만 보여준다. 따라서 그 캔버스 속에 작업하고 있는 화가의 모델은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 때 관전자의 눈이 놓치지 않아야 할 소도구가 있으니 바로 뒷면에 등장하는 벽면의 거울이다. 원경의 거울 속에는 합스부르크 왕가 특유의 긴 얼굴과 주걱턱을 가진 국왕이 왕비와 함께 희미하게 비치는 것이다. 이 상황까지를 이해한다면 감춰진 캔버스 속 화가가 그리는 대상은 결코 공주나 시녀가 아닌 국왕 부처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중 삼중의 액자소설이 이보다 더한 흥미를 가져다줄 것인가. 스페인 여행 당시 프라도 미술관의 보물이라는 이 그림을 보면서 느낀 감흥은 화가 벨라스케스의 예기치 못한 위트와 사물을 보는 세련된 전복의 유희에 박수를 치는 정도였다. 하지만 집에서 들여다보는 그림 속에서 또 다른 벨라스케스의 스승을 발견하는 기쁨까지 누린다. 17세기의 <시녀들>이 풍기는 이 소설적 기지는 이미 한 두세기를 앞선 르네상스 미술에서  시도되었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얀 반 에이크는 '아르놀피니 초상화'에서 이미 화가 자신을 회화 속에 등장시키는 매력적인 작업을 했던 것이다. 의뢰인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배경인 볼록 거울 속에 자신과 조수인 듯한 두 사람을 그려넣었던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 약혼식일지도 모를 아르놀피니의 숨길 수 없는 증거자가 되기로 작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은유적 유머에 만족하지 않고 반 에이크는 볼록 거울 위에다 '얀 반 에이크, 여기에 있다!' 라는 과감한 흔적까지 넣었다. 이보다 더한 엔도르핀 솟구치는 소설이 있을까!

  일찍이 이 그림을 풍문으로라도 접한 벨라스케스는 자신만의 진화를 더해 시녀들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궁정화가의 자리는 그러한 자신의 작업에 날개를 달 수 있는 필요충분이 되었던 것이다.

  '공주의 등을 그리려한다는 화집 해설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내 말에 딸아이의 수긍을 받아내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 편의 명화 속에 정신과 육체가 살아 숨쉬는 화가들을 발견하는  자체야말로  흥미롭고 경이로운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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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9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06-11-29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4:30분 귓속말님) 이런 실수! 고쳤어요. 'ㅈ'이 은근히 외로웠겠어요.^^* 네. 중3 딸내미가 있답니다.